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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적 담론은 가능한가?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3.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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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적 담론은 가능한가?


―포스트모던과 신학적인 실천적 담론으로의 이행에 대한 논의―



I. 들어가는 말: 논제제시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하더라. -요한복음 18:37-38


우리는 지금 거대담론의 파편화 현상이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진부한 잡담거리로 여겨진다.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일컫는 또 다른 인식의 틀이 시대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시켜 본다면 다원주의(Pluralism)가 주는 도전일 것이다.

   

그저 전통적인 신앙에 위협이 된다는 것 때문에, 반사적으로 무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타적인 성향(Exclusivism)을 지닌 채로 나르시즘에 환각증세를 일으키는 일종의 광신도로 살아갈 것인가? 아무런 관용도, 대화도 없는 평행주의(Parallelism) 혹은 병존주의적인 노선에 서서 예수의 본질적인 의미를 외곡하거나 망각한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속에서 진리의 파편화 된 것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대화의 기회와 기독교의 성장의 기회로 삼아 드넓은 대화의 장으로 그것들을 끌어들일 것인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역사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기형아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인식의 다른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탈근대주의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모호한 개념의 원인은 근대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근대적(modern)’이라는 말은 그 속에 거대담론(혹은 메타담론 Metadiscourse)에 근거하는 정체성의 확립, 정신의 변증법(헤겔적), 의미의 해석학, 이성적 주체의 해방을 함의하고 있다.1) 즉 근대의 필연적 전제 조건은 거대담론이라는 진리, 의미, 그리고 정신에 대한 이성적인 사유이다. 그러나 탈(Post) 근대적 사유는 그러한 모든 구조적인 것을 해체시킴을 의미한다. 언어학에서 착안된 구조주의의 암묵적인 틀들은 근본부터 뒤흔들리고 급기야는 들뢰즈나 데리다, 또는 보들리야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학자들에 의해서 일격이 가해진다. 주체와 객체도 없는, 텍스트와 그것을 대하는 독자의 경계가 무너져 버리는 시대, 현실보다 가상현실을 더욱 현실답게 여기며 살아가는 시대가 포스트모던이다. 모든 거대담론들은 파편화 되어 버렸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일 정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포스트모던적인 사회를 살면서 독단이나 신앙적 도그마만을 지닌 채로 살아간다면, 과거에 대하여 그리고 현실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적 흐름에 대하여 깊은 반성적 성찰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시대의 담론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 “1500년 동안이나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받아온 유럽이 그처럼 엄청난 살상과 파괴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쟁의 폭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2)라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출발점에서의 물음은 우리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전통의 사유하지 않은 독단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구별짓기로 인해 벌어진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보면서 우리는 철저히 반성적이면서도 의사소통적인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피터버거는 그의저서 <The Sacred Canopy>에서 ‘종교 간의 만남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등장한다’라고 말하였다.3)  

   

그러므로 본고에서 다룰 주제는 위와 같은 시대적-정신적 조류 속에서 기독교가 모색해야 할 방향설정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배타적이거나 혹은 우월감을 전제로 한 포용주의가 아니라 진정으로 세계 개방적인 종교, 예수의 진실됨으로 다시금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하에서 신학에의 담론적 질서의 타당성과 가능성을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신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으로 인해서 이러한 논의의 주제에 대해서 전적으로 독자들의 이성에 맡긴다는 것은 아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확연히 구분되는 한 노선에 서라는 강력한 외침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깊은 반성적 신학의 길을 스스로 열어보자는 시도이다. 특히 진리에 대한 무관심, 해체, 파편화와 ‘진리 재현의 불가능성 혹은 위기’4)에 대한 위기를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과 끝없는 담론의 과정 속에서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잠정적 합의로서의 이해관계와 의사소통이 아니라 전적으로 실천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어 나갈 수 있는 실천적 의미의 담론으로 신학이 저변을 확장시켜서 이 시대를 바라보자는 데에 의의를 둔다.


