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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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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5. 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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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를 중심으로*- 김 진(울산대)


이 논문은 캔트웰 스미스가 제시한 새로운 종교학의 구상들을 중심으로 종교대화의 가능성 조건을 살펴보는 데 있다. 필자는 캔트웰 스미스의 구상을 종교다양성의 현상과 의미있는 종교진술, 그리고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설립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압축하여 새롭게 정리하고자 하였으며, 그 이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종교대화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틀을 제시하려고 고심하였다. 그 결과 필자는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이 되는 종교다양성의 사실인정 요구,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이 되는 종교현상의 의미진술 요구, 그리고 종교대화의 지향적 이상으로 제시되고 있는 신 중심주의적 접근과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실현 요구로 압축하였다.


첫째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종교다양성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과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논증적 상황은 나의 종교신앙과 타자의 종교신앙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종교다양성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대화의 출발점이자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이다.


둘째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종교현상의 의미진술 요구를 천명하였다. 종교대화의 의미진술을 위하여 새로운 종교학을 도입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종교 개념을 축적적 전통과 인격적 신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축적적 전통은 역사적이고 관찰 가능한 삶의 축적물로서, 경전이나 사원생활에서 추상화된 신학체계, 관습이나 법률과 같은 사회제도, 그리고 도덕적 규범이나 신화 등과 같은 문화적 틀로서, 이에 대하여는 객관적, 역사적 접근이 가능하다. 반면에 인격적 신앙은 구체적인 한 실존의 종교체험이나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계문제로서, 이에 대하여는 객관적, 역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셋째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대화의 지향적 이상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종교들의 대화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근거지평으로서 신 중심적 접근방식과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이를 통하여 인류는 전통적으로 상이한 축적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종교의 구성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는 인격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연구분야 : 종교철학

주 제 어 : 종교, 종교대화, 축적적 전통, 신앙, 선험적 조건, 수행적 조건, 지향적 이상, 종교공동체


1. 문제제기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으로 다양한 세계종교들, 특히 불교와 유교, 그리고 오늘날에는 기독교 등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왔으며, 현재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종교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수많은 종교유형들이 경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으며, 제각기 가장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들은 서로 유사한 부분들도 있으나, 근본적인 부분에서 일치하지 않거나 심지어 반대적이고 상충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종교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야기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현상은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 인식되어 왔다.


칸트는 역사적인 계시신앙으로부터 도덕성을 지향하는 이성신앙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면서,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와 그 다양한 신앙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칸트는 "모든 의무를 신의 계명으로 인식하는 것"이 종교라고 규정하였으며, 세계 속에서의 다양한 신앙유형들이 실제로 하나의 참된 종교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인식함으로써,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적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종교간의 대화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기하였다.


1988년에 필자는 칸트의 이성신앙 및 요청적 사유방법론을 주요 내용으로 다룬 후부터, 칸트의 종교 개념에 대한 인식이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대화를 모색하게 하는 단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왔다. 이보다 훨씬 전에 칸트의 후계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알버트 슈바이처는 칸트의 종교철학을 철학박사 학위논문의 주제로 채택하여 심도 있게 다루면서 칸트의 도덕주의를 종교대화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종교대화의 문제는 폴 틸리히가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종교철학과 기독교신학의 주요 주제로 다루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틸리히는 칸트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선험존재론적 지평과 성서적 지평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개방적인 원리를 정초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하느님 위의 하느님"이라는 메타신학적 신 개념을 기반으로 기독교와 타종교의 신이 공통적인 존재지반에 근거한다는 통합주의적 주장을 통하여 종교간의 대화를 모색하였다. 다른 한편 카톨릭 신학의 영역에서는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제화하면서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라너의 관점은 그 시기의 기독교신학자들에게 분명 파격적인 것이었으나, 곧바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상대주의의 한계를 탈피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후에 한스 큉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의 전면적인 대화를 추진하려고 시도했으며, 상이한 여러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조건을 정초하려고 고심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지구적으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세계도덕의 구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스 큉의 구상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와 존 히크는 그리스도 중심 축으로부터 벗어나서 신 중심적인 종교통합 모델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정형화함으로써 종교대화의 가능조건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캐나다 출신의 종교학자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불교인 모두에게 수용될 수 있는 종교이론을 구축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그는 기존의 종교 개념에 대하여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과 같은 세계의 주요종교들이 그들만의 고유한 신앙을 통하여 다른 공동체들과는 구별되는 배타적인 구원을 선포하려고 하였던 종교 개념은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부터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종교체계보다는 인격주의적 신앙의 문제를 보다 일차적인 관심사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종교체계를 중시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어떤 종교가 가장 참된 종교인가라는 잘못된 물음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캔트웰 스미스가 다양한 종교전통들이 형성된 축적적 과정을 중시하면서 그 각각의 전통들에서 상호 공유할 수 있는 본질적인 근거들을 찾으려고 고심하였던 자취를 추적하려고 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물음들을 통하여 연구 내용과 범위를 확정하려고 한다. 첫째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다룰 것이다. 이것은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에 대한 물음이다.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논증적 상황은 나의 종교신앙과 타자의 종교신앙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종교다양성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대화의 출발점이다. 유일신 신앙 역시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 둘째로 서로 다른 진리주장에도 불구하고 종교대화의 모색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이 찾아질 수 있는가를 다룰 것이다. 이것은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에 대한 물음이다. 캔트웰 스미스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종교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축적적 전통과 신앙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분리하여 접근한다. 셋째로 종교간의 대화를 통하여 서로 다른 종교들이 일치할 수 있는 근거 및 지평이 무엇인가를 다룰 것이다. 이것은 종교대화의 지향적 이념에 대한 물음으로서 신 중심적 종교구상과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설립 요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제기한 세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캔트웰 스미스의 논의들 중에서 다양한 종교현상의 사실인정 요구, 고유한 종교현상의 의미진술 요구,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실현 요구라는 세 가지 명제들에 적용시키려고 한다.



