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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해설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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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화엄학의 범주와 사상 개요

 

1. 화엄학의 범주

 

화엄사상을 담고 있는《화엄경》은 한국불교의 수행과 신앙형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경이다. 불교의식에도 화엄사상이 무르녹아 있다. 특히 한국선의 이해는 화엄사상의 공부 없이는 완전하지 못할 정도이다. 지금도《화엄경》은 불교전문강원인 승가대학에서 이력과정의 마지막 대교과에서 배우는 과목이다. 아무튼 불교, 특히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화엄경》의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하리라 본다.

 

'화엄사상의 세계'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 화엄학의 범주는 대강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화엄사상은《화엄경》의 중심사상이다.《화엄경》에서는 우리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며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도록 교설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로《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둘째는《화엄경》을 소의로 하여 체계화한 화엄종의 화엄사상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 화엄종을 대성시킨 현수법장(643~712)의 화엄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후로 영향을 받고 준 화엄가들의 화엄사상이 있다.

셋째는 한국화엄사상이다. 한국화엄사상은 의상(625~702)과 의상의 뒤를 이은 의상계 화엄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넷째는 화엄교사(華嚴敎史) 부분이다.《화엄경》이 편찬․유통되며 화엄종과 화엄사상이 형성되어간 역사적인 점도 살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화엄에 의하여 수학하고 증득해 가는 수증론(修證論) 부분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니 사상 속에 수행과 증득의 면이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본 '화엄사상의 세계' 강의에서는《화엄경》을 개설하고, 화엄교사를 약설하며, 중국과 한국의 화엄사상을 고찰함과 동시에 수증의 방편을 살펴나가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화엄경》과 화엄사상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업적에 의거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화엄사상의 개요를 먼저 소개해 두고, 앞으로 그러한 화엄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2. 화엄사상의 개요

 

1) 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법

 

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 몇 가지 방법을 먼저 보기로 한다. 우선 경전 이해의 전통적인 방법은 경의 제목을 통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청량징관(738~839)의《화엄현담》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 7자에 각각 10가지씩 의미를 붙여서 총 70가지로《화엄경》의 제목을 설명하고 있다.《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大方廣佛華嚴)'을 설하는 경이니, 경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대방광불화엄을 경에 담긴 내용, 즉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화엄경》은 대방광하신 부처님의 세계를 보살의 갖가지 만행화로써 장엄함을 설하고 있는 경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또 경의 내용을 통틀어서 그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데 주목해 왔다. 조선시대 묵암최눌의〈화엄품목〉에는《화엄경》의 대의를 '만법을 통섭해서 일심을 밝힌다〔統萬法明一心〕'라고 하였다. 그후 전문강원에서 이 대의를 그대로 수용하여 경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사용해 왔다.

 

화엄종에서는 종지를 세우고 있다. 의상은〈법성게〉에서 법성(法性)으로 화엄세계를 노래하였고, 법장은《탐현기》에서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를 주창하고 있다. 이들 방법을 종합해서《화엄경》의 중심사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2) 화엄경의 중심사상

 

(1) 여래출현(如來出現, 如來性起)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서는 첫째로 '여래출현'을 들 수 있으니, 여래출현은 다른 번역으로 '여래성기'이다.《화엄경》은 '대방광불'을 설하는 경이다. 대방광이란 부처님의 체․상․용을 표현한 말이다. 범어로는 방광을 Vaipulya(바이풀리야)라 하여 하나의 붙은 말이나, 한역에서는 '방'과 '광'에 각각 따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원력과 자비, 신통과 위신력 등이 무한히 크고 반듯하고 너르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자각, 깨달음의 내용을 펴고 있기에《화엄경》을 정각의 개현경(開顯經)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이라기보다 부처님을 설한 경이라 하여《불화엄경(Buddh vata saka)》이라고도 하였다.경전 성립사적으로 볼 때《화엄경》은 대승보살에 의하여 대승불교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시대에 편찬된 초기대승경전이다.《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화엄대경(華嚴大經)은 서력 기원후 3,4세기경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편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화엄경》자체내에서는 경이 설해진 곳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나무 아래이며, 설해진 시기는 성도하신 직후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화엄경》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교설한 것임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엄경》의 대방광불은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한 변만불(遍滿佛)로서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 아님이 없다. 개개 존재가 고유한 제 가치를 평등히 다 갖고 있으니, 여래의 지혜인 여래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여래성기(如來性起) 또는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고 한다.

 

화엄가들은 화엄교주를 융삼세간(融三世間)․십신구족(十身具足)․삼불원융(三佛圓融)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화엄세계는 법신․보신․화신이라 불리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의 삼불이 원융한 비로자나불의 세계이다.《화엄경》에는 처음에 마가다국 붓다가야에서 정각을 이루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하신다. 그런데 이 석가모니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부처님이시며, 비로자나는 노사나로도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부처님을 삼불원융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한 것이다.

 

또한 화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세간에 두루해 계시는 변만불(遍滿佛)이다. 화엄가들은 일체 존재를 편의상 불․보살과 같은 깨달은 존재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아직 못 깨달은 존재인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그들 정보가 의지해 있는 기세간(器世間)의 삼종세간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 삼세간은 역시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여 융삼세간이라 일컫는 것이다.《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보살, 보살과 중생,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아니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가 비로자나 아님이 없으니, 기세간 역시 여래출현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융삼세간불이라 한다. 의상은 이를《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서 합시일인의 반시(槃詩)로 나타내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를 열이라는 숫자로 보이고 있으니 열은 원만수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십불(十佛)로 말씀되고 있다. 이러한 십불이 구족한 무애세계가 대방광불의 세계인 것이다.〈법성게〉에서도 화엄세계를 '십불보현대인경'이라 읊고 있으며, 십불의 모습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화엄세계는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불의 화현 아님이 없다.《화엄경》은 우리 범부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의상은 이를 법성성기(法性性起)로서 옛부터 부처〔舊來佛〕라 하였다.《화엄경》은 불세계를 교설한 것이니, 부처님 세계는 옛부터 본래 부처인 중생의 원력에 의해 이땅에 구현됨을 밝혀준 것이다.

 

(2) 일승보살도(一乘菩薩道)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서 둘째는 일승보살도이다. 화엄이란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니 보살행이라는 꽃으로 불세계를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는 광명으로만 보이시고 언설을 통해서는 문수(文殊)․보현(普賢)보살을 위시한 보살들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부처님의 세계가 보살행을 통하여 장엄되며 우리 중생에게 펼쳐지고 있다. 보살이 설하고 있는 그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우리 범부 중생이 바로 부처의 삶을 살게 됨을 보이고 있다.

 

범부와 보살과 부처가 다른 점은 발심에 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만, 그러나 중생과 부처는 또 확연히 다르다. 중생은 자기가 바로 부처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부처인 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래서 신심과 발심이 필요한 것이다. 신심이란 자기가 부처인 줄을 확실히 믿는 것이며, 이를 정신(淨信)이라고 한다. 이러한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깊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신만 성취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되니 곧 발심(發心)하게 되는 것이다.

 

발심한 중생이 보살이다. 보살이란 보리살타(Boddhi Sattva)의 준말이니 깨달을 중생 또는 깨달은 중생〔覺有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엄에서는 발심만 하면 바로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정각을 성취하는 때이다〔初發心時便成正覺〕. 그러므로《화엄경》에서 시설하고 있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성불로 향해가는 인행(因行)이라기보다 정각후의 과행(果行)이며 부처행〔佛行〕인 것이다. 인․과가 둘이 아닌 인과교철(因果交徹)의 인행이며 과행이다. 다시 말해서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화엄경》에서의 보살행이다.

 

《화엄경》의 보살계위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42위(四十二位)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보살계위를 52위 또는 53위 및 57위 등으로 설정하는 것과 다르다.《팔십화엄》에서는 신(信)은 십신(十信)의 계위로 나타나지 아니하니, 신은 모든 보살도를 받치고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42계위의 맨 첫단계인 초발심주에서 발심하여 여래가에 태어난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하나하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앞단계라기보다 낱낱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이타행이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면인 것이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한 53선지식의 낱낱 해탈문도 모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해탈문이며, 선재의 구법은 구체적으로 불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사상을 보살사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십지행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보살도를 말함에 있어서〈십지품을〈입법계품> 못지않게 중시해 왔던 것이다.

 

(3) 법계연기(法界緣起)

 

온갖 세계와 중생은 다 비로자나부처님의 현현이며, 보살행으로 불세계가 구현되고 있음을, 화엄교가들은 또한 십현육상(十玄六相)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설명하기도 한다. 일체의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相入〕 하나 되어〔相卽〕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현수법장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엄종의 종취로서 인과연기 이실법계를 주창하고 있다. 인과연기는 사(事)이고, 이실법계는 이(理)로서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따라서 사와 사가 걸림없는 사사무애의 일진법계(一眞法界)이다. 이 일진법계의 체는 물론 일심(一心)이다.

 

불교를 불교이게 한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연기의 진리를 든다. 연기에 맞으면 불교이고 연기에 어긋나면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연기의 진리를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란 '연하여 함께 일어난다'라는 의미인 프라티티야삼우트파다(prat tyasamutp da)의 역어이다. 모든 존재는 어느 것이나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라는 연기의 이법은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에 적용할 수 있는 까닭에 보통 연기의 기본공식이라 일컫고 있다.

 

세존께서는 십이연기〔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의 순관과 역관을 통하여 무명을 멸하고 생사의 모든 괴로움을 탈각하셨다고 한다. 이 연기의 진리는 후에 여러 가지로 그 설명방식이 변천되어 왔다. 업감연기(業感緣起)․뢰야연기(賴耶緣起)․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리고 법계연기(法界緣起) 등이 그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법계 전체가 비로자나법신의 현현인 것이니, 여래성연기의 여래출현이기에 법계연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강 화엄경의 편찬과 유통

 

1. 인도․서역의 화엄경 편찬

 

《화엄경》은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의 준말이다.《화엄경》의 원 범명은 알 수 없으니 원본인 범본이 Dasabhumika(다사부미카)라고 불리는〈십지품〉과 Gandavyuha(간다뷰하)라고 불리는〈입법계품〉외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의 제목에 대해서는 현재 크게 세 가지로 재번역되고 있다. 즉 Maha-Vaipulya-Buddha-Ga a-Vy ha S tra(마하 바이풀리야 붓다 간다 뷰하 수트라, 대방광불화엄경), Buddh vata saka(붓다바탐사카, 불화엄경), Avata saka S tra(아바탐사카 수트라, 화엄경) 등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의 한역본으로는 60권․80권․40권으로 된《육십화엄》․《팔십화엄》․《사십화엄》등 3부《화엄경》이 있다. 이중《사십화엄》은〈입법계품〉만의 별역이다. 이중《육십화엄》과《팔십화엄》을 화엄대경(大經)이라고 부른다.《육십화엄》은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에 의해 418~420년에 번역되었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또는 화엄대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팔십화엄》은 대주(大周, 695~699)시대 실차난타에 의해 역출되었으니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사십화엄》은 당(唐, 795~798)의 반야다라가 역출하였으며 정원본《화엄경》으로 불리고도 있다.

 

그러나《육십화엄》이나《팔십화엄》은 처음부터 대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각품이 별행경(別行經 또는 支分經)으로 먼저 성립되어 있었으며, 그 지분경을 모아 어떤 의도하에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이 웅대한 화엄대경인 것이다. 화엄부 경전으로는 《화엄경전기》에 《도사경》 1권(지루가참 역, 178~189)․《보살본업경》(지겸 역, 222~228)․《여래흥현경》4권(축법호 역, 291) 등을 위시하여 36부 150권의 지분경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경은 그 역출 시기(2세기~10세기)로 보아, 용수(N g rjuna, 150~250) 이전까지〈십지품〉․〈입법계품〉등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수보살이《십지경》에 대한 주석을 한 데서도 당시에《십지경》이 크게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품으로 구성된, 현《화엄경》과 같은 대경의 조직은 대략 250년에서 350년대의 편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입법계품〉등의 성립은 남방인도에서라고 생각되나 대경인《화엄경》의 편성은 우전(于 )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방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대승불설비불설 논쟁이 한동안 크게 일어나 있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내용이 입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문자화된 아함부 경전과는 다르니, 대승경전은 모두 불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비불설에 대해 대승불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니 대승경전이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글자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새로운 문자로 다시 편찬한 경전이기에 불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화엄부 경전 자체 내에서도 경의 설처(說處)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도량이며, 설한 시기도 성도 직후로 되어 있다.《팔십화엄》에는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 하고,《육십화엄》에도 시성정각이며 세친(世親)이 지은《십지경론》의 저본이 된《십지경》에는 제이칠일(第二七日)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천태교판에서도 이를 최초 삼칠일이라고 하였다. 즉, 아함경을 12년간, 방등경을 8년, 반야경을 21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8년간 설하시고,《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최초 삼칠일, 즉 21일 동안 말씀하신 경이라는 것이다〔阿含十二方等八 二十一載談般若 終說法華又八年 華嚴最初三七日〕.

 

그러나 이것은《화엄경》의 역사적 성립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화엄경》의 사상적 특징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화엄경》은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낸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2. 화엄경의 유통과 주석 ― 인도․서역

 

《화엄경》의 유통과정을 보면 법장의〈화엄경전기〉에는 서역에서 전해졌다〔西域相傳〕고 하였고,〈용수전〉에는 용수보살이 바다에 들어가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용궁장래설이 있다. 즉 용수보살이 용궁에 들어가 보니 3본《화엄경》이 있는데, 상본과 중본《화엄경》은 그 양이 방대하여 외우기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그 상본《화엄경》은 십삼천대천세계 미진수게송과 일사천하 미진수품이 있었다고 한다(이 내용은 우리가 아침에 예불하기 전에 치는 쇠송 염불문에도 들어 있다). 용수보살은 하본《화엄경》십만게 사십팔품을 외워서 세상에 유통시켰으며 지금 전해지는 한역된 삼대부는 그 중 약본《화엄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은 용수 이전부터 있었던《화엄경》을 용수가 비로소 크게 유통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용궁이란 용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에게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하고 남해지방에서 가져온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용수보살은《화엄경》을 주석하여《대부사의론》100권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는〈입법계품〉에 해당하는《불가사의해탈경》에 대한 주석이다. 용수보살은《십지경》에도 주석을 하였으나 남아 있지 않고〈십지품〉의 일부인 초지와 제이지가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출의《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으로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용수보살의 화엄보살도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용수의 화엄사상은 이외에도 그가 지은《대지도론(大智道論)》을 비롯해《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등에서 발견된다.

 

4세기(320~400) 혹은 5세기(400~480)경에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세친(Vasubandhu)보살은《십지경론》을 지어《십지경》을 크게 유통시켰다. 이《십지론》은 중국에 전래되어 화엄종의 선구인 지론종의 소의가 되었으며, 여기서 보이는 육상설은 화엄 육상원융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용수와 세친은《대승기신론》의 저자로 알려진 마명(A vaghosa, 50~150)과 함께 화엄조사로 숭앙받게 되었다.

마명보살은 용수보살보다 100년경 앞선 50~150년경에 사셨던 분으로 여겨지는데, 이때의 마명보살이《대승기신론》을 지었다고 볼 수 없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원효의《대승기신론소》《별기》에만 해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특징짓기를, 인도 대승불교사상의 양대 조류라 할 수 있는 중관과 유식의 양 사상을 회통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중관이 파하기만 하고 세울 줄 모르며, 유식이 세울 줄만 알고 파할 줄 모르는 데 비해,《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세우고 파함이 무애하고〔立破無碍〕 열고 닫음이 자재하다〔開合自在〕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중관이나 유식사상보다 먼저 성립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기에 세친과 용수보살보다 앞서 살았던 마명보살이 여래장사상이 담긴《대승기신론》을 지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마명보살이《대승기신론》의 저자였기에 후에 화엄종조로 받들어 모셨던 일은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위와 같이《화엄경》은 역사적으로 4세기경에 현재의 대경으로 편성되었으나 각 품들의 최초 성립은 용수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초기 대승경전에 속하며, 대승적 깨달음의 세계를 개현한 경전 가운데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경에 속하는 것이다. 또, 용수보살의 저서로 되어 있는 것 중에〈화엄경약찬게〉가 있다.〈화엄경약찬게〉는 갖추어서는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이며 줄여서 단지 '약찬게'라고만 부르고도 있다.〈약찬게〉는《팔십화엄》의 조직과 구성을 간략히 엮어 놓은 게송으로서 현 한국불교교단에서 널리 독송되는 대표적인 염불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팔십화엄》의 유통은 이〈화엄경약찬게〉의 수지독송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약찬게〉의 저자가 용수보살로 되어 있으나 이는 몇 가지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많다.

 

첫째로〈약찬게〉의 소의경전인《팔십화엄》의 유통과 용수보살과는 연대에 차이가 있다.〈약찬게〉가《팔십화엄》을 소의로 한 것은 '삼십구품원만교(三十九品圓滿敎)'라든지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 등〈약찬게〉내용을 보면 명확하다.《팔십화엄》은 39품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9회에 배대한 것이 육육 등(六六 云云) 품이기 때문이다.

 

용수보살은 2, 3세기에 활약하였고 화엄대경은《육십화엄》까지도 용수보살보다 후에 3, 4세기경의 편성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팔십화엄》은 용수보살 시대보다 뒤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팔십화엄》의 구성을 간략히 엮은〈약찬게〉가 2, 3세기에 활약하였던 용수보살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둘째로〈약찬게〉의 저자가 용수보살이라면 번역한 이가 있어야 하는데 역자를 알 수 없다. 셋째로〈약찬게〉가 한국에서만 그 문헌이 유통됨을 볼 수 있으며 그것도 가장 오래된 판본이 용성천오(龍星天旿)가 광서(光緖) 11년(1885)에 편찬한《화엄법화약찬총지(華嚴法華略纂摠持)》이다. 그 가운데〈약찬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상으로 볼 때〈약찬게〉는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것이 용수보살에게 가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3강 화엄경의 구성 조직

 

1. 경의 구성과 회처의 상징

 

《화엄경》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화엄경》의 구성 조직을《팔십화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팔십화엄》의 구성 조직을 도시하면 다음〈표 1〉과 같다.〈표 1〉《팔십화엄》(7처 9회 39품의 설주와 교설내용)

 

여기서 처(處)란 이 경을 설한 장소를, 그리고 회(會)란 경을 설한 모임을 말한다. 경의 설처는 지상에 세 곳이고 천상에 네 곳이며, 보광법당에서는 세 번 설해지고 있으므로 7처 9회이다. 현재 사찰에서 즐겨 독송하는〈화엄경약찬게〉에도《팔십화엄》의 구조가 약술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이라 함은 바로 39품을 9회에 배대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팔십화엄》은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 모임에 의해 39품이 설해지고 80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초회 6품의 설주는 보현보살로서 삼매에 입정하고 출정한 후에 부처님 세계〔佛自內證境〕를 설하고 있다. 제2회는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신(信)을 설하고 있다. 제3회는 법혜보살이 십주법문을, 제4회는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제5회는 금강당보살이 십회향을, 그리고 제6회는 금강장보살이 십지법문을 설하고 있다. 이 4회는 모두 천상에서 설하고 있으므로 천궁 4회라고도 불리니, 삼현․십성(三賢十聖)의 끝없는 향상도를 보인 것으로 십지 보살행이 그 대표가 된다.

 

다음 제7회는 다시 보광명전에서 등각과 묘각의 계위에 해당하는 정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으니,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보살도의 종극은 또한 정각과 일치함을 거듭 지상의 보광명전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8회 역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으니, 보살도를 총괄하고 있다.

 

끝으로 마지막 제9회는 전편 8회와 대비하여《화엄경》후편으로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9회의〈입법계품〉은 그 내용상 전편에서 보인 불자내증경과 보살도 및 구경지를 선재가 출현하여 재현시키고 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역참하여 보현행에 머물게 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설주와 설처 그리고 교설내용 등에 의하여《화엄경》전체의 내용을 보면, 보현보살이 설주가 되어 보리수 아래와 보광명전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보현경전계,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중생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문수경전계, 천궁 4회에서 향상되는 보살도를 설하는 십지경전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십주․십행․십회향의 삼현은 십지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화엄경》은 여래의 과해(果海)를 보현보살을 통해서 보인 보현경전계와 중생을 발심케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경전계 및 보살도의 전개를 보인 천궁 4회의 십지경전계로 분류되고도 있다.

 

그런데 중생에게 신을 설하는 단계인 문수보살의 설법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하는 장소인 보광명전에서 설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부처 종자이기에 부처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으니 인과교철(因果交徹)의 화엄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주초발심(住初發心)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중생이 신심을 원만 성취할 때 발심하여 보살이 되는데 그 발심을 하는 자리가 십주초인 초발심주이다. 이 초발심주에서 처음 발심하여 보살이 되는 때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후에 펼쳐지는 보살행은 정각후의 이타행이니 인과불이(因果不二)의 불국토장엄행이다.

 

나아가 경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체성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중생은 누구나 자심이 곧 불지임을 깊이 믿는 것을 정신(淨信)이라 하니 이는《화엄경》에 보이는 특이한 신심의 양상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와 다르지 아니함을 믿고 본래의 모습대로 살고자 발심하여 보살이 되면 곧 중생의 본래모습인 부처로서 살게 되는 것이다. 경에 다양하게 펼쳐지는 보살행은《화엄경》의 말씀이 중생들, 바로 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고 하겠다.

 

법장과 의상이 소의로 한《육십화엄》에서는,《팔십화엄》과 대동소이하나〈보왕여래성기품〉에 초점을 맞추어 여래출현의 성기(性起)를 중시한 점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경이 설해진 회처를 보면,《팔십화엄》처럼 지상-천상-지상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석존 성도의 장소인 적멸도량․보광법당에서 출발하여 점차 6욕천 중 도리천․야마천․도솔천․타화자재천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지상인 보광법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최고의 설처인 타화자재천궁에서 맨 마지막으로 설해진 것이〈성기품〉이라는 것이다.

