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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전기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0. 5. 22. 00:19

본문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전기


서론

1. 진실로 겸손하고 가난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최근에 당신의 종 프란치스꼬에게서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지극함을 묵상할 수 있으며 그의 모범은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며 또한 우리의 복된 희망을 열심히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한다. 그는 경멸당하고 천시 당했으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당신을 낮추고 친절로 대하시어, 그를 단지 잿더미에 딩구는 번민에서

들어 높이시고 세상에서 그를 뽑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가 복음적 완덕의 삶을 증거 하도록 고취시키고 그를 지도자와 사도로 만드셨다. 그가 빛을 증거 함으로써 신앙인들의 마음에 빛과 평화의 길인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준비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는 빛이 되기로 되어 있었다. 자신의 생활과 가르침의 영광스런 광휘로써 프란치스꼬는 구름 사이에서 빛나는 샛별(집회 50,6)과 같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밝은 빛으로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하였다. 영광의 구름 속에서 빛나는 무지개와 같이(집회 50,7) 그는 자기의 몸 안에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품고서 마치 진실한 평화의 천사처럼 인간에게 평화와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세례자 성 요한처럼 그는 광야 가운데서 길을 - 즉 완전한 가난 속에 내포되어 있는 완전한 포기로써 - 준비하도록, 또한 말과 표양으로써 회개를 가르치도록 하느님으로 뽑혔다.

하느님은 그를 거룩한 은총으로 채워주셔서 그는 영웅적인 덕으로 찬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세라핌 천사에 상당할 만한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는 동안 그는 예언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천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천사의 반열에 속해 있는 사람처럼 그는 불 수레에 태워져 하늘로 들어올려졌다. 그래서 그의 인생  행로에서 알게 되듯이 “엘리야의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루가 1,17) 그가 온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의 또 다른 친구, 즉 사도이며 복음사가인 요한이 한 예언에 나오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인호를 지니고서 동쪽으로부터 오고 있는 천사의 이미지로 언급된 사람이 그라는 사실을 믿을 만한 온갖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묵시록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여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또 보니 다른 천사 하나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읍니다: (묵시 7, 2)


2. 그의 뛰어나고 완벽한 성덕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온갖 의심의 여지를 넘어서서 이 하느님의 전갈 자는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사랑받을 가치가 있으며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전 세계가 칭송하는 하느님의 종 프란치스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사는 동안마저도 그는 천사들의 하자 없는 상태를 함께 누리고 있어서 주님을 완전히 따랐던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만한 많은 근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너희를 불러 모아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베옷을 입으라고”(이사 22,12) 하며 회개의 십자가를 그어주고 십자가 모양으로 된 자신의 수도복을 입혀주며“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주는”(에제 9,4) 사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우리들의 더할 나위없는 증거를 지니고 있으니 이것은 그의 몸에 새겨져 있고

그리고 그를 살아 있는 하느님 즉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같이 만든 진실 그 자체의 표지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도 아니며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진 일도 아니고, 오직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령이 지닌 기적의 힘으로 성취된 것이다.


3. 나는 그처럼 우리가 본받을 만하고 우리의 모든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의 생애를 쓰기에 나 자신이 보잘것없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만일 나의 형제 수사들의 열렬한 바람과 총회의 한결같은 요구가 아니었다면 이를 결코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그분에 대한 의무가 있기에 나는 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거니와 어린 소년시절에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오직 그의 중재로 인해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일 지금 그를 찬미하기를 거절한다면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받을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서 하느님이 나를 구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나 자신의 체험으로 그의 중재의 능력을 알았으며 내가 지금 그의 생애를 쓰는 주요한 이유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부분적으로 잊혀져 있는 그의 덕과 그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에 관한 여러 가지의 기록들을 한데 모아보자 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은  그와 함께 살았던 수사들이 죽을 무렵이면 다 잃어버릴 것이다.


4. 나는 후세들을 위해서 이것을 기록하기 전에 그의 생애에 관한 진실을 완전히 확신하고 싶고 또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출생지로 가 보았으며 그가 살고 죽은 지방도 방문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그의 가까운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특히 그의 성스러움을 직접 경험했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본받고자 노력했던 사람들과 조심스럽게 회담할 수 있었다.

