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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溪宗의 起源과 展開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8:49

본문

 

 

曹溪宗의 起源과 展開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허 흥 식

                                                      

 

     머 리 말

   1.韓國 佛敎宗派史의 槪觀

   2.曹溪宗의 起源과 確立時期

   3.14山門에서 9山門으로

   4.曹溪宗의 宗祖와 法統

     맺 음 말

 

머  리  말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기간 國敎로 존재한 종교이다. 적어도 일천년간 국교로 존속하는 동안 많은 종파가 성쇠하였지만 조계종은 가장 번성하였고, 오늘날까지도 계승자가 계속되는 대표적 종파이다.


불교종파란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分派의 宗團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종단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고 이론상 차이를 내세우지만 이론보다 배타적인 人脈이나 地脈이 집단의 형성에 기원하고 이론은 이를 합리화하면서 正統性을 裝飾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든 종교의 교조는 종파가 분립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불교계에서도 종파를 극복하려는 고승이 수없이 나타났지만, 현실적으로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종파에 의하여 유지되고 발전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불교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종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한국불교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李能和와 金映遂도 저술과 논문에서 종파에 대해서 심혈을 기울여 서술하였다. 이들의 이론은 아직도 학계에 적지 않게 남아있는 五敎九山說의 골격을 세웠다.1)


五敎九山說이란 三國時代末까지 敎宗의 다섯 종파가 확립되었고,통일신라말까지 선종의 9山門이 완성되었다는 이론이다. 오교구산설은 고려 중기까지 지속되다가 大覺國師 義天이 天台宗을 개창하면서 구산문대신 兩宗이 확립되어 五敎兩宗이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李佛化, 李鍾益 등은 이러한 불교사의 체계에 부분적인 수정을 더하여 曹溪宗은 普照知訥에 의하여 九山門이 통합되었으므로 조계종의  中興祖는 보조지눌이라고 주장함으로써2) 太古普愚를 중흥조로 삼는 기존의 불교학계와 팽팽한 대결을 보였다.


위와 같이 불교종파의 체계는 조계종의 중흥조에 대한 견해에서 차이를 보일 뿐 기존의 학설에서 골격을 이룬 체계는 오교구산설이란 관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그러나 필자는 풍부한 금석문자료를 이용하여 기존의 학설을 수정하고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 學說上의 여러 分派가 浮沈하였지만  사원이 특정한 종단에 속하거나 배타적인 종단이 형성된 시기는 9세기에서 비롯되고, 그 이상을 소급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귀착되고 있다.종파에 대한 체계도 오교구산이나 오교 양종이 아닌, 삼대종파와 사대종파를 거쳐 15세기초에 선교양종으로 귀착되었다는 견해이다.3)


조계종은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형성에 자극된 선종에서 확립되었다는 주장과 이와 달리 보조지눌에 의하여 개창되었다는 반론이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조계종은 신라말의 종파형성기에 기반을 이루고 늦어도 고려초에  이미 선종 또는 조계종불리었다고 보고, 의천이 5산문을 흡수하여 천태종의 기반을 삼으면서 나머지 9산문이 고려 후기의 조계종의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조계종의 기원과 더불어 계승자의 소속산문과 중흥조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게 개진되었다. 기존의 통설로서  태고법통설과4) 지눌법통설이5) 가장 통설화될 정도였다. 필자는 이와 달리 지눌과 같은 산문인 가지산문의 나옹의 법통상 중요성을 제시하려 한다.  


1. 韓國 佛敎宗派史의 槪觀


종단은 후삼국시대에 굳어지고 고려시대에 제도적으로 안정되었다. 의천이 천태종의 기반을 세우기까지 3대종파가 있었으며,고려후기에 군소종파는 증가하였으나 조선초까지 4대종파의 골격은 유지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종파의 형성과정과 변화에 대한 기존의 이론ㅋ과 전혀 다른 논의는 앞으로 불교사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9세기에 지방사원을 중심으로 祖師의 이론을 내세우고 實踐的이고 神異性을 내세운 종단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토호세력의 등장과 경주지배세력의 통제력 약화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서 義相을 추종한 華嚴宗과 眞表의 懺悔와 實踐思想을 강조한 瑜伽宗이 백제와 고구려고토의 남부를 연결시켜 고신라의 변두리지역까지 침투하였다.또한 같은 지역에서 중국의 남종선을 수학한 留學僧과 이들의 계승자들이 禪宗 또는 曹溪宗으로  남종선의 정통을 자처하면서 가장 번영하였다. 이외에도 群小宗派도 있었으나 약 1세기의 분열과 후삼국통일과정에 삼대종파의 기반이 갖추어지고 있었다.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까지 배출된 國師는 모두 선승이었다. 이는 남종선을 계승한 조계종이 가장 우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光宗의 치세 중반부터 華嚴宗出身의 국사가 배출되고 늦어도 顯宗時에는 瑜伽宗出身이 국사로 책봉되고 있었고 조계종의 국사와 왕사의 책봉은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고려전기에 三大宗派의 존재와 종단의 세력은 소속종파의 고승이 주지하는 사원을 통해서도 대강을 알 수 있다.특히 높은 僧階의 고승이 주지하는 開京의 寺院은 대부분 국가의 중요한 제전을 주관하거나 왕실의 조상숭배를 담당한 眞殿이었으므로 이를 이용해서  왕조국가의 종파별 후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로부터 약 1세기를 지나 화엄종출신의 의천이 종파불교의 대립을 극복하고 敎禪의 융합을 시도하였다.그는 宋에서 慈辯從諫을 찾아 천태학을 탐구하고 귀국한 후에 왕실의 후원을 받아 國淸寺를 개창하고 이곳을 중심삼아  천태종의 기반을 닦았다.그는 천태학의 敎觀兼修를 내세우고  그를 추종하는 선승 300여명과 광종시에 법안종과 교류하였던 선종 5산문의 100여명의 협조를 받아 그가 입적하기 직전인 1101년에는 奉恩寺에서 모든 교학의 경전을 중심으로 승과를 실시하여 40인의 합격자를 내었다.  