2.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 종교다양성의 사실인정 요구


종교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에서 대화의 가능성 조건과 최후정초 요구와 관련된 현대철학에서의 한 논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칼 오토 아펠과 한스 알버트 사이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아펠이 의미있는 논의의 가능성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논의의 윤리학 또는 논의상황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증명할 수 없었던 논증상황일지라도 토론의 참가자가 의미있는 발언을 시작하자마자 언제나 이미 전제하지 않으면 수행적 자체모순에 빠지게 되는 그런 현실을 뜻한다.


캔트웰 스미스의 출발점은 이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현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 인류공동체 안에 다양한 종교체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의 평화적 일치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문화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긍정적인 요소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종교적 다양성에서 우리는 문화의 형식적 다양성뿐만 아니라 각각의 문화가 추구하는 초월적 진리를 향한 인간의 개방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캔트웰 스미스는 이러한 초월적 진리는 종교적 체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체계 또는 교의가 아니라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인격적 태도이다. 그는 한 종교의 역사 사실이나 교의, 또는 다양한 제도적 실천보다는 그러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그의 종교이론을 '인격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타종교를 고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참여자들을 우리와 같은 인격을 가진 동료로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삶의 목표는 동일하다. 따라서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기보다는 불교인의 눈에 비친 우주의 모습이 어떤가를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은 무엇인가?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조건은 나의 존재 및 대화 상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지배-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도 종교들 사이의 대등한 인격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대등한 관계의 승인이 가능한 것일까? 종교사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아주 최근까지도 각각의 종교들은 다른 종교의 신앙 및 가치체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가장 지배적인 종교 중의 하나였던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왔는가를 보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캔트웰 스미스는 비교종교학의 분야에서 서구학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하여 보여 왔던 태도를 적시하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종교대화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서구의 종교학자들은 처음에는 다른 종교들을 사물화된 대상으로 파악하여 '그것'(It)이라고 부르다가, 아무 관계도 없이 저 멀리에 서 있는 존재로서 '그들'(They)이라고 부르다가, 아주 최근부터 이제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볼 수 있는 존재로서 인식하여 '당신들'(You)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물론 방식은 다르지만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앙을 가진 동료로서 인정하기 시작하여 '우리'(We)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대화의 선험적 조건은 논의상황의 요청, 즉 '나'와 '너'의 존재승인, 그리고 논의의 규칙들이다.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사람들과 선의를 가지고 신뢰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PF, 24).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그들도 우리를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캔트웰 스미스는 서파키스탄의 수도 라홀(Lahore)의 한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서 힌두교, 무슬림, 시크교 신앙을 가진 교수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종교적 다양성을 직접 체험한 바 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특정한 종교문화만을 고집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편협하며,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PF, 22). 또한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는 특정 종교의 선교정책이 우세하였으나, 앞으로는 한 종교전통에서 다른 종교전통으로의 개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들 사이의 접촉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PF, 23). 종교대화를 통하여 세계사회(world society)는 이제 새로운 세계공동체(world community)로의 변화를 모색하게 되며, 이는 지적, 도덕적, 사회적 문제가 서로 얽혀 있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흔히 진리 상대주의를 옹호하라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요구는 확실히 종교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캔트웰 스미스 역시 상대주의를 지지하고 있지 않다. 상대주의자들은 어떤 종교적 헌신도 궁극적으로는 타당성이 없고,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PF, 25). 이처럼 상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앙들이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들은 인류가 믿고 있는 다양한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캔트웰 스미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신앙은 인류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신을 믿어 왔던 사실에서 비롯된 현상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나의 신앙이 나에게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 각자의 신앙이 궁극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신 또는 초월적 존재(또는 사태)를 믿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초월적 존재를 섬기고 있다는 원초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를 들면 힌두교, 불교, 무슬림, 중국인들과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내용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선택하여 그 종교의 기본적 성향을 소개하고자 하였다(PF, 36-89). 여기에서 그는 체계적인 종교이론이나 교의가 아닌 신앙을 중심으로 접근하였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의 경우에 종교대화를 위한 태도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른 종교유형들과는 달리 캔트웰 스미스는 기독교를 다루는 곳에서 특히 종교대화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될 경우에 자기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의 문제이다(PF, 91).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하여 묻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현재 어떤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는 그가 힌두인들, 불자들, 무슬림의 신앙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가는 우리의 신학적, 도덕적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캔트웰 스미스는 모든 종교를 치우침이 없이 묘사하기 위하여 외부인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또는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각각의 신앙을 묘사하고나서,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이 내적으로 각각의 신앙에 시사하는 바를 고려하고자 하였다(PF, 93).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비인격적인 객관성이 아니라 정직한, 그리고 실천적인 자기분석이다. 캔트웰 스미스는 나의 기독교 신앙과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보는 나의 인식, 또는 그와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신앙을 보는 인식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개인적 경험(personal experience), 신학적 교리(theological doctrine), 도덕적 명령(moral imperative)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 의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개인적 경험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지식은 그 이전까지의 이해와 그것의 확장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한 이해 역시 자기 자신의 능력, 즉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실재들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인식, 나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달려있다(PF, 94). 종교전통들 사이에는 유사점뿐만 아니라 상이점들이 있다(PF, 95).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무슬림을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 무슬림이 하느님, 심판, 창조 등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더 나아가서 무슬림은 이것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유사성과 차이성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포괄하면서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하느님을 믿고 무슬림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를 일치시킨다. 그리고 내가 하느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무슬림이 하느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를 서로 분리시킨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하느님이 내가 그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곧 나의 신관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안다. 무슬림 역시 하느님은 자신이 그분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안다(PF, 96).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종교간의 일치가 이루어질 것인가는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와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어떤 유형의 신앙인이고, 그것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하는가 등에 의하여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것이며,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것이다. 모든 참된 종교적 삶은 과정이며, 그 자신의 신앙과 영적 깊이가 더해지고 탄탄해진다(PF, 97).