II.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II-1. 포스트모더니즘의 서막: F. 니체 

   

근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의 시초는 F. 니체이다. 이제껏 데카르트 이후부터 논의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유래했던 이분법적 도식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었다. 'cogito'의 주체의 사유의 존재론적인 근거임이 자명했으나 그러한 물음 자체의 위기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니체에게 있어서 세계의 본래적 질서, 일관된 목적과 도덕적 옮고 그름의 기준 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사상은 이른바 ‘전도(顚倒)의 철학’이었다. 칸트가 언급했던 보편적인 도덕법칙, 정언명법은 인간을 구속하는 범주에 불과했다.5)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가치체계 속에 속박되어 사는 인간이 아닌 짐승 혹은 벌레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기에 그러한 인간적 존재를 넘어선 진정한 존재인 ‘초인’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6)

   

인간은 그 자신이 하는 모든 사유는 세계를 구성 짖고 있는 거대한 틀 속에서, 이념의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세계의 인신론적 구조의 틀 자체를 부정하고 일종의 환상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I. 칸트의 사상에 대한 정면 도전을 선포한 것이다. 인간의 선험적(a priori)인 범주에 의한 인식과 지식의 구성, 그것의 인류 보편적 내재성은 니체에 의해서 해체되는데, 니체는 그러한 범주마저도 순전히 인간의 작품임을 강조한다.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거대한 인식 체계는 순전히 환상이요 개인적인 체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순전히 언어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7)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된 모더니즘의 거침없는 질주는 니체의 선포에 의해 전면 정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리와 가치’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이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표현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초월하려는 ‘초인적․권력의지’에서 온다. 초월적(transcendent)인 것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이 아닌 전적으로 인간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자기완성의 욕구를 향한 ‘자아를 초월하려는 욕망․갈망’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이제 “나는 신이다. 신은 내가 죽였다”라는 살인적 용어로 대치되어버렸다. 그리고 빌라도의 “진리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그것이 왜 필요한가?” 혹은 “무엇이 진리이냐?”라는 식으로 전도된 채로 대답을 상대화8) 시켰으며, 이것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모든 사유를 가치평가화’시켜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9) 

 

II-2.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신학적 작업의 필연성

  

II-2-1.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

   

리오타르에 의하면 고도로 발달한 사회, 즉 과학이 발달한 사회에서 서사는 우화취급을 받으며, 철학이라는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과 회의라고 말한다.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의 지식의 조건’에 대한 것이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이다.10)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구조주의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주된 특징은 사회의 권력구조인데 이러한 권력구조는 반사회적 행위들을 유발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사회 속에 내재한 ‘합의’, 하버마스의 용어로 ‘의사소통/담론’11)은 근대적인 산물임과 동시에 권력구조를 내포하는 부조리한 제도의 합리화가 되어버린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려 사용하자면 각기 다른 ‘언어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각각의 발화자가 발설하는 각기 다른 담론의 유형이므로 ‘공통의 척도’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리오타르의 ‘공통의 척도의 무(無)존재’는 하버마스가 시도하였던 '담론(discourse)’의 모든 시도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일종의 ‘메타담론’을 주장한다.12) 리얼리즘의 권위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ty)에 의해서 짓눌려 버렸으며 전통적인 이분법, 원인과 결과의 도식과 각 극의 의미의 거리는 소실되고 함열(implosion)되었으며 급기야 양 극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13) 그러나 이러한 공통분모 없는 사회에 대한 그의 연해를 비판하는 이들의 근거는 그가 각기 다른 ‘언어게임’들 사이의 공통점을 전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이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통해서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통의 분모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의사소통의 개연성을 무시한 언어게임의 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리오타르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의 목적과 합의(consensus) 도출을 배척했던 것은 합의의 도출 속에 억압과 폭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니체로부터 이어져 오던 전체성, 보편성의 해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경향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고 그의 그러한 사상들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적 패러다임은 집약되어 있던 빛에 프리즘을 비추어버린 것과 같다. 신학은 급변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게 된 것이다.


  

II-2-2. 다원화된 시대 속에서의 진리추구

   

그러나 다원화된 시대의 사상은 절대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양한 신학적 작업이 진행되어야만 한다. 종교신학자 W. 캔트웰 스미스는 ‘세계신학’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본래 ‘세계신학’이라함은 가톨릭 신학자 메츠의 개념과 스미스의 개념이 대표적이다. 메츠의 신학은 ‘세속화 신학으로서의 세계신학’을 의미하고, 후자는 ‘세계 종교사의 신학, 즉 보편신학’을 의미한다.14) 메츠는 진정한 신앙, 참된 기독교인의 삶은 “세상성 속의 삶”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은 결코 유아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여 이러한 견해는 H. 콕스, 마이켈슨 등의 세속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러한 세속화된 사회는 인간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사회를 말하며, 일종의 성숙한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성숙한 사회, 혹은 성인된 세계의 개념은 본훼퍼와 고가르텐의 개념과 동일하다. 메츠가 세속화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세상으로의 자기 비우심을 “하나님의 세계긍정”을 의미한다.15) 이것은 하나님의 원초적인 행동이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창조의 행위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끝없는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세상의 긍정은 세상을 심판의 안목이 아닌 인간에게의 자유부여를 의미한다. 