이들 증인들의 솔직성과 그들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우리들이 그들의 증인을 분명히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나는 문학적인 문체를 사용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단도직입적인 기술이 어떠한 교묘한 문학적인 문체로 시도하는 것보다 독자들에게 더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항상 연대적인 순서를 따라 적은 것은 아니다. 대신에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좀더 조직적으로  하여, 동시에 일어났지만 서로 다른 주제들에 관한 것들은 분리시키는 

반면, 각각 다른 시각에 일어났지만 유사한 주제에 관한 사건들은 함께 모아 두었다.


5. 프란치스꼬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15장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 내용은 세속에서의 그의 생애 - 하느님께 완전히 그 자신을 맡기고 성당 셋을 수리하다 - 수도회의 설립과 회칙의 인가 - 그의 시도 아래서 수도원의 진보와 그 전에 승인된 회칙의 확인 - 그의 생활의 엄격함과 피조물이 그에게 준 위안 - 그의 겸손과 순종 그리고 그의 가장 작은 소망까지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심 - 청빈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가 필요로 한 것은  기적적으로 채워짐 - 그의 동정심과 피조물이 그에 대해 지닌 사랑 - 순교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갈망 - 기도에 대한 그의 헌신 - 성경에 대한 그의 이해력과 그의 예언의 영 - 그의 설교의 효력과 병을 낫게 하는 능력 - 오상 - 그의 끈기 있는 인내심과 죽음. - 그의 시성식과 유해의 운반이다. 마지막 부분은  그가 죽은 후 일어난 기적들을 적어 놓았다.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전기

어린소년이었을 때 프란치스꼬는 세속 사람들 가운데서 살았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랐다. 일단 읽고 쓰는 걸 좀 알게 되자 그는 수익이 좋은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그는 항상 향락할 수 있었으나 쾌활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결코 정욕의 유혹에 따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산 사람들은 약삭빠른 사업거들이었으며 그 자신 또한 매우 돈벌기를 갈망했으나 부를 축적하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청년이었을 때 이미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에 불어넣어 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아낌없는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은 그가 성장하였을 때에도 그와 함께 했으며 그의 마음을 자비심으로 가득 채웠기에 그는 복음에 귀 기울이기를 마다하지 아니했으며 특별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번은 그가 장사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자기의 습관과는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애긍을 청하는 거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보내버렸다 그 후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는 그는 그 거지를 즉시 뒤 따라 가서 후한 희사를 하였다. 그때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간청하는 누구에게나 줄 것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거절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 그는 이 결심을 죽는 날까지 지칠 줄 모르는 충성심으로 지켰다. 그래서 그는 은총을 더욱더 받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더 커지는 보답을 받았다. 후에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완전에까지 본받게 되었을 때, 자주 말하기를 자신이 세속에 있을 때조차도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깊이 감동하지 않고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선한 생활, 그의 온순함과 인내심, 은혜를 베푸는 데 있어서 거의 초인적인 자발성,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까지 관대함을 베푸는 것과 함께, 그의 명랑한 태도는 젊은이로서는 그가 뛰어나다는 것을 시사하는 다가올 일의 징조처럼 보였다. 사실 하느님의 영감은 받았던 것같이 보이는 그 마을의 한 시민이며 매우 소박한 한 사람은 어느 날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를 만났을 때 자기의 외투를 벗어 그의 발아래 깔고 프란치스꼬가 앞으로 위대한 일을 하고 모든 교회로부터 존경받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프란치스꼬는 그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조금도 몰랐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으며 그의 마음은 인간성의 타락 때문에 세속의 일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그는 결코 그의 마음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천상적인 실체의 맛을 얻지 못했다. 역경은 사람의 정신적인 지각을 예리하게 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야훼의 손에 잡혔으며 가장 높으신 분이 그에게 관대함을 베푸셨다(에제 1,3 참조). 하느님은 그의 영혼이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도록 오랜 병고로 그를 낮추셨다.

