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성 프란치스코의 德論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0. 5. 22. 00:20

본문

성 프란치스코의 德論


                                                    김찬선(레오나르도) ofm




덕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는 ‘선을 사랑하는 습성’을 지닌 인간의 지성과 의지의 능력이 온전하게 발전된 상태요, 어떤 상황에서도 옳고 좋은 것을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덕은 분명 선과 관련이 있다. 선을 보유하고 간직하는 능력, 선을 키우는 능력, 선을 행하는 능력, 선을 나누는 능력 등이다. 프란치스코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데, 설교에 관한 그의 회칙에서 ‘설교자들의 말은 선별된 말이어야 하고 순수한 말이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들은 악습과 덕행, 벌과 영광을 선포하며, 이 세상에서 주님이 간단 명료하게 말씀하셨으니 간결한 말로 하십시오’(2회칙9,3-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덕을 악습과 대조되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덕은 선과 관련한 것으로 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형성되나?


그런데 악습이 악행 즉 죄의 반복으로 인해 형성된 능력, 악을 불러오고 재생산하고 키우고 전파하는 능력이듯이 덕 또한 선행의 반복으로 인해 형성된 능력일까? 프란치스코는 악습처럼 덕도 반복되는 인간의 선행에 의해 덕이 형성되는 것으로 봤을까? 교회 신학은 덕을 자연적인 습득덕과 초자연적인 주부덕으로 나누고 자연덕을 인간의 반복되는 선행의 습관에 의해 형성된 능력이라고 얘기하는데, 프란치스코는 모든 덕은 注賦德 또는 天賦德으로 본 것 같다.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그는 “지극히 거룩한 덕행들이여, 여러분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이라고 노래하면서 덕들의 원천이 하느님이고 그 덕을 지켜주시는 것도 하느님으로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선은 모든 선, 지상 선, 충만한 선,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인간에서 나오는 것은 악습과 죄악뿐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주의기도2; 1회칙17,7참조). 모든 선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선을 갈망하는 선한 사람도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선을 인식하고 갈망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선을 받아들이고 키우고 전파하고 행하는 능력도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악습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에게서도 덕이 나오지 않을까? 물론 하느님의 덕이 인간 안에 주입되도록 받아들이는 덕은 하느님의 덕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습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몫이다. 앞서 덕을 ‘선을 사랑하는 습성’을 지닌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온전히 발전된 상태라고 정의하였는데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모든 덕이 하느님에게서 옴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모든 선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소유하면 선으로 우리 안에 있다. 반대로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지가 선을 소유 의지에 의해 소유하는 순간 선은 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의지인 것처럼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지다. 자기 의지가 얼마나 육의 정신에 이끌리기 쉬운지를 알고(조명의 은총으로 인한 겸손한 지성의 작용: 영적인 지혜) 자기 의지를 자유 의지로 포기하고 하느님 뜻에 맞추면(의지의 작용에 의한 순종) 자기의 선과 덕은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선과 덕은 풍요해 진다. 반대로 자기 의지가 얼마나 육의 정신에 이끌리기 쉬운지를 모르고(교만하기 때문에 모르고 조명의 은총도 거부: 육적인 지혜) 자기 의지를 자유 의지로 포기하지 않고 자기 의지를 고집하면 선을 얻으려는 것이 악이 되고, 덕을 얻으려 해도 덕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선에 대해서 가난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에 대한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그 덕을 청해 받는 것이며, 그 덕을 지켜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완전한 가난은 덕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요, 가장 완전한 순종은 덕을 자기 힘과 능력으로 습득하려는 것을 포기함이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청년에게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라고 대답하시며 선을 하느님께 유보하고, 하느님만이 선하다고 하셨다. 존재가 곧 선이신 또는 선하신 존재만 선과 관련한 능력, 즉 덕이 있는 것이며 다른 존재는 그 덕을 받아들이는 덕이 있을 뿐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교만하여 육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선과 덕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것이고 그분에게서만 나옴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그 선과 덕을 자기 힘으로 자기의 것이 되게 하려 한다. 그러나 겸손하여 영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선과 덕에 있어서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고, 선과 덕을 하느님에게서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선과 덕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좋은 뜻에 자기의 뜻을 맞추는 것, 즉 순종의 덕만이 있을 뿐이다.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1 여왕이신 지혜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순수하고 거룩한 단순성과 함께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2 귀부인이신 거룩한 가난이여,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겸손과 함께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3 귀부인이신 거룩한 사랑이여,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순종과 함께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4 지극히 거룩한 덕행들이여,

     여러분의 원천이신 주께서 여러분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6 한 가지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가지게 됩니다.


7 그러나 한 가지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


8 그리고 어느 덕이든지 악습과 죄악을 부끄럽게 합니다.


9 거룩한 지혜는 사탄과 그의 모든 간계를 부끄럽게 합니다.


10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육신의 지혜를 부끄럽게 합니다.


11 거룩한 가난은 탐욕과 인색과 이 세상의 근심을 부끄럽게 합니다.


12 거룩한 겸손은 교만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부끄럽게 합니다.


13 거룩한 사랑은 악마의 온갖 유혹과 온갖 육적인 유혹과 두려움을 부끄럽게 합니 다.


14 거룩한 순종은 온갖 육신적이며 육적인 원의를 부끄럽게 합니다.


15 그리고 거룩한 순종은 육이 영에 순종하고 자기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육신을 제  어합니다.


