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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요한) 박사(상편)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1. 5. 1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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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요한) 박사(상편)

어둠 헤매는 겨레를 주님의 빛으로 이끌어

   20세기 한국은 식민과 전쟁의 비극, 극심한 좌우 대립과 갈등, 경제개발과 민주화 여정이라는 질곡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대 아픔을 끌어안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며 세상에 진리를 드러낸 이들이 있다.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를 비롯해 오기선(요셉, 1907~1990) 신부, 이광재(디모테오, 1909~1950) 신부, 구도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씨, 김홍섭(바오로, 1915~1965) 판사, 정지용(프란치스코, 1902~1950년 납북 뒤 사망 추정) 시인, 최정숙(베아트리체, 1902~1977) 교육감, 순교자 후예 남상철(프란치스코, 1891~1978)씨,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 류현석(요한 사도, 1927~2004) 변호사 등이다. 평신도로서, 사제로서 이들의 삶은 시대의 등불이자 빛나는 사표가 됐다.

 특히 교회가 800년이 넘도록 사랑을 아끼지 않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182~1226)의 모범을 따른 이들은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평화의 순례자로서 신앙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아름답게 신앙을 증거하며 살았던 이들의 삶을 통해 새 복음화(New Evangelization)의 사명을 새긴다. 오는 2012년에 한국 진출 75주년을 맞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 75주년 기념위원회(위원장 김수업 토마스 데 아퀴노)와 함께 시대의 빛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의 삶을 돌아본다. 그 첫 번째 인물로 장면 박사를 세 차례에 걸쳐 살핀다.
   (상)겨레에 빛을-장면 박사의 삶과 신앙적 여정
   (중)조국에 민주주의를-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기까지 정치 역정
   (하)주님 제단에 당신을-첫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삶과 영성


 
▲ 1928년 평양 메리놀센터에서 어학교수로 근무하면서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장면 박사와 맏아들 진.
장남 진은 미국 안셀름대를 거쳐 프린스톤대학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브라운대학에서 강의했으며, 귀국 후 서강대 교수 및 부총장을 역임했다.

 
▲ 계성보통학교 교장 재직 시 노기남 신부 및 교사들과 함께한 장면(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박사.
 

 
▲ 미국 맨해튼 대학 유학시절 동생들과 함께한 장면(오른쪽) 박사.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동생 장발 학장, 장면 박사, 장정온 앙네다 수녀, 처조카 김교임 마르가리타 수녀.
 

   운석(雲石) 장면 박사하면 제1공화국 국무총리 및 부통령,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하에 첫 국무총리, 5ㆍ16 군부 쿠데타로 9개월 단명 민주당 정권을 이끈 정치가로만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가 선교와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을 살았고, 건국과 외교의 선구자였으며,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한국에 프란치스코 3회의 토대를 놓았고, 복음적 가치를 자신과 조국에 구현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많지 않을 듯하다.

 구한말인 1899년 8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혼란과 전쟁, 가난한 시대를 살았다. 부친 장기빈은 2대째 가톨릭 신자였고, 모친 황 루치아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집안이었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9월 12일에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1909년 1월 3일 견진을 받았다.

 어려서 늘 부모에 순종했던 그는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 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를 거쳐 수원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를 다니던 중 1916년 5월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에서 김옥윤 여사와 혼인하고 이듬해 학교를 졸업한다. 당시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면 관리로 취직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는 1917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학관 영어과에 진학해 공부한 뒤 최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어 1918년 4월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 강사로 봉직하며 국어와 산수, 역사 등 과목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이때 학생 중에 훗날 한국인으로는 첫 서울대목구장에 착좌하는 노기남 대주교가 있다.

 그가 얼마나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는지,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았는지는 소신학교 교사 시절에 했던 그의 말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왜놈들이 총칼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맨손으로 저항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하지만 천주님께 대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므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힘의 원천인 신앙을 갖는 일이다."

 "3ㆍ1운동은 천주님이 민족의 얼을 다시 찾게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이며, 의로운 죽음이 없이는 독립 쟁취가 어렵다."

 그는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천주님이라고 여긴 신앙인이었다.

 1920년 10월 유학차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6개월간 메리놀외방전교회 예비 신학교에서 영어와 기타 과목을 익힌 뒤 이듬해 9월 뉴욕 맨해튼칼리지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한다. 그리 궁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시 뉴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식비를 벌었고, 또 숙식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자취를 했다. 물론 집에서 조금씩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에 앞서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다. 1921년 8월 28일 뉴욕 성 요한 세례자 성당에서였다.

 4년 만에 미국 뉴욕 맨해튼대학을 졸업한 그는 귀국길에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복자 79위 시복식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고, 다음날 비오 11세 교황을 알현한다.

 귀국 후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지인 평양교구로 간 그는 5년 동안 평양 메리놀센터 어학 교수이자 평양교구 사무, 평양 천주교 청년회장 등으로 있으면서 「영한 교회 용어집」과 「구도자의 길」 등을 저술하고 번역 작업도 하면서 선교에 공헌한다.

 1931년에는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 1933년 윤형중 신부 주관 아래 정지용, 이동구 등과 「가톨릭 청년」을 창간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만 전력을 기울인다. 이때 혜화유치원 원장, 계성초등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그는 나라를 잃고 어둠속을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망명이나 무력 저항의 길도 있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 훌륭한 교육자의 길을 택해 살 수도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무엇보다 대다수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부들의 신앙」과 「젬마 갈가니(Gemma Galgane)」 등을 번역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 사목을 도왔으며, 소속 본당인 혜화동본당 총회장이 되고도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951년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 훈장을 받는다.

 후에 아무리 바쁜 정계 생활 중에서도 매일같이 미사에 참례했다. 제1공화국 당시 야당 후보로 부통령에 당선된 그가 온갖 감시와 수모는 제쳐두고라도 살해 위협 속에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가 저격을 당하면서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이런 그의 삶에 하느님께서는 귀한 열매를 맺어준다. 제2공화국 정부 요인들과 그 관계자 상당수가 5ㆍ16 군사쿠데타로 시련을 겪고도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이는 당시 내각 수반이던 장면 박사가 평소 그들에게 보여준 좋은 표양의 결실이었다. 그가 선종하기 한 해 전인 1965년에 쓴 글 한 대목을 살펴보자.

 "우리 주변은 암흑 속에 파묻혀 있다. 불평과 저주만으로는 암흑이 물러가지 않는다. 촛불 한 개라도 켜들어야 광명이 온다. 한 사람, 한 사람 촛불을 켜들어 몇 백 몇 천이 되면 점점 더 밝아지고 희망과 살 길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어깨에 높이 치켜 모시고 각기 손에 촛불을 켜들고 암흑 퇴치의 십자군으로 나서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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