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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의 생애

노벨상(Nobel)

by 巡禮者 2010. 8. 1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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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의 생애

 

 

빌헬름 뢴트겐
Wilhelm Conrad Rontgen)
1845∼1923. 독일의 물리학자

X선을 발견하여 1901년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발견은 현대물리학의 새 시대를 열었고 진단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취리히공과대학에서 공부한 뒤에, 슈트라스부르크대학(1876∼79)·기센대학(1879∼88)·뷔르츠부르크대학(1888∼1900)·뮌헨대학(1900∼20)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는 또한 탄성, 유체의 모세관 작용, 기체의 비열, 결정 안에서의 열전도, 기체의 의한 열흡수, 압전기 등을 연구했다.
1895년 진공관(음극선관)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실험 중 근처에 있는 시안화백금(Ⅱ)산바륨 조각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 이로부터 음극선(전자)이 관(管)의 유리벽을 때릴 때 어떤 알려지지 않은 복사선이 방출되며 시안화백금(Ⅱ)산바륨 조각에 도달하여 형광을 일으킨다는 이론을 세웠다.
 그리고 이 새로운 복사선이 여러 물질 중에서 종이·나무·알루미늄 등을 쉽게 통과한다는 것과 사진 건판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반사나 굴절 같은 빛의 성질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빛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성질 때문에 그는 이를 X 복사선이라고 불렀으나 뢴트겐 복사선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으로 X선을 이용해 금속의 내부구조와 아내의 손뼈를 찍었다.

 

 

요하네스 피비게르
(Johannes (Andreas Grib) Fibiger)
1867∼1928. 덴마크의 생리학자.

실험 동물에서 최초로 암의 유도를 조절한 공로로 1926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그의 발견은 암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베를린에서 세균학자인 로베르트 코흐와 에밀 폰 베링 밑에서 공부했으며, 1900년 코펜하겐대학교의 병리·해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07년 결핵에 감염된 쥐들을 해부하는 동안 3마리에게서 위암을 발견했다. 집중적인 연구 끝에 그는 지금은 공길로네마 네오플라스티쿰(Gongylonema neoplasticum)으로 알려진 유충이 위조직을 감염시킨 후 악성종양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이 벌레에 감염된 바퀴벌레를 쥐가 먹은 것이다. 1913년 그는 쥐에게 이 벌레에 의해 감염된 바퀴벌레를 먹여 똑같은 위암을 일으킬 수 있었다. 종양이 전이(기생충이나 미생물의 직접적인 전파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기관에 암이 생성되는 것)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는 조직에 대한 자극으로 암이 생긴다는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개념을 지지해주었다. 이러한 연구 후, 일본인 병리학자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실험동물들의 피부에 콜타르 유도체를 발라 암을 유발시켰는데 피비게르 자신도 곧 이 실험방법을 사용했다. 피비게르의 발견은 현대 암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단계가 된 화학적 발암물질 생성에 준비 역할을 했다.


멜빈 캘빈
(Melvin Calvin)
1911∼1997. 미국의 생화학자.

1961년 광합성의 화학적 경로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35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2년 동안 잉글랜드의 맨체스터대학교에 있는 록펠러 재단의 회원으로 있었다.
1937년 그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 그곳에 있는 로렌스 방사선연구소의 생유기화학분과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1940년대 중반에 광합성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녹조류(綠藻類)인 클로렐라에 추적자 원소로 방사성동위원소인 탄소-14()를 쓰는 체계를 개발했다.
여러 단계별로 식물의 생장을 저지시키고 그 속에 존재하는 미량의 방사성 화합물의 양을 측정하여 광합성의 중간단계에 속하는 대부분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련의 반응들은 오늘날 '캘빈 회로'라고 알려져 있다.
이 과정을 밝히는 일에 15년간 몰두한 후, 1960∼80년 캘빈은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화학생체역학 연구소장을 지냈다.
이 기간에 캘빈은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과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대체연료의 개발과 관련된 연구도 했다.
평생동안 〈광합성 과정에서 탄소의 경로 The Path of Carbon in Photosynthesis〉(1957, J. A. 배셤과 공저)와 〈빛의 흔적을 좇아 : 과학의 오디세우스 Following the Trail of Light : A Scientific Odyssey〉(1922)를 비롯해 500편 이상의 논문과 많은 책들을 썼다.