천태종의 확립은 의천의 입적후에 한동안 시련기도 있었으나 의천의 문도가 되었던 선승들이 南崇山을 기반으로 山門을 구성하고 그 가운데서  敎雄과 圓覺國師 德素가 배출되면서 기반을 다졌다. 조계종의 보조지눌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圓妙國師 了世는 서남해안에서 白蓮結社를 중심으로 종세를 크게 확장하고 많은 국사를 배출하여 사대종파 가운데서 조계종 다음으로 번성시켰다.


1세기간 계속된 무신집권과 몽고와의 항전기간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안정기에 두각을 나타냈던 화엄종과 유가종은 문벌귀족과 유착되었으므로 새로이 등장한 무신집권자와 심한 갈등을 거치면서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다.이보다 미약했던 조계종과 천태종은 본래 土豪와 武將들과 유대가 깊었고,무신이 집권한 후에 의도적으로 이들 종파를 후원하여 기존의 우세헸던 교종종파를 약화시켰다.


조계종이나 교종이나 천태종은 敎理보다 參禪이나 淨土思想을 강조함으로서 단순하고 실천적인 무장들의 취향에 맞았다.특히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다음에  지방불교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면서 이들 두 종파의 실천적 결사운동은 민중의 집단전 결속을 통하여 항전해야 할 강화의 집권자들에게도 매우 긴요한 움직임이었다.


이와 같이 정치와 사회의 동요는 불교의 지방화,민중화를 촉진하였고 이론보다 실천을 강조한 경향과 신비사조를 유행시키면서 분립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다. 외세와의 항전을 제외하면 토호인 향리층의 역할이 두드러진 점에서 9세기 후반의 종파형성기와 유사한 경향이 재현되고 있었다.이러한 동요를 틈타 국가의 불교계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群小宗派가 등장하였다.


13세기부터 뚜렸하게 나타난 군소 종파로는 小乘宗,海東宗,芬皇宗,律宗,神印宗,摠持宗 등의 명칭이 보인다.이들 종파는 기존의 四大宗派에 비하여 열세하였으나 조선초까지 통합과 분열을 계속하면서 수효가 더욱 증가하였다.조선초인 1406년의 종파정리직전까지 있었던 종파로는 4大宗派와 摠持宗,疏字宗,法事宗,道門宗,中道宗,神印宗,南山宗,始興宗 등으로서 모두 12종이었다.6)


12종파는 다음해에 7종파로 통합되고 마지막으로 세종시에는 禪敎兩宗으로 다시 축소되었으며,조선후기에는 교종의 계승이 끊어지고 선종만 남았으나 광복이후 오늘날까지 증가하는 추세이다.고려시대에 전형을 이룬 불교종파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연관 관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韓國佛敎宗派의 形成과 變遷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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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期 ? 4-8세기    9-10세기  11-12세기   13-14세기   1406년直前  1407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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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徵 ? 學派時代   宗派形成   三大宗派   群小宗派의    12 宗派     7 宗派  ?

     ?                      -->四大宗派       增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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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禪宗      曹溪宗      曹溪宗       曹溪宗     曹溪宗  ?

     ?            (曹溪宗)                             摠持宗             ?

     ?                        天台宗      天台宗       天台宗     天台宗  ?

     ?                                                 疏字宗             ?

     ?                                                 法事宗             ?

     ?   華嚴學    華嚴宗     華嚴宗      華嚴宗       華嚴宗     華嚴宗  ?

     ?                                                 道門宗             ?

     ?   瑜伽學    瑜伽宗     瑜伽宗      瑜伽宗       慈恩宗     慈恩宗  ?

     ?                                   (慈恩宗)                         ?

宗派名?                                   神印宗       神印宗     中神宗  ?

     ?                                                 中道宗             ?

     ?                                    律宗         南山宗     摠南宗  ?

     ?  (其他學派)                        小乘宗       始興宗     始興宗  ?

     ?                                    海東宗                          ?

     ?                                   (芬皇宗)                         ?

     ?                                   持念宗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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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도 본래 종파를 극복하고 교조의 사상을 회복하려는 이상이 있었다.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종파에 담겨서 불교가 존속하였으며 종파가 없을 때는 침체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종파간의 특성이 유지되고 존립을 위한 활발한 경 쟁은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종파불교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종파가 존재하면서 각각의 특성과 교리와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종파별로 다른 사회기반을 흡수하면서 한국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이는 삼국시대의 불교계가 학파에 머무르고 각 사원이 특정한 사상을 가진 불교세력에 의하여 지속되지 못한 점과 다르다.


고려의 불교는 초기의 三大宗派와 중기의 四大宗派로 골격을 이루며, 후기에는 기존존파의 침체와  불교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군소종파가 나타났으나 조선초까지 사대종파의 골격은 유지되었다.조선시대의 척불은 종파의 기계적통합을 통하여 불교계의 자생적 특성이 좌절되었으며,이는 앞선 고려후기의 불교계가 각종파의 이론이나 실천방향을 모색하기보다  정치세력과의 결탁을 통하여 세속적인 영향력을 확장하기에만 힘쓴 때문이 아닌가 한다.