   

W. 캔트웰 스미스의 주장은 “보편적 종교이론”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진리의 다원화된 상황 속에서 모든 종교에게 수용될 수 있는 진리에 관한 이론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신학’이라함은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아니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외적인 전통이 아니라 개인과 시간마다 달라지는 역동적인 실재이다. 그리고 종교의 객관적 상징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경험한 자에게만 효력을 지닌다.16) 그래서 항상 타 종교를 연구할 때는 일종의 ‘epoche’가 있어야 했다. 그러한 판단중지는 타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절대필요한 도구이며 이해를 성취해 나가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어야만 한다. 그에게서 나온 이른바 ‘세계신학’은 모든 종교의 신학이기에 지극히 보편적인 신앙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플러스” 신학이 되어야만 한다.17) 그러나 그가 종교학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인격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연구라고 극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신학은 신학이 되지 못한다. 일종의 메타신학이 되어버린다.

   

혼합주의적인 신학으로서 진리를 각 종교에 맞게 편집해야하는 인간 중심적인 수정이 가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각각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각기 그 신학도 다르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그러하다. 서로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그것이 전부인 양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타자들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담론․의사소통적인 신학이 필요하다. 

 

III. 대화와 토론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 포스트모더니티 사회 속의 기독교

   

우리는 삶의 기본적인 의미를 고통과 근원적인 한계를 통하여 인식하여서는 안 된다. 쥐상스(jouissance: 향유)를 소유한 자로서 삶을 조망해야만 한다.18) 삶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투쟁은 끝없는 반대자와 적들을 양산하고 권력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주도권과 패권을 보충해주기 위한 이론을 생성해 내며 전통에 대한 왜곡을 실시한다. 타인의 존재를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경제적인 부분을 보아도 담론부재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화, 혹은 신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서 인간의 삶은 획일화가 되는데 더불어 사는 사회로서의 하나 됨이 아니라 패권을 쥐고 있는 일부를 위한 다수의 맹아적 노동이 실시되고 있다. 목표와 수단이 전도된 사회는 이미 도래했다. 다른 가능성의 여부는 열어두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세계화’라는 미화된 거대 제국주의적인 모토는 국경도 없이 전체적으로 확산되었다. A. 기든스는 ‘세계화 속에서 국민국가는 하나의 ‘허구’이며…새로운 초국가적 체제와 세력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일상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화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제도를 변화시키고 있다.’라고 언급한다.19) 세계화의 이름으로 확산되는 암묵적인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체제와 권력이다. 사람은 계속적으로 맘몬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원적이고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종교연구가 본질적인 이론적인 도전을 받게 된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전통적인 보편주의(universalisms), 제국주의(imperialisms), 모든 종류의 객관성(objectivities)들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전통에 대한 아주 특별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20) 그러나 G. Hyman은 신학이 이러한 상황에 대조적으로 기대하지 않은 수혜자라고 본다.


신학은 포스트모던적인 움직임을, 종교 연구의 보편주의에서 신학의 특수성에 이르는 유사한(혹은 일치하는 corresponding) 움직임에 관하여서는, 보편적인 것에서 부터 특수적인 것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모더니티에 의해서 제공된 것보다 더 적합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21)…모더니티의 종말은 과학과 합리성 속의 신뢰의 위기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성과 과학의 담론들이 더 이상 “정당한(justified)” 것이 아니고 신학적 담론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unfounded)”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학의 기회(return)와 활력을 불어넣을 중요한 기회로 해석된다.22)

 

이러한 견해를 추구하는 존 밀뱅크(John Milbank), 그래함 워드(Graham Ward), 게서린 픽스톡(Catherina Pickstock)과 같은 근본주의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계열의 신학자들은 모더니티야말로 신학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유의 양태가 우선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더니즘적인 양태가 궁극적인 메타-서사적(Meta-narrative)이라고 언급한다.23)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견해들은 모더니티 사회의 권력(Power)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조건적인 해체주의라고 여기지 않고 있다.

  

다원주의와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신학적(종교학적)인 작업은 다양하다. 대화시도의 노선에 섰던 이들은 존 캅(John B. Cobb Jr.)과 존 힉(Hohn Hick), 폴 틸리히(Paul Tillich),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와 같은 이들이다(그러나 이하에서 폴 틸리히의 신학적 방법론만을 간략히 소개한다). 존 캅에 의하면 전통신학의 방법론이 설득력을 읽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17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과학적 사유라고 보았다. 진보하는 정치․사회․과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전통성에 정체된 채 존재하는 신학은 무의미하다.