하느님은 그에게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네가 보았던 환시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네 안에서 이루어질 영적인 일을 예언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침에 프란치스꼬는 지체하지 않고 아씨시로 돌아갔다. 그는 너무 기뻤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는 이미 순종의 귀감으로 끈기 있게 하느님의 뜻을 기다렸다.

그는 상업의 바쁜 생활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여 마침내 그는 하느님께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다 쇠진되고 천상의 고향에 대한 바램으로 모든 세상을 기꺼이 포기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준비가 되여 있다. 그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했음을 깨달았으며 복음에 나오는 현명한 장사꾼처럼 어떻게 하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발견한 진주를 살 수 있는가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없었다. 그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으나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적인 모험은 세상을 거부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첫 발자국이 되리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씨시 아래 있는 들을 말을 타고 가다가 프란츠스꼬는 한 나병환자를 만났다. 전혀 뜻밖에 만난 것이어서 프란치스꼬는 그를 보았을 때 혐오감을 느꼈다. 그때 그는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결심을 상기했다.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 그 불쌍한 사람에게 달려가 입 맞추었다.그  나병환자는 무언가 얻기를 바라며 손을 내밀었다. 프란치스꼬는 돈을 그 손에 쥐어 주고는 키스하였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 사방으로 이리저리 똑똑히 바라보았으나 거기엔 나병환자의 자취도 없었다. 그는 깜짝 놀랐으나,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고 미래에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을 결심하며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죄를 참회할 수 있는 외딴 곳을 번번이 찾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곳에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하며  그의 전 영혼을 토로하여 그는 결국 길고도 끈질긴 기도 끝에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기에 합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평상시 자주 가는 한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열정에 넘쳐 하느님께 완전히 몰두되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의 영혼은 그분을 보자 녹아버렸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의 마음속 깊이 생생하게 새겨져서, 후에 그의 생의 마지막 무렵에 그가 고백하였듯이,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한숨과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그는 즉시 이런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전해졌음을 알았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 다”(마태 16,24)

또한 성 베드로의 무덤을 순례했다. 교회 앞에 모여 있는 많은 거지무리들을 보았을 때 그는 어느 정도는 자기 내부의 신심에 의해 이끌리고 또 어느 정도는 가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감동되어 그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옷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거지의 누더기 옷을 입었고 영혼의 진기한 기쁨으로 가득 차 거기에 모인 군중들 가운데서 하루 종일을 보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빛을 일으키는 것을 배우게 되고, 점차적으로 복음을 완전히 지키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는 외적인 고행에 큰 관심을 쏟았고 그래서 그의 전 생애는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야외에서 묵상하기 위해 시내를 떠나서 오래되어 다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 성당 곁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는 들어가서 기도 하고 싶었다. 그 성당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그려진 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그는 영혼의 큰 안식을 얻었고, 십자가를 응시했을 때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그때 갑자기 그는 십자가로부터 세 번이나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프란치스꼬야,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 이렇게 쓰러져 가는 것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프란치스꼬는 성당에 혼자 있었으므로 그 목소리에 놀랐다. 그러나 메시지의 힘은 그의 마음을 꿰뚫었으며 그는 탈혼 되었다.

그 메시지는, 후에 성령이 그에게 이를 깨닫게 하고 그가 수사들에게 설명하였듯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사도 20,28) 전 세계의 교회를 말한 것이지만 그는 헐어진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는 데 기꺼이 자신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세속적인 결별에서