 

설주인 보살의 상징에 의해서도 불과를 드러낸〈성기품〉이 두드러진다. 경은 전체적으로 보현보살〔佛自內證境〕 → 문수보살〔信〕 → 제보살〔住․行․向․地〕 → 보현보살〔佛果行인 菩薩道〕을 통하여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은 전후 네 번에 걸쳐 설주로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보현보살행품〉과〈성기품〉에서 설주인 것은 한층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양품이 속해 있는 타화자재천궁회의 타품들은 금강장보살이 설한 십지경전계인 까닭이다. 십지의 구극인 불과는 보현보살을 통하여 설해짐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보현보살은 불자내증경․불과․불과행용 등 통틀어 불경계를 드러내는 보현경전의 설주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여래출현(여래성기)의 사상을 가지고 문수경전과 보현경전을 결합하고 그 사이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운 것이《화엄경》구성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문수와 보현에 의해서 비로자나로서의 여래의 현현임을 보인 것은 명백한데, 거기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운 것은 이 양자를 시종으로 하는 보살도의 체계도 여래출현의 입장에서 조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곧《화엄경》에서의〈성기품〉의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60권《화엄경》이 이러한 의도로 편찬된 것을 잘 파악하여 구축한 것이 의상계 화엄가의 화엄성기사상이라 하겠다.

 

2. 화엄경 약찬게

 

이러한《팔십화엄》의 구성 조직은〈약찬게〉에도 담겨 있다. 약찬게문은 마지막 제목을 제하면 110구 770자이다.《팔십화엄》을 간략히 엮고 있는 이〈약찬게〉의 체제와 내용을 보자.

 

귀경송이다. 이는 화장세계의 비로자나 진법신과 보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등 일체 여래와 시방삼세의 모든 대성에게 귀의한다는 것이다. 이 귀경게에서는 화엄정토가 화장세계인 것과 화엄의 주불이 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비로자나불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과 다른 분이 아님도 시사하고 있다.

 

화엄교학에서는 삼불이 원융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경주(經主)로 모시니,〈약찬게〉에도 그러한 화엄교학에서의 불신관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설경인연력(說經因緣力)이다. 여기서는 해인삼매력에 의하여 전법륜됨을 말하고 있다. 운집대중이다. 보현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살대중과 39류의 화엄성중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이 곧 세주라 불리는 분들이니 그 대표되는 세주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다. 각 회의 설주보살 또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입법계품〉의 근본법회에 모인 대중과 지말법회의 문수보살 설법처인 복성 동방 사라림에 모인 대중들도 보이며, 선재동자의 선지식들도 운집대중으로 언급되어 있다.

 

선재의 선지식이다. 문수보살에서 비롯되어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이 출현한다. 경의 설처와 품명이다. 유통송이다. 이 경을 믿고 수지하면 초발심시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화장세계에 안좌하니, 그 이름이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약찬게〉의 독송은 중생이 보살행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인 부처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각을 이룬다고 하는 수행의 길이 된다.〈약찬게〉의 지송은 특히 화엄성중의 보호를 갈구하는 대중신앙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약찬게〉는 한국식 화엄지송경이자 다라니의 역할을 해온 것이라 하겠다.

 

제4강 화엄경의 내용 -초회 6품

 

초회 6품에서는 특히 다음 사항을 주목하게 한다.

6성취와 그 가운데 청법대중의 특징은 무엇인가?

《화엄경》의 교설인연, 달리 말해서 화엄교설의 내용이 무엇인가?

설주는 교설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삼매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연화장세계, 즉 화엄정토는 어떠한 세계이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화엄교주인 비로자나불은 어떻게 해서 비로자나불이 되셨는가?

 

1. 세주묘엄품

 

먼저 초회 6품 중 첫품인〈세주묘엄품〉은 처음 법보리장회의 서품이면서《화엄경》전체의 서분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법보리 도량에서 정각을 이루시자 신통력으로 도량에는 모든 장엄이 조화되어 빛났다. 보현보살을 위시한 보살대중과 집금강신을 비롯한 39류 화엄성중 등 총 40중이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 회상에 모여왔으며, 그들을 세주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각기 성취한 해탈문의 경계에서 본 부처님 세계를 게송으로 찬탄하여 불세계를 장엄하였으므로 첫품을〈세주묘엄품〉이라 하였다.

 

2. 여래현상품

 

세주들이 마음 속으로 40가지 질문을 일으키니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셔서 답해 주고 계신다. 이를 여래현상이라고 한다. 그 질문 내용을 보면, 제불지(諸佛地) 제불경계 제불가지(加持) 제불소행(所行) 제불력 제불무소외 제불삼매 제불신통 제불자재 제불무능섭취(諸佛無能攝取) 제불안(眼) 제불이(耳) 제불비(鼻) 제불설(舌) 제불신(身) 제불의(意) 제불신광(身光) 제불광명 제불성(聲) 제불지(智) 세계해 중생해 법계안립해 불해(佛海) 불바라밀해 불해탈해 불변화해 불연설해 불명호해 불수량해(이상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며, 다음은 보살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일체보살서원해 일체보살발취해 일체보살조도해 일체보살승해(乘海) 일체보살행해 일체보살출리해 일체보살신통해 일체보살바라밀해 일체보살지해(地海) 일체보살지해(智海)이다.

 

그러자 세존께서 그들의 생각한 바를 아시고, 입과 치아 그리고 미간백호로 광명을 놓으셨다. 광명을 입고 보살대중들이 모여오고 백호상에서 출현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공덕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여래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게송 중에서 부처님께서 법계에 충만하시어 佛身充滿於法界 널리 모든 중생들 앞에 나타나시니 普現一切衆生前 연을 따라 나아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되 隨緣赴感靡不周 항상 이 보리좌에 앉아 계시도다. 而恒處此菩提座라는 게송은 법당 앞 주련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래현상의 경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화엄경》의 교설은 전체적으로 이상의 40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다. 따라서《화엄경》의 교설은 불․보살 경계임을 대방광불화엄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3. 보현삼매품

 

《화엄경》에서는 각 회의 설주들은 제2회를 제외하고는 다 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서 설법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삼매에 들어간 것은 일체 부처님의 위신력과 비로자나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과 보살 각자의 선근력(善根力) 등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처음 보현보살의 경우도, 선재선재라, 선남자여, 그대가 이 일체 제불 비로자나여래장신 보살삼매에 능히 들었도다. 불자여, 이것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그대에게 가피하심이며, 비로자나여래의 본원력인 까닭이며, 역시 그대가 닦은 모든 부처님의 행원력인 까닭이니라. 라고 하여, 보현보살이 행원을 닦았기에 부처님의 가피와 서원에 힘입어서 삼매에 들 수 있었음을 설하고 있다. 보현보살은 삼매 속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온갖 지혜를 얻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모인 대중들 역시 보현보살과 함께 삼매에 들어서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보현보살을 비롯한 각 보살들은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써 도량과 모인 대중들을 관찰하고 부처님 법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온갖 법문을 내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며 또 모든 여래의 위신력을 받들어 구족히 말하리라. 보살들이 보살과 중생들을 위해 설법함이 다 부처님의 위신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주변의 모든 장엄도 부처님의 신통이다. 부처님과 보살의 신통은 또 비로자나부처님이 모두 나타내신 것이며, 그 한없는 신통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경에서는 보살이 원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행도, 그리고 그 보살행에 의하여 중생이 교화받음도 다 부처님의 힘임을 보이고 있다.

 

보살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시방세계 중생을 위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보살이 된 것도 부처님의 힘이다. 보살이 원을 세워 지혜와 자비를 충만케하여 중생을 위하여 보살행을 한 것도 곧 비로자나부처님이 본래 세우신 서원의 힘이며 일체 부처님께서 가피해 주시는 위신력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보현보살이 일체 부처님의 가피력과 비로자나여래의 본원력과 보현보살 자신의 행원력으로 일체 제불 비로자나여래장신 삼매에 입정하여 지혜를 얻고 출정한다. 이 보현보살의 입․출정 내용에서 우리는《화엄경》에서 보이는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닌 세계를 만날 수 있다.《화엄경》은 보살의 수행과 중생의 신앙 즉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고, 보살의 수행 역시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님을 보이고 있다.

 

4. 세계성취품

 

이 품은 보현보살이 세계해의 10사(十事)를 10종으로 설한 것이다.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세계해가 이루어진 인연을 위시하여 세계해의 의지하여 머무름․형상․체성․장엄․청정방편․부처님 출현․겁의 머무름․겁의 변천․차별없는 일 등, 세계해의 십사를 다시 10종으로 설하였다. 예를 들면 세계해가 이루어진 인연도 10종이 있다고 하니, 여래의 위신력과 중생의 업행과 보살의 원행 등으로 세계가 성취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5. 화장세계품

 

보현보살이 다시 화장세계의 장엄을 말하였다. 이 화장장엄세계해는 비로자나부처님께서 지난 세계해의 미진수겁 동안 보살행을 닦을 때에 낱낱 겁마다 부처님을 친근하고 큰 서원을 닦아서 깨끗하게 장엄한 것이다. 화장장엄세계해는 풍륜이 받치고 있는 향수해의 큰 연꽃 가운데에 있다. 장엄세계의 온갖 경계는 낱낱이 세계해 티끌수의 청정한 공덕으로 장엄한 까닭이다.

 

6. 비로자나품

 

보현보살이 비로자나불의 과거생 인연을 설하고 있다. 지난 옛적 승음세계에 일체공덕산수미승운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큰 광명을 놓아 중생을 조복하시니, 그 도성의 대위광태자가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예전에 닦은 선근의 힘으로 즉시 10종 법문을 증득하였다. 즉 일체 제불의 공덕륜삼매, 일체 불법의 보문다라니, 반야바라밀, 대자, 대비, 대희, 대사, 대신통(방편), 대원, 변재문 등이다. 그후 대위광태자는 여러 부처님을 친견 공양하며 법문을 듣고 장차 부처되리라는 수기를 받고 비로자나여래가 되었다고 한다.이상을 요약해서 다시 부연해 보면,

 

첫째,〈세주묘엄품〉에서의 청법대중은 보현보살을 위시한 보살대중과 화엄성중들로서 이들은 세주라고 불리고 있다.《화엄경》에서는 회처를 달리할 때마다 수많은 청법대중이 다시 모여온다.

둘째,〈여래현상품〉에서는《화엄경》이 교설되는 인연이 설해지고 있다. 세주들이 가만히 40가지 질문을 드리고 있으니,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불세계와 보살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여 여래께서 광명으로 출현하시니 이것이 여래현상이며, 이에 대한 언설을 통한 보살들의 재설명이 화엄교설의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셋째, 초회 설주인 보살의 설법 능력은 삼매를 통해서 얻어지고 있으며 이 삼매는 자타불이력(自他不二力)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제불의 위신력과 비로자나불의 본원력 그리고 보현보살 자신의 행원력에 의해서이다.

넷째, 이 세계가 성취된 인연을 비롯한 세계해의 갖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온갖 인연 중 부처님의 신통과 보살의 원행과 중생의 업행에 의해 일체 세계가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다섯째, 화엄정토인 연화장세계를 보이고 있다.

여섯째, 화엄교주인 비로자나불의 본생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제5강 화엄경의 내용 -제2회 6품

 

제2회 6품에서는 신(信)에 대해서 교설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특수한 지혜에 의해서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성취케 해주는 법회인 것이다. 이 말씀을 만남에 있어서도 다음 몇 가지를 염두에 두게 한다.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대상,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의심을 떨쳐 버려야 믿음이 생기는가?

어떤 의심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음을 성취할 수 있는가?

믿는 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즉, 신(信)의 공용(功用)이 무엇인가?

 

7. 여래명호품

 

첫째, 무엇을 믿는가? 부처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한량없음을 믿게 하고 있다. 먼저 제2회의 첫품이고 전체로서는 제7품인〈여래명호품〉에서는 부처님의 신업 경계가 한량없음을 보이고 있다. 세존께서 보광명전에서 신통을 나투시니 시방세계의 부처님 세계에 있는 보살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다. 동방 부동지불의 금색세계에 있는 문수사리보살을 비롯한 각수(覺首)․재수(財首)․보수(寶首)․덕수(德首)․목수(目首)․근수(勤首)․법수(法首)․지수(智首)․현수(賢首) 등 9수(九首)보살들이 시방세계 티끌수만큼 많은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데 나아왔다.

 

그때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말씀하였다. 부처님의 국토, 부처님의 출현 등이 헤아릴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중생의 좋아함과 욕망이 같지 아니함을 아시고 알맞게 법을 설하여 조복하시기 때문이다. 여래는 사바세계에서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알고 보게 하시므로 여래의 명호도 헤아릴 수 없음을 자세히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이 한량없어서 부처님의 명호도 한량없는 것이다.

 

8. 사성제품

 

〈사성제품〉에서는 문수보살이 사바세계를 비롯하여 시방세계에서의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10가지씩 갖가지로 달리 설하니 모두 중생들의 마음에 좋아함을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조복하게 함인 것이다. 부처님의 구업(口業)세계가 한량없음을 뜻한다. 예를 들면 사바세계에서는 죄가 고성제(苦聖諦)이고 핍박․변해 달라짐〔變異〕․반연․모임〔聚〕․가시〔刺〕․뿌리를 의지함〔依根〕․허망하게 속임〔虛?〕․종기자리〔癰瘡處〕․어리석은 행〔愚夫行〕이 고성제이다.  고의 집성제〔苦集聖諦〕는 계박(繫縛)․멸괴(滅壞)․애착〔愛着義〕․망령된 생각〔妄覺念〕․취입(趣入)․결정(決定)․그물〔網〕․희론(戱論)․따라다님〔隨行〕․전도근(顚倒根)이다.

고의 멸성제〔苦滅聖諦〕는 무쟁(無諍)․티끌을 여읨〔離塵〕․적정(寂靜)․무상(無相)․무몰(無沒)․무자성(無自性)․무장애(無障碍)․멸(滅)․체진실(體眞實)․자성에 머무름〔住自性)이다.

 

고의 멸에 이르는 도성제〔苦滅道聖諦〕는 일승․취적(趣寂)․이끌어 인도함〔導引〕․구경무분별․평등․짐을 벗음〔捨擔〕․나아갈 데 없음〔無所趣〕․성인의 뜻을 따름〔隨聖〕․선인행(仙人行)․십장(十藏) 등으로 교설되고 있다.

 

9. 광명각품

〈광명각품〉에서는 세존께서 두 발바닥으로 광명을 내어 시방 일체 세계를 비추시니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이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문수보살과 9수(九首)보살 등 시방세계 보살들이 나타나 게송으로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의업(意業)세계가 한량없음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초회에서는 부처님께서 미간백호로 광명을 놓으셨으니 이는 깨달음의 세계를 보이기 때문이고, 여기서 발바닥으로 광명을 내시는 것은 신심이 불과에 오르는 바탕이 되기 때문으로 본다.

 

10. 보살문명품

 

〈보살문명품〉에서는 신심을 성취케 하기 위해 문수보살과 9수보살들이 문답을 통해 의심을 파하여 제하고 있다.

이 보살들의 10가지 문답은 십심심(十甚深)이라고 불리고 있다. 즉, 각수보살은 연기심심을 보이고, 재수보살은 교화심심을, 보수보살은 업과심심을 보이는 것이니, 이를 통해서 중생의 현실을 잘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 또 덕수보살은 설법심심, 목수보살은 복전심심, 진수보살은 정교(正敎)심심으로 불교화의 모양을 보이고 있다.

 

법수보살은 정행심심, 지수보살은 조도심심에 의해 교화에 의한 수행을 보이며, 현수보살은 일승심심, 문수보살은 불경계심심으로 구경불과의 불가사의함을 바로 알도록 설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청정한 신심〔淨信〕을 개발토록 하였다. 이러한 보살들의 문답을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먼저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물었다. 마음의 성품〔心性〕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갖가지 차별을 보는가? 각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법의 성품 본래 남이 없지만 法性本無生

시현하여 남이 있으니 示現而有生

이 가운데 능히 나타냄도 없고 是中無能現

또한 나타난 물건도 없도다. 亦無所現物

부처님의 교법은 하나인데 중생들이 보고 어찌하여 즉시에 온갖 번뇌의 속박을 끊지 못하는가?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구함에 如鑽燧求火

불붙기 전에 자주 쉰다면 未出而數息

불기운도 따라서 없어지나니 火勢隨止滅

게으른 자 역시 그러하도다. 懈怠者亦然

 

〈근수보살〉

부처님 말씀처럼 만약 중생이 정법을 받아 지니면 일체 번뇌를 끊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정법을 받아 지니되 끊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어떤 사람이 남의 보물을 세어도 如人數他寶

스스로는 반전도 없는 것같이 自無半錢分

법을 닦아 행하지 아니하면 於法不修行

많이 들은 것만도 그러하도다. 多聞亦如是

 

〈법수보살〉

불법 가운데는 지혜가 제일인데 여래께서는 무슨 까닭에 중생을 위하여 보시를 찬탄하고 혹은 내지 지혜를 찬탄하며 자비희사를 찬탄하시는가?

인색하면 보시를 찬탄하고 ?者爲讚施

금지함을 깨뜨리면 계를 찬탄하고 毁禁者讚戒

성 잘내면 인욕을 칭찬하고 多瞋爲讚忍

나태하면 정진을 찬탄하시도다. 好懈讚精進

 

〈지수보살〉

부처님께서는 오직 한길로써 벗어나 여읨〔出離〕을 얻으셨는데 지금보니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 국토에 있는 온갖 일이 여러 가지로 같지 아니한가?

문수여, 법이 항상 그러하여 文殊法常爾

법왕은 오직 한 법뿐이니 法王唯一法

일체 걸림없는 사람은 一切無 人

한길로 생사에서 벗어나니라. 一道出生死

 

〈현수보살〉

이 게송은 원효대사가 대중 속으로 회향하러 들어가면서 읊었다는 유명한 게송이다.

끝으로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말씀하였다. 우리들이 아는 것을 말하였으니, 묘한 변재로 여래께서 소유하신 경계를 말씀해 주소서.

여래의 깊은 경계는 如來深境界

그 양이 허공과 같아서 其量等虛空

일체 중생들이 들어가되 一切衆生入

실로 들어간 바가 없도다. 而實無所入

〈문수보살〉

 

11. 정행품

 

보살이 어떻게 하면 신(身)․구(口)․의(意) 3업이 수승하게 할 수 있는지 지수보살이 문수보살에게 질문하였다. 이에 문수보살이 답하고 있다. 보살이 마음을 잘 쓰면〔善用其心〕 온갖 승묘한 공덕을 얻어 부처님도에 머물며 제2도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140원(願)을 일으키도록 권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원만 소개해 본다.

 

보살이 집에 있을 때에는 菩薩在家

마땅히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집 성질이 공함을 알아 知家性空

그 핍박을 면하여지이다. 免其逼迫

보시를 할 때에는 若有所施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一切能捨

마음에 애착이 없어지이다. 心無愛着

머리털과 수염을 깎을 때에는 체除鬚髮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번뇌를 아주 버리고 永離煩惱

마침내 적멸하여지이다. 究竟寂滅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할 때는 自歸於佛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불종자를 잇도록 紹隆佛種

위없는 뜻을 낼 지어다. 發無上意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할 때는 自歸於法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경장에 깊이 들어가 深入經藏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여지이다. 智慧如海

스스로 스님들께 귀의할 때는 自歸於僧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대중을 통솔하고 다스리되 統理大衆

모든 것에 장애가 없어지이다. 一切無

잠에서 처음 깰 때는 睡眠始寤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온갖 지혜 깨닫고서 一切智覺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지이다. 周顧十方

불자들이 이같이 마음을 쓰면 온갖 뛰어나고 묘한 공덕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12. 현수품

 

문수보살이 청정행의 대공덕을 말하고 나서 다시 보리심의 공덕을 보이려고 현수보살에게 수행공덕을 말하게 하였다. 이에 현수보살이 신심의 공덕과 공능을 게송으로 설하고 있다.

 

신심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 信爲道元功德母

모든 선한 법을 길러내며 長養一切諸善法

의심의 그물 끊고 애정 벗어나 斷除疑網出愛流

열반의 위없는 도 열어 보이도다. 開示涅槃無上道

믿음은 썩지 않는 공덕의 종자 信爲功德不壞種

믿음은 보리수를 생장케 하며 信能生長菩提樹

믿음은 수승한 지혜 증장케 하고 信能增益最勝智

믿음은 온갖 부처 시현하도다. 信能示現一切佛

 

이상의 내용을 부연해 보면,

첫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부처님의 신업과 구업과 의업의 경계가 한량없음이다. 이에 대해서〈여래명호품〉과〈사성제품〉그리고〈광명각품〉에서 설하고 있다.

둘째,〈보살문명품〉에서 믿음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의심을 밝히고 있다.

셋째, 믿음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을 잘 쓰도록 하며, 140원을 세우도록 한다. 이 원으로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잘 다스려 나가면 제2도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넷째, 믿음의 공용이 다양하게 교설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화엄경》에서 모든 보살도를 튼튼히 받쳐주는 기초가 된다. 이 신심이 만족하면 그때가 바로 부처되는 때이므로 이를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한다.

 

제6강 화엄경의 내용 -해인삼매

 

〈현수품〉에는 신심이 원만 성취되면 얻어지는 신심의 공능으로서 삼매가 설해져 있다.《화엄경》의 총정인 해인삼매도 교설되어 있다.이 해인삼매는 어떠한 삼매이며, 어떻게 모든 삼매 중 으뜸인 것으로 부각되어 갔는가. 그리고 해인삼매를 얻게 되면 어떤 덕용(德用)이 있으며, 그 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연은 무엇인가.

 

〈현수품〉에는 신심이 원만 성취되면 얻어지는 신심의 공능으로서 10종 삼매〔圓明海印三昧門․華嚴妙行三昧門․因陀羅網三昧門․手出廣供三昧門․現諸法門三昧門․四攝攝生三昧門․窮同世間三昧門․毛光覺照三昧門․主伴嚴麗三昧門․寂用無涯三昧門〕가 보이며, 그 첫째로《화엄경》의 총정(總定)인 해인삼매에 대하여 교설되고 있다.