2.曹溪宗의 起源과 確立時期


지금까지 불교계와 불교사학계에서 조계종의 기원과 종조,그리고 법통에 관한 연구만큼 활발하고 많은 논문과 저술이 축적된 분야도 흔하지 않다.때로는 치열하게 논쟁으로 떠올랐으나,견해의 차이가 좁혀지지 못하고 있다.이에 대한 관심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학술적 호기심에서 현재 한국불교의 기원과 사상적 특성을 체계있게 이해하려는 순수한 학구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다음은 자신이 속한 계보를 알려는 세속의 계보학과 상통하는 현실적 필요성에서,주로 불교에 출가한 승직자들의 저술에서 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출가승과 세속의 신도들이 자신이 수도하거나 속한 사원의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필요성에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세가지 경향은 금세기초에 일본의 다양한 종파불교와 접촉하면서 우리나라의 불교계에도 종파명칭을 붙일 필요에서 촉진되었다.8) 종파가 없던 조선후기에는 禪師란 포괄적으로 고승을 의미했고 종단의 존재도 고려시대처럼 뚜렸하지 않았다.금세기 전반에 圓宗,禪敎兩宗,臨濟宗,曹溪宗 등 여러 명칭을 일시적으로 사용하였으며,이는 당시에 종파가 없었던 전통 때문에 시도된 시행착오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9)


종파가 없던 금세기초 불교계에서는 대강의 의견을 수렴하여 명칭을 설정하고 뒤따라 의미를 부여하거나 점검하는 작업이 학술적인 차원으로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이는 출가승과 신도로서 불교사를 연구하던 이들의 중요한 작업의 하나였다.이에 따라 우리나라 불교계의 位相을 자각하고 그 기원을 밝히려는 연구로 발전하였다.
 

조계종의 기원은 중국의 禪宗과 연결된다.선종이란 참선을 중요시한 학파에서 발전한 종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불교가 기원한 인도에서도 참선의 중요성은 컸었으나 이를 강조하는 독립된 종단은 형성되지 않았다.굳이 선종의 기원을 인도에서 찾는다면 북전불교와 남전불교의 차이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가 한다.
 

남전불교는 북전불교에 의하여 소승불교라 불릴 정도로 上座部의 개인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였다.남전불교의 대표적 존재인 스리랑카의 예를 보더라도 단절의 위기를 맞았지만 몇 차례 중동부 인도와 연결을 가지면서 재생하였으며, 대체로 북전불교보다 政敎의 철저한 분리,국가를 초월하여 출가자의 개인주의적이라 할만한 독립성이 존재하였다.10)


북전불교는 중심지였던 貴霜國이나 拓跋魏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항상 개인의 완성보다 대중의 구원이란 보살신앙이 발달하였다.이는 개인의 완성보다 집단적 구원 사상으로 발전함으로써 기반을 신속하게 확대하고 사회와 밀착되는 기능이 있었으나,한편 집단주의를 내세워 국가세력과 결탁하면서 국가에 종속적인 경향을 가지면서 급속한 몰락을 초래한 예도 많았다.


불교의  기원지인 동북 인도에서 멀어질수록 남북전으로 나타난 사상의 차이점은 수용한 지역의 전통기반이나 환경에 따른 생존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북전불교가 주류를 이룬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예로 들면,남조의 불교계는 남전불교의 경향과 상통하는 경향이 있었다.중국의 천태사상은 주로 양자강 이남의 남조에서 발전되었는데  天台禪이라 할  정도로 선사상에 접근하였다.11)


이와 같이 禪은 수도의 수단으로 교학과 본래 미분화되었으면서도 남전불교에서 강했다.중국불교는 북전불교가 기반이었더라도  양자강유역 이남에서 교학보다 선사상이 자생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북전불교의 중국화와 더불어 일부지역에서의 선사상은 있었으나,본격적인 선종 종단의 기원은 달마를 초조로 삼는 데에 이론이 없다.그러나 達摩로부터 2세기까지 그는 물론 후계자의 활동은 초라하였던 것같다. 문도가 융성할수록 그 계승의 소요기간은 단축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六祖惠能에 이르러 분리되기까지 2세기를 소요한 사실만 보더라도 달마 이후 한동안 계승자의 활동은 미미하였다고 짐작된다.


중국에서 선종이 뚜렸한 종단으로 발전한 시기는 남종선의 분수령을 이룬 惠能이 활동한 이후라는 견해가 통설이다.혜능은 당의 해외무역이 활발하던 오늘날 광동부근의  소수민족인 갈로족 출신으로12) 해로를 통한 남전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앞서 달마는  남인도의 香至國 出身으로 海路로 왔었듯이 이들의 활동기는 다르지만 지방분권화의 경향이 강해진 시기에  남전불교의 경향을 지녔을  가능성이 크고,중국의 남부에서 활동 근거지를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훨씬 후이지만 14세기에 최후로  인도 불교를 동아시아에 전한 指空도 남북인도의 불교사상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13)


우리나라에서 신라는 발해보다 당과의 관계가  긴밀하였기 때문에 발해승보다 당으로 유학은  좀더 활발하였고 선종의 수용도 마찬가지였다고 추측된다.또한 남전불교에서 북전불교보다 선사상의 경향이 강했고 북중국보다 남중국에서 선종이 성했듯이 국내에서도 발해보다 신라에서 선종이 좀더 유행한 것같다.