  

또한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할 진정한 위기는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독교 내의 대화 없음이다. 종교의 내적인 세속화가 그것이 아니겠는가.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굳어버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속화되는 것이다. 예수의 시대의 소외자들과 함께하신 삶을 반추해보면 우리는 행동으로는 그러한 것들을 할 수 있으나, 사유와 사상적인 측면과 예술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편협하게 대화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것을 파편화 시키고 해체를 자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위기 속에 존재하는 사조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작업에 대한 해체작업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해체작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바로 그러한 노선 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V. 의사소통적 신학의 시도를 향해서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해체주의자들에 의해 무너졌다고 해서 그것들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어야하는가. 신학의 중대한 전환점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기독교 신학은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호교론적이며 도그마에 함몰되어 있는 신학을 지양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신학으로 전개를 해나가야 하리라 본다.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서 모든 것을 해체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해체주의를 해체시키기 위한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것 보다 의사소통 하는 종교로 자리 매김하여 이론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실천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는 기독교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본래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비판사회이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매개를 추구하기 위함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하버마스의 반기는 현대성의 진전인데, 이것은 이성의 폐기전략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의사소통이론을 의미한다. 이성에 가해진 공격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이성의 실존하는 형태를 의사소통․담론 속에서 찾고 있다.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담론은 일종의 반성적인 숙고로서 자기 내적인 반성, 독단적인 반성을 뛰어 넘는 담론적인 반성이다.24) 또한 상호 이해를 위한 자기 반성적, 자기 비평적인 방법은 모더니티의 발전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25)

   

타종교와 사상과의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다양한 해석적 전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의 방법론으로서의 의사소통은 진리의 도출이 아니라 진리의 인식론적 틀을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담론들이 송두리째 효력을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기독교 신학에 대한 깊은 반성이 요구된다.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유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는 항상 그 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작업을 하기위해서 다원주의적인 신학적 접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큼 신학의 의무와 기능은 막중하면서 포괄적이다. 신학은 끝없는 대화의 연장 선 상에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한다. 복음서에는 정지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며, 빌리 그래함 목사의 말처럼 ‘신약성서는 은퇴하거나 쉬고 있는 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되짚어 보아야 한다.

   

기독교 내적으로도 많은 갈등과 반목이 산재해 있다면 다원화된 세계를 살면서 다른 종교와 사상들과 올바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그리고 깊은 담론으로 모든 이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이해와 인정이 넘쳐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의 명제를 수직적인 위로부터의 노선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수평적이면서도 아래로부터 위를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각도에서 신학이 이루어져야하고, 다른 종교와 사상들과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본회퍼의 말처럼 교회는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존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그 거룩한 공동체 내의 거룩한 교제는 교회 내에서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식할 때 진리를 인식한다는 일방적인 도식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단절시켜 버린다. 전통 신학적으로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며, 교리적 논술을 넘어선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모든 이들이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전적으로 타인 지향적이신 그분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대화의 창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은 항상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긴장관계에서 담론이 형성된다. 즉 메시지와 상황 속에서 끝없는 의사소통이 발생한다.


방법론적 합리성의 원리는 실체에 접근하는 모든 과학적 방법과 마찬가지로, 조직신학은 방법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방법은 일종의 방편(tool), 문자적으로는 에움길이며, 그것은 반드시 본질적인 문제에 적절해야만 한다. 방법이 적절하던지 아니던지 아프리오리(a priori)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인식의 과정 자체 속에서 결정된다. 방법과 체계는 각각 상대를 결정한다.…(조직)신학은 상관관계 방법을 이용한다. 상관관계의 방법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상호 의존의 관계성 속에서 실존주의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답변들을 통해서 설명한다.26)