둘째로 다른 종교에 대한 인식태도는 신학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PF, 100). 기독교 신학의 경우에 지배적인 경향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논의할 여지도 주지 않고 그릇된 것이라고 단정하였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전통에서는 하느님을 성공적으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 안에만 참된 종교적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신학적 경향성은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이 발견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판정해버리는 편견을 갖게 된다(PF, 101).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신앙이 신학자들이 말한 것보다 더 타당하고 실제적이며 진실되고 심오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자신의 신앙이 위협받고 있다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신학은 신앙이 아니다. 신학은 매우 인간적인 신학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적으로 진술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말로써 명확하게 체계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지금까지 확실한 것은 "기독교 신앙만이 진리이므로 논리적으로 다른 신앙들은 당연히 그릇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이제 설득력이 없다. 배타적인 결론은 신앙 자체와 어긋나기 때문에 부정적 전제로서 사용되는 신학은 그 주인을 배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타당하다면, 바로 이런 사실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신앙 또한 진실되며, 그것을 통해 하느님이 그들을 만나고 구원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캔트웰 스미스는 기독교인이 가진 신앙의 사실들과 다른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사실들을 동시에 공평하게 다룰 수 있는 신학체계를 정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런 새로운 지적 시도에 착수하고 있으며, 그 해결책이 발견되면 승인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타종교에 대한 태도표명은 도덕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PF, 103). 이 문제는 지금까지 신학적인 것보다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다. 물론 도덕적 고려는 신학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신앙의 요구는 바로 도덕적 명령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그리스도적 명령이란 형제애(fellowship), 화합(reconciliation), 사랑(love) 등이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두 사실, 즉 그 하나는 지적인 수준에서 사상과 개념의 문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수준에서 대인관계와 행위의 문제가 제기된다. 도덕적으로 우리는 반샘족주의, 인종차별주의와 같이 심연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고 모든 사람에게 겸허하게 다가서서 사랑과 봉사와 신뢰를 바탕으로 조화와 평등 및 세계적인 인간적 동포애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학과 윤리 사이의 갈등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도덕적인 측면을 취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캔트웰 스미스는 "나는 교회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보다 더 우리의 원초적 계시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시사하는 바와 좀더 조화를 이루는 교리적인 입장을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였다(PF, 104).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독교인과 도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화해와 평화, 그리고 상호 이해와 지구공동체, 보편적인 인간 존엄성이 추구되는 세계"(a world of reconciliation and peace, of mutual understanding and global community, of universal human dignity)를 건설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PF, 104). 이는 종교적 공동체들 간에 보다 많은 호의를 갖도록 해야 하고, 종교적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낳고,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절망적으로 갈라놓은 심연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을 기독교인들이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캔트웰 스미스는 참된 기독교 공동체라면 신앙의 도덕적인 명령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와 사랑을 구축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종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그들은 논쟁의 방식보다는 실천적 방식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3.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 종교현상의 의미진술 요구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두 번째 조건은 종교다양성 현상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도 각각의 고유한 종교현상들에 대하여 그 참된 의미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현상의 참된 의미는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신자들이 이해하고 규정하고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다. 신자들이 부여하는 의미체계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인 의미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종교적 상징들의 객관적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현상에 대한 의미있는 진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캔트웰 스미스에 의하면 우리가 다른 종교의 현상에 대하여 의미있는 진술을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비교종교학의 임무는 적어도 어떤 종교에 관한 진술을 할 때, 서로 다른 두 개의 전통에서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RV, 152).