 

석존의 깨달음은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명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그 가운데 삼매는 대승경전의 말씀이 교설되는 주요 방편문으로 부각되었다. 원시경전에서도 4선 8정(四禪八定)이나 삼삼매 등 중시되지 않은 바 아니나 대승경전에서는 무량한 삼매가 수없이 나타난다. 특히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교설이 삼매에 들고 나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해인삼매는《화엄경》의 총정(總定)으로까지 주시되고 있다. 입․출정 후에 설해지는 다른 경전과는 달리《화엄경》은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것으로 주지되고 있다.

 

삼매는 sam dhi(사마디)를 음사한 것으로 삼마지(三摩地)로 음역되고도 있다. 그러나 그외에도 삼마제․삼마발제․사마타․삼마혜다․타연나․디야나․선나 등으로 음사되고 있다. 의역으로서는 흔히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상태로서 정(定)이라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사(正思)․등지(等持)․지(止)․등인(等引)․정려(精慮)․사유수(思惟修)․정정(正定) 등으로 번역되는 많은 용어가 정(定)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그 자체가 지혜까지도 포용된 의미를 지니기도 하면서, 삼학(三學)의 하나로 매우 중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체 모든 삼매의 근본이며 그 삼매를 다 포섭한다는 해인삼매는 경에서 해인삼마지(海印三摩地)․해인정(海印定)․대해인삼매(大海印三昧)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이는 S garamudr Sam dhi(사가라무드라 사마디) 또는 S gara Sam ddhi(사가라 삼릿디)의 음사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러면 경전에 나타난 해인삼매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해인삼매의 용례

 

해인삼매는《화엄경》이외의 다른 경전에도 물론 보인다. 예를 들면《대집경》,《대보적경》등 많은 경전에 설해져 있으며 화엄가들도 이 경전들을 인용하여 해인삼매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해인삼매는《화엄경》의 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삼매로 간주되고 있다. 해인삼매는〈현수품〉․〈십지품〉․〈여래출현품〉․〈입법계품〉등에서 교설되고 있다.

 

2. 해인삼매의 의미

 

해인삼매는 대해(大海)에 비유하여 붙여진 삼매의 이름이다. 그러면 해인삼매를 큰 바다에 비유하여 명명한 그 구체적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바다에 모든 영상이 다 나타나는 것처럼 일체 색상이 보리심해 중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므로 해인삼매라 한다.

섬부주의 모든 유정 등 색류가 다 바다 가운데 영상을 나투므로 이름이 대해인 것과 같이, 이 같은 유정의 일체 심색(心色)과 음성 등 모든 영상이 다 보리심해 중에 나타나므로 해인삼마지라 한다

둘째, 모든 물〔水〕의 흐름이 다 대해에 들어가는 것처럼, 한량없는 일체 제법이 다 해인삼매 중에 들어가므로 해인이라 한다.

대해수가 무량하여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체 제법도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또 일체 중류(一切衆類)가 대해 가운데 다 들어가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일체 법을 인함이 모두 제법해인에 들어가며 이 해인 중에서 일체 법을 보게 된다.

셋째, 대해에 모든 용왕․신중이 머물며 진귀한 보배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이, 이 삼매도 일체 법 및 법선교(法善巧)가 갈무리된 곳이므로 해인삼매라 한다.

 

이러한 해인삼매는 의상뿐 아니라 법장, 징관을 위시하여 화엄가들이 매우 중시하였으니 해인삼매를《화엄경》의 총정으로까지 부각시키고 있다.《화엄경》전체가 바로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화엄경》이 의지하고 있는 해인삼매는 십불(十佛)의 해인이고 석가불해인이며 정각해인이고 제불여래응공등정각보리며 무상보리해(無上菩提海)이다. 그래서 해인은 진여본각이며 일체지․대지(大智)․증분내증(證分內證)․여래성기심(如來性起心)이다. 응화하되 나투는 바가 없어 보리의 무심돈현(無心頓現)이 해인삼매인 것이다.해인삼매가 모든 삼매를 섭수하는 것처럼《화엄경》의 해인삼매 또한 제경의 해인삼매를 섭수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3. 해인삼매의 대용(大用)

 

해인삼매를 체(體)로 하여 일어나는 해인삼매의 상(相)․용(用)은, 해인삼매를 왜 해인삼매라 하는지를 가리키는 해인삼매의 의미와 별개인 것은 아니다. 해인삼매는 여래지(如來智)로 일체 색상을 인현(印現)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여래지를 의지하여 만상을 몰록 나투는 업용이 있다. 그러한 작용이 있어서 그 같은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해인삼매의 수승한 묘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한다. 화엄부의 제 문헌에서는 해인삼매의 대용(大用)이라는 용어 대신에 업용(業用)․덕용(德用)․승용(勝用) 등의 말도 자주 보인다.《화엄경》에서는 보살행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불보리의 경지에서 불행(佛行)으로 나투어지고 있다. 〈현수품〉에서는 현수보살이 10종삼매의 업용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있는데, 처음에 해인삼매의 대용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있다. 해인삼매의 대용을 크게 다섯으로 구분해 보기로 한다.

 

부처로 시현하고 법장을 설한다.《화엄경》의 해인삼매는 불보리정각(佛菩提正覺)해인이다. 어디든 부처 없는 국토에 시현하여 정각을 이루고, 법을 알지 못하는 국토에서는 묘법장을 설한다. 일념경에 시방에 두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달빛 그림자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같이 무량방편으로 군생을 교화한다. 분별도 없고 무념인지라 한 찰나에 시방세계에 두루 다녀 무공용(無功用)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

 

일체시 일체처에서 8상을 나툰다. 시방세계 가운데 염념이 시현하여 성불하고 정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고 내지 사리를 나누어 중생 위해 보인다. 성문․연각 등 삼승교를 열어 삼승문으로써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 무량겁 동안 무량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근기에 따라 성문․연각 등 삼승 방편문을 시설하기도 한다.

 

중생들의 좋아함을 따라 모든 모습으로 다 시현한다. 혹은 남자로 혹은 여자로 나타나고 갖가지 몸을 그 좋아함을 따라서 다 보게 한다.

중생의 형상, 행업과 음성도 한량없어서 이를 따라 일체를 다 나툰다. 이러한 모든 불사가 곧 해인삼매의 위신력이다. 제불보리가 널리 일체 중생의 심념(心念)과 근성(根性)과 욕락을 나투되 나투는 바가 없으니 정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찰나찰나마다 중중무진세계에 일체 모습으로 시현하여 끝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는 것이 바로 해인삼매의 위신력에 의한 해인삼매의 수승한 덕용이라는 것이다.《화엄경》에서는 한 세계에 한 부처로 시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으로 응현하는 것이다. 만법이 다 해인병현(海印炳現)이요, 해인돈현(海印頓現)이 다 불현(佛現)이다. 시현해도 시현함이 없는 무심돈현이요, 응화해도 응화함이 없는 무공용행이다. 무량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법 설함을 시설한 것은 사바세계에서의 교화방편은 음성 설법이 중요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4. 해인삼매에 드는 인연

 

해인삼매가 불가사의한 경계인 만큼, 해인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연 또한 헤아리기 어려우리란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인지 경에서 명확하게 해인삼매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두드러지게 제시한 곳은 오히려 드문 것 같다.《대집경》에서는 제일 먼저 다문(多聞)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많이 듣기를 바다와 같이 하면 지혜를 성취하여 항상 부지런히 법을 구하리라고 한다. 다문을 성취한 후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며 그 설법선근으로 해인삼매에 회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보적경》에서도 모든 법문을 잘 수행함으로써 해인삼매를 얻는다고 함은 같다. 이처럼 법문을 듣고 설법함이 해인삼매를 얻는 주된 방편으로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화엄에서도 마찬가지다.《대방광총지보광명경》에서는 해인삼매가 입으로 좇아 나온다〔海印三昧口中生〕고까지 역설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각 회마다 설주보살이 삼매에 들어 지혜를 얻고는 출정한 후에 설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삼매력으로 설법한 모든 것이 해인삼매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설주보살들의 입정인연도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으니, 보현보살을 위시하여 설주되는 보살이 삼매에 들 수 있음은 3종인연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시방 일체 제불의 가지력(가피력), 둘째는 비로자나여래의 본원력(위신력), 셋째는 보살이 일체 제불의 행원력을 닦은 선근공덕력 또는 지혜력에 의해서이다. 보살들이 닦은 행원(선근공덕력)은 입정의 인(因)이며, 주불과 제불의 본원력 가피력은 연이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항상 제불보살을 친근해야 해인삼매를 구족 성취하게 됨도 경에서는 보이고 있다.

 

〈현수품〉에서는 해인삼매 등 10삼매의 대용은 발심수행한 수승한 덕의 하나로서 설해진 것이다. 그런데 발심은 신심에 의해서 가능하니 발심성불은 신만성불인 것이다. 그 신심은〈정행품〉의 140원을 성취한 정신(淨信)을 말한다. 따라서 입정은 행원의 광대한 공덕행인 보현행덕으로 가능하며, 그 보현행덕은 무방대용인 과(果)와 둘이 아닌 인행(因行)인 것이다.

 

〈현수품〉에는 해인삼매 외에 아홉 삼매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 중 화엄삼매와 방망삼매(方網三昧)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해 보면, 우선 화엄삼매이다. 해인삼매가 만상이 다 나타나는 진여본각으로 설명되었다면 화엄삼매는 널리 보살만행을 닦아서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해인삼매가 불과무애라면 화엄삼매는 보살만행으로서의 바라밀행이다.

 

다음 방망삼매(方網三昧)는 동서 등의 방위나 육근과 육경, 남녀 노소, 비구 비구니, 중생과 부처, 미진과 일체처 등을 막론하고 온갖 곳에서 입정 출정함이 걸림없음을 말하고 있다.그래서〈현수품〉에서는 동방에서 바른 정에 들어가 서방에서 정으로 좇아 나오며, 서방에서 바른 정에 입정하여 동방에서 정으로 좇아 나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안근에서 입정하여 색진에서 출정하며, 색진에서 입정하여 안식에서 출정한다.

 

또 동자신에서 입정하여 장년신에서 출정하며, 장년신에서 입정하여 노년신에서 출정하며, 노년신에서 입정하여 선녀신에서 출정하며, 선녀신에서 입정하여 선남신에서 출정하며, 선남신에서 입정하여 비구니신에서 출정하며, 비구니신에서 입정하여 비구신에서 출정하며, 비구신에서 입정하여 학무학에서 출정하며, 학무학에서 입정하여 벽지불에서 출정하며, 벽지불에서 입정하여 여래신에서 출정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많은 삼매가 신심의 덕용으로 교설되어 있는 것이다.

 

제7강 화엄경의 내용 -제3회 6품

 

제3회 6품은 수미산정의 제석천궁전에서 법혜보살에 의하여 십주법문이 설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주목하게 하는 점으로서는

첫째, 보살의 주처이다.

십주의 자리는 어디이며 십주보살행은 어떠한 것인가?

둘째, 발심의 인과 연은 무엇이며,

초발심시변정각의 경계는 무엇인가?

셋째, 무엇이 범행인가? 화엄의 관행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13. 승수미산정품

 

먼저 제3회 첫품인〈승수미산정품〉은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수미산에 오르셔서 제석천의 궁전으로 향하신 것으로 시작된다. 제석천왕이 멀리서 보고 궁전을 장엄하고 사자좌를 놓고 부처님을 맞이하였다. 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하시니 시방세계에서도 그와 같았다. 이는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인 경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14. 수미정상게찬품

 

부처님의 신력으로 법혜(法慧)보살을 비롯한 일체혜․승혜․공덕혜․정진혜․선혜(善慧)․지혜(智慧)․진실혜․무상혜․견고혜보살 등 10혜보살이 십불세계에서 부처님 계신 데 이르렀다. 보살의 돌림자가 모두 지혜 혜(慧)인 것은 지혜가 보살행의 바탕이 됨을 의미한다. 지혜가 없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때 세존께서 두 발가락으로 광명을 놓아 수미산 꼭대기를 비추시니 제석천 궁전안의 부처님과 대중들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법혜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살들이 그 경계를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우리들은 지금 부처님께서 我等今見佛

수미산정에 계심을 보며 住於須彌頂

시방에서도 모두 그러하니 十方悉亦然

여래의 자재한 힘이로다. 如來自在力

온갖 법이 나지도 않고 一切法無生

온갖 법이 멸하지도 않나니 一切法無滅

만약 능히 이같이 알면 若能如是解

부처님께서 항상 현전하시리라. 諸佛常現前

온갖 법들이 了知一切法

자성이 없는 줄 알지니 自性無所有

이렇게 법의 성품 안다면 如是解法性

곧 노사나불을 뵈오리라. 卽見盧舍那

이 게송은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기도하고 받은 게송이다.

 

15. 십주품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었다가 일어나서 보살이 머무는 주처를 설하였다. 보살이 머무는 곳이 넓고 커서 법계와 허공과 같다. 보살은 삼세의 여러 부처님 집에 머물며〔住三世諸佛家〕, 이 보살이 머무는 곳에 10가지〔十住〕가 있다고 한다. 10주는 초발심주(初發心住)․치지주(治地住)․수행주(修行住)․생귀주(生貴住)․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정심주(正心住)․불퇴주(不退住)․동진주(童眞住)․법왕자주(法王子住)․관정주(灌頂住)이다.

 

(1) 초발심주(初發心住)는 보살이 처음 발심하는 자리이다. 발심의 인이 되는 10법과 발심의 연, 그리고 초발심주에서 닦는 10법을 차례로 교설하고 있다. 먼저 발심의 10인은 보살이 부처님의 형모가 단엄하심을 보고 발심하며, 내지는 중생들이 심한 고통 받음을 보거나, 혹은 부처님의 광대한 불법을 듣고 보리심을 내어 온갖 지혜를 구한다. 초발심주의 소연(所緣)인 여래의 10가지 수승한 지혜는 일체지로서 10지 또는 10력을 가리키는 10종지력(十種智力)이다. 

 

처비처지(處非處智)이니, 옳고 그른 도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선악업보지(善惡業報智)이니, 과거․현재․미래에 선업과 악업으로 받는 과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제근승열지(諸根勝劣智)이니, 근기가 예리하고 둔함을 아는 지혜이다.

종종해차별지(種種解差別智)이니, 갖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이다.

종종계차별지(種種界差別智)이니, 여러 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이다.

일체지처도지(一切至處道智)이니, 온갖 곳에 이르러 갈길을 아는 지혜이다.

제선해탈삼매지(諸禪解脫三昧智)이니, 모든 선정․해탈․삼매의 때묻고 깨끗함이 일어나는 시기와 시기 아님을 아는 지혜이다.

숙명무애지(宿命無碍智)이니, 온갖 세계에서 지난 세상에 머물던 일을 기억하는 지혜이다.

천안무애지(天眼無碍智)이니, 천안통의 지혜이다.

삼세누보진지(三世漏普盡智)이니, 누진통의 지혜이다. 모든 번뇌가 다한 자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이 부처님의 공덕을 배우며, 중생의 귀의할 곳이 되는 등 10가지 법 배우기를 권하고 있다.

 

(2) 치지주(治地住)는 심지(心地)를 다스리는 자리이다. 10심으로 자기 마음자리를 다스리니, 보살이 중생들에게 10가지 마음을 낸다. 이른바 이익심․대비심․안락심․안주심․연민심․섭수심․수호심․동기심(同己心)․사심(師心)․도사심(導師心) 등이다.

 

(3) 수행주(修行住)에서는 10가지 행으로 일체 법을 관찰하여 수행한다. 즉 온갖 법이 무상․고․공․무아․무작(無作)․무미(無味)․이름 같지 않음〔不如名〕․처소가 없음〔無處所〕․분별을 여읨〔離分別〕․견실하지 않음〔無堅實〕을 관한다.

 

(4) 생귀주(生貴住)는 부처님 교법으로부터 나서 귀한 자리이다. 보살이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나서 10가지 법을 성취하여 마음이 평등함을 얻는다. 10가지 법이란 영원히 부처님의 처소에서 퇴전하지 아니하며, 깊이 청정한 신심을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행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이다.

 

 

(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는 보살이 선근을 닦아 방편을 구족하는 자리이다.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온갖 중생을 구호하며 내지 열반을 증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6) 정심주(正心住)는 마음이 안정하여 움직이지 않는 자리이다. 보살이 부처님을 찬탄하거나 훼방하는 등 10가지 법을 듣고도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한다.

 

(7) 불퇴주(不退住)는 보살이 부처님이 있다거나 없다는 등 10가지 법을 듣고도 마음이 견고하여 퇴전하지 아니하는 자리이다.

 

(8) 동진주(童眞住)란 동자와 같이 순진한 자리이다. 보살이 10가지 업에 머무는 자리이다. 즉 몸의 행〔身行〕과 말의 행〔語行〕과 뜻의 행〔意行〕이 잘못됨이 없고, 마음대로 태어나고, 중생의 갖가지 하고자 함〔欲〕과 해(解)와 계(界)와 업(業)과 세계의 성괴를 알고, 신통이 자재하고 다니는 데 걸림이 없다.

 

(9) 법왕자주(法王子住)는 법왕의 소행을 아는 왕자의 자리이다. 10가지 법을 잘 아니, 중생의 수생(受生)과 번뇌의 일어남과 습기가 상속함과 행하는 방편과 무량법과 위의와 세계차별과 전․후제(前後際)의 일과 세제(世諦)를 연설함과 제일의제 연설함을 잘 아는 것이다.

 

(10) 관정주(灌頂住)는 왕자가 관정식에서 왕위에 취임하는 것같이 보살이 10가지 지혜, 즉 일체종지를 얻어 주(住)의 최고 자리에 앉는다.

 

이러한 십주행은 십지행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 십지에 포섭된다. 별행경에서는《십주경》,《십지경》은 함께 번역되어 쓰이고도 있다.

 

 

16. 범행품

 

〈범행품〉에서는 특히 염의 출가자를 위한 보살행으로서 10종의 관행법이 설해지고 있다. 정념천자가 법혜보살에게 말하였다."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해야 범행이 청정하여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에 이르리이까?"

 

법혜보살이 이러한 정념천자의 질문을 받고 출가자가 범행을 닦아 위없는 보리도에 이르는 10가지 법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 10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10가지 법이란 몸〔身〕과 몸의 업〔身業〕․말〔語〕․말의 업〔語業〕․뜻〔意〕․뜻의 업〔意業〕․불(佛)․법(法)․승(僧)․계(戒)이다. 이에 대하여 무엇이 범행인가 관찰하도록 한다.

 

예를 들면 만일 몸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냄새나는 것이며, 부정한 것이며, 내지 송장일 것이다. 만일 신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앉는 것, 눕는 것, 가는 것 등일 것이다. 만일 말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음성․입술․고저 등일 것이며, 만일 말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인사․칭찬․헐뜯는 것일 것이며, 내지 만일 계가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계단 아사리 삭발 걸식 등일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면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 데 집착할 것이 없고 법에 머무를 것이 없으며 업을 짓는 이도 과보를 받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범행인가? 범행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소유인가? 이렇게 관찰하면 범행이란 법은 얻을 수 없으며, 삼세의 법이 다 공적하며, 뜻에 집착이 없으며, 내지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까닭에 청정한 범행이라 한다.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하여 모든 법에 두 가지 견해〔二解〕를 내지 아니하면 온갖 부처님 법이 빨리 현전해서 처음 발심할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온갖 법이 마음의 성품임을 알며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여기서도 부처님의 처비처지(處非處智) 등 10법을 닦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17. 초발심공덕품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일으킨 공덕은 헤아릴 수 없어 부처님만이 아실 것이니, 발심함으로써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임을 법혜보살이 제석천왕의 질문에 따라 점증적으로 설하고 있다.

 

18. 명법품

 

십바라밀(十波羅蜜)로 보살행을 청정하게 하고 있다. 법혜보살이 정진혜보살의 질문에 의해 보살로 하여금 10가지 바라밀법으로 행하는 일이 청정케 함을 설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이 명법품에서만 설한 것이 아니라《화엄경》의 보살행 전체를 십바라밀로 포섭할 수 있다. 따라서 화엄보살행을 다 포섭하는 십지보살행도 역시 십바라밀로 묶어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10행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하기로 한다.

 

제8강 화엄경의 내용 -제4회 4품

 

제4회 4품에서는《화엄경》의 유심설과 보살의 십바라밀행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19. 승야마천궁품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와 수미산 꼭대기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야마천궁으로 향하셨다. 야마천왕이 멀리서 보고 즉시 보연화장 사자좌를 만들고 맞이하였다. 천왕은 지난 세상 부처님 계신 데서 선근 심은 것을 생각하고 불공덕과 야마천궁의 길상함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20. 야마궁중게찬품

 

상주안불 친혜(親慧)세계의 공덕림(功德林)보살을 위시하여 시방불세계의 수많은 보살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모여들자, 세존께서 두 발등으로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비추셨다. 여기에 모여든 보살이 수풀 림(林)자가 돌림자가 된 것은 보살의 공덕행이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쌓임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공덕림보살을 위시한 열 분의 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게찬하였다. 이중에 정진림보살이 부처님의 차별없는 평등한 대지혜를 말씀하는 내용 가운데 수를 헤아리는 비유가 나온다. 이는 후에 화엄교학에서 상입상즉을 설명하는 '수십전유(數十錢喩)'로 체계화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법계연기설에서 살피기로 한다.