신학은 시대의 체계 속에서 시대의 물음과 끝없는 대화와 상호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상관관계를 유지하는 신학은 인간의 상황에 대한 끝없는 물음과 대답을 반복한다. 변증신학이라는 것이 교리를 변호하는 언술이 아니라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긴장관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양한 대화를 통해서 헤게모니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시금 점검하는 대화의 장으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대화가 없는 독단적이고 고립적인 종교로 남는다면 다시금 식민주의적인 신학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속적인 학제간의 연구와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를 끊임없이 점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오늘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니체가 반격하듯이 그러한 물음; ‘진리를 왜 물으려 하느냐?, 혹은 무엇이 진리냐?’과 같은 물음은 답변되지 않는 해석학적 순환만을 반복하게 된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 인식을 실천의 장으로 옮기는 일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티 사회가 권력과 권력을 조장하는 이성에 극심한 반대를 부르짖는데 진리에 대한 담론을 다시금 헤게모니의 전쟁터로 만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리에 대한 실천적 담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온갖 만남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 속에서 ‘대상물의 소유’로서의 인생이 아닌 ‘관계의 설정’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아가야한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에 최고의 만남, 최고의 관계가 필요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마르틴 부버는 세 가지의 관계성․공동생활을 언급한다. 첫째는 자연과의 공동생활, 둘째는 사람과의 공동생활, 마지막 셋째는 정신적 실재와의 공동생활이다.27) 그러나 이것은 각기 분리된 공동생활이 아니다. ‘분리’와 ‘공동’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사람(나와 타인들), 그리고 정신적 실재(하나님)과의 삼각 구도 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이해되어진다. ‘나’라는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독립’과 ‘존재’는 함께 사용할 수 없다.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이기 때문이다.28) 부버는 이러한 관계성을 인간 삶의 ‘근원어(Grundwort)’라고 정의한다. 진리에 대한 물음은 항상 관계성 속에서만이 대답가능하다.

   

재현의 위기를 오히려 재현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전환시키고자하는 끝없는 신학적인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 많은 신학자들은(여성신학자, 생태신학, 정치신학 등) 역동적인 신학으로, 궁극적인 차원의 궁극 이전의 차원으로의 해석으로 신학의 패러다임의 일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재현의 위기에 처해있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서막, 그 특이성 속의 다원주의와 신학의 고착성, 그리고 그러한 다원주의 사상적 조류 속에서 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하여 담론․의사소통적 신학을 언급하였다. 리오타르가 주장하듯이 현대 사회는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암묵적인 동의를 얻고 있다. 또한 상이한 언어게임들 사이에는 양립 불가능한 심연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음을 언급했다. 그의 상이한 언어게임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개념이다. 다원화 되었다고 해도 공통분모 없는 언어게임이란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를 신학의 위기로 보지 않고 새로운 담론의 장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살펴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라는 말로 언어에 모든 것을 국한 시켰으나,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말할 수 없는 것도 말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담론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해체된 것이 아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진리는 계속적으로 인간의 상호 관계 속의 삶,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의 삶,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속의 삶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신학은 끝없는 대화의 장을 통해서 헤게모니가 아닌 화합, 폭력과 억압이 아닌 사랑과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인식되기를 바란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는 실천적인 담론으로 이행되어야한다. 리오타르가 비판하듯이 권력과 부조리한 제도의 합리화를 내포한 근대적인 개념의 합리적인 담론이 아니라, 열린사회를 향한 열린 담론의 패러다임을 신학적으로 구상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전체적이고 차별 없는 담론을 의미하며 추상적인 담론이 아닌 실천으로 확산되는 역동적인 의미의 담론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으로 타인 지향적인 그분의 삶을 통해 반추해 봄으로서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끝없이 인간과 담론을 형성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으로서의 전능하심을 계시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담론은 파편화된 진리에 대한 이성적 사유를 통한 의사소통의 과정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의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참고도서

1. J. 보들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완 역(민음사, 2006)

2. J. 보들리야르, 불가능한 교환, 배영달 역(울력 출판사, 2001)

3. 앤서니 기든스, 제 3의 길, 한상진․박찬욱 역(생각의 나무, 2002)

4. E.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강영안 역(문예출판사, 1996)

5. J. F.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외 역(민음사, 1999)

6. 정승훈, 종교개혁과 21세기, (대한기독교서회, 2001)

7. J.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역(문예출판사, 2002)

8.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 김태길외 역(을유문화사, 1999)

9. 브라이언 매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철학의 역사, 박은미 역(시공사, 2002)

10. 윤철호, 기독교 인식론과 해석학,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11. 길희성,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종교연구; 종교학의 이해 7장, (분도출판      사, 2000)

12. 마르틴 부버, 나와 너, 김천배 역(대한기독교서회, 2004)

13. 홍정수, 세계신학의 개념과 과제, (세계신학연구소, 1989)

14. 노양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로티와 리오타르, (범한철학회, 2004)

15. Gavin Hyman, The Study of Religion and Return of Theology, AAR 2004

16. Marc P. Lalonde, Critical Theology and the Challenge of Jürgen Habermas,           (Peter Lang, 1999)

17.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Chicago Uni Press,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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