비교종교의 연구는 그 자신의 종교보다는 다른 사람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요청으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요청은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상황에 의하여 검증될 수 있다고 본다(RD, 155). 어떤 종교에 대한 의미있는 진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종교 신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신앙공동체에 속한 사람의 동의를 구할 수 있어야만 의미있는 진술이 될 수 있다. 둘째로 동시에 그것은 진술자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나 또는 학문공동체 안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진술이어야 한다. 이처럼 종교대화를 통한 세계신학 또는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구축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 가능성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적 신앙을 가진 학자가 그가 믿고 있는 신앙 이외의 다른 신앙에 대하여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진술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그리고 이와 같은 지나친 요구 및 제약은 오히려 비교종교학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우려에 대하여 캔트웰 스미스는 전통적인 종교 개념이나 연구방식으로는 종교현상들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이 되는 종교현상의 의미진술 요구를 위해서 새로운 개념과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세속적 존재인 동시에 언제나 이미 초월적 실재에 대하여 묻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하여 있는 교접적 존재이다. 이 점에서 종교사는 바로 성속이 교차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학을 전형적인 인문학으로 보며, 이것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학이 아니고 인격적 삶의 속성들에 대한 학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캔트웰 스미스의 진리관은 전통적인 자연과학적 진리관과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그에 의하면 자연과학적 진리 개념은 인간의 내면적 사건인 종교현상을 다루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며, 철학 역시 하나의 특수한 문화적 역사적 산물로서 보편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 철학 역시 역사적 유한성을 가진 사유체계에 지나지 않으므로 같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종교적 진리를 심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에밀 부루너의 입장, 즉 "종교는 불신앙이고, 불신앙은 죄이며, […] 타종교들의 신은 언제나 우상이다"라는 생각은 '편협한 그리스도인의 오만'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MR, 140). 틸리히 역시 이러한 종교 개념의 사용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타종교들'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서 이미 그 종교들의 신을 우상, 거짓 신, 인간 공상의 산물로 전락시킨다. 이는 기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적어도 삼위일체의 2격에 있어서는 우상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보면 종교라는 개념은 자기들이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의 종교적 삶에서 초월과의 관계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유용하다. 따라서 스미스는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우상을 숭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우상의 형태로 하느님 혹은 그 어떤 것을 숭배한 것이다(MR, 140).


캔트웰 스미스는 "상호 대립적인 이념공동체"로서의 서구적인 종교 개념은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최근 200여 년 동안에 형성된 근대적인 발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루크레티우스 등과 같은 로마인들은 religio를 '성스러운 의무'나 '특정한 관습의 외적 준수'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MR, 20).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 사용하였던 religion의 개념 역시 지금의 '종교' 개념이 아니고 '경건성'을 뜻하는 말이었다(MR, 29,37). 17세기의 신학논쟁 이후부터 교리체계로서의 종교 개념이 정착되었고, 18세기에는 상호 배타적인 이념 공동체가 추구하는 교의체계로 이해되었으며, 19세기에는 세계종교들을 각각의 역사를 가진 복잡한 유기체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계의 다른 민족들을 개종시키려는 전략으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따라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라는 현상을 개념과 시각의 전환으로 특징지워지는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MR, v). 스미스는 인간의 종교적인 삶이 여러 개의 신학적·역사적 복합체로 구분될 수 있다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은 종교의 세계를 독자적인 복음이나 교리체계에 근거한 상호 배타적인 집단들의 하나로 이해한다. 이 경우에 종교인들은 필연적으로 어느 종교가 가장 참된 종교인가라는 물음에 이르게 된다(MR, v-vi).


