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마틴 부버의 “너와 나의 사상”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25. 18:09

본문

마틴 부버의 “너와 나의 사상”


마틴 부버는 1878년 2월 8일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부버가 세살 되던 해에 그의 부모의 이혼으로 동유럽 갈리치언(Galizien)의 수도 렘베르그 [Lemberg, 렘베르그는 갈리치언의 수도로 1772년-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에, 1919년-1939년까지는 폴란드에 속했다. 이 갈리치언은 우크라이나의 오블라스트 지방의 수도로 1939년-1991년까지는 구소련에, 1991년 이후부터는 독립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에 속한다.]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 살로몬 부버(Salomon Buber; 1827-1906)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게 된다. 그의 할아버지 살로몬 부버는 ‘하스칼라(Haskala, 18세기 이후로 전개된 동유럽 유태인들의 계몽 운동)’의 마지막 주요한 인물이었고 ‘미드라쉬(Midrasch: 성경 주해)’ 분야의 이름난 연구가로 렘베르그에 있었던 유태인 신앙 공동체의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상공회의소의 소장, 그리고 두 은행의 은행장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영향 아래서 부버는 14세까지 성경, 유태교 구비전설, 히브리어 등을 배웠다. 이 영향은 부버의 삶 전체에 있어 줄곧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부버가 14세 될 때, 그의 아버지 칼 부버(Karl Buber; 1848-1935)는 재혼하고 렘베르그에 이주해 온다. 이때부터 부버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폴란드계의 김나지움을 다니게 된다. 이 시절 그는 슬라브어와 슬라브 문학 그리고 폴란드 문학에 접하고 심취하게 된다.


부버는 18세 때에 대학 공부를 위해 빈(Wien)으로 간다. 1896년 겨울학기에 빈(Wien)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자유로운 물결이 넘치는 빈에서 대학 공부 시작과 동시에 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유태교의 정신과 전통에서 먼 생활에로 점차 빠져 들어간다. 그는 오히려 철학과 미술사 그리고 문학에 관심을 갖고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빈에서 일년 정도 밖에 머물지 않았고,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라이프찌히, 쮜리히, 베를린으로 대학을 옮겨 다니면서 철학, 독문학, 고전어, 문학사, 미술사, 심지어는 정신 병리학과 국가경제까지 다방면으로 공부한다. 특히 그는 쮜리히에서 그의 배우자가 될 독문학 여대생 파울라 빈클러(Paula Winkler; 1877-1958)를 만나게 되고, 베를린에서는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딜타이(W. Dilthey; 1833-1911)와 짐멜(1858-1918)의 강의를 듣게 된다.


부버는 1898년 여름학기 베를린에서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에 의해서 시작된 시온니즘 운동을 알게 되고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온니즘 운동이 부버로 하여금 그동안 무관심 속으로 던져 버렸던 자신의 유태교적 뿌리를 다시 찾게 하였고, 또한 그의 선조들과 이어지는 연대감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그는 잊혀져 가는 유태교의 구비전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심취한다. 그리고 그동안 소흘히 해왔던 히브리어에 대해서도 다시 공부하게 되고, 선조들의 사상에 더욱 깊이 몰두하게 된다. 이 시기에 부버는 유태교 전통에 관한 연구와 아울러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가 문화를 창조적인 인간의 결정적인 영역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1898- 1904)를 부버의 삶에 있어 ‘문화적 시기(Kulturelle Periode)’라 한다.


