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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우리가 드려야 할 선물/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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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우리가 드려야 할 선물/배광하 신부
대림 제3주일 (마태 11, 2~11) :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발행일 : 2007-12-16 [제2578호, 6면]

- 기다림과 기다려야 할 분 -

가난한 이들과 함께

프랑스의 박애주의자이자 집 없는 이들의 아버지였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님’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몇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셨습니다.

부유했던 프랑스 리옹의 어린 시절에 신부님의 아버님께서는 해마다 대림시기가 시작되면 일찌감치 거실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구유를 장식하고 가족 모두에게 각기 다른 동물 인형을 나누어 주며 매일 저녁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에 그날 하루 가족들이 행한 착한 일들을 발표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발표한 착한 일들이 모두의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의 인형은 구유안의 아기 예수님께 한 발짝 가까이 가도록 이동시켜 주셨고, 성탄 때까지 아기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이동한 인형의 주인공 가족에게는 가장 큰 성탄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때 피에르 신부님과 형제들, 가족들은 얼마나 아기 예수님께 자신들의 인형이 가까이 가도록 애썼는지 모른다며, 성탄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이며, 아름다운 성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분명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그 옛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던 들판의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은 구유를 향하여 찾아 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분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것도 빈손이 아닌,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선물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우리가 준비할 선물은 가난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면 충분합니다. 무엇이든 반드시 선한 일을 실천하여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 없는 기다림은 마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중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바깥 어둠 속으로 내쫓기는 슬픈 일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22, 1~14 참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선물과 입어야 할 예복은 사랑의 나눔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해마다 대림 3주일이면 자선주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버려진 이들, 가난과 소외와 장애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 그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구세주께서 오실 때 누구보다 먼저 고통 받는 이들이 환호할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 5~6).



누구를 기다려야 합니까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대한 권모술수에 밝아야 한다는 교활함의 소리로 비칠 수 있습니다.

실로 역사의 많은 이들이 줄을 잘못 섰던 까닭으로 죽음이나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를 신앙에 적용시켜 보면 그 또한 배울 점이 있다고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소개하기에 앞서 군중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마태 11, 7~9)

진정 우리들은 어느 쪽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러 이 신앙의 길을 선택하였습니까?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기껏 사라져 버리는 세상 것들 때문입니까? 그것들은 결국 사라져 버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네 삶에 참된 중심이 되어주지 않고 늘 흔들릴 뿐입니다. 때문에 그 끝은 허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화려한 옷이나 화려한 왕궁의 권력과 세상 지위나 화려한 칭송의 명예 입니까? 그것들 역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마냥 위태롭기 그지 없습니다.

그 화려함 역시 끝내는 빛이 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슬픈 운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은 분명히 전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또다시 힘주어 말합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 5).

요한은 세상 시련과 아픔, 고통과 눈물을 닦아 주실 가난의 주님, 겸손의 주님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같은 기다림이 진정한 대림을 사는 것이고, 영원한 기쁨의 성탄을 맞이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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