이반 부닌
(Ivan Alekseyevich Bunin)
1870∼1953. 러시아의 시인·소설가.

러시아에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1933) 러시아 최고의 명문장가로 꼽힌다.
언론인이자 사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쓰거나 번역했고 1891년 첫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롱펠로의 〈히아와타 Hiawatha〉를 번역해 1903년 러시아 아카데미로부터 푸슈킨 상을 받았고 1909년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바이런의 〈맨프레드 Manfred〉·〈캐인 Cain〉을 번역했다. 푸슈킨 계열의 전통에 속하는 고답풍의 시를 썼으며 전위적인 모더니즘 경향을 거부했다.
주로 단편소설 작가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한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Gospodin iz San-Frantsisko〉(1916)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1943년에 마지막 단편집 〈어두운 거리 Tyomnye alley〉가 출판되었다.
장편소설로는 〈마을 Derevnya〉(1910)·〈미탸의 사랑 Mitina lyubov〉(1925), 자전적 소설인 〈아르세니예프의 생애 Zhizn Arsenyeva〉(1930), 그 속편인 〈리카 Lika〉(1939), 2권의 회고록 〈저주받은 날들 Okayannye dni〉(1926)·〈회상 Vospominaniya〉(1950)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톨스토이와 체호프에 관해서도 각각 〈톨스토이의 해방 Osvobozhdeniye Tolstogo〉(1937)과 미완성인 〈체호프에 관하여 O Chekhove〉를 썼다. 〈체호프에 관하여〉는 그가 죽은 뒤 1955년 출판되었다.


마리 퀴리
(Marie Curie) 결혼 전 이름은 Manya Sktodowska.
1867∼1934.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물리학자.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H. 베크렐과 그녀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11년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는 등 노벨상을 2번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비범했던 그녀는 16세에 러시아 고등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치면서 금메달을 받았다. 수학·물리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해 돈을 잃었기 때문에 그녀는 교사자리를 얻어 일을 해야 했으며 동시에 여성 노동자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면서 민족주의자의 '자주강좌'에 비밀리에 참여했다. 18세에 가정교사직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불행한 연애사건을 겪었다.
마리는 나중에 언니 브로냐가 그녀를 도와준다는 합의 아래 자신의 수입으로 파리에서 의학공부를 하는 언니를 도와 주었다. 1891년 마리는 파리로 가 소르본대학교에서 P. 아펠, G. 리프만, E. 부티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J. 페랭, C. 모랭, A. 코통 등 이미 잘 알려진 물리학자들을 만났다. 그녀는 학생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으며 실제로 빵과 버터와 차만 먹고 살았다.
1893년 1등으로 물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고 그 후 리프만의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해 1894년 2등으로 수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다. 그해 봄 그녀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그들의 결혼(1895.7.25)으로 인해 폴로늄(마리가 자신의 모국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렀음)과 라듐의 발견 등 세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성취하게 될 협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학위 논문의 주제를 찾고 있던 마리 퀴리는 H. 베크렐이 발견한(1896) 새로운 현상(그녀는 후에 이 현상을 ' 방사능'이라고 불렀음)에 접하고 우라늄에서 발견되는 성질이 다른 물질에서도 발견되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G. C. 슈미트와 같은 시기에 토륨의 경우에도 같은 성질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물질을 조사하면서 역청 우라늄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청 우라늄광은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큰 광물질로 방사능이 매우 큰 소량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의 광석에 존재한다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가 착수했으며, 새로운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이어진 연구에 피에르 퀴리가 참여했다. 피에르 퀴리가 주로 새로운 복사(輻射)를 물리적으로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마리 퀴리는 금속상태에서 순수 라듐을 얻기 위해 애썼는데, 피에르 퀴리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화학자 A. 데비에른의 도움으로 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연구 결과 그녀는 1903년 6월 과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피에르와 함께 왕립학회의 데이비 메달을 받았다. 또한 1903년 그들은 방사성을 발견한 공로로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두 딸 이렌(1897)과 이브(1904)의 출생도 그녀의 열성적인 과학 연구를 방해하지 못했다. 세브르에 있는 여자고등사범학교의 물리학강사로 임명되었으며(1900) 그곳에서 실험적 증명에 기반한 교수법을 도입했다. 1904년 12월 피에르 퀴리가 지도하는 연구실의 책임조교로 임명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1906. 4. 19)은 마리에게 쓰라린 충격이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 그들 부부가 수행하던 과학 연구를 홀로 완성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1906년 5월 13일 남편이 죽은 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교수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소르본대학교의 첫번째 여교수가 되었다. 1908년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마리 퀴리는 딸 이렌의 도움으로 'X선 사진법'(X-radiography)의 이용법을 개발하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1918년 이렌이 합류한 라듐 연구소는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핵물리학과 화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이제 최고의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922년부터 의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어 방사성 물질의 화학적 성질과 이를 의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두 딸과 함께 미국 여행을 했는데 W. G. 하딩 대통령은 그녀에게 미국 여성들이 모금하여 마련한 1g의 라듐을 선물했다.
그녀는 특히 벨기에·브라질·스페인·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강연을 했다. 국제연맹위원회는 그녀를 국제지적협력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밖에 파리에 퀴리 재단이 만들어지고 1932년 언니 브로냐가 소장인 바르샤바의 라듐 연구소가 개관되는 것에 만족해했다. 마리 퀴리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질병 치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핵물리학 연구를 풍부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방사성원을 축적할 필요를 이해한 일이었다. 그 결과 비축된 방사성원은 1930년 입자가속기가 출현할 때까지 비할 데 없는 도구였다. 수년에 걸쳐 라듐 D와 폴로늄이 축적된 1.5g의 라듐이 파리 라듐 연구소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은 1930년경 수행된 실험과 특히 이렌 퀴리가 1926년 결혼한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수행한 실험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연구는, J. 채드윅 경에 의해 중성자가 발견되고 결국 졸리오 퀴리에 의해 인공 방사능이 발견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몇 개월 후 마리 퀴리는 복사작용으로 생긴 백혈병으로 죽었다. 2회의 노벨상 수상으로 그 중요성이 드러난 그녀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핵물리학자와 화학자에게 미친 영향으로 보아 물리학에 대한 그녀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노벨상을 눈 앞에 서 놓치신분들*