캔트웰 스미스는 전통적인 '종교' 개념 대신에 '축적적 전통'(cumulative traditions)과 '신앙'(faith)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축적적 전통이란 사원, 경전, 신학체계, 무용 양식, 법률 또는 그 이외의 사회제도, 관습, 도덕적 규범, 신화 등과 같은 문화적 틀이며, 이는 종교적 공동체의 과거 역사적 삶의 축적물로서 역사적인 접근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러나 신앙은 구체적인 실존의 삶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종교적 체험, 누멘적인 것에 대한 느낌, 사랑, 경외, 희망, 숭배, 헌신과 봉사 등에 대한 생동적이고 내면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다(Hick, MR, x).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만이 참된 종교이고, 따라서 다른 종교들은 모두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적 틀은 결국 기독교 신학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아포리아에 빠지게 한다.


"만약에 하느님이 온 인류의 하느님이라면 도대체 왜 하느님에게로 가는 올바른 길인 이 참된 종교가 인류 역사의 한 가닥에만 국한되어 인류 역사 이래 지금까지 살고 죽은 수십억 인구 대다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는가? 만약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요 아버지라면 그가 과연 이 참된 종교를 단지 선택된 소수만을 위하여 줄 수 있었을까? 어째서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종교적 삶으로 하여금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도록 하였던 것일까?"(MR, vi) 또한 동시에 "성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결정적이고 유일한 말씀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많은 전통들 가운데서 한 전통에 속하는, 더군다나 세계 종교공동체의 문제가 생겨나기 이전에 씌어진 경전일 뿐인가?"(MR, vi-vii)


이와 같은 물음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간주되거나, 교회를 통하여 주어지는 '특별한' 방식과는 다른 일반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현대의 신학적 이론들에 의하여 유사한 답변에 이를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적절한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그런 이론들은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완화제로서 기능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이론들은 경건한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과도적인 지위만을 부여하다가 마침내는 현세 혹은 내세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MR, vi).


그리하여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축적적 전통과 신앙이라는 두 차원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축적적 전통은 이 세계의 일부이며 인간활동의 산물이다. 그것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며 성장하고 변화하며 축적된다(MR, 159). 그것은 이전 세대들의 신앙을 가시적인 형태로 담고 있고, 새로운 세대의 신앙을 포함하게 되고, 그 다음 세대의 신앙을 조건지우게 된다. 축적적 전통의 자료가 지속되는 것은 그것이 각 세대마다 어떤 초월적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근거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전통의 객관적 자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역사가들에 의하여 관찰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초월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창문이다(MR, 160). 그러나 물론 "축적적 전통이 지닌 요소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탈락되거나 추가될 수도 있으며, 어떤 습관은 사라지고 어떤 규례는 지켜지지 않으며, 어떤 사원은 폐허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고매한 통찰이 저질화되고 온정을 지닌 자발적 행위들이 점차 제도화되며, 새로운 것들이 전통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는 지도자들의 통찰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오해되거나 유실될 수도 있다"(MR, 161).


축적적 전통은 전적으로 이 속된 세계에 속하여 있고, 역사적 관찰에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다. 속된 전통이란 각 세대마다 참여자들 각자의 신앙을 통하여 새롭게 되는 한에서만 존속될 수 있다. 축적적 전통은 전적으로 역사적이다. 그러나 역사는 폐쇄된 세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안에서 주체로 서 있으며, 그의 정신 역시 어느 정도 초월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전통이란 역사적 산물이며 그것에 참여하는 자들에 의하여 계승되며 계속적으로 형성되는 산물이다"(MR, 165). 이런 사실에서 각각의 특정한 종교의 축적적 전통은 역동적이고 다양하며 관찰 가능하다(MR, 168). 그러나 축적적 신앙은 우리 모두에게 비교적 비슷하고 공통적인 것으로 인식된다(MR, 190).


이와 반대로 그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이나 혹은 여러 개인들이 지닌 신적인 초월성과의 관계이다. 스미스에서 신앙은 '개인 인격체적 신앙', 즉 '한 특정한 인격체의 내적인 종교적 체험이나 개입'을 뜻한다. 사실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초월적인 것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의미한다. 종교 사상가들은 신앙이란 정확하게 묘사되거나 언표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신앙은 공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개인 인격체적이며 또 너무나 신적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또 그들이 속한 전통의 상이성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 현저한 차이를 보여 왔다. 여기서도 역시 인류의 신앙이 지닌 놀라운 다양성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종교적 삶의 핵심은 그 안에서 인간이 한계를 초월한 어떤 것으로 인도된다는 데 있다. 한 종교를 개념화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모순을 범하는 일이다(MR, 141). 신은 사물이 아닌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MR, 127). 신은 이 세상을 사랑해서 그의 아들을 보낸 것이 분명하지만, 신이 기독교를 사랑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읽지 못한다(ibid.). 신은 종교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계시한다(MR, 128,129). 왜냐하면 종교는 너무나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종교의 역사적 현상이 지니고 있는 풍부성, 다양성, 변동과 변화, 분파와 복합적 양상이 그것을 정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스도교라고 불리우는 것은 역사적으로 한 개가 아니라 수백만 개이며, 또한 수억의 인격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과 유대교, 그리고 힌두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힌두교를 정의하는 것은 힌두교 신자가 지닌 그의 신앙의 자유와 성실성에 대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MR, 145).