 

그보다 여기서는 각림보살의 게송을 살펴보겠다. 그 10게송은 유심게(唯心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각림보살은《육십화엄》에서는 여래림보살로 번역되어 있다. 유심게에서는 마치 그림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다고 하여, 마음을 화가에 비유하고 있다. 후반부 다섯 게송만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心如工畵師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能畵諸世間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五蘊實從生

무슨 법이든 짓지 못함이 없도다. 無法而不造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如心佛亦爾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如佛衆生然

마땅히 알라, 부처와 마음이 應知佛與心

그 체성 모두 다함이 없도다. 體性皆無盡

마음이 모든 세간 짓는 줄을 若人知心行

아는 이가 있다면 普造諸世間

이 사람 부처를 보아 是人卽見佛

부처의 참성품 알게 되도다. 了佛眞實性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心不住於身

몸도 마음에 있지 않으나 身亦不住心

불사를 능히 지어 而能作佛事

자재함이 미증유로다. 自在未曾有

만일 어떤 사람이 若人欲了知

삼세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三世一切佛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應觀法界性

모든 것 오직 마음이 지어냄이로다. 一切唯心造

 

《화엄경》의 대의를 '통만법 명일심'이라고 이해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일심 또는 유심사상은《화엄경》의 핵심 내용의 하나가 된다.《화엄경》의 일심사상은 이 유심게와〈십지품〉의 제6현전지 그리고〈여래출현품〉의 10종 성기심(性起心)이 그 주요 소의처가 된다.〈십지품〉에서는 삼계에 있는 것이 오직 한마음〔三界所有 唯是一心〕이라 하고 있다.〈여래출현품〉에서의 마음은 여래심이며 여래성기심이다. 여래심은 10종으로 교설되어 있다.이곳〈야마궁중게찬품〉의 유심게에 보이는 일심은 오온과 세간을 만들어내는 일심이다. 위의 두 번째 게송은《육십화엄》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如心佛亦爾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如佛衆生然

마음과 부처와 중생 心佛及衆生

이 셋이 차별이 없다. 是三無差別

 

그리고 마지막 게송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는 '마땅히 마음이 모든 여래를 짓는 줄 관하라〔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일심은 부처를 만드는 마음이므로 진심이다. 따라서〈야마궁중게찬품〉에서의 마음은 표면적으로는 진(眞)과 망(妄)에 통한다.

 

《화엄경》은 마음을 내세우는 모든 종파의 소의경전이 되어왔다. 마음을 망심으로 이해한 유식의 제8아뢰야식에 의한 뢰야연기와 진망화합심(眞妄和合心)인 여래장심에 의한 여래장연기의 소의경전도 되고 있다. 그러나 화엄종에서는《화엄경》의 일심을 여래장 자성청정심과 여래성기심으로 이해하여 여래성기심인 진여심이 그 체성이 되는 법계연기를 체계화시켰다.

 

그리하여 화엄가들은 이 일심을 연기해서 나타난 일체 존재인 일진법계의 체로 보고, 만덕을 구족한 일심이며 원융한 일심이며 만유를 다 포섭하는 일심으로 보았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의 일심은 무애평등의 일심인 것이다. 마지막 게송인 '일체유심조'는 우리나라에서《화엄경》의 수많은 게송 가운데 제일 으뜸가는 게송으로 수지되어 왔다. 아침 쇠송에 '화엄경제일게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華嚴經第一偈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서 이 게송은 지옥고를 타파한다는 뜻에서 쇠송에서는 파지옥진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도《청량소초》에 의하면《찬령기》에 소개되어 있는 전설적인 얘기와 함께 잠시 수지하여도 능히 지옥고를 파한다고 하였다. 즉, 문명(文明) 원년에 왕명간(王明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착한 일을 한 것 없이 병환으로 죽게 되어 두 사람에게 인도되어 지옥문 앞에 끌려갔다. 지옥문 앞에 한 스님이 있음을 보았는데 지장보살이라 하였다. 그 스님이 왕씨에게 게송 하나를 외우게 하였는데 바로 이 일체유심조 게송이었다. 그리고 이 게송을 외우면 지옥고까지 배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씨가 이 게송을 외우고 들어가 염라왕을 만나보니 염라왕이 묻기를 무슨 공덕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왕씨가 답하기를 오직 한 사구게만 수지하였다고 하고 좀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염라왕이 더 살다오라고 내보냈다. 왕씨가 이 게송을 외울 때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었던 사람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왕씨가 3일 만에 소생하여 이 게송을 기억해서 외웠다. 그리고 공관사(空觀寺)의 승정(僧定)법사에게 이 일을 말하니 법사가 그 게송이 바로《화엄경》의〈야마궁중게찬품〉에 나오는 이 게송임을 밝혀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일체유심조 게송은《화엄경》신앙의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야마궁중게찬품〉에 이어서〈십행품〉이 나온다. 그러므로〈십행품의 10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임을 추정할 수 있다.

 

21. 십행품

 

공덕림보살이 선사유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 보살의 10가지 행을 말씀하였다. 즉 즐거운 행〔歡喜行〕․이로운 행〔饒益行〕․어김이 없는 행〔無違逆行〕․굽힘이 없는 행〔無屈撓行〕․어리석거나 어지러움이 없는 행〔無痴亂行〕․잘 나타나는 행〔善現行〕․집착이 없는 행〔無着行〕․얻기 어려운 행〔難得行〕․법을 잘 설하는 행〔善法行〕․진실한 행〔眞實行〕 등 십행(十行)이다.

 

이 십행에서는 특히 보살의 십바라밀행을 차례로 교설하고 있다. 십주에 머무른 보살이 자타를 이롭게 하는 만행을 일으키니 십행이 교설되고 있다. 이 보살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면서, 십바라밀이 근본이 되어 모든 행을 포섭하고 있다. 이처럼 공덕림보살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보살행은 바로 공덕을 쌓아가는 공덕행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엄의 보살도는 십바라밀에 다 포섭된다. 십주의 갖가지 보살행은 십바라밀을 체로 하며, 십행은 십바라밀 그 자체이며, 십회향 역시 초회향이 바라밀행이며 다른 회향에서도 바라밀행이 그 기저가 되고 있다. 십지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토대 위에 일불승(一佛乘)적 보살도가 가장 잘 시설되면서 십바라밀행이 펼쳐지며, 아울러 각지에 십바라밀을 차례로 치우쳐 닦도록 역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엄대경 전편의 내용을 선재라는 구법자를 등장시켜 다시 한 번 재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입법계품〉의 보살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선재동자가 구법한 선지식의 해탈법문도 십바라밀에 배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계위에서의 보살행과 선재의 구법행은 십바라밀로 포섭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십바라밀은《팔십화엄》에서는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 Danaparamita)․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Silaparamita)․찬제바라밀( 提波羅蜜, Ksantiparamita)․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 Viryaparamita)․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 Dhyanaparamita)․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Up yaparamita)․원바라밀(願波羅蜜, Pra idh naparamita)․역바라밀(力波羅蜜, Balaparamita)․지바라밀(智波羅蜜, J naparamita)로 언급되어 있다. 이는 또 단바라밀(檀波羅蜜)․시바라밀(尸波羅蜜)․인바라밀(忍波羅蜜, 提波羅蜜)․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선바라밀(禪波羅蜜)․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원바라밀(願波羅蜜)․역바라밀(力波羅蜜)․지바라밀(智波羅蜜)로 표기되고도 있다.

 

그리고 이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력․지바라밀로 번역되어 상용되고 있다. 대승의 육바라밀에 중생교화의 입장에서 사종의 바라밀을 더하여 10이라는 원만수로 모든 보살행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화엄경》에서는 이 십바라밀에 대해서는 총설하기도 하고 따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교설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십지품〉에서 다시 언급되겠으나, 여기서는 우선 십행계위에 있는 보살들의 십바라밀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십행품〉에서는 십행계위에 있는 보살들이 닦아가는 주 수행법으로서 십바라밀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십주위에 해당되는〈명법품〉에서도 보살들로 하여금 행하는 일이 청정케 하는 10가지 법으로서 십바라밀을 설하였다.

 

제9강 화엄경의 내용 -십바라밀

 

보살의 십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므로 중생이 본성대로 사는 것이 십행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십바라밀로 전개되고 있다.

 

(1) 환희행(歡喜行)에서는 보시바라밀을 구족하여 중생을 즐겁게 한다. 보시행은 곧 즐거운 행이니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즐겁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경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즐거운 행인가.

 

불자들이여, 보살이 큰 시주가 되어서 가진 것을 모두 베풀되 그 마음이 평등하여 뉘우치거나 아낌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않으며, 이름이 남을 구하지 않으며, 이양을 탐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며, 제불의 본래 수행하신 바를 학습하고 청정케 하며 증장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애락하게 한다.

 

그래서 빈궁한 곳이 있으면 원력으로써 부호의 집에 왕생하여 시여해서 가난한 이들을 기쁘고 만족하게 한다. 수없는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더라도 보살은 물러나거나 겁내지 않고 더욱 자비심을 증장시킨다.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하며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이익을 얻고 있다. 이 중생들은 나의 복전이고 나의 좋은 벗이다. 구하지 않고 청하지 않았으되 찾아와 나를 불법 가운데 들게 하니, 내가 이제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리라" 한다.

 

이처럼 보살은 중생들을 자신의 복밭〔福田〕이라 생각하고, 찾아와서 구하면 기뻐하며 시여하라는 것이다. 복전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비전(悲田)과 은전(恩田)과 경전(敬田)을 들 수 있다.보살은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겠다고 원한다. 그리고 보시함에 있어서 분별상이 없다. 보살은 이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나〔我〕'라는 생각 등 4상이 전혀 없다. 자기 몸도 보지 않고, 보시하는 물건도 보지 않고, 받는 이의 복밭도 보지 않으니 삼륜이 청정하다.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선근과 모든 재물을 다 희사하되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자기도 환희롭고 중생들도 환희롭게 일체를 베푸는 것이 보시며, 보시함에 집착이 없는 행이 바라밀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시가 무슨 의미이며, 무엇을 보시하며, 어떻게 보시하며, 왜 보시하며, 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보시바라밀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보시란 다른 이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뭘 베푸는가 하면 선근과 재물 등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베푼다. 환희까지도 베푼다. 어떻게 베푸느냐면 무집착으로 베푼다. 분별심이 없이 사상이 없이 베풀기 때문에 삼륜이 청정한 것이다. 왜 베푸느냐면 자신도 기쁘고 남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됨을 보이고 있다.

 

(2) 요익행(饒益行)에서는 지계바라밀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설하고 있다. 불자들이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을 이롭게 하는 행인가.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위세를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녀서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평등한 정법을 얻으려고 한다. 보살은 욕심으로 인해 한 중생도 괴롭히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중생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요익행의 보살은 중생들이 오욕에 탐착하며 거기서 헤매느라고 자유롭지 못하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위없는 계율에 머물도록 하며, 그리하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스스로 해탈하고 남도 해탈케 하며, 스스로 열반에 들고 남도 열반에 들게 한다.

 

이 지계바라밀 역시 중생들이 본성대로 사는 중생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이처럼 보살은 자신만 제도해서는 보살이 아니다.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주어야 보살이다. 그래서 그 중생들도 다시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 주어야 바라밀행이 되는 것이다. 십바라밀 모두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중생들이 십바라밀행을 할 수 있도록까지 하여야 바라밀행이 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무위역행(無違逆行)에서는 인욕바라밀로 중생을 어기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를 수순하고 인내하여 중생을 어김이 없음이다. 보살은 항상 참는 법을 닦아 겸손하고 공경하여,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다. 중생에게 법을 말하여 그들이 모든 나쁜 것을 여의고 항상 참고 견디며 화평하게 살도록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참는 법을 성취할 때 남으로부터 온갖 나쁜 말을 듣거나 심지어 생명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괴롭고 즐거움이 모두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을 내가 이해하고 남들에게 널리 말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4) 무굴요행(無屈撓行)에서는 정진바라밀로 도에 정진하여 퇴굴함이 없어 굽히지 않는다. 보살은 성품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므로, 한 중생이라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정진을 한다. 오로지 모든 번뇌를 끊기 위해 정진을 하고, 모든 의혹의 근본을 뽑기 위해 정진을 하며, 익힌 버릇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하며, 모든 중생계를 알기 위해 정진한다. 보살은 자신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영원히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모든 세계에서 일체 중생에게 끝까지 무여열반을 얻게 한다. 이것이 네번째의 굽히지 않는 행이다.

 

(5) 무치란행(無痴亂行)에서는 선정바라밀로 정혜가 바르고 밝아서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다. 보살은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미혹이 없다. 생각이 바르므로 세간의 모든 언어를 잘 알고 출세간법의 말을 할 수 있다. 보살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도 정법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한다.

 

보살은 잠깐 동안에 수없는 삼매를 얻어 갖가지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이 산란치 않고, 삼매가 점점 더 깊어지게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을 몹시 두렵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지 않게 하는 소리, 귀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 등도 보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한다. 모든 음성을 사유 관찰하여 그 성질을 잘 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청정한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마침내 무여열반을 성취하게 하리라.' 이것이 다섯째의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을 떠난 행이다.

 

(6) 선현행(善現行)에서는 반야바라밀로 경계와 지혜가 훤출히 밝아 잘 나타난다. 보살은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말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여, 얻을 것 없는 데에 머물러서 얻을 것 없는 몸과 말과 생각의 업을 보인다. 이 세 가지 업이 모두 없는 것인 줄 알며, 허망함이 없으므로 얽매임도 없다.

 

실제와 같은 마음에 의지하여 한량없는 마음의 바탕을 알며, 세간을 초월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분별을 떠나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갔고, 가장 뛰어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갔고, 세간에서는 알 수 없는 출세간법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보살의 선교방편으로 생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생이 성숙되지 못하고 조복되지 못했는데 그냥 버려두고 나만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중생을 교화하면서 무량겁을 두고 보살행을 닦아, 성숙하지 못한 이를 먼저 조복하게 하리라.' 이것이 여섯째의 잘 나타내는 행이다.

 

(7) 무착행(無着行)에서는 방편바라밀로 중생을 포섭하되 집착이 없다. 보살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순간마다 무수한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면서도 그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 순간순간 많은 부처님을 뵙지만 부처님께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보살행을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이와 같이 집착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에 장애가 없어 부처님의 보리를 알고, 법의 계율을 증득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머문다.

 

보살행을 닦고, 보살의 마음에 머물고, 보살의 해탈법을 생각하면서도 보살이 머무는 데에 물들지 않고 보살의 행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여 보살의 수기를 받는다.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시방세계의 낱낱 국토에서 무량겁을 지내면서 교화하고 성숙하게 할 것이며, 이 한 중생을 위해서 하듯이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할 것이다. 끝까지 이 일을 위해 싫어하거나 고달픈 생각을 내어 그냥 버려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8) 난득행(難得行)에서는 원바라밀(願波羅蜜)로 대원을 성취하여 얻는다. 보살은 얻기 어려운 선근 내지 부처님과 성격이 같은 선근 등을 성취하였다. 보살이 모든 행을 닦을 때 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해를 얻고, 부처님 보리에서 가장 넓고 큰 이해를 얻는다. 보살의 서원에는 조금도 휴식이 없고, 모든 겁이 다하여도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으며, 온갖 고통에도 싫은 생각을 내지 않으며, 대승의 소원을 항상 버리지 않는다.

 

보살은 중생이 있는 것 아닌 줄 알지만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중생의 수효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중생을 버리고 많은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많은 중생을 버리고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중생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다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분별하지도 않고 둘로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계와 법계가 같은 데에 깊이 들어가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을 위해 보살도를 닦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안온한 피안에 이르러 위없는 보리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째의 얻기 어려운 행이다.

 

(9) 선법행(善法行)에서는 역바라밀(力波羅蜜)의 힘으로 법을 설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시원한 법의 못이 되어 바른 법을 거두어 지녀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집이 되니 모든 선근을 기르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돌아갈 곳이 되니 큰 의지처를 주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되니 진실한 법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니 그들에게 업보를 환히 보게 하기 때문이다.이것이 아홉째의 법을 잘 말하는 행이니, 보살이 이 행에 머무르면 일체 중생을 위해 시원한 못이 되어 모든 불법의 근원을 다하게 된다.

 

(10) 진실행(眞實行)에서는 지바라밀(智波羅蜜)로 진실한 행을 이룬다. 보살은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부처님들의 종성에 들어가고, 부처님들과 선근이 같고, 여래를 따라 배워서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성취되어 보살행을 버리지 않는다.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다. 보살은 이와 같은 증상심을 다시 일으킨다.

 

내가 만약 일체 중생에게 무상 해탈도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먼저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면, 이것은 내 본래 소원을 어기는 일이니 마땅치 않다. 그러니 반드시 일체 중생에게 위없는 보리와 무여열반을 먼저 얻게 한 후에 성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내게 청하여 발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생에게 불청객이 되어 일체 중생에게 선근을 쌓아 일체지를 이루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십행위에서 보살이 십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그 바탕에 제법존재가 무상하고 공임을 철저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도 그림자 같으며, 보살행이 꿈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은 메아리 같은 줄 관하기 때문이다.

 

22. 십무진장품

 

〈십무진장품〉에서는 신(信)의 무진장을 비롯하여 계장(戒藏)․참장(懺藏)․괴장(愧藏)․문장(聞藏)․시장(施藏)․혜장(慧藏)․염장(念藏)․지장(持藏)․변장(辯藏) 등 10가지 다함없는 무진장행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필경에 무상보리를 성취케 한다. 장(藏)은 출생과 함장의 뜻이 있으니 만덕을 포섭함과 묘용을 출생함이 무진함을 나타낸다. 이 십무진장행으로써 앞에서 말한 10행의 법을 이루어 무진케 하고, 다음에 올 십회향의 법을 이뤄서 나아가게 한다.

 

제10강 화엄경의 내용 -제5회 3품

 

제5회의 주요 내용은 10회향법문이다.

 

23. 승도솔천궁품

 

세존께서는 다시 위신력으로 보리수 아래 내지 야마천궁을 떠나지 않고서 도솔천으로 향하셨고, 도솔천왕에 의해 설법처가 마련되었다.

 

24. 도솔궁중게찬품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금강당보살을 위시하여 당(幢)자가 돌림자인 견고당․용맹당․광명당․지당․보당․정진당․이구당․성수당․법당보살 등 10보살들이 수많은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데 이르렀다. 이 제5회의 설주는 금강당보살이니 금강은 지혜를, 당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자비의 기치를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 두 무릎으로 광명을 놓아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며 신통을 나투셨다. 10대보살이 차례로 게송으로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였다. 아래 게송은 금강당보살이 찬탄한 게송 가운데 하나이다.

 

색신이 부처 아니며 色身非是佛

음성 또한 그러하나 音聲亦復然

색신과 음성을 떠나서 亦不離色聲

부처님 신통력을 보는 것도 아니다. 見佛神通力

 

《금강경》에서는

만약 색으로 나를 보거나 若以色見我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以音聲求我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요 是人行邪道

여래를 볼 수 없다. 不能見如來

라고 하였으나,《화엄경》에서는 법신이 색신을 통해서 중생 앞에 나타나시는 것이다.

 

《금강경》오가해의 종경송에 보면,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참되지 않고 마침내 허망한 인연이요, 법신이 청정하여 광대함이 끝이 없다.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의 달이요, 만리에 구름없음에 만리의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법신이 응․화신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으로 나투어진다고 하겠다. 우리는 석가모니불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로 모시고 있다.

 

25. 십회향품

 

금강당보살이 보살지광삼매에서 일어나 보살로 하여금 부처님의 회향을 닦아 배우도록 하였다. '회'는 돌리는 것〔轉〕이고 '향'은 나아가는 것〔趣〕이다. 십회향은 다음과 같다.

 

(1) 일체 중생을 구호하면서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난 회향(救護 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回自向他>.

 

 이는 자신을 돌려서 타인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회자향타(回自向他)로 요약되고 있다. 보살에게 선근이 있을지라도 만일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고자 하지 않으면 회향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고, 지계바라밀을 맑히고, 인욕바라밀을 닦고, 정진바라밀을 일으키고, 선정바라밀에 들어가고,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대자․대비․대희․대사 등 사무량심으로 무량 선근을 닦아 두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일체지를 얻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선근을 닦을 때,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여 모두 청정케 해서 마침내는 영원히 고통을 떠나게 하여지이다'라고 회향한다.보살마하살은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여,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이익을 주며 마침내 모두 일체지를 얻게 한다.

 

(2) 깨뜨릴 수 없는 회향(不壞廻向)〈回小向大〉

 

불괴회향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어 안주하여 그 선근을 중생에게 광대히 회향하는 것이다. 비록 선근이 적으나 널리 중생을 포섭하여 환희심으로써 광대히 회향한다.보살은 부처님 계신 데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모든 부처님을 다 받들어 섬기기 때문이다. 보살들과 내지 처음 한 생각을 내어 일체지를 구하는 이에게서까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서원하고 닦으면서 지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에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수호하고 머물러 지니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에게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인자한 눈으로 평등하게 보고 선근으로 회향하여 널리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에 안주할 때 보리심을 더욱더 자라게 하며, 부처님들의 지으신 일을 따라 배운다.

 

(3)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等一切諸佛廻向)〈回自己因行 向他因行〉

 

모든 부처님께서 회향하시는 도를 따라 배워 중생을 이롭게 하는 회향이다. 보살이 모든 선근으로써 부처님께 회향해 마치고 다시 이 선근으로써 일체 보살에게 회향하고 내지 중생에게 회향한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회향하는 도를 배울 때 모든 색과 내지 법의 육진경계가 아름답거나 추함을 보더라도 애증을 내지 않아 마음이 자재하며, 허물이 없어 청정하며, 기쁘고 즐거워서 근심 걱정이 없으며, 마음이 부드러워 여러 감관이 상쾌하다.

 

보살이 이와 같은 안락을 얻었을 때 또다시 발심하여 부처님들께 회향한다. 즉, '내가 지금 심은 선근으로 부처님의 낙이 더욱 늘어나게 하여지이다' 한다. 이런 선근으로 부처님께 회향하고 다시 이 선근으로 보살에게 회향한다. 즉, 원이 채워지지 않는 이는 가득 채워지게 하고, 마음이 맑지 못한 이는 청정하게 한다. 보살이 선근으로써 이같이 보살에게 회향하고는 다시 일체 중생에게 회향한다. 일체 중생이 심은 선근이 아무리 적더라도 한 순간에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듣고 스님들을 공경하여지이다고 원한다. 따라서 이상의 셋을 중생회향이라 한다.