★ 멘델레예프
화학자 맨델레예프(1834~1907)의 업적은 이미 과학 교과서에 실릴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상이 거론된 당시 모든 교과서에 확고한 진리로 자리잡아 버렸기 때문에 신선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 모즐리
물리학자 모즐리(1888~1915)는 여러 원소의 특성X선 스펙트럼을 실험적으로 연구하여 그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에 간단한 관계(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한, 주기율표상의 미발견원소을 확인하는 등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모즐리는 자원 입대하여 사망함으로써 노벨상과 인연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 로잘린느 프랭클린
윌킨스는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에 접근하면서 그들과 협력하는 입장을 취했고, 이중 나선 모형을 보고는 대번에 그것이 DNA의 정확한 구조라는 데 동조했다. 런던에 돌아간 윌킨스는 로잘린느와 함께 X-선 회절 결과도 이중 나선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962년에 왓슨, 크릭, 윌킨스는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했다. 마침 같은 해에 퍼루츠와 켄드류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후일 왓슨은 "로잘린드가 크릭과 한 시간만 대화를 했더라면 DNA 구조를 발견한 과학자로 이름을 남겼을 텐데......" 하고 회고했다.

★ 쁘엥카레
쁘엥카레는 불란서의 물리학자로 1854년에 태어나서 1881년 이후 소르본느의 파리대학에서 역학을 가르쳤으며 수학 특히 위상 기하학과 미분방정식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후에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10년에는 노벨상 역사상 거의 유례가 없는 한 해 34명 추천이라는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으나, 1912년 사망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수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좀머펠트
좀머펠트는 독일의 명문대학의 하나인 괴팅겐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뮨헨 대학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하이젠베르그, 파우리와 데바이 등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영재들을 교육하였다. 수리물리학에 능란하여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했다. X선 회절, 유체의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 초기에 소위 윌슨-좀머펠트 양자조건의 공식화 등을 이루었다. 그의 '이론 물리학 강의'라는 책은 2차대전 때까지 물리학자들의 표준 교과서로 쓰일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다. 그러나 1951년에 사망함으로서 영원히 수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

 

2002년까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수상자는 아래의 총 6명입니다.