가난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프란치스꼬는 기꺼이 동의했으며 스스로 주교 앞에 출두했다. 거기서 그는 지체 없이 -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마디 말도 듣거나 말하지 않고 - 즉시 옷을 벗어 그것을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때 그는 입고 있었던 좋은 옷 아래에 고행할 때 입는 거친 털옷을 맨살 위에 입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는 열정과 열심에 차서 그의 바지조차 벗어 주고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그때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이제까지 나는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거리낌 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꼬는 세상을 무시하고 모든 세속적인 욕망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 도시를 떠나 세상에 대한 근심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러한 곳에서 고독과 고요함 가운데 하느님의 은밀한 계시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그가 불어로 기쁘게 하느님을 찬양하며 숲 속을 걷고 있었을 때 갑자기 도둑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그를 위협하고 누구냐고 묻자 “나는 위대한 왕의 사자이다”라고 말하며 눈 덮인 도랑에 그를 던져 버렸다. 그런 말을 하며 그들이 도망쳐 버리고 난 뒤 도랑에서 나와 기쁨에 넘쳐 모든 것의 창조주를 찬양하는 프란치스꼬의 소리가 숲에 메아리쳤다.

많은 사건 중  - 스뿔레또의 이웃에 입술과  뺨이 썩는 병으로 고통 받고 있던 한 사람아 있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의 중재를 청하기 위해서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성 프란차스꼬를 만났다. 그는 성인의 발등에 경건한 마음으로 키스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는 이를 허락지 않고 자기가 그의 입에다 키스했다. 동정심에 차서 그는 자기의 입술을 그 끔찍한 상처에 대었다. 그러자 즉시 그 병은 사라지고 아픈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였다. 우리는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하게 하는 그의 놀라운 겸손과 그리고 이러한 기적을 행하는 그의 뛰어난 능력 중에서 어느 것을 더 많이 찬미해야 하는가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는 천사들에 대한 존경심 에서 또 그리스도의 어머니께 대한 사랑에서 영원히 그곳에서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세상의 다른 어떠한 곳보다 이곳을 좋아했다. 그가 매우 작은 방법으로 종교적 생활을 시작한 곳도 바로 여기였으며, 그토록 뛰어난 발전을 이룬 곳도 여기였으며, 그가 행복하게 생을 마친 곳도 여기였다 . 그는 죽을 때 형제 수사들에게 이곳을 다른 어떠한 곳보다 먼저 부탁하였다. 왜야하면, 그곳은 성모 마리아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수사들 중 한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뽀르치웅꼴라에 대한 한 환시를 보 왔다. 그는 많은 장님들이 성당 주위에 둥글게 모여 무릎을 꿇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 왔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손을 뻗치고는 하느님께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때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들 모두를 감싸고는 그들에게 갈망하던 시력과 건강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이곳은 성 프란치스꼬가 신적인영감에 의해 작은 형제회를 세운 곳이며 그가 수도원을 세우고 복음을 설교하기 전에 세 성당을 수리하게 그를 인도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섭리였다. 이것은 그가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더욱더 영신적인 성취로, 정당한 순서로 적은 것에서부터 더 위대하게 발전한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것은 그가  성취할 것을 예언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가 수리한 세 건물과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프란치스꼬의 지도 아래, 또 그의 회칙과 가르침에 따라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새로워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로 이뤄진 이 세 겹의 군대는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현재 이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한 사도의 축일인 어느 날 그는 미사에 참례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우리의 주님이 당신 제자들을 설교하라고 보내시면서 복음에 따라 생활해야 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구절이 나왔다. 프란치스꼬는 제자들이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한 다”(마태10,9_10)는 것을 들었을 때에 너무도 기뻤다. 그는 사도 적 가난에 대한 사랑으로 이 구절의 의미를 즉시 파악하고 기억에 새겼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라고 외쳤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그는 신을 벗고 지팡이를 버렸다. 그는 어떤 종류의 돈이나 부든지 싫어하였으며 단지 겉옷 하나만 입고는 가죽혁대 대신에 띠로 바꾸어 맸다. 그의 마음이 전적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가 들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며 모든 것에 있어서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생활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신적인 영감에 의해 그는 이제 복음적인 완덕을 좇기 시작했으며 또한 다른 이들로 하여금 회개의 생활을 하도록 초대하였다. 그의 말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결코 공허하거나 우스꽝스런 것이 아니었으며, 그 말은 마음에 곧 바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그의 청중들은 놀랐던 것이다. 그의 모든  설교에 있어서 그는 청중들에게, 그가 후에 확신하듯이, 계시에 의해 배운 인사의 한 형식인 “주께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참조: 요한14,27)이라고 말하면서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예언자들의 영으로 고취되어 평화와 구원을 외쳤다. 유익한 경고로 그는 전에 그리스도와 반복하고 구원에서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진실한 평화의 유대 안에서 일치시켰다.