 

(4)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至一切處廻向)〈回因向果〉

 

보살이 선근 공덕의 힘으로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이다. 보살이 선근을 닦을 때 선근 공덕의 힘으로 모든 곳에 이르러지이다고 한다. 이 선근이 모든 여래의 처소에 두루 이르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내지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여 한량없고 끝이 없는 세계에 충만하여지이다고 한다.

 

(5) 다함이 없는 공덕장 회향(無盡功德藏廻向)〈回劣向勝〉

 

보살이 모든 선근을 회향하여 불국토를 장엄하는 회향이다. 범부와 이승의 복을 수희하여 무상보리에 회향한다. 보살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일으킨 선근과, 삼세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고 일으킨 선근, 모든 부처님께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여 일으킨 선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광대한 경계를 깨닫고 일으킨 선근,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선근을 모두 따라 기뻐해서 일으킨 선근들이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선근 등을 모두 회향하여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

 

(6) 모두 평등한 선근에 들어가는 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回比向證〉

 

온갖 보시 등을 통하여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하는 회향이다. 보살의 견고한 일체 선근을 따르는 회향이란 보살의 그 위덕이 널리 퍼지어 중생을 구제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많은 권속이 있어 다른 이들이 저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온갖 보시를 구족하게 행하며, 부처님의 정법을 보호․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라도 달게 받으며, 법을 구할 때 한 글자를 위해서라도 모든 소유를 죄다 버리며, 항상 바른 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여 선행을 닦고 악행을 버리게 하며, 중생들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보면 자비심으로 구원하여 죄업을 버리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보시할 때 잘 거두는 마음을 내어 회향한다. 이른바 색을 잘 거두어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하며, 수․상․행․식을 잘 거두어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한다. 따라서 이 셋을 보리회향으로 묶을 수 있다. 이하는 실제회향이다.

 

(7)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따라주는 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回事向理〉

 

이는 보시 등의 선근을 쌓아 모아서 평등하게 일체 중생을 수순하는 회향이다. 보살은 가는 데마다 모든 선근을 쌓아 모은다. 크고 작은 선근을 비롯하여, 모든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을 기르는 선근이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선근으로 일체 중생이 모든 험난한 곳을 떠나 일체지를 얻어지이다고 회향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때 모든 공덕이 청정하고 부처님의 평등을 얻는다.

 

(8) 진여인 모양의 회향(眞如相廻向)〈回差別行向圓融行〉

 

진여상과 같이 보살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선근을 회향하는 것이다. 선근으로 항상 원만하고 걸림없는 신(身)․구(口)․의(意) 삼업을 성취하여 대승에 안주하고 보살행을 맑게 닦아지이다고 원한다. 보살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회향하기를 진여가 모든 곳에 두루하여 끝이 없듯이, 선근의 회향도 모든 곳에 두루하여 끝이 없고자 한다. 진여가 끝까지 청정하여 온갖 번뇌와 함께 하지 않듯이, 선근의 회향도 일체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청정한 지혜를 원만케 한다.

 

(9) 집착도 속박도 없는 해탈회향(無縛無著解脫廻向)〈回世向出世〉

 

집착과 속박이 없는 해탈한 마음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선근을 존중한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합장 공양하고, 탑에 정례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청하는 데 마음으로 존중하나니, 이런 여러 가지 선근에 모두 존중하여 수순한다. 보살은 여러 선근으로 집착과 속박이 없는 해탈한 마음으로 보현의 광대한 정진을 일으킨다. 부처님들이 보살로 계실 때 닦으시던 회향과 같이 회향한다. 모든 부처님들의 회향을 배우며, 모든 부처님들의 회향하시는 길을 따른다. 세간과 세간법을 분별하지 않으며, 중생을 조복하거나 조복하지 않음을 분별하지 않으며, 자신과 타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10) 법계와 평등한 무량회향(等法界無量廻向)〈回順理事向所成事〉

 

이는 법보시를 비롯하여 모든 청정한 법으로 법계와 평등한 한량없는 회향을 말한다. 보살마하살은 법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법보시를 널리 행한다. 큰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들을 보리심에 편히 있게 하며, 중생들을 위해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선지식이 되어 선근이 자라서 성취하게 한다. 법보시한 선근으로써 회향하여 보현의 한량없고 끝없는 보살의 행과 원을 원만하게 성취하며, 허공과 법계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며, 일체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이 끝없는 지혜를 두루 성취하여 모든 법을 알게 한다. 이상과 같이 10종회향은 십바라밀이 체가 된다. 그리고 삼처회향(三處廻向)으로 묶을 수 있으니 중생회향․보리회향․실제회향이다. 자기만행을 돌이켜서 삼처에 향하는 것이다. 사찰에서는 상단을 향하여 항상 '삼처에 회향하여 다 원만하여지이다〔廻向三處悉圓滿〕'이라 축원하고 있다.

원효대사는《화엄경》을 이〈십회향품〉까지만 주석한 후 절필하고는 회향하러 중생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원효가 주석한《화엄경》은 물론《육십화엄》일 것이다.《육십화엄》은〈십회향품〉이〈금강당보살십회향품〉으로 되어 있다. 이 십회향은 원의 성격이 강하여 십회향원으로 일컬어지고도 있다.

 

제11강 화엄경의 내용 -제6회 십지품

 

제6회는 십지법문을 설하는〈십지품〉한 품이다. 따라서 이〈십지품〉은 다른 회에서 설법좌가 마련되는 부분까지〈십지품〉내에 함께 교설되어 있다.

 

26. 십지품

 

십지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사상사의 전개과정에서 뺄 수 없는 주맥이 되고 있는 사상이 아닌가 여겨지고도 있다. 십지사상이 마하바스투의 십지에서《대품반야경》의 십지로, 이것이 다시《보살본업경》의 십지를 거쳐《십지경》의 십지로 완성되며, 그것이 유가행자에 의해 보살행으로 실천화되는 것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십지사상을 본생십지․반야십지․본업십지․화엄십지․유가행십지로 크게 나누어 보기도 한다.

 

《화엄경》의〈십지품〉에서는 앞에서 제3회 4회 5회 등에서 살펴본 십주와 십행과 십회향을 통틀어 포섭하는 십지보살행이 시설된다. 이 십지보살행은 화엄이 일승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십지법문은 타화자재천궁에서 이루어진다. 금강장보살이 보살대지혜광명삼매에 들었다가 십지를 설했으니 여기서 지(地)란 지혜의 지이다. 십지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환희지(歡喜地:기쁨에 넘치는 지위)

이구지(離垢地:번뇌의 때를 벗은 지위)

발광지(發光地:지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

염혜지(焰慧地:지혜가 매우 치성한 지위)

난승지(難勝地:진제와 속제를 조화하여 매우 이기기 어려운 지위)

현전지(現前地:지혜로 진여를 나타내는 지위)

원행지(遠行地:광대한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지위)

부동지(不動地:다시 동요하지 않는 지위)

선혜지(善慧地:바른 지혜로 설법하는 지위)

법운지(法雲地:대법우를 비내리는 지위)

 

(1) 환희지(歡喜地)

 

환희지는 10가지 원을 성취하며, 보시섭(布施攝)과 보시바라밀로 기쁨에 넘치는 지위이다. 만약 보살이 선근을 깊이 심고 모든 행을 잘 닦고 내지 광대한 지혜를 내면 자비가 앞에 나타나서 범부의 처지를 뛰어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 이때가 환희지에 머무는 때이다.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生如來家〕는 말씀은《화엄경》에서 여러 번 보인다. 그것은 앞의 초발심주와 이곳 초지, 그리고 제4지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비심(悲心)이 점점 증대됨에 그 차이가 보인다. 보살이 환희지에 머물면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지며 10가지 큰 원을 성취한다. 그 십대원은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는 원 불법을 수호하는 원 법륜 굴리기를 청하는 원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원 중생을 교화하는 원 세계를 잘 분별하는 원 불토를 청정히 하는 원 항상 보살행을 떠나지 않는 원 보살도를 행하여 이익을 주는 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원이다.

 

이를 청량징관은 공양원(供養願)․수지원(受持願)․전법륜원(轉法輪願)․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성숙중생원(成熟衆生願)․승사원(承事願)․정토원(淨土願)․불리원(不離願)․이익원(利益願)․성정각원(成正覺願)으로 이름하고 있다. 보살이 환희지에 머물러 이렇게 큰 서원을 내니, 만일 중생계가 끝나면 이 원도 끝나려니와 중생계가 다할 수 없으니 이 원의 선근도 다함이 없다고 한다.

 

《화엄경》의 원으로서는 앞에서 140원, 10회향원을 보았고, 이곳 초지에서 10대원을 만났는데 앞으로〈여래출현품〉에서도 여래성기원이 설해지고 있다. 의상은 이러한 원을 들면서 원에 의해 부처가 된다고 해서 10불 중에 원불을 말씀하고도 있다. 이외에도《사십화엄》에서는 보현보살의 10대행원을 설하고 있다.

 

이 십대원 중 제7원에서는 '일체 국토가 한 국토에 들어가고 한 국토가 일체 국토에 들어간다'는 상입(相入)으로 체계화되고도 있다.

그런데 특히 제4원이 화엄교학에서 대단히 중시되고 있다.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으로 닦기를 원하는 이 원은 후에 육상원융설로 체계화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4원의 내용이다.

 

또 원을 일으키되 일체 보살행이 넓고 크고 한량없어서 무너지지 않고 잡되지 않으며 모든 바라밀을 거두어서 모든 지를 깨끗이 다스리며, 총상․별상․동상․이상․성상․괴상의 있는바 보살행을 다 여실히 설하여 일체를 교화해서 그로 하여금 받아 행하여 마음이 증장을 얻게 하여지이다.

 

보살이 육상으로 모든 바라밀행을 설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닦아 마음이 증장케 하는 원을 일으킨다. 이는 후에 육상원융설로 체계화되면서 화엄교학의 골격이 되고 있다. 육상원융에 대해서는 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환희지에서는 또 보시섭과 보시바라밀로 기쁨에 넘치는 지위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단지 보시바라밀을 중심으로 한 제바라밀을 동상 내지 괴상으로 닦아지이다고 발원한 것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화엄보살도는 총상이며, 보시바라밀 내지 지바라밀 각각은 별상이다. 십바라밀의 모든 연이 서로 위배되지 아니하여 보살도의 전체 모습이 되는 것이 동상이며, 보시바라밀 등 각 바라밀이 각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은 이상이다. 성상은 모든 바라밀에 의해 보살도의 공용이 이루어지며, 괴상은 보시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의 공덕이 있고 내지 지바라밀은 지바라밀의 공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상원융적으로 볼 때 보시바라밀이 곧 화엄보살도이다. 보시바라밀이 없으면 온전한 보살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시바라밀이 지계바라밀 내지 지바라밀과 다르며 주(住)․행(行)․향(向)․지(地) 각위에 보시바라밀부터 차제로 닦아가도록 시설되어 있기는 하나, 또 반드시 보시바라밀을 다 닦아 마친 후에 지계바라밀을 닦고 보시와 지계를 다 닦아 마친 후에 다시 인욕바라밀 내지 지바라밀을 닦아가서 보살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십바라밀이 각각 차별하여 하나가 아니면서도 무애원융하다. 보시바라밀이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모든 바라밀을 포섭하여 보살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원융수행법이 이루어지기에 초발심 때에 정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발심을 하는 자리인 초발심주에서는 보시바라밀을 치우쳐 닦도록 시설하고 있다. 보시바라밀이 주(主)가 되고 여타바라밀은 반(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초발심주에서 또한 초발심시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육십화엄》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하였다. 이는 보시바라밀로 정각을 이루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불종성을 이어가게 한다고도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모든 보살계위에서의 제바라밀행은 화엄보살도가 그러하듯이 부처님 세계의 갖가지 장엄이라 하겠다.

 

(2) 이구지(離垢地)

 

이구지는 십선업도(十善業道)를 행하고 애어섭(愛語攝)과 지계바라밀로 모든 번뇌의 때를 여의는 지위이다. 10가지 깊은 마음을 일으켜 제2지에 들어간다. 즉, 정직한 마음〔正直心〕․부드러운 마음〔柔軟心〕․참을성 있는 마음〔堪能心〕․조복한 마음〔調伏心〕․고요한 마음〔寂靜心〕․순일하게 선한 마음〔純善心〕․잡되지 않는 마음〔不雜心〕․그리움 없는 마음〔無顧戀心〕․넓은 마음〔廣心〕․큰 마음〔大心〕이다. 이구지보살은 성품이 일체 악업을 멀리 여읜다. 성품이 저절로 일체 살생을 멀리 여의어서, 칼 등의 살생도구를 두지 아니하고, 원한을 품지 아니하고, 일체 중생에게 항상 이익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낸다. 보살은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거치른 마음으로 살해하는 일이 없다.

 

성품이 훔치지 않는다. 보살이 자기의 재산에 만족함을 알고 다른 이에게는 인자하고, 다른 이에게 소속한 물건에는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내어 훔치려는 마음이 없고, 풀잎 하나라도 주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는다. 성품이 사음하지 않는다. 보살이 자기의 아내에 만족함을 알고 다른 처를 구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처첩이나, 다른 이가 보호하는 여자에게 탐하는 마음도 내지 않는다.

 

성품이 거짓말하지 않는다. 보살이 항상 진실한 말과 참된 말과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꿈에서라도 거짓말 하려는 마음이 없다. 성품이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살이 이간하는 마음이 없고 해치려는 마음도 없다. 이간하는 말은 실제거나 실제가 아니거나 말하지 아니한다. 성품이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해롭게 하는 말, 거치른 말, 남을 괴롭히는 말, 남을 성내게 하는 말 등은 모두 버린다. 항상 윤택한 말, 부드러운 말, 뜻에 맞는 말, 여러 사람이 기뻐하는 말, 몸과 마음이 희열한 말을 한다.

 

성품이 번드르한 말을 하지 않는다. 보살은 언제나 잘 생각하고 하는 말, 시기에 맞는 말, 진실한 말, 의로운 말, 법에 맞는 말을 좋아한다. 보살은 웃음거리로라도 항상 생각하고 말한다. 성품이 탐욕부리지 않는다. 보살이 남의 재물이나 다른 이의 생활용품에 탐심을 내지 않고 원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 성품이 성내지 않는다. 보살이 일체 중생에게 항상 자비한 마음을 낸다.

또 성품에 삿된 소견이 없다. 보살이 바른 길에 머물러서 불․법․승 삼보에 결정한 신심을 낸다.

 

보살이 이와 같이 10가지 선한 법〔十善業道〕을 행하여 항상 끊임이 없다. 이 보살이 4가지로 거두어 주는 법〔四攝法〕중에서는 사랑스러운 말〔愛語〕이 치우쳐 많고, 십바라밀 중에서는 지계바라밀이 치우쳐 많으니,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을 따르고 분수를 따를 뿐이다.

 

소승계와 대승보살계, 또는 사계(事戒)와 이계(理戒)는 차이가 있다. 소승계인 사계는 표업만 범계가 되나 대승보살계는 무표업 또한 범계가 된다. 예를 들면 소승계는 직접 살생을 하지 않으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살계는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파계가 된다. 그것은 보살은 성품 자체가 살생과는 전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일체 중생이 살생을 하지 않도록까지 해 주어야 살생계를 지키는 것이 된다.

 

(3) 발광지(發光地)

 

발광지는 10법, 특히 삼법인을 관하고 이행섭(利行攝)과 인욕바라밀로 지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이다. 보살이 제3지에 머물고는 모든 유위법의 실상을 관찰한다. 즉 유위법은 무상하고, 괴롭고, 부정하고, 안온하지 못하고, 파괴하고, 오래 머물지 못하고, 찰나에 났다 없어지고, 과거에 생한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다.이 법을 관찰하면 모든 유위법에 대하여 싫어함이 배나 더하여 부처님 지혜로 나아간다.

 

보살은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가 한량없이 이익함을 보고, 모든 유위법은 한량없이 걱정되는 줄을 보므로, 일체 중생에게 10가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낸다. 보살이 발광지에 머물면 4선과 4무색정에 머물고 한량없는 신통력을 얻는다. 사섭법 중에는 이행섭이 수승하니, 십바라밀 중에는 인욕바라밀이 수승하니, 다른 것을 닦지 아니함은 아니지만, 힘을 따르고 분수를 따를 뿐이다.

 

제12강 화엄경의 내용 -십지보살행

 

(4) 염혜지(焰慧地)

 

염혜지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을 닦고 동사섭(同事攝)과 정진바라밀로 지혜가 매우 치성하는 지위이다. 보살이 이 염혜지에 머물면, 지혜로써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다. 삼십칠조도품은 다음과 같다.

 

사념처(四念處):관신부정(觀身不淨)․관수시고(觀受是苦)․관심무상(觀心無常)․관법무아(觀法無我)

사정근(四正勤 혹은 四正斷):이생악령단(已生惡令斷)․미생악령불생(未生惡令不生)․이생선령증장(已生善令增長)․미생선령생(未生善令生)

사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욕(欲)․정진(精進)․심(心)․사유(思惟)

오근(五根):신(信)․진(進)․염(念)․정(定)․혜(慧)

오력(五力):신(信)․진(進)․염(念)․정(定)․혜(慧)

칠각분(七覺分):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의( )․사(捨)․정(定)․염(念)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5) 난승지(難勝地)

 

난승지는 진제와 속제를 조화하여 이기기 어려운 지위이니,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와 선정바라밀을 주로 닦는다. 난승지에서는 또 보살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세간의 기예를 모두 익힌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이면 모두 열어 보여서 점점 위없는 불법에 머물게 한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문자와 산수와 약방문과 글씨와 시와 노래와 춤과 풍악과 연예와 웃음거리와 재담 등을 다 잘하며, 나무와 꽃과 약초들을 계획하고 가꾸는 데 묘리가 있고, 금․은․마니․진주․유리․보배․옥․보석․산호 등의 있는 데를 다 알아 파내어 사람들에게 보이며, 산수가 좋고 나쁜 것을 잘 관찰하여 조금도 틀리지 아니한다.

 

(6) 현전지(現前地)

 

현전지는 세간 출세간의 일체 지혜가 다 나타나는 지위이니, 십이연기〔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를 관하고 반야바라밀을 성취한다. 이상에서 시설된 수행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근본불교시대부터 소승불교시대까지 시설된 기본적이고 중요한 수행방편이었던 것이다. 이곳〈십지품〉에서는 일심에 입각하여 일승적으로 재해석되어 십지보살도의 내용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7) 원행지(遠行地)

 

원행지는 광대한 진리세계에 이르는 지위이니 십바라밀〔布施․ 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方便․願․力․智〕을 구족하고 특히 방편바라밀을 치우쳐 닦는다. 십바라밀을 그 주된 수행덕목으로 삼고 있는 제7원행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보살은 생각마다 항상 능히 10가지 바라밀을 구족한다. 왜냐하면 생각마다 대비로 으뜸을 삼고 부처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 지혜에 향하는 까닭이다.

 

있는바 선근을 부처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중생에게 베풀어 줌이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이요, 일체 번뇌의 열을 멸함이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이요, 자비로 으뜸을 삼아 중생을 해롭히지 않음이 찬제바라밀( 提波羅蜜)이요, 수승하고 선한 법을 구하여 만족해 싫어함이 없는 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요, 온갖 지혜의 길이 항상 앞에 나타나서 일찍이 산란하지 않음이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이요,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능히 인정하는 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요, 한량없는 지혜를 능히 출생함이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이요, 상상품의 수승한 지혜를 구함이 원바라밀(願波羅蜜)이요, 모든 마군들이 능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역바라밀(力波羅蜜)이요, 일체 법을 실제와 같이 요달해 아는 것이 지바라밀(智波羅蜜)이다. 불자여, 이 십바라밀은 보살이 생각마다 모두 구족하니라.

 

(8) 부동지(不動地)

 

부동지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동요하지 않는 지위이니 원바라밀을 치우쳐 닦는다. 마음과 뜻과 식으로 분별하는 생각을 여의어서 집착할 바가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일체 법의 성품이 허공과 같음에 들어서 다시는 남이 없는 법에 들게 된다.  이 부동지에서는 무공용각혜(無功用覺慧)로 일체지지의 경계를 관하며, 중생의 좋아함을 따라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한다. 이렇게 해서 나타내 보이는 부처님 몸은《화엄경》의 다른 품에서 보이는 십불설과 함께 후에 화엄교학에서는 이종십불설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점도 다음에 고찰하기로 한다.

 

(9) 선혜지(善慧地)

 

사무애지〔法․義․辭․樂說〕를 얻어 대법사가 되어 설법하는 지위이니 역바라밀이 가장 수승하다.

 

(10) 법운지(法雲地)

 

대법우를 비내리는 지위이니, 지혜바라밀이 가장 수승하다. 경에서는 이상의 십지경계를 바다의 10종 이익에 배대하여 다시 한 번 보이고 있다. 큰 바다의 10가지 이익은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차례로 점점 깊어진다. 송장을 받아두지 않는다. 다른 물이 그 가운데 들어가면 모두 본래의 이름을 잃는다.

모두 다 한맛이다.

한량없는 보물이 있다.

바닥까지 이를 수 없다.

넓고 커서 한량이 없다.

큰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조수가 기한을 넘기지 않는다.

큰 비를 모두 받아도 넘치지 않는다.

십지보살의 행도 그와 같다.

환희지는 큰 서원을 내어 점점 깊어지는 까닭이다(십대원).

이구지는 모든 파계한 송장을 받지 않는 까닭이다(십선업).

 

이구지에서는 보살이 성품 자체에 일체 나쁜 것이 없어서 나쁜 업은 일체 지을 생각조차 없으므로 십선업도를 닦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바다가 송장이나 나쁜 오물을 속에 담겨 두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는 공덕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 속에 일체 번뇌를 담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화가 날 때 속으로 화를 참고 있다면 이는 속에 번뇌를 담고 있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고 남에게 화풀이를 해서 화를 해소시키라는 것은 아니다. 화 자체에 자성이 없어서 아예 화낼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이치가 터득이 안 돼서 그래도 화가 난다면 자비관을 닦아가도록 경에서 교설하고 있다.

