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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중)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1. 5. 19.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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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중)


 
▲ 2공화국 총리 인준 직후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오른쪽) 총리. 왼쪽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다.
 

   정치를 하는 데 권모술수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장면 박사는 정치인이 되지 않았어야 했다. 그는 평생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닦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에도 이렇게 깨끗한 이가 있으면 국민은 행복하다. 여러 왕들과 정치인 가운데에도 성인들이 있었듯이….

 그가 정계에 투신한 것은 8ㆍ15 광복 이후 일이다. 권유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심을 한 뒤에 그는 최선을 다했다. 평신도 대표로 정계에 나가야 한다는 명분도 그가 정계 진출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인 듯하다.

   유엔총회서 국제적 승인 얻어내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훗날 그의 소회에 따르면, 그는 "해방된 우리 민족의 최대 당면과업은 우선 정치면에서 조국을 완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경제적 자주 자립을 확립하며, 문화와 교육 정책과 체계를 재편성하고 강화하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군정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천주교 대표), 과도 정부 입법의원 의원을 거쳐 그는 1948년 5월 10일 서울 종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리고 그해 9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한민국대표단 수석대표로 참석, 공산권 국가들의 반대 공작을 물리치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아낸다. 1948년 12월 8일의 일이다. 같은 해 12월 말 주미대사로 임명된 그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기민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유엔군을 참전케 함으로써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다.

 장면 박사 가문은 어학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아들 장익(전 춘천교구장) 주교의 어학 실력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장면 박사의 부친 장기빈 옹도 일어와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장면 박사도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외교관으로서 그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6ㆍ25가 발발하자 그는 미국 정계 요인들을 만나고 곧 유엔으로 달려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9대0으로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고, 개전 초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킬 채비를 갖췄다. 

   총검보다 자유 바탕 위에 질서 택해

 하지만 그해 8월 소련 말리크 외상이 안보리 의장이 되면서 6ㆍ25는 미국과 한국의 북침이며 소련은 북한에 소총 한 자루도 보내지 않았다며 그간 한국 사태에 대한 유엔의 결의안은 모두 무효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장면 박사는 한국전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자루를 꺼내 보이며 말리크의 말을 반박하는 데 성공했다. 40분간 연설은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돼 극찬을 받았고, 장면 박사 스스로도 생애를 통해 가장 잊지 못할 후련한 연설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4ㆍ19 직후 국무총리가 된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에게 자유주의적 이념과 경제제일주의 정책을 제시한다.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강경한 수단을 동원하자는 건의를 수 차례나 받았지만 그는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는 자유라는 바탕 위의 질서를 선택했다. 비록 군사 쿠데타로 9개월간에 걸친 그의 짧은 집권은 막을 내렸지만, 지금도 그가 추구한 민주주의적 이상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를 원했고, 경제개발계획으로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고자 노심초사했다.

 제2공화국 무임소 장관을 지낸 오위영의 '민주투사 운석'이라는 글을 보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시위와 채 정돈되지 않은 질서 속에서도 장면 박사가 제2공화국의 새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각료 몇 사람과 시위 방지에 대해 그분에게 문의 했더니 '나는 독재정권에 시달려본 사람이야.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본보기로 마음껏 자유를 누려보게 하고 싶어요.'"

 그는 이처럼 날마다 벌어지는 시위와 소란조차도 민주주의 실현의 단계요 과도기적 현상으로 여겼다.

   지위고하 막론 사람을 존중했던 총리

 총리 공보비서관이던 송원영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날림으로 하거나 거짓으로 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찾아온 사람이 학생이거나 망령끼가 있는 노인이거나 그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장광설을 한두 시간이나 지껄이는 방문객에게조차 끝까지 정중히 대하며 차근차근 설득하기가 일쑤였다. 다들 정치가는 '쇼맨십'도 갖춰야 한다고 진언하고, 인기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본 일도 있었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세단을 타고 앞뒤 호위를 받는다는 행차는 집권 9개월 중 몇 번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지프를 타고 일반인과 똑같이 교통신호를 기다렸다.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일과에 들어가면, 자정이 가깝도록 줄곧 회의와 면접, 결재, 공식 행사를 하는 신앙 정치가였다고 그는 증언한다.

 장면 박사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꿈을 반을 이뤘고(분단조국),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함으로써 겨레와 만방에 깨끗한 이름을 남겼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원대한 경제개발계획을 세웠으나 그는 5ㆍ16군사쿠데타로 다시 좌절, 시련 속에서 자신의 지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속죄양이 돼 하느님 품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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