스미스에서 신앙은 '개인 인격체적 신앙', 즉 '한 특정한 인격체의 내적인 종교적 체험이나 개입'을 뜻한다. 사실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초월적인 것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의미한다. 신앙이란 개인 인격체의 내적 종교적 체험이다. 따라서 신앙은 역사적인 것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각 사람의 신앙은 그 자신의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자유롭고, 그 사람의 개인 인격체 속에서 그가 대면하게 되는 전통을 비롯한 그 외의 내, 외적인 속된 환경과 초월적인 것이 상호 작용하여 생기는 결과이다. 한 사람의 신앙은 전통이 그에게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그의 신앙은 이 전통의 빛 아래서 우주가 그에게 갖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MR, 159).


인간의 신앙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개인 인격체적 성질이다(MR, 171, 185). 역사적으로 볼 때, 신앙은 산문과 시적 언어, 의례와 도덕, 예술, 제도, 법률, 공동체, 성격과 같은 관찰 가능한 형태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다. 신앙은 이 세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서 초월적인 것과 관련된다. 종교적 신앙은 개인 인격체적이다. 그리스도교의 교회, 무슬림의 움마, 힌두교의 카스트, 불교의 승가와 같은 여러 공동체들은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 인격체적 신앙의 표현이다. 구성원들의 개인 인격체적 신앙을 떠나서는 종교적 공동체의 성립이나 지속적 역사 그 어느 것도 이해될 수 없다(MR, 175).


어느 날 아침의 어떤 한 사람의 신앙은 그 전날 오후의 신앙과도 다르다고 인정해야 한다. 신앙은 개인 인격체적인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는 터툴리아누스(Tertullian)의 신앙은 아베라르두스(Abelard)의 신앙과 다르며,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의 신앙은 츠빙글리(Zwingli)의 신앙과 다르고, 성 테레사(St. Teresa)의 신앙은 존 녹스(John Knox)의 그것과, 하르낙(Har- nack)의 신앙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보다 선택된 수준에서 보자면 로마 지하교회의 한 무산계급자가 지녔던 신앙이나 순교자의 신앙은 십자군의 한 맹목적 추종자의 신앙과 달랐으며, 또한 이들 모두의 신앙은 오늘날 보수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미국의 중·남부 지역인 바이블 벨트(Bible-belt)에 사는 한 농부의 신앙과 달랐다(MR, 190).


나의 신앙은 내가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적나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행위이다(MR, 191).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 일반, 불교 신앙, 힌두교 신앙, 유대교 신앙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앙, 너의 신앙, 나의 한 이웃인 유대인의 신앙 등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초월적인 것을 직접적, 개인적으로 만난다. 하느님에 들어오는 것은 한 개인의 인격체이지 유형이나 집단이 아니다. 따라서 규범적인 그리스도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은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개인적이고 특수한 사람들의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신앙만이 있을 뿐이다(MR, 191). 무슬림의 신앙 역시 땅위에서,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그의 개인 인격체적 의식으로서, 역사 밖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존재하며, 땅위의 역사 속에서 그가 해야 할 의무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복종하는 것임을 깨닫는 의식이다. 이러한 신앙은 계속해서 변천해 왔으며,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나 캔트웰 스미스가 여러 종교적 삶 속에 어떤 공통된 것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는 바로 초월적인 것 그 자체이다. "전통들은 진화되고, 인간의 신앙은 다양하게 되지만, 하느님은 계속해서 존재한다"(MR, 192).


4. 종교대화의 지향적 이상: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실현 요구


우리는 물려받은 개념틀을 사용하여 세계를 바라다 본다. 이 개념화 작업은 인간의 활동이고, 바깥세계를 바라보는 창틀이다. 이것은 그 기능이 변할 수도 수정될 수도 있다. 캔트웰 스미스는 기존의 '종교' 개념을 기각하고, 유익한 새로운 개념적 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MR, 194). 즉 우리가 종교 일반 또는 어떤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해온 것을 두 개의 역동적이면서 서로 다른 요소들인 축적적 전통과 개인 인격체적 신앙으로 대체한 것이다. 종교적 접경선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는 한, 그리고 서로 다른 심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고 일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지 않는 한 지구촌의 앞날은 밝지 못할 것이다(MR, 9).


