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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성 프란치스코 영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0. 5. 2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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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성 프란치스코 영성 프란치스코 (재속회) 


작은 형제회의 특징을 이루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즉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보편적 형제애의 영성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

어느 그리스도인치고 아니 어느 영성학파에게 있어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이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프란치스칸 영성의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은 수도생활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성소의 기초로서의 복음. 프란치스코 성인은 당시 기존 수도회들의 회칙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하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곤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복음적 성소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성인은 긴 회개여정 끝에 복음의 메시지들을 통해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은수자의 옷을 입고 은수자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포르찌웅쿨라 성당에서 사도들의 파견Missio Apostolorum에 관한 설교(마태 10,7-13)를 들은 후, 그의 성소는 보다 구체화되고 확고하게 된다. 여기서 성인은 주님께서 그를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고 파견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이다"라고 외쳤다(1첼라노 22; 대전기 3,1; 세 동료 25). 이 순간에 그가 즉시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생기자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통해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첫 동료들과 함께 산니콜로 성당으로 가서 그 당시 만연했던 대중 신심인 소위 사도들의 제비뽑기Sortes Apostolorum를 통해 복음서를 세 번 펼쳐보았다. 이렇게 해서 뽑은 세 구절은 ①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마태오 19,21) ② 여행 중에 아무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루카 9,3) ③ 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오 16,24)였다.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주제였고, 이에 성 프란치스코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와 앞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이들의 회칙입니다"라고 하였다(대전기 3,3; 세 동료 29; AnP 11). 성인은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성소를 찾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주님 친히 가르쳐 주셨다"고 말한다(유언). 그래서 그는 당시 수도생활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한 반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출처: 권고 6장)


어느 날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성 마리아 성당에 머물고 있을 때 레오 형제를 불러 말했다. '레오 형제, 기록해 놓으십시오.' 레오 형제가 대답하였다. '예, 준비되었습니다.' 프란치스꼬가 말했다.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기록해 놓으십시오. 어느 소식 전달자가 와서 파리 대학의 모든 교수들이 우리 수도회에 들어왔다고 전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참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으십시오. 마찬가지로, 알프스산 너머 모든 고위 성직자들과 대주교들과 주교들이 형제회에 들어오고 또 불란서의 왕과 영국의 왕이 형제회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해도, 그런 것들이 참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으십시오. 마찬가지로, 나의 형제들이 이교도들에게 가서 그들 모두를 신앙에로 개종시켰다고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병든 이들을 고쳐 주고 많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큰 은총을 받았다고 전한다 해도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안에는 참된 기쁨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페루지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밤이 깊어 이곳에 도착합니다. 때는 겨울이고 나는 진창에 빠져 추워 떨고 있습니다. 차갑고 시린 물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수도복 자락에 들러붙어 피가 나올 정도로 다리를 치면서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내가 진창에 빠지고 추위와 얼음에 떨며 문에 다가가서 오랫동안 문을 두드리고 부른 다음, 마침내 문지기 형제가 나와서 물어 보기를 '당신은 누구요?' 하자 '나는 프란치스꼬 형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썩 물러가거라. 지금은 돌아다니는 시간이 아니니 너는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또 다시 애걸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썩 물러가거라.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놈아, 이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도 많고 훌륭한 사람들도 많으니,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또다시 문 앞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늘 밤만이라도 저를 받아주십시오'라고 애걸합니다. 그러나 그는 '안돼, 십자가회 수도원에 가서 부탁해봐'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경우 만약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바로 여기에 참된 기쁨이 있고 또한 참된 덕행도 영혼의 이익도 여기에 있다고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출처: 영적 권고, 참되고 완전한 기쁨. 이 글에서 성인은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만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사실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람이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매달릴 때 그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양식.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으로 제시한다(2회칙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일반화되어 있었던 정주적定住的인 양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설교적인 생활양식을 기본 생활양식으로 삼게 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글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도가 말합니다"라는 표현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33). 그리고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루가 9,24)라고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이 자기 장상의 손 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장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본인 자신이 알고, 또한 그 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참된 순종이 됩니다(권고 3장)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중심주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대는 교황권이 지고의 위치에 있는 시기였고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황금기인 시대였다. 지상의 왕권은 교황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풍미한 그리스도론은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면서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 통치하시고, 영광중에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따르게 될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결국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를 거듭 요청하게 된다.