부버는 근본적인 유태교 전통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유태 민족의 내적인 성장을 꾀하는 것을 시온니즘 운동의 과제로 보았던 것과는 상반되게 이 운동의 창시자 헤르츨은 정치적 시온니즘을 주창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 차이 때문에 부버는 시온니즘 운동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어진 시간을 철학 박사학위논문 쓰는데 정열을 쏟는다. 그 결과 그는 1904년 빈대학에서 지도교수 요들(F. Jodl; 1849-1914)의 지도 아래 “개체화 문제의 역사에 관한 연구(Beitrge zur Geschichte des Individuationsproblems)”라는 논문을 완성하고 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부버는 1904년부터 1912년까지 학문적인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하씨디즘(Chassidismus) 연구에 몰두하면서, 특히 신비주의자의 황홀한 일체화 체험에 매혹된다. 이러한 연유에서 1904년에서 1919년까지를 부버의 삶에 있어 ‘신비주의적 시기(Mystische Periode)’라고 부른다. 그는 이 시기에 흩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잊혀지고 사라져 버린 하씨디즘에 관한 자료들을 온 정열을 다해 수집하였으며, 그는 비밀 세계를 찾는 듯 이 자료 속으로 빠져 들어 가 연구에 몰두한다. 부버에 있어서 하씨디즘은 학문적인, 철학적인, 미적인 연구 대상이었을 뿐아니라 아마도 그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부버의 이러한 노력으로 하씨디즘이 새로이 탄생되었고, 이는 생동적인 영향력을 주는 힘 그리고 창조적인 힘으로써 유태인들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를 이루게 한다. 그는 이 하씨디즘에서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와 인간과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처음으로 접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 부버의 신비주의적 시기에 하씨디즘과 신비주의에 관한 다음의 저서들이 출간된다: “랍비 나하만의 이야기(Die Geschichte des Rabbi Nachman, 1906)”, “발쉠의 전설(Die Legende des Baalschem, 1908)”, “황홀한 고백(Ekstatische Konfession, 1909)”, 번역서 “추앙 체의 연설과 비유(Reden und Gleichnisse des Tschuang Tse, 1910)”, “도교의 교리(Die Lehre vom Tao, 1910)”, 번역서 “중국의 정신사와 사랑의 역사(Chinesische Geister- und Liebesgeschichte, 1911)”, “유태교에 관한 세개의 연설(Drei Reden ber das Judentum, 1911)”, “다니엘(Daniel, 1913)”. 이외에도 부버는 1905년부터 “사회(Die Gesellschaft)”라는 제목의 사회 심리학 전문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1912년까지 40권까지 출간되었다. 이 잡지 총서의 머리말에서 그는 처음으로 인간 사이의 인격체적 관계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이 시기에 부버는 베를린에서 자기보다 여덟 살 많은 사회주의자이며 무폭력 무정부주의자인 란다워(Gustav Landauer; 1870- 1919)를 알게 되고, 그들 사이에 두터운 우정이 싹튼다. 이 우정은 란다워가 죽기까지 지속된다. 이 만남은 부버의 삶과 사상, 특히 인간의 사회적 삶에 관한 부버의 견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부버는 1913년에 발표한 그의 산문시 “다니엘”에서는 신비주의적 시기에서 대화적 시기로의 전환을 위한 새로운 조짐을 보게 된다. 내재적 침잠의 신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더불어 서로 마주 보는 인격적 파트너에 관한 인간 이해로의 전환이 서서히 자리잡아간다.


이러한 부버의 대화적 시기(dialogische Periode; 1919-1965)로의 전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점점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부버는 그가 정리한 1919년 하씨디즘의 전설 전집 “위대한 마기드와 그의 후계자(Der große Maggid und sein Nachfolger)”의 머리말에서 “인간-나와 신(神)-너의 양방향으로 지향하는 관계(die doppelgerichtete Beziehung von Menschen-Ich und Gott-Du)”와 “상호성(Gegenseitigkeit)” 그리고 “만남(Begegnung)”으로서 새로운 대화적 실제성을 특징지었다. 이것으로써 부버는 1919년 “대화적 실제성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는 모든 관계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실제성이다: 즉, ‘신과 세계 그리고 인간’”. 1916년 이미 부버는 그의 대화철학의 주저가 될 ‘나와 너(Ich und Du)’를 다섯 권의 책으로 쓸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이 계획을 기초로 ‘나와 너’의 초고가 완성되었고, 퇴고를 거듭하여 완전한 퇴고는 1922년에야 끝낼 수 있었으며 1923년 발간되었다. “부버는 그의 주저 ‘나와 너’로써 그의 철학을 요약한다. 그 이후에 나오는 그의 철학적 저서들은 그의 주저에서 간단히 정리된 이론들을 폭 넓게 깊게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주저 이후에 저술된 모든 그의 철학적, 인간학적 혹은 교육학적 저서들은 그의 주저인 ‘나와 너’의 보충적인 그리고 한계를 명확히 해주는 주해서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화철학에 관계되는 저서들은 1923년 발간된 ‘나와 너’이외에도 상당수 되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대담(Zwiesprache, 1930)”, “개별자에게의 물음(Die Frage an den Einzelnen, 1936)”, “인간의 문제(Das Problem des Menschen, 1943)”, “원간격과 관계(Urdistanz und Beziehung, 1950)”, “인간 사이의 요소들(Elemente des zwischenmenschlichen, 1953)”, “말해지는 단어(Das Wort, das gesprochen wird, 1960)”.