혜능은 曹溪山 寶林寺를  활동무대로 중국의 남부 산간지역을 지방불교의 거점으로 삼아 종단을 형성하여 갔다.그의 문도들이 사방으로 퍼져 확장하였지만 그는 조계산을 떠나지 않았고,한동안 그의 문도들도 몇 차례의 폐불에도 불구하고 북중국의 불교계보다 안정을 유지하였던  남중국에서 혜능과 마찬 가지로 독립된 종단을  키운 것같다.그러나 이들 선승들이나 이후의 그곳 계승자들이 조계종이란 용어를 쓴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혜능에 앞서 달마의 계승자는 많았고 牛頭禪이나 北宗禪에 이르기까지 당의 서울인 長安이나 그 부근에서 성행하였고 교학과도 절충적이었다.당의 문화와 대외정책은 국제화와 개방성이 강해서 발해와 신라의 유학승들도 일찍부터 혜능에 선행한 선사상을 수학하였다.그러나 이들이 귀국하여 개창한 사원은 찾을 수 없다.14) 사원의 성립조건은 국가의 인정이나 사액을 필요로 했던 것같다.


통일신라의 변방에서 의상계의 화엄학을 익힌 승들의 유학하여 8세기 후반부터 혜능의 계승자로부터 감화받은 유학승의 수효가 증가하였고,830년대부터 국사로 책봉되기 시작하였으며 10세기 전반까지 국사와 왕사의 전부를 이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특히 고려 태조는 지방에서 활동하던 많은 선승들을 국사로 예우하였다.


9.10세기는 토호의 시대라 불릴 정도이지만 불교계에서는 지방불교시대라 할만큼 지방사원이 주축이되어 독자적으로 주지를 계승하고 종파를 확립시켰다.특히 선승의 활동은 두드러지고 많은 선승이 9세기부터 왕실의 우대를 받았으나 경주 사원의 주지를 맡은 예는 없었다.이는 황룡사 주지가 겸임하는 국통이 주지임명권을 장악하고 보수성을 가지면서 지방불교계와 대립관계로 종파의 형성을 촉진시킨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0세기 선승의 비문에는 선종이란 용어가 쓰였지만 曹溪란 용어도 자주 나타난다. 당시 조계란 초기에는 六祖慧能을 의미하였으나,차츰 남종선을 계승한 고려의 선종종파를 의미하였다.15)  僊鳳寺 大覺國師  碑陰記에는 “國初부터 화엄(華嚴宗).유가(瑜伽宗)와 더불어 三大業(三大宗派)을 이루었다”고 뚜렸하게 지적하고 있다.16) 조계종이란 용어는 고려초에 종파의 공인과 더불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중국에서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으므로,남종선을 이어온 고려 선종의 긍지를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선종은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눌 수 있고,북종선은 후에 단절되었으므로 선종은 곧 남종선을 의미하였던 점에서는 중국과 같으나,고려에서만 조계종이라고 좀더 두드러진 용어를 사용하였다.신라말 혜능의 두골을 옮기려고 시도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고,쌍계사에는 이를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이에 대한 기원은 머리 신라시대까지 소급된다.17)또한 고려전기의 禪籍은 당시 중국의 그것보다 초기 선사상의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었다.18) 이러한 몇가지 사실은 남종선의 정통을 지키려는 열성을 나타내며,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선종계보다 혜능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일면을 보여준다.


3) 14山門에서 9山門으로


불교의 전래와 발전을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사실을 강조하고 중국의 13宗派가 이식되었다고 파악한 李能和說이 있다.19) 金映遂는 이능화설을 좀더 발전시켜 우리나라에는 삼국통일기까지 교종 5종파가 확립되고,신라말에 선종을 수용한 선승들이 9개의 山門을 형성하였다는 五敎九山說을 뚜렸히 제시하였다.20) 김영수의 견해는 오늘날까지 통설화되었다.


김영수는 9산문설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으나 이를 뒷받침할 저술은 적지 않다.禪門祖師禮懺儀文과 이를 인용하였다고 생각되는 梵音集,仔夔文 등을 들 수 있다.그러나 선문조사예참문의 약점은 저자가 뚜렷하지 않고 빨라야 고려후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이 책은 조선후기의 간행본이 현존하고 있으며,점차 계보를 추가 시키고 있으므로 정확한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구산문의 명칭과 조사의 활동이 간단하나마 한 곳에 밀집된  가장 확실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21)


필자는 구산문설과는 달리 신라말에야 종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전에는 학파만이 존재하였고 고려초에야 3대종파가 확립되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안하였다.또한 신라말에 선종산문이 형성된 사실에는 이론이 없으나 최치원이 열거한 산문만도 14산문이므로 구산문설에 대해서도 異見을 제시하고 고려중기 이후에야 구산문설이 확립되었다고 추정하였다.22) 1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비판이 없이 기존설이 통용되고 있다.


신라말에 이미 선종의 14산문이 있었음은 당시의 금석문에서 찾을 수 있다.신라에서는 9세기초부터 많은 선승의 비를 세웠으나,890년대부터  10세기초에는 전혀 중단되고 있는데 이는 후삼국의 분립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선종에 대한 회유책마저 포기하였다고 해석된다.고려태조는 통일후에 많은 선승의 비를 세웠고,광종이후에는 교종출신의 국사와 왕사의 비문도 포함되었다.