아무도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십시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 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창세 1,26 참조)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과 더불어 그분을 못 박았으며, 그대는 지금도 악습惡習과 죄악罪惡을 즐기면서 그분을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1고린 13,2 참조) 모든 이상한 언어를(1고린 12,28) 해석할 수 있고, 천상의 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리 마귀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2고린 12,5 참조)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권고 5장)


 

회개생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었다. 성인은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씨시의 회개자들이라 불렀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 회개는 마음의 변화, 의식의 변화, 시각의 변화였다(유언 1-3 참조). 실제로 그와 초기의 동료들이 교황님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 받고 처음으로 받은 공식 소명은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들은 먼저 자신들이 회개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삶으로 보이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할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가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권고 27장)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의 두 번째 측면은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이라는 것이다. 생활양식 자체가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들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계층의 그리스도인에게 개방된 영성. 교회 안에서의 수도생활의 역사를 보면, 어떤 수도생활 양식은 성직자 중심이고 또 어떤 생활양식은 수도자 중심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직계에 속하든 평신도계에 속하든, 또 출신 신분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에게 개방하여 모두를 받아들였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계급과 신분의 지장없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으며(글라라회),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다(재속 프란치스코회). 이리하여 그는 신분 계급 여하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실현에 옮겼다.


교회 안에서의 영성. 프란치스칸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시초부터 자신의 성소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를 교회가 가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초기 형제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을 교황 성하로부터 인준 받으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복음적 운동들은 성인처럼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사는 삶을 주창하였지만 때론 교회에 반기를 들며 교회 없는 삶의 구조를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을 범하기도 했다. 성인은 이러한 이단적인 오류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친히 사도들을 주추삼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삶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주 형제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했으며, 입회의 조건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기도 했다. 어떤 속화되고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 해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도 가르쳤다. 이렇게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과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요소였다. 그래서 그는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2회칙 12,4)


하느님의 종들은 성직자를 존경할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관습을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들에 대해 신앙심을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그리고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비록 그분들이 죄인이라 해도 주님 자신만이 이들을 판단하는 것을 당신 자시에게 유보시키시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기 자신들도 이를 영하고 자신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직분은 다른 어는 직분보다 더 큰 것인 만큼,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권고 26장)


삶의 영성.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이끌어준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는 프란치스칸적인 방법은 어떤 사업이나 거창한 활동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삶으로써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요 회개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는 어떤 수도회들의 카리스마처럼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복음을 몸소 살아감으로써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생활 혹은 삶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이 생활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은.."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사업이나 활동보다는 형제적인 삶, 회개의 삶, 복음적인 생활이 기초가 된다. 사업이나 활동은 삶의 결과로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을 통해 스스로 복음화되고 또 복음화시키는 것이 작은 형제들의 제1차적인 과제였다.


선교적 영성.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부름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열려있기 마련이다.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선교적 열정에 북받쳐 수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고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성지탈환의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 그는 동방으로 건너가 홀몸으로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으로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부이며 스승으로서의 선교적인 모범은 작은 형제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서 늘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선교적 열정의 덕분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교와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선교 프로젝트들이 활성화되고 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 성소는 그 본질이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음과 보편적 형제애의 영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 선택. 프란치스코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 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 형제들은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 한 말 한 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뺨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마태 5,39 참조)(권고 14장)


일과 애긍.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 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1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 살아가게 된다.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 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이든 모든 이가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마태 5,44; 루가 6,27 참조).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줄 것입니다(권고 9장)


정의, 평화, 환경보호, 보편적 형제애. 나아가 성인이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동물과 식물, 세상 모든 것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로서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평화의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권고 15장)


-참고서적.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작은 형제회 한국관구, 분도출판사), 기쁨에 찬 가난(성 프란치스코의 영적권고 묵상집, 프란치스코출판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J.요르겐센, 프란치스코), 보나벤뚜라에 의한 성프란치스꼬 대전기(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수도회 한국관구, 분도출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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