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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하)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1. 5. 1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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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하)

빛과 소금으로 살았던 기도하는 ''시대의 거인''


 
▲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무렵의 장면 박사.
1921년에서 1922년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 1940년 3월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장면 박사가 3남 장익의 첫 영성체를 기념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장 박사 오른쪽에 긴 휘장을 매고 가슴에 꽃을 꽂고 선 아이가 훗날 춘천교구장을 지낸 장익 주교다.
 

 
▲ 장면(두 번째 줄 가운데) 박사가 생전에 프란치스코 회원들과 함께하고 있다.
 

   프란치스코회 3회 입회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장면 박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이 일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에나 최선을 다해 봉사했다. 한국천주교회가 1784년 평신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시작됐다면, 현재 1만2000명이 넘는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는 작은 형제회 주도 이전에 이미 장면 회장의 역할로 그 초석을 세웠다.

 장 박사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것은 1921년 8월 28일의 일이다. 1919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맨해튼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던 참이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첫 재속 프란치스칸으로 기록된다. 이날 요한 세례자성당에서 입회한 그는 당시 관습에 따라 이듬해 9월 24일 프란치스코라는 수도명으로 프란치스코 3회 착의식을 한다. 이후 3회 월례회가 열리는 주일 오후가 되면 그는 요한 세례자성당으로 향했고, 세속에서도 프란치스코 성인 영성을 따라 복음대로 살면서 학업에 힘을 쏟았다.

 그가 성 프란치스코를 어떻게 여겼는지는 1965년에 쓴 그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낳은 성인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에 빛나고, 가장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킨 성인이었으며, 극단의 가난과 겸손과 고행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문자 그대로 따라 복음의 산 표본으로, 속죄의 산 제물로, 사랑과 평화의 사도였다. 또 제자들을 파견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일대 영적 혁신을 일으킨 희대의 성자였으며, 당시 위기에 빠진 교회를 권력이 아닌 성덕의 위력으로 구출한 절세 영웅이었다. 그는 우리 교회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까지도 추앙하고 절찬하는 위대한 관상 시인이며 사회 개혁자였다."


   프란치스코 3회 초석 쌓아

 1937년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서울대목구 혜화동본당에 적을 두고 있던 장 박사는 본당 신부인 오기선 신부의 3회 입회에 기여했고, 당시 혜화동 일대에 살던 지식인 신자들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리는 데 노력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그의 가족을 주축으로 약현(현 중림동 약현), 종현(현 명동), 백동(현 혜화동), 영등포(현 도림동)본당에서 평신도 28명이 같은 해 12월 25일 3회에 입회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혜화동본당에서 닻을 올린 것이다.

 1939년 1월 3일, 앞서 입회한 회원들 서약식이 거행됐고, 동시에 서울 형제회가 정식으로 조직돼 장 박사가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3회는 특히 일제 치하 가톨릭 지성인들의 희망이자 등불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모인 서울 형제회는 1942년 12월 3회원으로 첫 한국인 주교에 임명된 노기남 주교 서품식 진행을 전담하기도 했다.

 모윤숙(1909~1990) 시인의 생전 회고는 '기도하는 신앙인'으로서 장 박사의 새로운 면모를 전해준다.

 "1948년 12월 12일 새벽이었다. 제3차 유엔 총회 한국대표단으로 3개월째 파리에 머물던 장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앞서 득표에 도움이 되고자 많은 외국인들과 만나다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그 날이 다가오자 11일 밤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성 요셉성당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지쳤다고 성당으로 가는 길에 함께하기를 거절했으나 나는 그 뜻에 감복해 함께했다. 날씨는 추웠고, 지나가는 자동차도 한 대 눈에 띄지 않는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성 요셉성당 앞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가본 성당 성모상 앞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친 장 박사는 다시 근처 아베 마리아성당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하자고 제안했다. 무릎이 아파 더 이상 따라가기 힘들다고 거절했으나, 장 박사가 '큰일을 앞두고 그것도 못 참아 어떻게 하느냐'고 다그쳐 하는 수없이 따라갔고, 그래선지 고통 없이 30분을 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이같은 열심과 기도 덕인지 이날 오후 3시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다.

 이어 주미 대한민국 대사를 지내던 장 박사는 6ㆍ25전쟁 중 누이 장정온(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초대 원장) 수녀가 북한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장 박사는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뒤 정치에 몰두하면서 1954년 3월 태평양 전쟁과 6ㆍ25전쟁으로 인해 정체되고 흩어진 프란치스코 3회원들을 모아 형제회 재조직을 시도했다. 정치에 여념이 없는데도 회원들을 소집해 1961년 1월에는 서울 형제회 집회가 재개되도록 이끌었다.

 1963년 9월 17일, 장 박사는 제2차 프란치스코 3회 전국대회에서 재속 프란치스코 한국 형제회(당시 연합회) 초대 회장에 선출돼 형제회를 재건하고 1966년 선종 때까지 한국형제회를 이끈다. 


   오직 하느님 뜻 따라

 이처럼 사생활에서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직 하느님 가르침을 따르려 했고, 조국의 민주주의 확립에 진력했으며, 한국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로서 선교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지병인 간염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문병 온 손님들에게 입교를 권면하던 장 박사는 1966년 6월 4일 67살을 일기로 선종한다. 그해 6월 12일, 국민장으로 9일간 전 국민의 애도를 거쳐 경기도 포천에 있는 혜화동성당 묘역에 안장됨으로써 빛과 소금으로 산 한 생애를 마무리한다.

 생전, 그를 가까이 한 이들은 그를 '구도자'로 증언한다. 참으로 가톨릭인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프란치스칸으로 한 삶을 살다간 시대의 거인이었다.

 작은 형제회는 생전 그에게 1회원 자격을 인정하는 특전을 베풀었고, 운명하고 나서 1회 수도복을 입혀 안장했다. 그래서인지 신자들이 임종경을 드릴 때 "망자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말이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혜화동본당 신자들과 한국 재속프란치스코 회원들의 영원한 회장이었던 장 박사는 자신과 민족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삶을 살고 하느님 대전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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