 

발광지는 세간에서 붙인 이름을 여의는 까닭이다(삼법인).

세간의 유위법을 잘 관찰하면 그 유위법이 좋아할 것이 아닌 줄 알게 되므로 가치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염혜지는 부처님의 공덕과 맛이 같은 까닭이다(삼십칠조도법).

보리를 돕는 수행법은 어떤 것을 닦든지 다 부처님 세계에 도달되는 일승 수행법이 된다.

 

난승지는 한량없는 방편과 신통과 세간의 보배들을 내는 까닭이다(사성제). 이 난승지는 이기기 어려운 단계를 넘어서는 자리이다. 세간지와 출세간지가 하나 되어서 중생을 위해 갖가지 방편을 시설하고 있는 자리이다. 모든 고통을 여의고 열반세계로 인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현전지는 인연으로 생기는 깊은 이치를 관찰하는 까닭이다(12연기). 우리 존재는 모두 상의상관의 인연 속에 있다. 이 연기의 진리는 불교의 근본진리로서 그 순역관을 통해서 생사의 고통을 해결하고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이 또한 다 마음에 의해서 생겨나는 깊은 도리를 관찰하는 자리이므로 바다가 깊고 깊어서 바닥까지 다다를 수 없는 데 비유되고 있다.

 

원행지는 넓고 큰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를 잘 관찰하는 까닭이다(10바라밀). 모든 바라밀로 부처님의 광대한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부동지는 광대하게 장엄하는 일을 나타내는 까닭이다(무생법인).

 

선혜지는 깊은 해탈을 얻고 세간으로 다니면서 사실대로 알아서 기한을 어기지 않는 까닭이다(사무애변).

법운지는 모든 부처님 여래의 큰 법의 비를 받으면서 만족함이 없는 까닭이다(대법우).

그래서 끝없는 원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에서는 이상의 십지보살 행과로서〈십정품〉내지〈이세간품〉의 11품에서 등각과 묘각의 경계를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보살도는《화엄경》이 일승보살도를 펼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한다. 십지보살도는 회삼귀일에 바탕한 일승보살도로서 보살도의 정화로 간주되어 왔던 까닭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초지는 원을 세우는 자리이니 대승보살은 원이 없으면 보살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을 세우는 것은 기본적인 보살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2지에서의 십선업도(十善業道)는 근본교설에서는 십선업으로서 재가불자의 윤리 도덕에 해당하는 항목으로 여겨졌던 것이, 대승불교도들이 지키는 십선계(十善戒)로서 대승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다시《화엄경》에서는 제2지 보살이 닦는 수행덕목으로 들어오고 있다.

 

제3지에서는 삼법인에 해당하는 일체 법을 관찰한다.

 

제4지에서 닦는 삼십칠조도품은 소승불교시대에 종합된 수행덕목이다. 대승은 소승을 비판하고 일어났던 것임을 볼 때《화엄경》이 일승설이기에 이 37조도품 역시 보살의 수행방편으로 다시 해석되어 수용된 것이라 하겠다.

 

제5지에서 닦는 사성제는 처음 대승불교가 일어났을 때는 대승에서 자리매김하기를, 성문승이 주로 닦아가는 수행법이고 이 사성제를 통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는 수행법이다.

 

제6지의 십이연기를 관하는 것은 소승에서 연각이 닦아가는 수행법으로서 역시 아라한과까지 도달된다고 한 실천법이다.

 

다시 말해서 삼승(三乘)이라고 할 때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을 말하는데, 성문승․연각승은 소승이고 보살승은 대승이다. 처음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는 보살은 성문․연각과는 다르다고 하고, 대승은 소승을 비판함으로써 일어났던 것이다. 성문․연각은 아라한 정도의 깨달음밖에 성취할 수 없고 보살은 6바라밀행을 닦아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로 보았다. 그때 성문과 연각이 닦는 대표적인 수행법이 사성제와 십이연기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화엄경》에서는 이 두 수행법이 제5지와 제6지 계위의 보살이 닦는 수행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보살의 바라밀행은 다음 제7지 보살이 닦는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10바라밀이 교설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화엄경》십지보살도는 회삼귀일에 바탕한 일승보살도로서 보살도의 정화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이상의 모든 바라밀에 관한 교설을 총합해 보자. 다음과 같이 십바라밀을 약설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기에게 있는 선근과 내외의 모든 가진 것을 중생에게 베풀어 주어 마음이 만족하게 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단나바라밀이다. 일체 번뇌의 열을 멸하고, 부처님의 계법을 청정하게 지니어 범계하지 아니하면서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아만을 영원히 여의는 것이 시라바라밀이다.

 

부처님 인욕에 머물러 자비를 으뜸으로 삼아 중생을 해롭게 하지 않으며 온갖 나쁜 것을 모두 참으면서 여러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여 흔들리지 않음이 찬제바라밀이다. 수승하고 선한 법을 항상 닦아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퇴전치 아니하며 용맹한 세력을 제어할 이 없고 모든 공덕에 만족함이 없는 것이 비리야바라밀이다.  온갖 지혜의 길이 항상 앞에 나타나서 바르게 생각하는 힘으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한 경계를 생각하고 온갖 삼매문에 들어가는 것이 선나바라밀이다.

 

한량없는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분별하여 실상인을 얻으며 온갖 지혜의 지혜문에 들어가서 영원히 휴식함을 얻음이 반야바라밀이다. 한량없는 지혜를 능히 출생하여 중생을 교화함에 그들의 즐겨함을 따라 몸을 나타내며 일체 행하는 법에 물들지 아니하고 탐착하지 아니함이 방편바라밀이다.

 

끝까지 일체 중생을 성취하며, 일체 세계를 장엄하며,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며, 장애없는 법을 통달하며, 법계에 가득한 행을 수행하며,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니 보현의 큰 서원을 만족하여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함이 원바라밀이다. 온갖 자재한 신통을 나타내는 심심력(深心力)․심신력(深信力)․대비력․대자력․총지력․변재력․바라밀력․대원력․신통력․가지력 등 갖가지 힘을 갖추어 중생들을 널리 제도함에 모든 이론(異論)과 마군들이 능히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역바라밀이다. 일체 법을 실제와 같이 알며 모든 중생이 여래와 더불어 성품이 같은 줄 알아 모든 부처님 법에 두루 들어가는 것이 지바라밀이다. 이러한 십바라밀을 구족하여 대비를 으뜸으로 삼고 부처님 지혜에 향하는 것이다.

 

제13강 화엄경의 내용-제7회 11품

 

제7회 11품에서는 십지보살행을 지나 깨달음의 경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화엄경》에 보이는 깨달음은 등각과 묘각을 시설해 놓은 것으로 파악된다. 마지막의〈여래출현품〉과 제8회 설법의〈이세간품〉이 묘각의 경계이고 그 이전은 등각의 경계이다. 보살인행을 거쳐 과위로서의 단계를 등각이라고 한다면, 인행에 상대한 과위가 아니라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의 세계를 묘각이라 한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으면 나타나는 경계는 품명에서 그 내용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27. 십정품

 

10가지 삼매를 설하고 있다. 삼매에 의해서 보살이 모든 세계에 두루 들어가되 세계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모든 중생계에 두루 들어가되 중생에 취하는 것이 없다.

 

28. 십통품

 

타심통이나 누진통과 같은 10가지 신통을 보이고 있다.

 

29. 십인품

 

무생인을 비롯하여 10가지 지혜의 경계인 10가지 인(忍)을 말한다. 이 무생법인은 앞에서 제8 부동지보살이 증득한 경계이기도 하다. 제8지에 오르면 불과에 오른 것과 같은 경계로 간주함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그러면 무엇이 무생법인인가?〈십인품〉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보살이 조그만 법의 남도 보지 않고 사라짐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지 않으면 사라짐이 없고, 사라짐이 없으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으면 때를 여의고, 때를 여의면 차별이 없고, 차별이 없으면 처소가 없고, 처소가 없으면 적정하고, 적정하면 탐욕을 여의고, 탐욕을 여의면 지을 것이 없고, 지을 것이 없으면 원함이 없고, 원함이 없으면 머무를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으면 가고 옴이 없기 때문이다.남이 없는 법은 불생불멸의 깨달음의 지혜 경계임을 알 수 있다.

 

30. 아승지품

 

세존께서 일백낙차라는 수에서 불가설불가설전(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제곱)을 극수로 하는 큰 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아승지도 그 큰 수의 이름 중에 하나로 나온다.  불보살의 덕용은 광대무변하여 이 큰 수와 같이 크거나, 그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31. 여래수량품

 

심왕보살이 부처님 세계의 수명을 말씀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계시는 사바세계의 한 겁이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에서는 낮하루 밤하루라고 하며 이렇게 수많은 부처님 세계의 수명이 다 다름을 보인다.  이 부처님들의 수명은 그 세계의 근기에 따라서 장단이 자재한 불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시간적으로 일즉다(一卽多)의 상즉(相卽)경계라 할 수 있다.

 

32. 보살주처품

 

시방의 보살주처를 말하였다. 예를 들면 동북방에 청량산이 있으니 지금은 문수사리보살이 그의 권속 일만보살과 함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연설한다는 것이다. 이〈보살주처품〉에 보이는 보살과 그 주처는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는 화엄신앙도량을 추정케 하는 경증(經證)이 되고 있다.

 

33. 불부사의법품

 

연화장보살이 부처님의 국토 등 부처님 과덕이 불가사의함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34. 여래십신상해품

 

여래께서 가지신 32가지의 거룩한 모습 내지 티끌 수만큼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

 

여래에게 갖추어져 있는 잘생긴 모습을 세존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여기서는 화엄수행의 특징적인 모습의 하나인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의 내용도 담겨 있다. 이 점 또한 화엄교학을 살필 때 언급하겠다.

 

36. 보현행품

 

보현보살의 평등한 인행을 말하였다. 화엄에서는 부처님 세계를 중생 앞에 펼쳐 보이는, 인과가 둘이 아닌 인행이며 과행을 보현행으로 대표짓고 있다. 그 동안 살펴온 말씀 중에 보현보살이 설주가 된 교설이 많았는데, 이곳 제7회 11품도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이 11품 중에는 다른 모임에서와 달리 세존과 심왕보살과 연화장보살이 설하시는 품도 있다. 그러나 주로 보현보살에 의해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의 보현은 덕이 법계에 두루 미치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편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보현행품〉에서는 특히 성내는 마음을 배격하고 있다.

 

불자여, 나는 어떤 법의 허물이라도 보살들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큰 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100만 가지 장애되는 문을 이루게 되는 까닭이다. 보살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100만 가지 장애되는 문을 일으킨다고 하니 일장일체장(一障一切障)의 도리이다. 화내는 것은 대부분 자기자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화냄에 의해서, 따라 일어나는 장애의 첫째로 보리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행을 빨리 만족하려면 10가지 법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며, 그래서 청정함을 구족하며, 지혜를 구족하며, 두루 들어감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두루 들어감에 있어서 "일체 세계가 한 모공에 들어가고 한 모공이 일체 세계에 들어간다", "일체 중생의 몸이 한 몸에 들어가고 한 몸이 일체 몸에 들어간다" 하는 등, 일입일체(一入一切) 일체입일(一切入一)의 상입(相入)세계가 두드러지게 교설되고 있다. 후에 화엄가들은 이 도리에 대해 그 까닭을 밝히는 등 깊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이〈보현행품〉은 다음의〈여래출현품〉과 함께 화엄가들에 의하여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전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점도 다음에 살피기로 한다.

 

37. 여래출현품

 

〈여래출현품〉은 여래의 과덕을 보이고 있으니,《육십화엄》에서는〈보왕여래성기품〉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여래출현, 즉 여래성기의 화엄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화엄성기사상은 법계연기와 함께 화엄사상의 2대 측면으로 간주되고 있다. 법계연기가 연기의 측면에서 볼 때 화엄세계를 드러내는 대표격인 사상이라면, 화엄성기는 타 종파나 교학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화엄을 대표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선과의 교섭에서 선과 화엄의 통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후에 선과 교를 회통시키는 교선일치나 선교일치를 주창하는 데 있어서 교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성기(性起)의 의미는 여래출현 출생 생여래가 여래성의 시현, 여래종 등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경에서는 성기묘덕보살, 즉 문수보살이 여래께서 출현하시는 10가지 상(여래의 출현하는 법․여래의 몸․음성․마음․경계․행․성정각․전법륜․반열반․견문 친근 선근)을 질문하고, 보현보살이 답하고 있다.

 

(1) 여래출현법

첫째, 여래출현법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한 가지 인연이 아니라 무량법으로 출현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현보살이 거듭 이 뜻을 밝히기 위해 게송을 읊고 있다. 그 중에 우리 불교교단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게송 하나를 보자.

만약 부처경계 알고자 하면 若有欲知佛境界

그 뜻을 맑히기 허공과 같이하며 當淨其意如虛空

망상과 모든 집착 멀리 여의고 遠離妄想及諸取

마음이 향하는 바가 걸림없도록 하라. 令心所向皆無

조선시대 설잠은《화엄석제》에서 이 게송을 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2) 여래신

여래의 법신 역시 10가지 비유로 교설하고 있다. 그 중 여래법신의 2대 특징으로는 허공과 광명의 비유이다. 허공으로는 여래의 존재양상을 보이고, 광명으로는 법신의 작용과 덕상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을 성(性)과 기(起)로 보고도 있다. 이 여래신의 모습 중에 다섯번째 생맹(生盲)의 비유는 특히 주목되는 경계이다. 여래의 지혜 해는 날 때부터 신심의 눈이 없는 생맹 중생까지도 이롭게 하여 선근을 길러 성취케 하니, 지혜 햇빛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 이익은 얻는다. 이 말씀은 화엄세계가 다 비로자나법신의 출현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이들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3) 여래의 음성

여래의 음성은 중생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환희케 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10종으로 교설되고 있다.

 

제14강 화엄경의 내용-여래출현․제8회 이세간품

 

여래출현의 10종법 가운데 이어서 네번째 여래심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4) 여래심

여래심은 바로 여래성기심으로서 여래출현에 있어서 특히 중요시되어온 교설 부분이다. 이 역시 10종심이 있음을 보이며 이 마음은 지혜와 같이 쓰이고 있다. 여래의 마음을 모두 볼 수는 없으나 다만 지혜가 한량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여래의 마음 또한 10가지로 교설되어 있는데 그 첫째는 여래의 지혜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건의 의지가 되지만 허공은 의지한 데가 없으니,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지와 출세간지의 의지가 되지만 여래의 지혜는 의지한 데가 없다.

 

이렇게 비유로 여래의 지혜를 차례로 설하고 있다. 그 중에 열번째 마음은 특히 주목되어온 여래의 지혜이다. 그것은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무처부지(無處不至)의 여래심이다.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다. 왜냐하면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어 가지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허망한 생각과 뒤바뀐 집착으로 증득하지 못하니, 만일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온갖 지혜가 곧 앞에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큰 경책을 들고 있다. 이를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 또는 진함경권유(塵含經卷喩)라 부르고 있다.

 

이 미진경권유는 분량이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경권이 있어 삼천세계에 있는 일이 모두 쓰여 있으나, 이 큰 경책이 한 티끌 속에 있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며, 한 작은 티끌속과 같이 모든 작은 티끌 속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지혜가 밝은 사람이 청정한 천안을 구족하여 이 경책이 작은 티끌 속에 있어 이익이 되지 못함을 보고 꾸준히 노력하는 힘으로 저 티끌을 깨뜨리고 이 경책을 내어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즉시 방편을 내어서 작은 티끌을 깨뜨리고 이 큰 경책을 꺼내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이익을 얻게 하였으며, 한 티끌과 같이 모든 티끌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한량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일체 중생을 두루 이익되게 하는 것이 중생들의 몸속에 갖추어 있지만, 어리석은 이의 허망한 생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이익을 얻지 못한다. 여래께서 청정한 지혜눈으로 법계의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하고 말씀하시기를 "이상하고 이상하다.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를 가르쳐서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영원히 여의고 자기의 몸속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같아서 다름이 없음을 보게 하리라" 하시고, 곧 저 중생들로 하여금 성인의 도를 닦아서 허망한 생각을 여의게 하며 허망한 생각을 여의고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를 얻어서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이처럼 보살은 마땅히 여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이 무처부지의 여래심은 화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어 왔던 부분이다. 우선 티끌 속에 경권이 들어 있다고 해서 여래장사상의 전거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여래장사상을 바탕으로 한 법계연기사상의 전거도 된다. 특히 미진을 깨뜨리고 경권을 꺼내어 이익을 준다는 측면에서 이는 여래성기의 출처가 되어, 매우 주목을 받은 여래출현의 경계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도〈여래출현품〉의 이 대목을 보고 불심(佛心)과 불어(佛語)가 하나인 줄을 깨닫고 너무 기뻐서《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자술하고 있다. 이 여래심의 여래출현상은 선교일치의 경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5) 여래경계

여래의 경계란 여래의 지혜가 활동하는 경계이니, 곧 중생계를 떠나 있지 않다. 그래서 모든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이다. 보살은 마땅히 마음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며, 마음의 경계가 그지없고 한량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이러이러하게 한량없이 나타나는 까닭이다〔如是如是思惟分別 如是如是無量顯現〕. 이 경계 역시 일체유심조의 화엄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6) 여래의 행

여래의 지혜가 중생에게 응하는 것은 행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래행은 보살의 공덕행으로 나타난다. 여래행은걸림없는 행이며, 진여의 행이 여래의 행이다. 그러나 진여가 생하지도 움직이지도 일어나지도 않듯이, 여래행 또한 불생(不生)․부동(不動)․불기(不起)이다. 기이불기(起而不起)인 것이다. 여래행은 시간의 범주를 초월하므로 현재에 활동하되 불기(不起)인 것이다. 이것이 성기(性起)인 것이다.

 

(7) 여래의 성정각

여래의 지혜와 행의 근거가 곧 보리(菩提)이다. 부처님의 보리는 바다와 같아서 모든 중생의 마음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면서도 나타내는 것이 없다. 부처님의 보리는 모든 글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으며, 모든 말로도 나타낼 수 없으나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열어 보인다. 부처님의 보리는 허공과 같아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 보리는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으며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도 없는 까닭이다. 보살마하살은 자기의 마음에 생각생각마다 항상 부처가 있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여래의 전법륜

여래는 마음의 자유자재한 힘으로써 일어남도 없고 굴림도 없이 법륜을 굴리니, 모든 법이 항상 일어남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글자와 온갖 말로써 법륜을 굴리니, 여래의 음성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까닭이다. 일체 중생의 갖가지 말이 다 여래의 법륜을 떠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말과 음성의 실상이 곧 법륜이기 때문이다.

 

(9) 여래의 반열반

보살이 여래의 열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근본 성품을 알아야 한다. 진여의 열반처럼 여래의 열반도 그러하여, 열반은 생겨나는 일도 없고 벗어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생겨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면 멸함이 없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래의 열반을 보이고 있다. 여래는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내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사모함을 내게 하려고 열반함을 보이신다.

 

그러나 여래는 참으로 세상에 출현하심도 없고 열반하심도 없다. 왜냐하면 여래는 청정한 법계에 항상 계시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열반함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해가 떠서 세간에 두루 비치되, 깨끗한 물이 있는 그릇에는 그림자가 나타나서 여러 곳에 두루하지만 오거나 가는 일이 없으며, 그릇이 깨지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10) 견문․친근․선근

경에서는 보살이 여래의 정등각을 보고, 듣고, 친근하여 심은 선근이 모두 헛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내는 까닭이며, 내지 온갖 훌륭한 행을 이루는 까닭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러 좋은 비유로 부처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가까이 모신 선근공덕이 다함이 없음을 보이고 있다.

 

먼저 금강 비유를 들고 있다. 장부가 금강을 조금만 삼켜도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을 뚫고서 밖으로 나오니, 금강은 육신에 섞여서 함께 있지 않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처럼 여래께 조그만 선근을 심어도, 모든 유위행과 번뇌의 몸을 뚫고 지나가서 무위의 가장 높은 지혜에 이르니, 이 선근은 유위행과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는 까닭이다.

 

또, 가령 마른 풀을 수미산처럼 쌓았더라도 그 가운데 겨자씨만한 불을 던지면 모두 다 타고 마니, 불은 능히 태우기 때문이다. 그처럼 여래에게 조그만 선근을 심어도 모든 번뇌를 태워 버리고 필경에 무여열반을 얻는다. 그리고 설산에 있다는 진귀한 선견이란 약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여래도 약왕이라 일컫고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말하고 있다.

 

 여래의 육신을 보는 이는 눈이 깨끗하고, 여래의 이름을 듣는 이는 귀가 깨끗하고, 여래의 계행 향기를 맡는 이는 코가 깨끗하고, 여래의 법을 맛본 이는 혀가 깨끗하여 광장설을 갖추어 말하는 법을 알고, 여래의 광명에 닿은 이는 몸이 깨끗하여 필경에 위없는 법신을 얻고, 여래를 생각하는 이는 염불하는 삼매가 청정하여진다.

 

뿐만 아니라 만일 중생이 여래께서 지나가신 땅이나 탑에 공양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갖추어서 모든 번뇌와 근심을 멸하고 성현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가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을 보거나 들으면서도 업에 덮여서 믿고 좋아함을 내지 못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심게 되어 헛되지 않을 것이며, 내지 필경에는 열반에 들게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이같이 여래께서 계신 데서 보고 듣고 친근하면 그 선근으로 모든 나쁜 법을 여의고 착한 법을 구족하리라 원하고, 견문 친근하여 선근을 쌓도록 강조하고 있다.