9세기 후반기에 崔致遠은 王命으로 여러 선승의 비문을 지었다. 그 가운데 鳳巖寺 智證大師碑에는 지증대사가 속한 曦陽山門을 제외하고도 13산문과 그 祖師 法名의 끝글자를 첨가하여 3字씩 수록하였다.이 비는  924년에 세워졌으나 893년에 썼으므로 9세기말에 적어도 14산문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23) 이후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더많은 산문이 형성되었음이 확실하며,고려초에 이를 통페합하여  일정한 수로  재편하였다는 뚜렸한 증거도 없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종계를 망라하여 9산문 또는 9산파로 총괄하는 이론이 지배적이었다.이러한 이론의 근거조차 규명하지 않은 단계에서 개설서에까지 채택되어 왔다.9산문의 조사와 구체적 명칭이 실린 최초의 서명은 선문조사예참의문이 아닌가 한다.이책은 知訥의 문도에 의하여 정리되고 조선초까지 懶翁의 문도에 의하여 증보되었다고 추정된다.


최근까지 신라말에 선종 9산문이 확립되고 이들 산문이 의천이 천태종을 개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견해가 통설화되었으나,신라말에 최치원이 지적한 14산문은 이미 9산문의 수보다 많으며,고려초까지 그보다 좀더 많은 수의 산문이 史書와 金石文에서 확인된다. 또한 景宗初(971년)에 法孫에 의하여 주지의 계승을 인정한 高達院,曦陽院,道峯院 등 3大寺院이 있었으나24) 이 가운데 9산문에 포함된 곳은 고달원뿐이다.9산이란 용어는 고려 중기에야 쓰이기 시작했고,知訥의 修禪結社 이후에야  구체적인 명칭이 나타난다.


고려전기에 실시된 선종산문의 재편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기록은 선봉사에 세운 천태시조 대각국사비문의 음기이다.이에 의하면 조계종의 5산문이 의천의 천태학에 동감하고 그 기반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선봉사비문에는 5산문 5사원의 명칭 가운데 하나는 마멸되어 알 수 없으나 나머지 사원은 모두 광종시에 吳越의 法眼宗으로 유학하였던 계열의 고승들이 주지했던 사원임이 입증된다.법안종은 남종선의 五家 가운데 하나이고,이들의 사상은 천태학을 절충하면서 염불사상을 통하여 실천적이고 선교통합적인  특성이 강하였다.이러한 기반이 1세기 이상 존속하다가 의천의 통합적 교학사상과 만나면서 천태종을 출발시키고 있었다.


천태종은 선봉사를 중심으로 의천의 문도로 포섭된 선종승과 고려초부터 있었던 5산문을 합쳐 6산문으로 출발하였다고 하겠다.그렇다면 천태종이 개창될 무렵부터 9산문이란 용어가 쓰였으므로25) 천태종이 나타나기 전에는 조계종은 14산문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이는 공교롭게도 9세기말 최치원이 열거한 당시 산문의 수효와 일치하지만,명칭상 큰 차이가 있으며,고려초까지 증가한 산문을 통폐합하여 14 산문으로 정리했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으므로 이를 입증하기는 어렵다.이들 산문의 수효는 최치원이 지적한 산문의 수효와 일치하더라도  천태종의 기반이된 산문이나 남어지 9산문을 합쳐도 구체적인 명칭상 일치하는 곳은 聖住山門뿐이다.


4. 曹溪宗의 宗祖와 法統


불교종파에 대한 적지 않은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말인 9세기에 남종선을 바탕으로한 선승들이 산문을 형성하였고,이것이  조계종의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에는 모든 연구자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다만 산문의  수효와 구산문이 당시의 선종세력을 포괄하는 용어라는 통설과 필자의 14산문설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의 종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종조는 처음으로 조계종을 일으킨 인물이므로,조계종이 기원한 시기와 관련이 있게 마련이다.조계종의 기원은 고려초설,의천이 천태종을 출발시킨 시기와 같이한다는 설,보조지눌의 개창설 등 3가지가 있다.


고려초설은 伽山智冠,退翁性徹 등이 제시하였고, 필자도 좀더 사료를 보완하였으나 종조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하고 싶다.앞의 두 분은 조계종의 기원을 신라말의 산문에고 종파로서 용어는 고려초부터이지만 종조는 훨씬 후인 고려말의 태고보우라고 하였다.26) 이 견해는 오늘날 불교계와 학계에서 가장 많은 전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종파가 확립되고 5세기 가까이 지난 고승을 중흥조라면 타당성이 있지만,종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는 설득력을 반감시키고 있다.조계종이란 종조를 혜능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다음은 義天이 천태종을 형성하자 남은 9산문의 선승들이 이에 자극을 받아 조계종을 형성시켰다는 김영수의 견해를 들 수 있다.27) 이는 통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개설서에서도 반영되었다.실제로 의천이 기점이된 고려 천태종의 출발은 기존의 선승을 흡수하여 그 기반을 삼았으므로 기존 종파의 전체를 뒤흔드는 불교계전반의 재편은 아닐지라도 기존의 남종선의 전통을 고수한 선종에 대해서는 커다란 위기감을 주었다.