스뿔레또 계곡에 도착한 프란치꼬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종인 프란치스꼬는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동료 수사들의 제의를 믿지 않고, 대신에 끈기 있는 기도로써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애썼다. 마침내 하늘로부터 온 계시에 의해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마귀가 빼앗아 가려고 애쓰는 영혼을 구하고자 하느님께로부터 보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지기 혼자만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만인을 대신해서 죽기까지 하신 선하신 그분의 모범을 따라 모든 이 들을 위해서 사는 길을 택했다.

수사들이 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시오. 오, 그리스도여! 우리는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를 예배하오며 주를 찬송하오니, 이는 주의 거룩하신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 하느님의 격려로 프란치스꼬는 열두 명의 수사로 이뤄진 어린 양떼를 뽀르치웅꼴라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작은 형제회가 천주 성모의 공로에 의해 설립된 곳도 그곳이며 또한 그녀의 중재로 수도회가 성숙하게 된 곳도  그곳이었다. 뽀르치웅꼴라로부터 프란치스꼬는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1고린 2, 13) 인접해 이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9, 35; 루가 9,60)하는 복음의 사도로 출발했다. 그가 마음이 항상 머물고 있는 하늘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들의 생각을 높이 들어올리려고 애쓰는 모습은 딴 사람들에게는 마치 딴 세계에서 온 사람같이 보였다.

가난이란 얼마나 값진 보화인가! 그것의 뛰어난 매력은 미개인의 야만스런 마음까지도 움직여 동정과 친절을 베풀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이 그와 같은 존경심을 보인 복음의 진수를 그리스도인이 발아래 짓밟는 것은 얼마나 말할 수조차 없는 큰 죄인가.

프란치스꼬는 항상 이 특별한 표시(타우)에 대해서 큰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종종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사용하기를 권했다. 그는 그것을 모든 편지 끝에 써넣곤 하였는데 이는 마치 그의 유일한 소망은 에제키엘의 예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인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이 타우 십자가)를 해주는 것”(에제 9,4)인 것 같았다.

프란치스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음으로써 하느님 스스로의 증거로 입증되었다. 이것은 가장 높으신 사제인 그리스도의 인호로서 이것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회칙과 그 회칙을 쓴 사람에게 당신 자신의 거룩한 인가를 주신 것이다.

그는 이미 모든 면에서 완전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방금 시작한 것처럼 항상 새로이 시작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육체를 벌함으로써 자연적인 욕망들을 채찍질했다.

한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낡아빠진 보잘것없는  옷으로 살을 에이 는 듯한 겨울의 추위를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열정에 차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 마음속이 천상의 고향을 동경하는 불길로 타고 있다면 이런 외부의 추위를 참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는 값비싼 옷들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졌으며 보잘 것 없는 의복에 만족하곤 하였으며 이에 덧붙여 세례자 요한은 거 칠은 옷을 입고 지낸 데 대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옷의 감촉이 지나치게 부드러우면 그는 밧줄을 안쪽에 대어 꿰매어 입곤 했다 .이는 그가 늘 말했던 것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는 사람은 부유한 궁전에서 살아야 하지 오두막집에는 살지 않기 때문이다. 악마는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두려워하며 반면에 부드럽거나 호화로운 의복은 악마에게 보다 사납게 공격할 수 있는 용가를 준다는 사실을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형제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또한 그들에게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권하는 조심성이 아니라 그 일생이 모든 완덕의 모 봄인 그리스도가 행하신 신중성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프란치스꼬의 육체와 정신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그의 정신이 하느님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은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 덕분이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그 보상으로 자신들을 만드신 분께 완전히 봉사해야 하는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의 의지에 따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성인이 성취한 양심의 순결성과 높은 미덕을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성인이 원하는 데 따라, 불은 타는 것을 잃고, 물은 그 맛을 잃었으며, 천사도 그의 빛이 되어 그를 협력하러 왔던 것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그의 물질적 요구를 시중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처럼 그는 거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겸손함이 지극하였으며 모든 덕의 수호자요, 덕의 더없는 영광을 지닌 자였다. 그는 하나의 거울이었으며, 크리스찬 완덕의 빛나는 모범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눈에는 자신이 단지 죄인에 불과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정신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능숙한 건축가가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배웠던 기초를 놓았다(참고:1고린 3,10). 그는 자주 말하길 하느님의 성자는 우리에게 말과 모범으로 겸손함을 함께 나누고 우리의 주님이시오 스승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그는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라는 지극히 높으신 스승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자신을 낮게 여기도록 조심하였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잘것없이 보이도록 마음을 썼다. 또한 그는 “하느님 앞에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존경의 표시를 보일 때 우쭐거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칭찬에는 당황했으나 모욕을 당할 때는 매우 기뻐하였다.

