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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만(atman:自我)과 개령(個靈)의 차이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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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만(atman:自我)과 개령(個靈)의 차이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我가 없기에 윤회를 믿지않습니다. 지난번에 개령에 대해서 말씀 들었습니다만 아트만과 개령의 차이점을 말씀해주셨으면합니다. 라는 재희님의 물음에 대한 답변.]

 

 

아트만(atman:自我)은 바라문교에서 수립된 개념입니다. 우파니샤트 철학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산스크리트어인 아트만은 바라문교의 사상으로써 힌두교도 이를 차용하였으며 정신원리를 초월하여 개체를 통일하는 보편적인 최고실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개체의 실체가 아트만이라면 우주의 실체는 브라만입니다. 우파니샤트문헌에서 아트만은 우주 최고의 원리 브라만과의 동일성이 역설되고 범아일여사상(梵我一如思想)이 주창되었습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아트만을 인간에게 내재(內在)하는 보편적 원리로서 실체시(實體視)하는 데 비하여, 불교는 그러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령은 아트만이라는 용어를 불교식으로 한역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개령과 아트만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 아(我)인정하지 않는다함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태어나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나라는 실체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며 이 개체가 윤회를 하는 것까지 인정을 하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개령의 개념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석가는 중생들이 자아라는 개체를 영원한 것처럼 인식하는 것을 경계하여 무아를 주창했을 뿐입니다. 더 심층적으로 표현하자면 아트만 내지 개령은 아(我)라는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표현은 일시적이라고 했으나 이것이 윤회의 틀을 타면 영겁까지도 이를 수 있습니다. 윤회를 하는 존재인 이 실체를 불교에서는 "가짜 나"(가아假我)라고 부릅니다.

 

중생이 이 가짜 아에 집착하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지 못함은 물론 종내 중생으로 머물고 맙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릴 때, 즉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을 때 중생은 반야지에 이르게 됩니다. 버린다는 이 개념이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를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망집과 온갖 사념을 끊고 무아의 궁극에 도달하면 곧 부처인 것입니다.

 

윤회는 이 가짜아가 주체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짜아의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4종번뇌와 항상 같이 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 이들에 의한 인상이나 여운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되어지는 장소입니다. 중생이 지닌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식과 더불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과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프로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의식입니다. (식에 대하여 더 알고 싶으면 유식론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생이 보리심을 득하여 부처가 되었을 때는 이 아뢰야식까지도 능히 소멸시킬 수 있으며 제9식인 백정식(白淨識)을 소유하게 됩니다. 백정식은 그 모든 과나 업으로부터 초월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부처식으로도 표현합니다. 백정식은 초월식이기에 윤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처는 육도윤회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재희님은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아(我)가 없기에 윤회를 믿지않는다고 했는데 윤회는 고정적이고 실체적인 아가 하는 것이 아니고 가짜 아가 하는 것입니다. 즉 중생이 부처가 되기 전에는 이 가짜 아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무아는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무아를 지닌 이는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타종교에 비하여 대단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입니다만 과학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철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체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앎을 제시하는 학문이지만 불교는 앎의 세계를 넘어선 앎과 궁행을 같이 도모하는 개념이며 이를 수행하는 과정이 지극하여 종내는 구원에까지 이를 수 있기에 종교의 경지에까지 오른 미증유의 가치입니다. 따라서 과학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윤회설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이론의 합리성보다는 신심입니다. 의문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인정을 할 수 없어서 믿지 않는다는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면 윤회설은 성현이 주창한 개념이며 성현의 말씀은 호리도 틀림이 없기에 인정을 하고 안 하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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