통설화된 의천시 조계종기원설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하나는 이미 앞에 제시한 바와 같이 고려초 기원설과 어긋난다. 둘째로 천태종에 대항해서 조계종을 형성시킨 구심점이 된 고승,다시 말해서 종조는 누구냐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없다.또한 필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구산문에서 천태종으로 5산문이 흡수되었다면 4산문이 남아야할 터인데,실제로 9산문이란 용어는 의천이 선승을 포섭한 후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므로 김영수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지눌 기원설은 李能和가 제시하였고,28) 李在烈,李鍾益에 의하여 보강되었다.이는 지금까지 열거한 주장 가운데서 처음으로 기원과 종조를 일치시킴으로써 가장 선명한 학설로 부각되었다.이 학설은 태고종조론자의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던 만큼,공격 또한 가장 심하게 받았다.이 견해의 가장 큰 약점은 조계종이란 용어가 고려초부터 쓰였고,지눌도 구산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의문점이 남아있다.


종조에 대한 3가지 대표적인 학설은 통설로 삼기에는 공통적으로 적지 않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이보다 논리상 개연성이 있는 가지산 도의 종조설을 들 수 있다.이는 일찌기 方寒巖에 의하여 제시되었고,29) 권상로에 의하여 보강되었다.權相老는 9세기의 道義로부터 14세기후반의  太古는 물론 조선중기에 이르는 계보를 체계화하였다.30) 이 견해는 태고종조론을 소급시킨 셈이나,자신이 만든 필사본에 의존하였으며 자료의 근거를 상실하였으므로  의문점이 있다.아직껏 그가 제시한 계보를 나타낸 유사한 옛문헌은 나타나지 않았며,김영수는 이를 의심하면서도 타협하고 말았다.31)


迦智山 道義宗祖說과 대결이라도 하듯이 ?堀山 梵日宗祖說이 나타났다.이는 松廣寺誌를 쓴 林錫珍에 의하여 체계화되었으며32) 9세기의 범일로부터 고려중기의 지눌과 고려말의 나옹에 이르는 인맥의 계승을 체계화하였다.사굴산 종조설이라고도 불릴 수있는 조사인 범일을 지눌과 나옹으로 연결시켜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전통과 인맥을 강화시켜주고 있다.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은 고려말까지 가장 두드러진 고승을 배출하였으므로 인맥이 계승되었다는 개연성을 무시하기도 어렵다.최근까지도 이 두가지 견해를 반영한 현대판 불조원류가 간행되었을 정도이다.33) 사굴산과 희양산문은 고려말의 양대산맥을 이룬 나옹과 태고와 마주치므로 이들을 중요시하여 소급시켰으나,이를 제시한 권상로와 임석진은 그들보다 선행한 결집된 자료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각각 입지적 기반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나타내었다고 의심받을 수 있다.


종조란 인맥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법통으로 인정을 받아야 쓰일 수 있다.우리나라에 존재하다가 중도에 단절된 산문과 종파는 많으며,사굴산문과 가지산문의 인맥이 오늘날까지 계승된다면 개산조를 곧 한국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삼을 수 있으며,그렇지 못하면 그 산문의  조사일 뿐이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종조는 아니다.다시 말하면 조사는 많을 수 있으나 인맥이 단절되었다면 종조는 아니며,사굴산과 가지산의 인맥이 단절되지 않았으면 이 두산문의 조사는 곧 종조가 된다.


한국 불교의 종조는 인맥의 계승이 확인된 법통의 조사를 의미하므로 법통을 밝히지 않고는 누구를 종조라고 말할 수 없다.기존의 불교계에서 종조설이 먼저 대두되었으나 인맥의 계승을 확인한 다음에 소급하여 설정될 수 있다고 하겠다.법통이란 종조로부터  현재까지의 계승을 의미하므로 불교계의 정통론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조계종의 법통설은 조계종의 인맥을 소급하여 계보화할 수 있으므로,오늘날의 모든 불교종파는 종조와 법통을 가지고 있으나,그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는 종파의 기원과 전통성을 의미한다.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법통은 기원과 전통성을 나타내고 이를 통하여 지향성을 가지므로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


법통은 종파의 조사나 개산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거의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중국의 고승으로부터 계승하였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조계종의 기원이된 신라말의 선종산문의 조사도 대부분 중국의 선승을 계승하였으며,그렇지 않은 경우도 간혹 있으나 그들을 소급하면 반드시 중국의 선승과 연결을 맺고 있다.이는 중국의 조사가 서역이나 천축의 고승으로 소급되는 점과 다른 점이 없다.


고려의 조계종산문은 모두 신라말 조사로부터 기원하였다.신라말에 14산문 고려중기에 9산문이 확인되고 고려후기에 국사를 배출한 조계종산문은 사굴산,희양산,가지산뿐이고 나머지는 어느 정도 인맥을 계승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대표적 3산문 가운데서 뚜렸하게 계승을 밝혀 놓은 저술은 극히 드물다.권상로와 이재렬은 이를 중요시하고 각각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의 계승을 신라말 조사로부터 확립시켰으나 이보다 앞서 정리된 뚜렸한 저술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며, 불교계에서조차 논외로 취급된 새로운 불조원류가 간행되기도 하였다.34)


대체로 종조는 신라말의 조사로 소급되어야 한다는 견해에는 반론이 있을 수 없으나,이를 단절 없이 계보화할 수 있는 근거가 뚜렸하지 못하다.오히려 불교계와 학계에서 종조로 언급된 知訥,太古,懶翁 등은 中興祖라고 불리는 편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다시 말하면 종조로부터 중흥조까지의 인맥은 단절된 셈이 된다.