또 한번 그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다음과 같이 행동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며 나는 나 자신을 작은 형제로 생각 하지 못할 것이오. 즉, 이런 것을 가정해 봅시다. 자, 내가 장상이고 그리고 총회에 가서 수사들에게 강연을 하고 몇 마디의 충고를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내 말이 끝났을 때 그들은 모두 ‘당신은 우리의 올바른 장상이 아니오. 당신은 교육도 받지 않았고 말재주도 훌륭치 못하오. 그 외에도 무식하고 경험이 없소’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수치스럽게 내쫓기고 모든 사람에게서 경멸을 받았다고 합시다.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건대, 이로 인해 내가 마음이 산란해짐이 없이 또한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나 자신의 성화를 위해 쓰겠다고 확고한 결심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작은 형제가 될 수 없소.”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웃사람의 지위는 타락으로 이끌지 모르며 칭찬은 위험한 낭떠러지기요, 그러나 아랫사람의 낮은 신분은 영혼을 위해 큰 이점을 지니고 있읍니다. 왜 우리는 공덕을 얻으려 하기보다 위험을 무릅쓰려 하고 있소? 시간이란 우리가 공덕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만 주어진 것이오.””                      

 바로 이런 이유로 겸손의 모범인 프란치스꼬는 자기의 형제들이 작은 형제로 알려지길 원했고 또 장상들은 봉사자로 알려지길 원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이 순종하기로 약속했던 복음의 말씀(마태 25,45 참조)을 따라 지켰다. 그리고 그는 동료 수사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온 것은 바로 겸손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겸손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 26-27)라고 말씀하심으로 완전한 겸손을 가르치셨다.

프란치스꼬는 자신과 수사들에게서 세속적인 어떤 명예보다 겸손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그를 가장 높은 명예를 받을 만한 인간으로 판단하셨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명의상으로 직책을 맡고 있는 레오 추기경으로부터 로마로 가기를 방문에 달라고 초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가까운 친구인 추기경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 초대에 동의했다.

가난한 수도원에 있는 수사들이 내가 추기경과 머물고 있다는 걸 듣게 되면 그들은 내가 세상일에 몰려버렸다든가, 아니면 명예를 흠뻑 받는다든가, 즐겁게 지낸다고 생각할 것이오.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궁전을 피해야 하오. 이런 식으로 그는 다른 사람의 가난을 나누어 갖고 이와 비슷한 처지를 견디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낼 것이오.” 그러고 나서 아침에 그들은 추기경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성인은 모든 악의 원인인 교만과 그의 가장 나쁜 자식인 불순 명을 두려워했다. 반면에 그는 겸손한 회개에 대해서는 따뜻한 환대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꼬의 겸손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 또한 그것은 심지어 땅 위에서도 존경받았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가장 경미한 소망도 겸손히 들어주셨다. 그래서 아레쪼 시민들에rps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그는 마귀가 염치없이 대드는 것도 명령으로 물리쳤으며 불의 열기도 마음대로 길들였다. 따라서 겸손은 무든 사람에 의해 공경을 받아 마땅함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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