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생애를 오롯이 교회에 몸 바친 순교자의 후예 남상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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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0월 6일 바티칸 베드로대성당 앞에서 거행된 증조부 남종삼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한 남상철(왼쪽)씨와 부인 서상순씨, 자녀들(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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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년간 재속 프란치스칸으로 산 남상철(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씨가 1963년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거행된 재속 프란치스코회 종신서원식(허원식)을 마친 뒤 다미아노 십자가를 든 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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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후예' 남상철(프란치스코). 평생을 교회의 아들로 산 그에게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노, 1784~1866), 남종삼(요한, 1817~1866) 등 순교자들 후손이라는 사실은 빛나는 영예였을까, 아니면 크나큰 부담이었을까. 이에 대한 고뇌와 심경은 그의 삶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고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당신들을 닮지 못하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자신의 한 생애를 교회를 위해 바쳤다.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청빈과 정결, 순명의 삶을 살아가려 했다. 더불어 순교자 현양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종내엔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주어사와 천진암 터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교회를 위해 자신의 한 생애를 오롯이 바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순교자 후예로 태어나 가시밭길을 걷다
증조부 남상교와 조부 남종삼 등 그의 가문 순교자 5위의 신원이 회복된 것은 1895년의 일이다. 1894년 7월부터 1년 8개월간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갑오개혁으로 남상철 가문에 복권이 이뤄졌다.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라는 죄명도 씻겼고, 관명(官名)도 복구됐으며, 후손들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 남상철의 나이 5살 때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참으로 힘겨웠다. '15살 미만은 사형에 처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박해에서 살아남아 두 누이 데레사ㆍ막달레나와 함께 경기도 안성에 정착한 아버지 남규희는 아들 상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종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생후 1개월 만에 어머니마저 산고로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선조들의 복권은 그에게 자유를 안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열심한 신앙생활과 함께 한학을 익혔고 장성해서는 일본 와세다대학 통신 강의로 법학을 독학했다. 졸업 뒤 충북 장호원(현 감곡)본당에서 회장으로 일하는 한편 본당에서 운영하던 매괴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또 1921년부터 20년간 감곡면장으로 일하며 충청북도 의회 의원을 겸해 행정능력을 보여줬다.
가정에도 충실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서상순(엘리사벳)씨와 혼인해 5남 5녀를 둬 유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두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10남매 가운데 형우(요한 세례자)ㆍ순우(레지나)ㆍ공우(가롤리나) 등 세 딸은 모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 수도의 길을 걸어 그에게 기쁨을 안겼다.
이처럼 투철한 신앙과 화목한 가정, 폭넓은 영향력, 치밀한 관리 능력으로 그는 교회에 정평이 나 있었다. 많은 사제들 추천으로 그는 경성대목구(현 서울대교구)청으로 자리를 옮겨 대목구 일을 돕게 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 교회는 조선총독부 강요로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대목구 연맹'을 출범시킨다. 이 단체에서 경성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를 도와 활동하던 그는 1942년 어쩔 수 없이 이사장까지 맡았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는 일제 당국의 압력과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해가며 바람 앞 등불과도 같은 한국천주교회를 지키며 발전에 이바지했다. 용서와 화해, 선교의 삶을 살다
교회에서 일하던 그는 순교자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다. 1939년 7월 경성대목구 종현(명동)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봉헌된 미사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노라는 수도명으로 입회한 뒤 이듬해 10월 종신서약을 한다. 이후 그는 39년간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몸 담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 프란치스코 제자로 충실했다.
광복 뒤 미 군정청 교섭 대표로 활약한 그는 혼란스런 해방 공간에서 노 주교, 장면(요한) 박사 등과 함께 시국문제를 협의하며 희망에 찬 새 조국 건설에 힘을 보탰다. 1947년 그가 고종황제의 일곱째 아들 영왕 환국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돼 활동한 것은 그가 프란치스칸으로서 얼마나 깊은 영성 속에서 화해의 삶을 실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왕 환국이 이뤄지기까지는 17년이 걸렸지만, 그는 자신의 직계 선조 5위를 치명케 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손자를 환국시키고자 갖은 애를 다 썼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라는 하느님 말씀을 좇기 위해서였다. 그리고서 1963년에 영왕이 귀국하자 회장으로서 그는 따뜻하게 영왕을 맞아들였다.
그는 선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6ㆍ25전쟁 이전부터 서울 삼양동 자택을 공소로 내줬다. 당시 이 지역엔 가까이는 길음동성당, 멀리는 의정부성당밖에 없어 신자들이 모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을 기증해 미아3동(현 미아동)성당 설립에 이바지했다.
또 제4대 재속 프란치스코회 서울형제회 회장을 지내며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살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계속했다. 1967년엔 미사에 참례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대퇴골 골절상을 입기도 했지만, 휠체어를 타고서도 임종 전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서울형제회 회장직도 사임했다. 그렇지만 그 불편한 몸으로도 그는 선종하기까지 재속 프란치스칸으로 최선을 다했다. 한국천주교회사의 뿌리를 찾다
말년엔 한국교회 뿌리 찾기에 몰두했다. 선교사 도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교회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는 그 시발점인 '주어사 강학회' 연구에 몰입했다. 성호 이익 학통을 이어받은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정약전, 이벽(요한 세례자) 등이 모여 강학하고 이 과정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현장인 주어사와 천진암을 찾고자 수년간 문헌 고증과 함께 경기도 여주와 양평, 광주 일대 답사를 거듭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주어사 터 찾기 여정을 계속한 건 순교자 현양 일념에서였다. 당시 주어사는 여주군 산북면 하품2리(점란산골) 앵자봉 서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었다는 기록, 한 승려가 잉어를 따라 가던 꿈을 꾸고 얻은 터라는 창건 비화만 전해져 왔다. 오랜 고생 끝에 그는 1962년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에서 주어사 터를 확인하는 비석을 발견한다.
그 오랜 여정은 「경향잡지」 1962년 11ㆍ12월호 및 1963년 1월호에 '한국천주교회 요람지인 주어사가 발견됨'이라는 글 3편에 실렸다. 당시 답사를 통해 그는 주어사 창건 시점은 1698년 이전으로, 나중에 폐사돼 그 절터가 논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발견된 비석은 높이 91㎝, 폭 33㎝ 크기였으며, 이 비석은 현재 서울 절두산순교성지에 보존돼 있다. 그는 이 비석을 근거로 주어사와 천진암 성역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교회에 호소했으며, 그의 선종 이후 천진암 터를 중심으로 성지가 개발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온전히 자신의 것을 다 내어준 사람, 순교자 후손 남상철은 그런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평생 동안 교회에서 솔선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번도 교회를 이용한 적이 없으며, 스스로를 낮춰 늘 겸손하게 봉사의 삶을 살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를 비우며 철저한 가난을 추구했듯이, 그도 일생을 통해 자기 비움과 나눔, 가난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1978년 87살을 일기로 하느님 품에 안긴 그는 유서에서조차도 자신보다는 교회와 성직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하고 "치명한 선조들의 덕을 본받도록 힘쓰라"는 말을 후손에 남겼다. 평소 자손들에게도 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닮으라고 가르친 그는 순교자 후손답게 참된 신앙인으로서 길을 걸었고,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세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표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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