법통에서 중흥조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요건을 가진 고승이 거론되고 있다.첫째로 국내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상체계를 나타내고,둘째로 문도가 번창하고 계승의 단절이 없으며,마지막으로 계승을 입증하는 기존의 저술이 남아 있다.새로운 사상체계는 탁월한 능력과 수도로 자각의 경지에서 계발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외국의 고승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전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문도의 계승이나 이를 입증할 기존의 저술도 의도적으로 개인이 작성하기보다 계승자들에 의하여 인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3가지 요건을 갖춘 중흥조는 대체로 지눌,태고,나옹을 벗어나지 않는다.이외에 신라말 산문의 조사는 대부분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점에서 가능성은 있으나 나머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다만 가지산의 도의와 사굴산의 범일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조사이지만  역시 인맥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므로 아쉬움이 있다.
 

인맥을 소급시켜 법통을 정립시킬 수 있는 중흥조사에 관한 기존의 견해는 대체로 지눌설,태고설,나옹의 3가지가 있다.이 가운데서 태고설이 가장 유력하며,종정의 견해와도 일치하고35) 최근에 법통을 정리한 저술에서도36) 이를 반영하고 있다.다음으로 지눌설이 유력하며,나옹설은 거의 주목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를 보완한 지공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태고설에 가깝지만 조선전기에 단절되었다는 견해를 추가할 수 있다.이는 태고의 계승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高橋亨이 제시하였으며,최근에 김영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벽송지엄부터 인맥의 계승이 확실하므로 그를 법통의 초조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하였다.37)
 

지눌법통설은 李在烈과 李鍾益에 의하여 제안되었다.이들의 견해는 태고법통설과 가장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으며,불교사의 체계를 반성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이 견해를 통하여 논쟁을 전개한 과정에서 발표된 논문이나 저술이 적지 않으며,38) 이밖에 다른 방법(신문이나 비학술잡지,성명서 등등)은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분들은 지눌이 조계종의 개창자이며,종조라고 주장하였다.좀더 자세히 말하면  구산문을 통합하여 최초로 조계종을 개창한 인물이 지눌이므로 그를 조계종의 종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이다.처음에는 전거를 명시하지 않고 주장만을 내세웠으나,차츰 저술과 논문으로서 뒷받침하였다.이에 대해서 태고종조론자들의 반박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교사의 발전을 위한 구도자의 자세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지눌설의 가장 뚜렸한 전거는 선문조사예참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의 저자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눌의 문도에 의하여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조선초에 나옹의 계승자들이 다시 수보하였고,1660년의 간행된 가장 오랜 현존본이 있다.이후에 계보를 보충한 간행본이 있으며, 또한  梵音集과 仔夔文의 증보판에도 인용되어 있다.39)


이 책은 迦葉으로부터 惠能에 이르는 33祖의 祖師를 싣고 다음으로 道義.洪陟 등 신라말 九山의 조사와 행적을 간략히 七言詩로 나타내었다.마지막으로 중흥조로 지눌을 실었으므로 지눌이 부각되는 전거로 제시될 수 있다.이는 구산문의 근거로도 가장 두드러진 저술이라 하겠으며,김영수의 구산설도 이와 순서까지 일치하지만 典據로 밝히지 않았었다.


지눌은 사상적인 폭으로나 개경의 중앙불교계가 무신집권기에 휘말려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던 시기에  그의 결사운동과 문도의 번창으로 더욱 돋보이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의 사상은 외국의 선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는 아니었으나 독서를 통한 스스로의 탐구에 의하여 大慧宗고의 간화선을 확고하게 정착시켰으며,독학으로 터득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파의 경론이나 조계종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선적에 대해서도 가치를 확인하고 이후의 고려불교계에 통합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발단을 열었다.이후에 선종산문간의 유대는 물론 천태종이나 화엄종과의 사상적 거리를 좁히는 계기도 그의 사상경향과 상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인맥은 그를 포함하여 16國師로 전승되는 바와 같이 13.4세기에 가장 번영하였고 이에 대한 기존의 기록도 적지 않다.40) 다만 15세기 이후의 계승은 뚜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며,이밖에도 그를 종조로 삼기에는 몇가지 무리한 점이 지적된다.무엇보다 그에 앞서 조계종이란 용어가 쓰였으며,그도 사굴산의 중흥조일 뿐이고,그의 활동으로 구산문이 완전이 조계종으로 통합되었다는 증거보다는 반증이 많다.41)


맺 음 말


조계종의 기원에 대해서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가장 오랜 기간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설이 확립되지 못하고 이설이 분분하다. 그 원인은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만 하나는 조선전기에 불교계에 대한 배척으로 불교계가 스스로 충실한 자료를 남기지 못한 데에 있다.다음은 있는 자료나마 논리적으로 성실하게 해석하거나 체계화하는 과정에 소홀하고 논쟁에 급급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조계종은 신라말 南宗禪을 이어온 여러 山門의 祖師를 기원으로 삼고 고려초부터 禪宗 또는 曹溪宗으로 불리었다. 이들 여러 산문은 9개의 산문으로 총괄된다는 통설과는 달리 필자는 고려초기까지 14산문이 골격을 이루고 점차 산문간의 구분이 모호한 경향도 나타났으나, 중기에 天台宗의 기반으로 흡수된 5산문을 제외하고 나머지 9산문은 11세기말부터 존속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조계종은 고려초에 성하였으나 광종후반기부터 華嚴宗보다 약화되었고 義天 이후에 천태종으로 분리되면서 더욱 타격을 받았다. 고려후기에 산문의 구분이 다시 엿보이지만, 대체로 ??山, 迦智山, 曦陽山등 3山門의 활동이 주로 나타난다.그 가운데서 사굴산문의 지눌은 조계종의 사상적 방향을 다시 定立하였고 교종사상을 흡수하여 조선후기에 선종 단일종단으로 존속시키는 방향을 닦았다.