캔트웰 스미스는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사를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집약하였다(PF, 107). 이 물음은 곧 "우리 자신의 신앙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도 공정성을 유지하면서 신앙 자체를 규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인간의 어떤 자질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어떤 특정한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 일반이 문제된다. 캔트웰 스미스는 자신의 종교이론이 "잠정적인 것으로 아직 증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가설에 불과한 사변적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PF, 107). 그것은 이론적이고 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PF, 108). 이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동시에 우리의 문명을 방향을 정하고 인류가 새로운 시기로 진입할 수 있는가에 결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문제이다(PF, 109). 이제 인류의 종교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 이외에 다른 종교 전통들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풍조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인류 전체의 발전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온 인류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캔트웰 스미스는 최근의 종교사학의 연구성향은 타인의 종교적 삶의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는 것과, 종교공동체 상호간의 소통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MR, 196). 또한 동시에 독백적인 설교보다는 대화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는 앞으로 세계의 종교가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가는 사안이다. 캔트웰 스미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무슬림 공동체가 이 축적적 전통과 신앙이라는 두 개념군을 수용하면 이들 종교가 현대에 처한 위기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MR, 197).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지만, 종교신앙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관측 지점, 즉 외부의 관찰자와 전통의 참여자(MR, 200)가 있다. 외부관찰자는 자기가 보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 즉 신화, 의례, 신조, 경전, 교의, 제도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전통참여자는 자기가 전수받은 문화유산을 알고 느껴보려는 태도를 취하며, 여기서는 그 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내면적인 세계가 중시된다. 캔트웰 스미스는 어떤 특정한 종교에 대한 의미있는 진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입장을 넘어선 제3의 유형, 즉 관찰자와 참여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단일 종교 이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공동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서로 격리되어 있지는 않은 종교적 복합체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입장이다. 이들은 타인의 신앙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기 신앙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가 인류 전체의 공동체적인 종교적 복합체의 구성원이거나 또는 될 수 있다고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대에는 전통간의 상호침투, 의사소통이 요구된다. 그러나 캔트웰 스미스는 우리가 종교적 영역에서 이와 같은 통일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MR, 200).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책임을 부여받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상이한 종교적 공동체에 속한 인간들이 협동하여 함께 긍정할 수 있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엄청난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려면 새로운 관념들, 새로운 종교이론과 신학이 요구되며, 이를 통하여 "세계종교사의 다음 국면"(the next phase of the world's religions history)이 기술될 것이다(MR, 201).


종교다원주의를 신중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카워드는 동방정교회의 성령 편재신앙을 정점으로 폴 틸리히, 존 히크, 캔트웰 스미스의 경우를 들고 있는데, 기독론과 타종교와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기본적인 지침을 마이엔도르프의 {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또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들을 하느님에게로 끌어올리는 신인(神人, theanthropos)이다. 다른 종교들도 인간을 신성한 삶으로 끌어올리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하느님의 세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도구로 인지된다".


캔트웰 스미스의 종교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탐구에 의하여 언표된 '종교'라는 말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인간의 종교적 삶 그 자체가 보다 참되게 부각되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종교의 의미와 목적은 하느님이며, 이 때문에 모든 종교적 장식품은 속된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곧 종교의 종말을 뜻한다(MR, 201). 이는 오늘날 종교대화에서 지배적인 입장이 되고 있는 신 중심적 사유방식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종교 체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교회, 대학, 인류공동체의 내부에서 씌여진 것으로서 교회와 학자들과 전 인류에게 헌정사를 쓰고 있는 캔트웰 스미스의 심정 속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공존할 수 있는 종교적 공동체의 설립이 다름 아닌 종교대화의 선험적인 가능성 조건인 하느님의 존재 승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하느님의 존재를 승인하게 되면 그가 기독교인이든지 무슬림이든지 혹은 불교인이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신앙을 가진 순수한 인간이며, 우리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과 동일한 우주를 보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는 문화적 다원성과 다양한 신앙이 존재하는 세계이다(PF, 117).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승인되어야 한다. 이를 성사시킬 것인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류의 결정에 달려 있다. 모든 종교들의 이상이 통합된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건설은 확실히 우리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종교적으로 다양한 세계 속에서 살고있는 기독교인"(The church in a religiously plural world)이라는 강연에서 캔트웰 스미스는 최초의 새로운 세계주의의 출현, 즉 정치경제적으로 "하나의 세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우리의 현실세계는 종교적 다양성을 가진 세계이다. 선교영역에서는 다른 종교형식, 종교적 전통과 직접적인 대결이 있었으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특정한 종교신앙에로의 개종을 요구하는 선교활동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틸리히의 유명한 저서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 역시 이제는 하버드대학의 학부생이 가진 지식보다도 더 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가 되었다.