16 순종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17 모든 가축과 야수들에게까지 복종케 하고 그들 수중에 있게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


악의 경험인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은 인간이 선과 덕에 있어서 얼마나 유한한지를 깨우치시는데 이 깨우치심으로 겸손해져 영적인 지혜를 얻어 선과 덕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깨우치심에도 끝까지 교만하여 자기 힘으로 선과 덕을 얻으려는 사람은 악과 악습만이 자신에게 남게 된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초라고 지혜서는 얘기하고 있는데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氣高萬丈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 최고라 생각하기에 上智를 받아들일 자세가 애초에 안 되어 있는데 반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겸손함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받들어 모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지를 알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사물이 무엇인지를 잘 알며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고, 마찬가지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무엇이 제일 중요하고 우선하는지를 분별하게 하기에 덕 중의 덕이며 순수하고 거룩한 단순성과 자매 관계이다.  



가난과 겸손


덕이란 앞서 보았듯이 선과 관련한 능력이다. 선을 얻어 간직하고 발전시키고 나누는 능력이라 할 것이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가난과 겸손도 말할 것도 없이 선과 밀접하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표현보다 ‘소유 없이(sine proprio)'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이며,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은 결과가 가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선을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가? 프란치스코의 생각은 아주 간단하다. 첫째는 그 선이 하느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가난을 얘기할 때 마치 자기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사실은 우리 인간이 본래 가난하다. 형이상학에서 얘기할 때 선이란 내가 바라는 것이고, 내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이다. 그러기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선이고 그래서 모든 선의 주인이 되시지만 인간은 전능하지 않기에 바라는 것, 즉 선을 원하는 대로 이루지도 소유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가 아니라 소유하려 하면 하느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그럴 경우 선이 오히려 악이 된다.  


선을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온갖 선을 내려주시는 좋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저 주시는 대로 받기만 하면 선하신 분이 주시는 것이기에 다 선이 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소유하려 하면 그 옆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소유하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진정 자기에게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런 믿음이 있을 때 무엇이든 다 좋은 것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좋지 않으면 좋은 것과 함께 싫은 것이 있기 마련이기에 어떤 것이 좋으면 다른 것은 좋지 않은, 그래서 나에게는 악이 되는 것이다.


선을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하느님만이 완전한 만족을 주는 선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선만을 소유하기 위해서이다. 선이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님을 앞서 보았는데 왜 인간은 선이 자기의 것이 아님에도 선을 소유하려하고, 소유하려던 선이 악이 되는데도 소유하려 하는가? 너무 엉뚱한 대답처럼 보이지만 선이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것이다. 악이라면 누가 소유하려하겠는가? 앞에서 선이란 내가 원하는 것인데,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못 가진 새로운 것을 보고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 지금까지 좋던 것(선)이 나쁜 것(악)이 되어 더 이상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싫증을 내며 못 가진 것은 좋아 보여 소유하려 든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려 들지 않으려면 질적 양적으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어떠한 선의 결핍도 느끼지 않고, 그래서 욕구도 불만도 없는 완전히 가난한 사람이 되던지 더 이상 가질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진정한 부자가 되던지 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완전히 가난한 자가 될 수 있고 모든 것을 소유한 진정한 부자가 스스로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럴 능력이 없으면서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무한을 인식하고 누리려하는 존재다. 그러니 인간은 항상 그리고 무한히 선의 결핍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상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 모든 선이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면 완전한 만족으로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않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아오스딩의 말처럼 님 안에 쉬기까지 안식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우기까지는 무한히 결핍을 느끼고, 끊임없이 대리 만족케 할 무엇을 소유하려들  것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겸손을 가난의 자매라 부르고 있고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전기에서 겸손을 모든 덕의 기초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겸손이란 인간이 얼마나 가난한 존재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본래 가난한 자기임을 알 때에야 인간은 진정 가난할 수 있다. 그러니 가난은 만덕의 기초이고 특히 가난의 자매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겸손은 단지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높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다(권고 19번 참조). 하느님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진정 겸손하게 되고, 진정 겸손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 뵈옵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은 믿지 않고 그저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순종 잘하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서는 안 된다.  



사랑과 순종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프란치스코는 이어서 사랑과 순종을 얘기한다. 가난과 겸손이 바탕이 될 때 사랑과 순종은 가능하고 완전하다. 가난치 못할 때 인간은 사랑하지 못하고, 가난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할 때 순종치 못한다. 왜 그럴까?


가난하지 못할 때 인간은 사랑하기보다는 좋아하게 되고, 좋아할 때 인간은 소유하려 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좋아할 때 소유하고자 하고, 소유하고 싶으면 좋아하게 된다. 도대체 좋아하는 데도 소유치 않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고 싫은데도 소유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싫은 것을 소유하려는 사람도 없고, 좋은 것을 버리려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선-소유의 인간 관계는 사랑인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아닌 경우가 많고, 그래서 미움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존재와 좋아하는 것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을 하면 존재와 좋아하는 것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것을 소유치 않고 그래서 좋고-싫고의 경지를 넘어서 오직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고 그 바람에 존재가 소외되는데, 사랑의 경우는 존재를 바라보고, 존재를 살리고, 존재를 존재하도록 유지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순종이 무엇보다 강조되고 순종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란치스코는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사랑의 자매로 순종을 부르고 있고, 그의 글 여러 곳에서 사랑의 순종을 얘기한다. 사랑이 선의 소유라는 만족을 넘어선 것처럼 순종도 자기 좋을 대로 무엇을 하는 즐거움의 만족을 넘어서는 것이다. 내 좋을 대로 무엇을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그이가 기뻐할 일을 원하고 실천하는 것이다(형제회 편지의 기도 참조). 그러기에 순종이야말로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성령과 남에게 완전히 자신을 개방하고 순응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그 만큼 자기는 시체가 되고, 상대의 뜻대로 되어질 채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 경우 상대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아무런 고려 사항이 아니다. 순종의 이유, 즉 동기와 목적이 상대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높고 낮음 등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이 순종은 더 나아가서 사람에게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가축과 야수들에게까지 복종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