 

38. 이세간품

제8회는〈이세간품〉한 품으로 보광명전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에 들었다가 일어나 보혜보살의 200가지 질문을 받고 한 물음에 10가지씩 모두 2,000가지의 대답을 한 것이다. 즉, 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등각․묘각 등 모든 지위를 포섭한 일체 보살행을 다시 한 번 총괄적으로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의지(依支)인가로 시작해서 무엇이 보살의 행이며, 선지식이며, 내지는 어찌하여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반열반하심을 보이셨는지를 설하고 있다. 모든 보살도를 총괄하면서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세간이라는 의미는 세간을 떠난다, 세간을 여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세간이 무엇이며 여읜다는 것은 어떠한 경계인가 하는 것을 짚어보게 한다. 그에 대해서 화엄가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것을 종합해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세간이란 처렴상정(處染常淨)을 말하니 동사섭으로 중생계에 있으나 물들지 않는 경계이다. '처세간여허공 여연화불착수(處世間如虛空 如蓮花不着水)'라고 한 연꽃경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이세간품〉다음에 오는,《화엄경》의 마지막 품인〈입법계품〉에서 법계(法界)에 들어간다고 함도 다시 들어갈 법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제15강 화엄경의 내용-제9회 입법계품

 

제9회 역시 한 품인〈입법계품〉으로 이루어져 있다.〈입법계품〉은《화엄경》의 마지막 품으로서 품수는 39품 중 한 품이지만, 그 분량은 권수(62~80)로나 페이지수(대정장 10, pp. 331~446)로 볼 때 총《화엄경》분량 중 약 4분의 1에 해당되는 방대한 양이다.

 

〈입법계품〉의 별행경은 다른 대부분의 화엄부 경전보다 일찍 성립된 품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선재동자의 구법을 통해 전편의 내용이 재현되는 형식이 취해지고 있다.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한 선재동자가 보살의 가르침대로 선지식을 역참하여 보살도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원과 행을 성취함으로써 법계에 들어간다는 줄거리이다. 선재의 구법 여정이나 선지식의 해탈법문은 화엄의 보살도를 말해 주는 주요 자료가 된다.

 

〈입법계품〉도 근본법회와 지말법회로 나눌 수 있다. 근본법회에서는 세존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대장엄중각에서 사자빈신삼매에 드신 후 설법하시는 내용이다. 그 자리에 보현의 행과 원을 성취한 보살과 성문들과 세주와 함께 계시는데 보현보살과 문수사리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었다.《화엄경》청법대중 가운데 성문들이 보이는 곳은 이 근본법회뿐이다.

 

지말법회는 그 자리에 있던 문수사리동자가 부처님께 공양올리고는 남쪽으로 인간세계를 향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문수보살이 복성의 동쪽 장엄당 사라숲에 머물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수다라를 말씀하니 복성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 선재동자도 함께 있었다.

 

문수보살은 선재가 어머니 태에 들 때부터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 쌓이기 시작하였으므로 부모와 친척들이 선재라는 이름을 지어줄 만큼 복많은 이였음을 알았다. 또 이 동자가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며 선근을 많이 심었고 선지식을 항상 친근하였으며 삼업에 허물이 없고 지혜로 불법을 깨달을 수 있는 근기임을 알았다.

 

문수보살이 이렇게 선재를 관찰하고는 선재와 대중들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법을 연설하였다. 선재는 자재한 지혜와 변재로 부처님법을 설하는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을 하게 된다.  선재는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는 너무나 다른 점을 발견하고 반성을 하였다. 선재가 생각하기를, 자신은 어리석고 교만하며 탐내고 성내는 마음이 많아서 생사 고통의 성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해탈의 문을 찾는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쳐 주길 문수보살에게 청하였다.

 

문수보살은 선재가 과거에 심은 선근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한다고 칭찬하며, 온갖 지혜를 구족하는 첫째 인연은 선지식을 친근하고 공양하는 것이니, 그 일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였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 여쭈었다.

보살은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으며, 어떻게 보살행에 나아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행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깨끗이 하며, 어떻게 보살행에 들어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성취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따라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생각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더 넓히며, 어떻게 보현의 행을 빨리 원만케 합니까?

 

이에 문수보살이 한량없는 부처님을 뵙고 원력을 성취하면 보살행을 구족하게 되며, 모든 세계 모든 겁 동안 보현행을 닦아 행하면 보리도를 성취하리라고 한다. 그러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고, 온갖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법문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선지식의 여러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는 남쪽으로 승낙국을 찾아가 묘봉산에 있는 덕운비구를 만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닦으며 내지 보현행을 빨리 원만히 할 수 있는지 묻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난다. 여기서 선지식을 찾아나서는 선재는 세간의 복이 많은 이로서 선근과 신심이 있었기에 문수보살을 만났고, 강한 의지로 발심하여 해탈도를 구하는 수행자로서의 보살이 되어 선지식을 친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재는 덕운비구 선지식을 만나 해탈법문을 들었다. 덕운비구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지혜의 광명으로 두루 보는 법문

〔憶念一切諸佛境界 智慧光明普見法門〕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덕운비구 선지식은 대보살들의 지혜로 청정하게 수행하는 문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하며, 남쪽 해문국에 있는 해운비구를 찾아가서 보살행을 물으라고 한다. 해운비구는 광대한 선근을 일으키는 인연을 분별하여 말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선재동자는 덕운비구 선지식으로부터 염불(念佛)해탈문을 얻고는 덕운비구의 가르침대로 다시 해운비구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렇게 해서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선지식을 친견하여 해탈문을 성취하게 된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선재가 찾아간 선지식을 우리는 53선지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선재는 선지식을 54번 만나며, 만난 선지식 수도 54분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을 두 번 만나고 한 곳에서는 두 선지식을 함께 만나기 때문에 53선지식이라 일컫고 있다.

 

이렇게 선재가 역참한 선지식을 보면 우선 보살이 다섯(문수․관음․정취․미륵․보현보살)이다. 그리고 비구 5(덕운․해운․선주․해당․선견비구), 비구니 1(사자빈신비구니), 우바이 4, 장자 9, 거사 2, 천신 1, 여신 10, 천녀 1, 바라문 2, 선인 1, 왕 2, 선생 1, 동자 3, 동녀 2, 뱃사공〔船師〕 1, 외도 1, 유녀(狀女) 1, 싯닫타 태자비 1, 태자모 1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재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달되는 지위는《화엄경》전편에서 말하는 42계위와 대비시키고 있다. 처음 문수보살은 신위에 해당하며, 덕운비구는 10주초의 초발심주이며 차례로 배대하여 태자비였던 구바녀가 제10지에 배대된다. 그리고 등각에 10분, 미륵보살은 묘각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53 보현보살은 전보살도와 불과행위를 총망라하는 자리이다.

 

법장은《탐현기》에서 문수가 선재로 하여금 여러 곳을 순력하여 선우(善友)를 구하게 한 것에 다음과 같은 8가지 뜻이 있음을 들고 있다. 궤범이 되기 때문이다. 선재는 법을 구하는 묘한 모범을 이루고, 선지식은 법을 설하는 좋은 규범을 보여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자취를 모범으로 삼아서 행하게 하는 것이다. 행연(行緣)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범행을 이루는 데는 선지식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견만(見慢)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신학(新學)보살인 선재로 하여금 법을 구하는데 여러 부류의 선지식을 만남으로 해서 스스로의 교만을 깨뜨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마(細魔)를 여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 매여 하나만 고수한다면 후행(後行)이 증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집착하는 허물도 있는 까닭이다.  행(行)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재가 한 법문을 얻어서도 수행할 수 있는데 그렇게 널리 구하는 것은 보살행과 선우의 행과 법을 구하는 행 등을 성취하는 것이다.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지식에 의탁함으로써 신(信) 등의 다섯 가지 지위의 차별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재의 지위는 신위의 선지식을 만나면 신위이며, 주에 있으면 주위이니 한 몸으로 오위(五位)를 거친다. 있는 곳에 따라서 곧 그 지위가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현의 지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불법이 깊고 넓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식은 비록 지위가 법운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직 이러한 하나의 법문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찌 모든 보살의 한량없는 보살의 경계를 요달하겠는가'라고 하며 다른 선지식을 찾아가 보살도를 배우도록 일러주고 있다. 선재 또한 비록 지위가 등각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사오나 어떤 것이 보살행이며 보살도인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선지식에게 보살도를 묻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연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재는 선지식과 더불어 하나의 연기를 이루니 능입과 소입이 두 가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 외에 선재가 없으므로 하나가 곧 일체임을 드러내서 선재가 모든 지위를 거침을 밝힌다. 또 선재 외에 선지식이 없으므로 일체가 곧 하나임을 나타내어서 여러 지위가 선재에게서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거둠과 펼침이 자재하며 서로 원융하여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그 특기할 만한 점을 화엄의 만수인 10가지만 찾아보려 한다.

 

(1) 선재가 선지식을 만나 발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근이 있었기 때문이며, 주체적인 자각이 배제될 수 없다. 선재가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는 복성에 사는 수많은 우바새․우바이, 동남․동녀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재가 가장 선근이 깊었기에 문수보살이 부처님 세계를 말씀하실 때 당시의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 너무나 다름을 느끼고 참회를 하며 부처님을 닮고자 발원하였던 것이다.

 

(2) 선지식들의 해탈법문은 그들의 이름, 처소, 신분 등과 밀접하게 연계됨을 발견할 수 있다.

 

(3) 총 54분의 선지식 가운데 여성이 21분(비구니, 우바이, 여신, 천녀, 동녀, 유녀, 태자비, 태자모)이나 되는 것이다. 이는 비남비녀(非男非女) 역남역녀(亦男亦女)라 할 수 있는 보살은 여성 선지식에 넣지 않은 숫자이다.  그리고 십지 계위는 모두 여성 선지식에 해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십지는《화엄경》에서 화엄보살도를 총괄하며 화엄의 일승보살도를 대표하는 계위이다. 그 자리는 특히 비심(悲心)이 증대된 자리이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특징적인 모습을 통해 화엄의 일승보살도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같이 화엄세계에서는 숫자적으로나 해탈경계로나 남녀의 차별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여성에게 자비․청정․수순중생의 덕이 수승하며, 생불(生佛)하는 특징적인 장점까지 있음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화엄경》에서의 여성 선지식은 여래의 행덕을 드러내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4) 선재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달되는 지위는《화엄경》전편에서 말하는 화엄보살도의 계위인 42계위와 그 속에서 수행하는 10바라밀에 차례로 배대되어 있다. 처음 문수보살은 신위에 해당하며, 덕운비구는 10주초의 초발심주이며, 차례로 배대하여 태자비였던 구바녀가 제10지에 배대된다. 그리고 등각에 10분, 미륵보살은 묘각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53 보현보살은 전보살도와 불과행위를 총망라하는 자리이다.

 

(5) 이들 선지식의 계위는 법계로 향해가는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일위일체위이다. 선재는 각 선지식에게서 모두 해탈문을 증득하며 선지식은 일위일체위의 일승보살 계위를 다양한 방편으로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수행계위를 두루 지나는 선재의 지위는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현의 지위와 같다.

 

(6) 인과불이의 보살도를 보여 준다. 그것은 선재가 문수․미륵․보현보살을 만나는 여정에서 특히 더 보여 주고 있다.  선재동자가 비로자나장엄장 대누각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미륵보살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을 칭찬받고 보리심 공덕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누각에 나아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니 문이 열렸다. 그리하여 누각의 갖가지 장엄과 불가사의한 자재로운 경계를 보고 해탈문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륵보살이 다시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듣고 삼매에서 일어나니 누각의 장엄이 다 사라졌다. 그리하여 미륵보살이 다시 문수보살에게 가서 보살행을 배우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때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가르쳐준 대로 110성을 지나서 보문국의 소마나성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뵙기를 희망하였다.

 

이때 문수보살이 멀리서 오른손을 펴 110유순을 지나와서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며 말씀하였다. "선재동자가 만약 신근(信根)을 여의었다면 조그만 공덕에 만족하고 행원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의 거두어 주고 보호함도 받지 못하며, 여래의 생각하심도 되지 못했을 것이며, 내지 두루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선재를 칭찬하였다. 그러고는 선재로 하여금 보현행원을 성취할 결심을 굳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재가 일심으로 보현보살을 만나려고 정진하여 드디어 보현보살을 만나서 보현의 자유로운 신통을 보게 되었다. 그때에 선재동자는 보현의 행과 원의 바다를 믿어서 보현보살과 평등하고 내지 부처님의 해탈자재도 모두 평등하였다. 그때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공덕바다가 한량없음을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세계 티끌 수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刹塵心念可數知

큰 바다 물을 마셔 다하고 大海中水可飮盡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맬 수 있으나 虛空可量風可繫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도다. 無能盡說佛功德

 

이 게송 또한 기도시 항상 하는 염불문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게송이다. 이처럼 선재는 처음 문수보살에게서 시작하여, 미륵보살에게서 불과에 들고 다시 문수를 만나 보현행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일단 그 여정이 끝난다. 따라서 이는 인과 과가 둘이 아닌 경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선재 역시 초발심에 해탈하여 법계에 들었으며〔入法界〕계속해서 선지식들을 만나 무수한 해탈문을 증득함으로써 펼쳐 보이는 중중무진한 화엄일승보살도는 불세계를 장엄하는 행이다.

 

(8) 선재나 선지식 모두 여래출현의 존재이다.

 

(9) 이외에도 무진법계연기나 화엄성기 등, 후에 체계화된 화엄사상이나 수증법이 이들 선지식의 해탈경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해인삼매, 일중다․다중일, 일즉다․다즉일, 동체․이체의 상즉․상입, 일엄․일체엄의 보엄․보문, 일단일체단․일성일체성, 융삼세간불의 화엄경계가 선재가 여성 선지식들을 만나는 여정에서 적나라하게 교설되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10) 이러한 모든 선지식의 해탈경계와 보살도는 보현보살의 행과 원에 포섭되며 10대원으로 대표된다. 이 보현보살의 10종 대원은《사십화엄》의〈보현행원품〉에만 나타나는 원이다.

 

제16강 화엄경의 내용-보현행원품

 

지금까지《팔십화엄》의 전체 구성과 그 내용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제《팔십화엄》에는 없으나 우리 주변에〈보현행원품〉으로 널리 지송되는 보현보살의 10종 대원 부분을 잠깐 살펴보겠다.〈보현행원품〉이란〈입법계품〉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나 좁게는《사십화엄》에만 있는 보현보살의 10종 행원 부분만 일컫기도 한다.

 

이 보현보살의 10종 행원은 40권《화엄경》의 제40권에서 보현보살에 의해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모든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였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가령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불가설불가설 불찰극미진수 겁을 지내면서 계속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지 못하시느니라. 만약 이러한 공덕문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10가지 넓고 큰 행원을 닦아야 하느니라. 10가지라 함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다〔禮敬諸佛願〕.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稱讚如來願〕.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다〔廣修供養願〕.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다〔懺悔業障願〕.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이다〔隨喜功德願〕.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請轉法輪願〕.

일곱째는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다〔請佛住世願〕.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다〔常隨佛學願〕.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다〔恒順衆生願〕.

열째는 지은바 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다〔普皆廻向願〕.

 

그리하여 어떻게 예배하고 공경하며 내지 회향해야 하는지 묻는 선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1) 예경제불원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을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앞에 대하듯 깊은 믿음을 내어서 청정한 몸과 말과 뜻의 업을 다하여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무진 몸을 나투어 무진 부처님께 두루 예배하고 공경하는 원이다. 그리고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하도록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이 다함이 없기를 원한다. 즉,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하려니와 중생계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다.

 

(2) 칭찬여래원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무수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수승한 지견으로 찬탄하며 미래세가 다하도록 계속하고 끊이지 아니하여 법계에 두루한다.

 

(3) 광수공양원

시방삼세 부처님께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깊고 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을 일으켜 여러 가지 으뜸가는 공양구로 항상 공양한다는 원이다.모든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한다.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중생의 고를 대신 받는 공양이며,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보살업을 바라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다. 여러 가지 꽃이며 음악이며 의복이며 향이며 기름 등 갖가지 공양구로 공양하여 얻은 공덕은 일념동안 닦은 법공양 공덕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한다.

 

(4) 참회업장원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과거 한량없는 겁으로 내려오면서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악한 업이 한량없고 가이없어, 만약 이 악업이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끝없는 허공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리니, 내 이제 청정한 삼업으로 일체 불보살전에 두루 지송으로 참회하되 다시는 악한 업을 짓지 않고 항상 청정한 계행의 일체 공덕에 머물러 있으오리다" 하는 것이다.

 

(5) 수희공덕원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로부터 일체지를 위하여 부지런히 복덕을 닦되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기를 극미진수 겁을 지내고 낱낱 겁마다 일체 난행고행으로 바라밀문을 원만히 하며 이와 같이 보리를 증득하며 내지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를 분포하실 때까지의 모든 선근을 내가 다 함께 기뻐하며, 일체 중생들이 짓는 공덕을 모두 함께 기뻐하며, 일체 유학 무학 보살들이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는 넓고 큰 공덕을 내가 모두 기뻐하는 것이다.

 

(6) 청전법륜원

모든 부처님께 몸과 말과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을 지어서 설법하여 주시기를 은근히 권청하는 것이다.

 

(7) 청불주세원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하실 때와 모든 보살과 성문․연각과 일체 선지식에게 두루 권청하되 "열반에 들지 마시고 무진겁토록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여 주소서" 하고 원하는 것이다.

 

(8) 상수불학원

이 사바세계의 비로자나여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아니하시고 보리수하에서 대보리를 이루시던 일이나 내지 열반에 드시는, 이와 같은 일체를 내가 다 따라서 배우기를 지금의 세존이신 비로자나불과 같이 하는 것이다.

 

(9) 항순중생원

시방세계 중생들을 내가 다 수순하여 받아 섬기며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부처님과 같이 받든다는 원이다.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어두운 밤중에는 광명이 되어 평등히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다.만약 보살이 일체 중생을 수순하면 곧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며 공양함이 되며,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하면 곧 일체 여래로 하여금 환희하시게 함이다. 어떠한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 체를 삼으시는 까닭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심을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발하고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넓은 벌판 모래밭 한가운데 있는 큰 나무가 만약 그 뿌리가 물을 만나면 줄기나 꽃이나 과실이 모두 무성하는 것과 같이 생사광야의 보리수왕도 역시 그러하다. 일체 중생으로 나무뿌리를 삼고 여러 불보살로 꽃과 과실을 삼으니 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 즉시에 여러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과실이 성숙된다. 만약 보살들이 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까닭이다.

 

(10) 보개회향원

처음에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으로부터 중생을 수순하는 것까지의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하는 원이다. 중생들이 항상 안락하고 일체 병고는 영영 없기를 원한다. 악한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도 됨이 없고 착한 업을 닦고자 하면 다 속히 성취하여 일체 악취의 문은 닫아버리고, 인간에나 천상에나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열어 보이며, 모든 중생이 그 지어 쌓은 모든 악업으로 얻게 되는 모든 괴로움은 대신 받아서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해탈케 하여 마침내 무상보리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그 닦은 공덕을 회향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보살의 이 회향은 다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다. 이〈보현행원품〉의 총결분에는 이 10가지 보현행원이 널리 구족하고 원만하게 하기 위한 말씀으로 되어 있다. 이 십대원은 원 중에 으뜸이라 하여 원왕(願王)으로 일컬어지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원왕을 수지독송하면 일체 장애가 없음이 마치 공중의 달이 구름 밖으로 나온 것 같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여 마침내 생사에서 벗어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리라고 한다. 보현보살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원하오니 이 목숨 다하려 할 때 願我臨欲命終時

모든 업장 모든 장애 다 없어져서 盡除一切諸障碍

찰나중에 아미타불 친견하옵고 面見彼佛阿彌陀

그 자리서 극락세계 얻어지이다. 卽得往生安樂刹

 

이 원은 화엄교주가 비로자나부처님이시지만 아미타부처로 출현하실 수도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화엄십찰이라고 불리는 사찰에서도 비로자나부처님 대신 아미타부처님을 모셔 놓은 곳이 적지 아니함도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이〈보현행원품〉의 맨 마지막 게송 역시 위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여 우리 교단내에서 회향할 때 널리 염송되어지는 게송이다.

 

내가 지은 수승하온 보현행의 我此普賢殊勝行

가없는 수승한 복 회향하오니 無邊勝福皆廻向

바라건대 고해중의 모든 중생이 普願沈溺諸衆生

속히 무량광불찰에 왕생하여지이다. 速往無量光佛刹

 

제17강 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연구

 

이제부터는 중국과 한국에서 체계화된 화엄사상을 그 교사부분과 함께 살펴보자. 우선《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화엄경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화엄경의 전래와 번역

 

《화엄경》의 편찬과《화엄경》을 소의로 한 교학적 체계의 성립과는 사뭇 다르다.《화엄경》은 인도에서 이루어졌으나 화엄교학은 중국과 한국 등에서 체계화되었으니, 곧 화엄종의 성립에 의해서이다. 처음 중국의 화엄교학 형성에 기반이 되었던 것은《육십화엄》이다. 이《육십화엄》의 범본을 중국에 전래한 이는 월지국의 지법령이다. 그는 우전에서 3만 6천게의 범본을 구하여 장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법령은 계빈국 삼장 불타발타라〔覺賢〕를 만나《화엄경》을 중국말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가 처음 장안에 도착했을 때 구마라집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와 대립이 생겨 여산에 있는 혜원의 처소로 갔다. 그곳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가 412년에 하산하여 형주로 갔다. 건강의 도량사에 있었을 때 번역 요청을 받아 418년에《육십화엄》의 번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불타발타라는 경전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선과 율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전한다.

 

이《육십화엄》의 번역장에서 받아적는 필수를 맡았던 분으로 법업(法業)이 있다. 법업은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화엄경》을 이해한 자라고 전해진다.《화엄경전기》에서 법장은 "화엄대교의 출발은 법업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법업은《화엄경지귀》2권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국에 있어서《화엄경》의 강포는《육십화엄》의 역장에 참예한 동진의 법업으로 효시를 삼는다. 그 이래 화엄의 강포에 참예한 자가 많았다. 불타발타라 이후도 그 이전처럼 화엄의 별행경이 많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역시 중국 화엄교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경으로서《팔십화엄》과《사십화엄》의 번역이 주목된다.

