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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영원한 생명의 열쇠는 실천하는 사랑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3. 7. 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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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영원한 생명의 열쇠는 실천하는 사랑 / 장재봉 신부

연중 제15주일(루카 10,25-3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실천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추가해 주셨습니다. 그날 하느님의 율법을 앞세웠지만 말씀을 살아내지 않았던 "어떤 사제"와 레위인들은 주님께서 날린 강속구에 뒤 꼭지가 얼얼했으리라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주인공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돌직구'를 맞았으니까요. 주님의 경고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그리고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똑 부러지게 명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아픔을 지닌 이웃을 향한 연민, 즉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면 몸소 끝까지 그 사랑을 간직하여 애긍을 실천했던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기꺼이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줄 뿐 아니라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하여야함을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마음을 쏟아 그에게 최선의 배려와 희생을 각오해야하며 그에 따르는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아야한다는 일깨움이라 듣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측은하다는 감성적 '생각'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 끝까지 보살피는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이웃 사랑은 누군가의 고통에 서슴없이 "다가가" 응급조치를 취해주는 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내 믿음'만 간수하는 것으로 족하다 여기는 우리가 매우 갑갑하다는 고백으로 듣습니다.

 

이웃의 곤고함을 "가엾다" 여기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며 겨우 간단한 응급조치를 해주는 것으로 사랑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때문에 나의 일이 급해서 "반대쪽으로" 가 버렸던 사제나 자신의 정결한 믿음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반대쪽으로" 지나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점을 들추게 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내게도 소중한 "두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사용한 적이 있는지, 이웃의 나중까지도 무한 책임지겠다고 나선 적이 있는지 캐묻게 됩니다. 단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매우 선하고 엄청 착하게 사랑을 지니고 살아가는 듯 오인하는 행태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전교란 전교주일에 플래카드를 걸고 공개적으로 치루는 행사로 여기고 있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권위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깨우치게 할 수 있었다면 굳이 당신 아들이 땅에 와서 서른세 해를 꼬박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갖은 수모와 능욕을 견디고 십자가의 고통을 치뤄야 할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수천 년을 한결같이 일깨우셔도 딴전만 부렸던 세상입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을 보내어 이 땅에서 실제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 보여주기까지 최선을 쏟았습니다. 그 사랑과 희생의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전교에는 주님께서 살아내신 삶을 몸소 살아 보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고쳐 살아갈 것을 권하신 것이라 헤아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아픈 이웃을 위해서 내 노새를 내어주고서 터벅터벅 두발로 걷는 일을 마다지 않는 모습을 정말로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생각'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자비를 베풀려는 우리의 인색함을 슬퍼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상대를 좋다하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만 응대하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주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친절에 따라 내 마음과 행동이 적절히 반응하는 꼼수는 복음인이 사용할 묘수가 아닙니다. 더딘듯 보여도 주님의 방법이 가장 힘이 셉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에만 이웃에게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세이며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되, 망설임 없이 철저히 끝까지 사랑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활천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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