14세기 말에는 太古와 懶翁이 거봉을 이루면서 15세기 불교계의 고승들도 이들의 문도가 주도적 역할을 보였다.조선시대의 게승을 정리한 저술에서 이들 두 고승의 법손이 각각 불교계의 인맥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상반된 법통설을 확립하였으나 그밖에도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체로 태고법통설이 우세하고 오늘날까지도 이를 통설화한 저술이 대부분이다.42)


후대의 저술보다 당시의 고승이 살던 시기와 15세기의 자료를 정리하고 해석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재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태고법통설은 1620년대에 비롯되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나옹법통설이 보편적으로 지속되었다. 나옹법통설은 임난후인 1610년대까지 존속하였지만 청허휴정의 소장문도에 의하여 태고법통설이 부각되면서 미미하여졌다. 따라서 15.6세기까지는 나옹법통설이 통설화되었고,이는 당시 불교계의 사실성을 반영한 결과였으므로 신빙성이 있다.43)


조선전기의 나옹법통설은 내용상 사승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 나옹이 지공을 계승하였다는 지공계승설과 평산을 계승하였다는 평산계승설,그리고 사굴산문의 계승을 강조하는 3가지 학설이 있을 수 있다.?禪門祖師禮懺華藏畵?에는 사굴산계승설과 指空繼承說을 접목시킨 나옹법통설을 반영하고 있으나 저자를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平山繼承說은 自超가 만든 簇子에 의하여 비롯되었으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道安의 ?佛祖宗派之圖?에 답습되었으므로 본래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잇다.


나옹법통설은 그의 문도 가운데서 누구를 上首弟子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시 混修繼承說과 自超繼承說로 나누어진다.혼수계승설은 나옹의 語錄과 舍利石鍾碑, 그리고 용재총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보다 좀더 보편화되었던 자초계승설은 조선왕조실록,선문조사예참화장화,불조종파지도,삼화상부도비와 교서 등 매우 풍부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자초법통설은 자초에 의하여 혼수를 배제시킨 법통이며, 조선건국과정의 정변에 편승하여 자초가 태조를 움직여 설정하였음이 확인된다.
    

采永의 海東佛祖源流는 간행년대가 비교적 늦은 18세기의 저술이지만 당시까지 보편화되었던 법통설을 집대성하여 광범위하게 수록하였으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나옹의 上首弟子인 혼수를 태고의 문도로 수록함으로써,太古-->混修-->覺雲으로 법통을 연결지우고 있다. 또한 자초를 나옹의 대표적 계승자로 정리하였으나, 이와 달리 懶翁-->混修-->卍雨로 계보를 연결시킨 成俔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후반 세조시에 왕사였던 守眉와 刊經都監에서 활약한 信眉는 모두 나옹의 법손으로 추측된다. 또한 불조원류의 碧溪正心과 淸虛行狀의 淨心은 시기상 다른 인물로 생각되며 당시의 법통은 다시 규명될 과제로 남는다.


조계종의 법통은 저술을 통하여 사상면에서 추적이 가능하다. 祖堂集, 祖原通錄, 法集別行錄 등 중국에서 전하지 않는 초기의 禪籍을 고려에서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이 상고적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혜능을 정통으로 유지하였다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 때문에 중국에서 쓰지 않았던 조계종이란 종파명을 표방하지 않았는가 한다.


고려의 조계종은 중국선종의 5家와 적지 않은 사상적 연관이 있었지만, 특히 永明延壽의 저술이 지눌에게 영향으르 주었음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자주 간행되었다. 이는 吳越의 法眼宗이 천태종을 형성시킨 고려의 禪僧뿐 아니라 知訥과 그의 계승자의 사상에도 널리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臨濟宗의 大慧宗?, 育王介諶, 溫陵戒環, 蒙山德異, 鐵山紹瓊 등은 坦然과 知訥, 그리고 그 계승자에게 깊은 사상적 흔적을 남겼다. 고려말의 石屋과 平山이 각각 태고와 나옹에게 계승시킨 사상적 영향은 연속적인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나옹은 평산보다 指空의 절대적 감화를 받음으로써 조선시대의 불교에 특성을 나타냈다고 정리될 수 있다.나옹의 폭넓은 사상과 문도의 계승이야말로 불교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법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고 정리된다.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필자가 시도한 조계종의 기원과 법통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曹溪宗의 起源과 法統의 繼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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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9세기말    10세기       11세기말       13세기    14세기말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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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印度指空

                                                    臨濟平山

惠能→14山門→曹溪宗14山門→曹溪宗9山門→??山知訥→懶翁→混修→正心

                                                                  覺雲

                                                                  自超 

 


                                        ..迦智山 一然...太古普愚...粲英

                                                 臨濟石屋

                                        ..曦陽山 承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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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법통은 당시의 사실성을 반영하며, 동시에 계승자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신빙성있는 법통은 시대적 사실성과 계승자의 주관이 일치할 때 정통성이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조계종에서 법통은 두 가지 요소가 거리감이 있으므로  정통성에 적지 않은 혼란이 있으며, 앞으로 좀더 면밀한 연구가 요구되는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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