부버는 1919년 가을 로젠쯔바익(Franz Rosenzweig; 1886- 1829)이 ‘유태인 학당(das Judische Lehrhaus)’을 설립하자, 그와 함께 이 학당에서 1938년 이스라엘로 이민 가기 전까지 젊은이들을 가르친다. 그의 강의는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강의 외에도 ‘현재로서의 종교’, ‘기도’, ‘종교적 삶의 원형’ 그리고 하씨디즘의 원전에 관한 강의 등과 같이 종교적 성격을 띤 강의도 많이 들어 있었다. 1923년부터 부버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종교학과 유태교 윤리학을 교수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외에 부버는 유태인 교육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스위스, 독일, 네델란드에 설립된 유태인들의 ‘자유 배움 모임(Freie Lehrgruppen)’을 지도하고, 그는 이러한 교육 운동을 팔레스티나에까지 전파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부버는 스스로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교수직을 내놓았고, 독일 전역을 돌면서 랍비들, 교사들, 청소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오직 유태인들의 성인 교육에 주력하게 된다. 부버는 나치에 의해 1935년 2월 모든 공적인 활동에 대한 금지 명령을 받는다. 1938년 3월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을 떠나, 팔레스티나로 이주한다. 그는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회 철학 교수직을 받고 1951년 정년으로 은퇴할 때까지 강의하게 된다.


부버는 예루살렘으로 이주 이후 곧 유태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정치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는 유태인과 아랍인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함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길 원한다. 그러나 유태인들만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들에 대한 억압과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1948년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분리되고 그곳에 독립된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졌고, 이러한 분리에 의한 부버의 정신적 고통은 무척이나 컸다.


부버는 히브리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925년에 로젠쯔바익과 함께 시작한 번역 사업은 1929년 로젠쯔바익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하나 부버는 혼자서 이 번역작업을 계속해 1937년에 15편이 출간된다. 1938년 부버의 이스라엘 이주로 이 작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단되었다가 전쟁 종식 후 다시 시작하여 1961년에 마치게 된다. 이 번역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부버는 다음과 같은 성서의 주해와 성서에 관한 저서들을 출간한다: “신의 왕직(Knigtum Gottes, 1932)”, “도유자(Der Gesalbte, 1939-1964)”, “예언자들의 신앙(Der Glabube der Propheten, 1940)”, “모세(Mose, 1940)”, “두개의 신앙 방법(Zwei Glaubensweisen, 1950)”, “신의 어두움(Gottesfinsternis, 1952)”.


부버는 1951년 히브리 대학교에서 정년을 하고, 세미나, 강연, 대담 등을 위해 미국과 유럽 등 여러나라로 여행하면서 노년을 보내게 된다. 그는 80세가 넘는 만년에 이르러 그동안 그가 저술했던 책들을 주제별로 모아 세권으로 된 전집을 출간한다. 제1권은 그의 철학에 관련된 저서들로서 1962년에 출간 되었고, 제2권은 성서에 관련된 저서들로서 1964년에 출간되었고, 마지막으로 제3권은 하씨디즘에 관련된 저서들로서 1963년에 출간되었다. 이 세권으로 된 전집은 부버의 평생을 통해 이룩한 세 분야에서의 업적을, 즉 철학 - 성서 번역 - 하씨디즘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부버는 1965년 6월 13일 예루살렘에서 87세로 그의 삶을 마감한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철학자 마틴 부버의 말처럼 그의 사상은 ‘관계’ 개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도 공기나 물 같은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상대적 세계에 묶인 인간이 절대적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지상에 묶인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 개념에서 ‘만남’ ‘대화’ ‘인격체’ 등의 개념들로 그의 사상은 확장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부버의 철학을 ‘관계의 철학’ 또는 ‘대화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잘못된 관계에서 연유됩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오염되는 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설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윤리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 등의 모든 문제들은 인간과의 잘못된 관계설정에서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종교적인 문제들은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계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버는 이러한 잘못된 관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나-너(Ich-Du)’ 존재 방식을 제시합니다. ‘나-그것(Ich-Es)’ 존재 방식에서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적이면서 수직적이고 종속지배적이고 대화가 없는 독백적인 관계의 토대에서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삶이 앞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너’의 존재 방식에서의 인간은 상대를 나의 객체가 아닌 파트너(동반자)로 받아들이기에 자기중심이 아닌 ‘나와 너’가 함께 중심이 되고,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종속지배적이 아니라 상호 평등관계가 되고, 그러므로 진정한 대화적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가 인격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버 사상의 핵심이면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