 

《팔십화엄》의 전역은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화엄경》의 범본이 우전국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측천무후가 칙령을 내려 사신을 보내어 십만게송의 범본을 구해오게 하였다. 그리고 실차난타(實叉難陀)로 하여금 대변공사(大遍空寺)에서 번역하게 하였으니 695년이었다. 4년에 걸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때 측천무후가 서문과 품의 제목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서문은《팔십화엄》과 함께《신수대장경》10권의 첫페이지에 수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팔십화엄》번역장에서 법업이 필수를 맡았다.

 

《사십화엄》의 번역은 이로부터 96년 뒤에 계빈국 삼장 반야에 의해 번역되었다.《육십화엄》이 번역된 지 278년 뒤에《팔십화엄》이 번역되었으니,《육십화엄》이 번역된 때부터 헤아린다면 374년 뒤이다. 남인도 오다국왕이《화엄경》범본을 당나라 조정에 보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필수를 맡은 분은 원조(圓照)이며 청량징관도 역장에 참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화엄경》의 번역 외에 중국 화엄교학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십지경론》의 번역을 빠뜨릴 수 없다. 이《십지경론》의 번역에 의해 화엄을 원교로 내세운 지론종이 성립되고 지론종의 혜광(惠光)을 거쳐 두순 → 지엄 → 법장에 이르러 화엄종이 대성되고 화엄교학이 체계화된 것이다.

 

2. 중국 화엄종의 성립

 

(1) 중국 화엄오조설

중국 화엄종조로는 전통적으로 법순두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 →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이어지는 화엄오조설이 있다. 화엄종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징관의《화엄경소》에서였다. 그리고 화엄조사설은 종밀의《주법계관문》에서 처음 세우고 있다. 그러나 화엄종의 대성자 법장이 그의《화엄경전기》에서 이미 그 기초는 다져 놓았음을 볼 수 있다.

 

이 두순초조설 외에 지엄초조설 또는 지정초조설이 거론되고도 있다. 지엄이《화엄경》을 배운 스승은 지정(智正, 559~639)이라는 점과 두순의 화엄관계 저술이 진찬이 아니라는 의문 때문이다. 아무튼 법장이 화엄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법장대에 이르러 화엄종이 대성되었음에는 이견이 없다.

 

(2) 화엄칠조설

중국 화엄종도 그 연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중국 화엄오조에다 마명과 용수보살을 모셔서 화엄칠조설을 신봉해왔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용수는《화엄경》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화엄경》의 별행경인《십지경》을 주석한《십주비바사론》을 짓기도 했다. 마명을 모신 것은 마명을《대승기신론》의 저자로 보았던 것이니,《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중국에서 이룬 법계연기의 기초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 화엄종에서는 마명과 용수, 그리고 중국의 화엄오조를 합해서 칠조를 내세운 것이다.

 

(3) 화엄십조설

칠조에다 세친보살과 문수와 보현보살을 합해 화엄십조설을 말하기도 한다. 세친은《십지경》에 의거하여《십지경론》을 지었으니, 화엄교학의 성립과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다른 세 보살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두 보살은《화엄경》에 출현하시는 양대보살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 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 두 분은 경전상의 이상적인 보살마하살이라 해야 할 것이다.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말한다면 지엄 다음에는 의상을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설도 있다. 법장은 스승인 지엄의 입적시까지 거사로 있었으며 의상보다 20년 정도 연하이다. 그런데 의상은 귀국하여 한국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으므로 중국 화엄종은 법장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본다.

 

3. 화엄종 성립의 배경

 

지엄은 12세 때 두순을 따라가 달법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계속 두순의 인도를 받았음이《화엄경전기》에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화엄경》을 배운 것은 같은 지상사(至相寺)에 기거했던 지정으로부터였다. 지정은 혜광(惠光) → 도빙(道憑) → 영유(靈裕) → 정연(靜淵)으로 계승되는 지론종(地論宗) 남도(南道)파에 속했다. 법장 역시 지론종 남도파의 사상적 영향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화엄종의 성립을 살핌에 있어 지엄․법장과 관련 있는 당시의 종파상황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법장 당시 유심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다름에 따라 여러 종파가 형성되었다.《화엄경》의 유심설에 바탕을 둔 세친의 유식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십지경론》의 번역에 의해서이다. 즉, 보리유지와 륵나마제 등이 세친의《십지경론》을 번역함에 의해 지론종이 일어났다. 진제가 무착의《섭대승론》을 번역하여 섭론종이 흥기하였으며, 이어서 현장이 호법 등의《성유식론》을 번역함에 의해 자은법상종이 형성되었다.

 

지론종은 남도와 북도의 2파가 있으니《십지경론》을 번역함에 있어서 륵나마제는 정식설〔法性生一切法〕의 입장을 취했는데 혜광에 의하여 남도파로 형성되었다. 보리유지는 망식설〔黎耶生一切法〕을 주장하였는데 도총에 의하여 북도파로 계승되었다. 남․북도라 함은《속고승전》에서 낙양 아래에 남북으로 난 두 길이 있었는데 도총은 북도에서 4인을, 혜광은 남도에서 도빙 등 10인을 지도하였다는 데서 보인다.

 

그런데 후에 지론종 북도는 같은 뢰야망심을 주장하면서도 제9 무구식(無垢識)을 설정한 섭론종에 흡수되고 섭론종은 다시 법상종과 합해진다. 반면 지론종 남도계는 혜광 문하가 크게 번성하였는데 그 아래 도빙(道憑)․담준(曇遵)․법상(法上)이 유명하다. 담준의 제자에 담천이 있어 법상종을 세우고, 법상 문하에 정영사 혜원(523~592)이 있었다. 혜원은《대승의장》을 편찬하였으며, 이 혜원의 사상 또한 화엄종의 교학체계가 형성됨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되었다. 도빙의 제자에 정연이 있고 정연의 뒤를 이은 지정대에 이르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화엄종의 지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지엄과 법장 당시는 제가들이 심(心)의 분류 및 아뢰야식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였다. 망식설과 정식설은 뢰야연기와 진여연기의 대립을 야기시켰으니 이는 당시의 어려운 문제였다. 법장은 이러한 대승연기설을 종합하고 통일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스승인 지엄과 동시대인으로서 교세를 떨치고 있었던 현장의 법상종 사상을 초극할 수 있는 원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법장은 초월적 입장에 있는 법상 유식설에서 자료를 가져와, 이를 지론 남도의 정식설과 기신론의 진여수연설에 근거하여 공의 원리로 대립을 화해시켰다. 즉, 법장이 법계연기사상을 확립하는 데 있어 진여사상에 앉아 유식가에서 자료를 섭취하여 공의 논리에 의해 구성 변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화엄종의 유심설은《화엄경》을 소의로 하면서도 융성하였던 당시 중국불교의 유심사상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체계화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법장의 체계는 그의 스승인 지엄의 시도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서 별교일승 법계연기설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법장을 위시한 화엄종의 이러한 입장은 화엄교판에서도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화엄종의 성립이 같은 유심적 측면을 중시한 다른 종파와는 그 성립시기에 있어서 크게 다름을 보게 된다. 화엄종은 소의경전인《화엄경》의 번역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된다.《육십화엄》이 5세기 초에 번역되었는데 7세기의 지엄이나 법장 때에 와서야 교리가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의 전적이 번역되면서 바로 종파가 형성되었던 타 종파들과는 크게 다르다. 유심을 핵심으로 한 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종파들이 소의 논서의 번역이 이루어지자마자 형성되는 데 비해, 화엄종은 몇 세기가 흘러서야 종파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화엄종이《화엄경》자체를 소의로 한 데 비해 다른 종파는 경의 주석서가 번역된 것에 크게 힘입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엄종의 성립이 다른 종파에 비해 그처럼 시간적인 격차가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화엄종조로 모셔진 분 외에《화엄경》과 인연이 닿았던 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화엄경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화엄경》의 세계를 사상적으로 체계화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제18강 화엄경의 연구

 

1. 화엄오조의 생애와 저서

 

《화엄경》을 연구하여 저술을 하고 화엄교학을 일구어 간 분들은 화엄종조들이 주를 이룬다. 화엄조사들은《화엄경》의 주석 외에도 화엄사상의 선양에 기여한 많은 전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서 5조의 주요저술을 그 생애와 함께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러한 화엄관계 저술은 화엄교학을 이해하는 주요자료가 된다.

 

(1) 법순두순(法順杜順, 557~640) - 화엄행자

두순의 휘는 법순이며 제심(帝心)존자라고도 한다. 속성은 두(杜)씨이고 옹주 만년현 출신으로서 18세 때 인성사의 승진(僧珍)에게 출가하였다. 승진은 산야에 살며 청빈하게 정업을 닦은 수행자로 알려져 있다. 두순도 스승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미타염불을 권유하고 정토를 찬탄하며 오회문(五悔文)을 지어 스승의 사풍을 전하였다고 한다.

 

두순은《속고승전》에는 감통편에 소개되어 있는 신승(神僧)이다. 그는 평소에 신이로운 일을 많이 행하고, 입적 후에도 한 달이 지나도록 살빛이 선명하였으며 3년간이나 유해가 마른 채로 흩어지지 않고 주위에 향기가 퍼졌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알려져서 태종으로부터 제심이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항상《화엄경》을 지송하고 경에 의해 선관을 닦아 보현행을 체득한 화엄행자로 여겨진다. 제자인 반현지에게도 항상《화엄경》을 지송하고《화엄경》의 말씀에 의지하여 보현행을 닦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제자로는 반현지 외에 지엄이 유명하고 지엄을 키운 달법사,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나 이씨의 아들이 있었음이 전한다.

 

스님의 화엄관계 저서로는《오교지관(五敎止觀)》과《법계관문(法界觀門)》이 알려져 있다.《오교지관》은 화엄오교판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두순의 찬술이 아니며,《오교지관》이 법장이 지은《유심법계기》의 초고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소(小)․시(始)․종(終)․돈(頓)․원(圓) 오교의 입장에서 5문의 관법내용을 구별하고 전체가 화엄삼매에 들기 위한 관문으로 조직하고 있다.《유심법계기》의 오문에 상당하는 오교의 조직은 지엄에게서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그 이전 법순에게 있었을 리가 없으며, 이는 법장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음《법계관문》1권 또한 찬자에 대해서 근년에 여러 학설이 있다. 법장의〈발보리심장〉에 그 전문이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법계관문》의 내용은 진공관, 이사무애관, 주변함용관의 법계삼관을 설한 것이다. 이는 사사무애 십현연기의 근저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법계연기관을 고찰할 때 살피기로 한다. 홍각범(洪覺範)의《임간록(林間錄)》하권에는 두순의〈법신송(法身頌)〉이 전해진다.

 

(2)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 화엄교학의 기초자

지엄에 대해서는 제자인 법장이 지은《화엄경전기》의〈지엄전〉에 잘 전하고 있다. 지엄은 속성이 조씨이고 부(父)는 경(景)이며 감숙성 천수 출신이다. 지엄은 현장이 출생한 해와 같은 602년에 태어나서 현장보다 4년 뒤인 668년에 입적하였다. 12세 때 57세인 두순을 따라 출가한 뒤 두순의 수제자였던 달법사에게 맡겨 키워졌고 14세 때에 수계를 받았다.

 

지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인도승으로부터 범문도 배우고 여러 법사에게서 《섭대승론》 ․ 《사분율》 ․ 《실론》 ․ 《십지경》․

《열반경》등을 배웠다고 한다. 지엄은 남북조에서 수당에 걸친 중국불교의 흐름을 대부분 접하였을 정도로 불교의 여러 교학에 통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에 여러 경론이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지엄은 점차《화엄경》연구에 몰두하여 화엄을 중심으로 한 교학을 형성해 갔다. 지엄은 자신이 소의처로 삼을, 평생 나아갈 교학을 선택하려고 장경 앞에 서서 절한 후 서원을 세우고 잡은 것이《화엄경》이었다고 한다. 그후《화엄경》의 탐구가 그의 생활의 중심이 되어 갔다. 지엄은 곧 같은 지상사에 주석했던 지정(559~639)에게서《화엄경》강의를 들었으며, 장경의 주석서를 보다가 혜광의《화엄경소》를 접하고는 '별교일승 무진연기'의 화엄세계를 납득하게 되었다. 그후 어느 낯선 스님으로부터 "일승의 뜻을 알려고 한다면 십지중 육상의를 가벼이 말라"는 가르침을 듣고 두 달간 깊이 참구한 끝에 일승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화엄경》의 주석서를 지었으니 그것이《수현기》이다. 그때 지엄의 나이 27세라 한다.

 

지엄 문하에 의상․법장․혜효․반현지 등이 있다. 지엄이 청정사의 반야대가 기우는 꿈을 꾸고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을 때 혜효도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특히 의상은 해동화엄초조가 되고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3조가 된 분으로 주목된다.

지엄의 저서는 20여 부가 있으며 뜻은 풍부하면서도 문장은 간결하여 그 정신을 이해하는 자가 적다고 법장은 말하고 있다. 그 중에 진찬이라 인정받는 것은 7부이다. 화엄관계 저서로는 다음의 저술이 중시된다.

 

《수현기(搜玄記)》5권:《육십화엄》의 주석서로서《수현기》가 있음은 이미 보았다.《화엄경공목장(華嚴經孔目章)》4권:《육십화엄》에 대해 144개의 문항〔章門〕을 시설하여, 소승․삼승․일승의 차별을 설하여 일승화엄의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는 지엄의 62세 이후 만년작으로서 지엄사상의 원숙함을 보여 준다.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2권:화엄학의 중요한 이치를 53가지 문답형식으로 설명하였다. 소승․삼승과 일승화엄의 교설을 비교하고 화엄이 구경대승임을 설한 것이다. 58세 이후의 저술로 보이며《공목장》에서 이《오십요문답》을 인용하고 있다.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1권:십현연기문을 설한 것인데《화엄경》의 내용을 교리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이《일승십현문》은 두순이 설한 것을 지엄이 찬술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법장의《화엄오교장》이《일승십현의》와 유사하며, 지엄 찬술인 것에 대해서도 이설이 있다. 이에 대한 의심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비롯되며 이《일승십현문》의 지엄 찬술에 대해 이설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지엄의 전기에 의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지엄이 일승의 진의를 알게 되어《수현기》를 짓게 되었다고 하였으나,《수현기》에서는《일승십현문》에 대한 설명이 극히 간략하다. 따라서 일승십현에 대한 보강 설명이 필요한데 다른 저서에서는 이 요구가 채워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일승십현문》이《수현기》를 전후한 시기에 저작된 지엄의 저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의 진찬여부는 좀더 많은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육상장》:간략하지만 지엄의 육상원융관이 보이는 중요한 글이다.

 

(3)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 화엄교학의 대성자

법장의 전기자료는 최치원의《법장화상전》, 염조은(閻朝隱)의〈강장법사지비(康藏法師之碑)〉를 비롯하여 20여 종이 있다. 속성은 강씨이며 강거국인이다. 법장은 일찍이 불승을 깨닫고자 맹세하고 지엄으로부터《화엄경》강의도 들으며 문지라는 호도 받았으나, 지엄이 입멸한 2년 후인 28세 때 태원사에서 득도하였다. 32세 때 측천무후의 주선으로 십대덕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현수라는 호를 사사받았다고 한다.

 

법장이《화엄경》을 강론할 때 신이로운 상서로움이 보였다는 기록도 많이 전한다. 법장은 문지라는 호처럼 많은 화엄관계 전적을 남겨 중국 화엄교학을 크게 융성시켰던 것이다. 약 30부 100여 권의 저술 가운데 화엄관계 저술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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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20권:《육십화엄》의 주석서이다.《탐현기》는 법장이 45세에서 53세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니, 법장의 화엄사상이 원숙해질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 지은 저술에 보이는 설과 차이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 한 예가 십현연기설이다. 이《탐현기》에 보이는 십현은 신십현이라 하고, 34세경에 지은《화엄오교장》에 보이는 십현설은 고십현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탐현기》는 완성되기도 전에 신라에 유통되었다. 신라에서 유학간 승전(勝詮)을 통하여 의상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탐현기》의 구성 조직은 처음에 서문(귀경서와 총서)이 있고 다음에 10문을 열어《화엄경》을 해석하고 있다.

제1문에서는《화엄경》이 교설된 까닭을 여래성기품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은 무량인연이 있는 것이니 이에 의해 총별로 설명한 것이다.

제2문에서는 부처님 교설을 10가지로 분류하면서《화엄경》은 대승경이면서도 모든 부류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이기도 함을 서술하고 있다.

제3문에서는 교를 세운 차별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까지 유통되던 교판 가운데 10가지 설을 소개하며, 화엄교판인 오교십종판을 밝히고 있다.

제4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익을 입힐 근기를 구분하고 있다.

제5문에서는 능전교의 체를 열 가지로 분별하고 있다. 그것은 말이나 글에서부터 내지는 해인삼매에 의해 나타나는 문 등을 말하고 있다.

제6문에서는《화엄경》의 종취를 밝히고 있다. 이에 10설을 소개하고 있다. 말이 나타내는 것이 종(宗)이고 종이 돌아가는 곳이 취(趣)라고 한다. 이에 '인과연기 이실법계'도 말해지고 있다. 대방광은 이실법계이고 불화엄은 인과연기로 설명함도 여기에 보인다.

제7문에서는 경의 갖춘 제목을 10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제8문에서는《화엄경》의 전래와 번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제9문에서는 의리분제를 역시 10문으로 드러내고 있다. 십현연기를 설한 것이다.

제10문에서는 경문을 따라 해석하고 있다.

 

법장은 이《탐현기》에서 자신의 화엄경관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은 주요한 화엄교학으로 주목되어 왔다.

《화엄문의강목(華嚴文義綱目)》1권:《육십화엄》8회에 대한 경문과 내용의 골자를 설명한 것이다.

《화엄경지귀(華嚴經旨歸)》:지귀란 종지 귀취를 말하니《화엄경》의 대강을,《화엄경》의 설처․설시․교주․청법대중․교화의식 등 10문으로 나누어 간략히 말하고 있다.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2권:의상의 강의를 지통이 받아적은 추동기의 내용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그 진찬이 의심되기도 한다.

《금사자장(金獅子章)》1권:측천무후에게 장생전 뜰앞의 금사자로 비유하여 화엄교관을 나타낸 것이다.

《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4권:여래장심을 기본으로 하는 유심(唯心)의 입장에서 사사무애관을 설하고 있다.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5권:법장 이전의 화엄관계 연구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4권:법장의 저작 가운데 후세에 가장 많이 읽혀진 것 중 하나로서 화엄학 연구의 입문서이자 필독서로 간주되는《화엄오교장》이 있다.

《화엄오교장》은 화엄종의 교판론인 오교판에 근거하여 화엄학의 체계를 조직한 입교개종(立敎開宗)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는 화엄학 개론임과 동시에 화엄종의 입장에서 본 불교개론으로 일컬어진다.《화엄오교장》의 찬술연대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약 34세 때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화엄오교장》은 제목과 이본이 많다. 이본으로는 초본(草本)․송본(宋本)․연본(鍊本)․화본(和本) 등이 있다. 10문의 순서만으로 본다면 초본이 화본이며, 연본은 송본과 같다. 제호로는 연본과 화본이 같다.

《화엄오교장》은 신라에 있어서도 이본의 문제가 있었음이 고려시대 균여의《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 상술되어 있다.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인〈기해동서(奇海東書)〉에 따르면 법장이 자신의 저술도 보내면서 그 잘잘못을 가려줄 것을 청했다. 의상은《일승교분기(화엄오교장)》를 검토하고 나서《화엄오교장》의 순서를 일부 바꾸어서 전후의 의로가 통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정정본은 초본이고, 정정하지 않은 본은 연본이라 일컬어졌다. 일본의 화본은 신라의 초본과 일치한다.

《화엄오교장》의 제목으로는 8종이 있다. 송본의 제목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송대의 진수정원이 종밀의

《원각경대소초》를 전거로 해서 제호한 것이다. 그런데 법장이 직접 사용한 제호는〈기해동서(寄海東書)〉에는 '일승교분기'라고 하고 자신의 저작인《화엄경전기》에는 '화엄교분기'라 하고 있으므로 화엄일승교분기가 원의에 가깝다. '화엄오교장'이라 함은 최치원이 지은〈법장전〉을 따른 것이다.

《화엄오교장》의 구성은 다음 10문으로 조직되어 있다.

제1문은 일승과 삼승의 관계와 동별이교(同別二敎)를 말하고 있다. 화엄은 별교일승에 속한다.

제2문은 일승과 삼승의 교의와 섭익(攝益)을 밝히고 있다.

제3문은 법장 이전 10가의 교판을 소개하고, 화엄교판 확립의 자료로 삼고 있다.

제4문은 화엄종의 입교개종을 선언한 것이다. 전 불교를 오교십종으로 분류하고 화엄종을 최고위에 둔 것이다.

제5문은 승(乘)과 교(敎)의 관계를 밝힌 것이다. 화엄이 일체 모든 교를 융섭하는 일대 원교임을 서술하고 있다.

제6문은 교가 설해진 시기를 논한 것으로서《화엄경》이 성도후 최초설법임을 말하고 있다.

제7문은 교에 전후의 차별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제8문은 별교일승과 삼승교와의 상위점을 논하고 있다.

제9문은 소전차별(所詮差別)에서는 소승․삼승․일승의 심식․수행 등 10가지를 화엄오교판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화엄 별교일승의 가르침이 최고임을 논증하고 있다.

제10문은 의리분제(義理分齊)이니 화엄교학의 핵심인 법계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의상이 이 제9문과 제10문을 교체하였다.

이외에《화엄삼보장》2권,《의해백문》1권,《유심법계기》1권,《발보리심장》1권,《화엄삼매장》등도 알려져 있다. 법장이 55세 때 의상에게 보낸〈기해동서〉도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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