과거에는 서로 다른 문명들끼리 서로를 무시하거나 싸워왔으며 아주 드물게 때때로 서로 만날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들이 서로 만나고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침투하고 있다. 즉 그들은 서로 만날 뿐 아니라 공통된 문제들을 함께 대처해 나가고 있으며, 함께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인류가 대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도전은 오늘날의 미성숙한 사회를 세계공동체로 바꾸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일 것이다(PF, 131).


스미스는 만일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나 불교와 다른 종교들도 생동하며 변화하는 신과 인간의 만남을 추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 기독교 선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종교의 신과 인간의 만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들은 진화하고, 신앙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The traditions evolve. Man's faith varies. God endures).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신중하게 진술할 경우에 인류공동체 안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다른 종교의 교리를 부분적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창조의 교리로써 은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지만, 바가바드기타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특정한 지식 없이 인간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PF, 138). 그러나 이 명제의 인식론적인 어려움이 있다. 누군가가 기독교 신앙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물을 경우에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내재화하고, 신앙과 일치하면서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신앙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신앙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임을 안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가 이천년 동안 기독교신앙이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였고, 그와 같이 발견해 왔다고 대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 속에 살아오면서 그것이 옳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다른 전통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신앙이 그릇되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당황하게 된다(PF, 139). 소수신학자들의 논리적 추론 때문에 다른 전통 속에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지옥에 가거나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잔혹한 일이다. 실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역시 그들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지내왔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내부에서도 배타주의를 견지하기란 그렇지 쉽지 않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그와 무관한 인간 종족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느님이 성령이시라면, 그가 다른 신앙의 역사 안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외의 인류 역사 속에서 완전하게 부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질 수 있는가?(PF, 142)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떠나면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 수 없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캔트웰 스미스는 "무모한 배타주의의 오류"(the fallacy of relentless exclusivism, PF, 143)는 진정한 그리스도적 자비와 통찰력을 교리적인 타당성과 조화시키는 올바른 길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PF, 143). 부적절한 기독교 신학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종적인 교리는 이렇게 다시 씌어져야 한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하느님이시므로, 불자, 힌두인, 무슬림 등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해야 한다. 하느님은 서로 다른 종교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PF, 144f). 이처럼 신 중심적 사고방식은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설립요구를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5. 결론


우리는 이 글에서 "종교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특히 캔트웰 스미스의 새로운 종교학의 언어들을 통하여 답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착안하였던 사실은 세 가지의 문제였다. 첫째로 그것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종교들 사이에서 대화가 성립될 수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들을 통하여 그런가를 문제삼았다. 캔트웰 스미스는 우리가 제기한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종교다양성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과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인식의 변화를 주문하였다.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논증적 상황은 나의 종교신앙과 타자의 종교신앙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슬람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그는 잘못된 신앙을 가졌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의 신앙까지를 부정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종교다양성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대화의 출발점이다. 그리하여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은 다양한 종교현상의 사실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문제는 만일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 다른 진리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종교주장들 속에서 의미있는 내용들을 수렴하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론적 토대가 구축될 수 있는가였으며, 이것은 바로 의미있는 종교대화의 모색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적 조건에 대한 물음이었다.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하나의 폐쇄적인 체계적 사유로 고착시키는 전통적인 종교 개념의 성립 배경과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종교학의 정립을 요구하였다. 그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 종교개념은 축적적 전통과 인격적 신앙이었다. 축적적 전통은 역사적이고 관찰 가능한 삶의 축적물로서, 경전이나 사원생활에서 추상화된 신학체계, 관습이나 법률과 같은 사회제도, 그리고 도덕적 규범이나 신화 등과 같은 문화적 틀이다. 이와 반대로 신앙은 구체적인 한 실존의 삶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종교적 체험이나 초월적인 것에 대한 고유한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내면적이고 생동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객관적, 역사적 접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서로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동일한 축적적 전통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신앙의 내용은 각각 다르며, 심지어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캔트웰 스미스는 축적적 전통만을 중시하게 되면 그 객관적 사실의 고착화 현상으로 종교간의 대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지만, 각각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인격적 신앙은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매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종교대화의 가능성과 관련된 세 번째의 문제는 서로 다른 종교들이 대화를 수행할 경우에 방법론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근거 및 지평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대화의 지향적 이념에 대한 물음으로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신 중심적인 접근방식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인류는 전통적으로 상이한 축적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종교신앙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는 인격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캔트웰 스미스에서의 종교대화는 종교다원화 현상을 인정하고 있는 대화 상대자들이 신 중심적인 종교구상을 바탕으로 서로가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공통적인 신앙근거들에 대한 상호주관적인 해석작용을 통하여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종교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기능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종교대화의 선험적 조건인 종교다양성의 사실인정 요구와 종교대화의 수행적 조건인 종교현상의 의미진술 요구, 그리고 종교대화의 지향적 이상인 세계적인 종교공동체의 실현 요구를 완전하게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근거지평의 확보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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