1. 리하르트 쿤: 화학상, 1938년, 독일, 카로티노이드 및 비타민 연구
2. 아돌프 부테난트: 화학상, 1939년, 독일, 성 호르몬 연구
3. 게르하르트 도마크: 생리의학상, 1939년, 독일, 프론토질의 항균 효과
4.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학상, 1958년, 소련, 소설가/시인
5. 장 폴 사르트르: 문학상, 1964년, 프랑스, 철학자/극작가
6. 르 둑 토(黎德壽): 평화상, 1973년, 북베트남, 베트남 분쟁 해결

이들의 수상 거부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2, 3(리하르트 쿤, 아돌프 부테난트, 게르하르트 도마크 ): 외부 압력 때문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 designtimesp=25610>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 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정치적인 이유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보냈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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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폴 사르트르 ): 본인 의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치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좌익으로 기울었다. 또 비록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1954년에는 소련·스칸디나비아·아프리카·미국·쿠바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는〈현대〉에〈스탈린의 환상 Le Fantome de Staline〉이란 긴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에 굴복한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비난했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사르트르적 사회주의'란 형식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새로운 주요저서〈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에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착수했고 소련식 변증법은 살아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당대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믿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화석처럼 굳어졌으며 특정 상황에 적응하는 대신 그 특정 상황을 미리 정해진 보편성에 따라 억지로 짜맞춘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일반적 원칙이 무엇이든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빈약한 구성이 문제이지만 지금보다 좀더 관심을 끌 만한 인상적이고 유려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제2권을 기획했다가 포기했다. 대신〈말〉을 출판할 준비를 했는데, 이 책이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고는 수상을 거부했다.

 

* 6(르 둑 토(黎德壽) ): 본인 의사
1973년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 일원이었으며 정치적 활동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940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1945년 하노이로 돌아와 공산당인 베트남 노동당 재건과 공산반란 단체인 베트민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1955년부터 베트남 노동당의 정치국에서 일했고 1976년부터는 노동당에서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1968~73년 파리 평화회담에 월맹측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파견되어 1973년 베트남 종전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는 대표단의 수석 대변인이 되었다.

참고로,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됩니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94만 3,000달러, 2001년 현재)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노벨수상자*
페더슨

Charles J(ohn) Pedersen

1904. 10. 3 한국 부산~1989. 10. 26 미국 뉴저지 세일럼.

한국 부산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한국에 진출한 미국계 금광회사에서 근무하였고, 1953년 미국시민권을 획득할 때까지 노르웨이 국적을 소지했었다.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州) 데이턴대학교를 졸업하고, MIT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27∼1969년에 뒤퐁사(社)의 화학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생체효소의 합성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미국의 화학자.

1987년 장 마리 랭, 도널드 J. 크램과 함께 크라운에테르를 합성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크라운에테르는 유기화합물 중의 하나로 생체내 분자들이 하는 것과 같이 다른 원자 및 분자들과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화합물이다.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20년대초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에 있는 데이턴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유기화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27년부터 E. I. 뒤퐁드느무르사의 화학연구원으로 42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1960년대에 그는 화합물을 합성했는데 그 구조가 탄소원자들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소원자가 결합되어 있는 느슨하고 유연한 고리 형태이기 때문에 크라운에테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고리의 크기를 달리 함으로써 크라운에테르들이 크라운 중심에서 특정 금속 원소의 이온과 결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발견은 랭과 크램에 의해서 발전되었으며, 그결과 효소들이나 다른 천연 생물 분자들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다른 분자들과 선택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분자들을 실험실에서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노벨상이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며 이것을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A. B.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겨,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수상식은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해당 부문에 돌아온 상금을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다.

과거의 유명한 수상자로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두 부문을 수상한 M. 퀴리(프랑스), 부부가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처(프랑스 : P. 퀴리와 M. S. 퀴리) 및 졸리오 부처(프랑스 : J. F. 졸리오와 I. 졸리오퀴리), 문학의 E. 헤밍웨이(미국), 평화상의 A. 슈바이처(프랑스) 등이 있는데, M. S. 퀴리와 I. 졸리오퀴리는 모녀간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2000년 노벨평화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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