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는 간질을 심하게 앓아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가 많았다. 그 사이 도박에 빠진 어머니는 많은 빚을 지고 결국 이혼하셨다. 힘든 살림에 병든 아들과 손자, 손녀까지 감당해야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 여동생을 고아원에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방과 후 주유소 일, 일요일에 막노동, 방학 때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차비를 벌어 힘겹게 공고를 졸업했다. 사춘기 시절, 외로움과 가난의 무게에 숨이 막혔지만 어른이 되면 내가 갖지 못했던 따뜻한 가정을 이루고 살겠다는 희망으로 눈물을 닦았다. 군대 갈 나이가 되자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육군 하사관에 지원했다. 힘들고 낯선 군생활이었지만 열심히 해서 고참들에게 인정도 받고 3년 뒤 야간대학에도 진학했다. 적은 돈이지만 집에 생활비도 부쳐 드리고 저금도 하며 '행복이 이런 거구나'하고 느낄 즈음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내게 일깨워 주려는 뜻이었을까. 군대 동기와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술에 취해 비를 맞으며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았다. 안됐다며 집에 데려다 주자는 동기의 말에 그녀를 차에 태운 뒤 집을 물어보려고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뜬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뺨을 때리고 내 머리를 잡아챘다.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설명했지만 취한 그녀는 지나가던 순찰차를 세웠다. 파출소에 가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그녀가 너무 취해 있어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다음날 그녀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우리를 강간범으로 몰아 헌병대에 넘겨진 것이다. 거짓말로 둘러대는 그녀의 진술만 믿고 변호사마저 합의를 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억울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무서웠다. 아버지가 아픈 몸을 이끌고 면회를 오셨다. 아버지는 "오늘 피해자 측과 합의했다. 잘될 거니까, 이제는 나와서 참되게 살아가라"말씀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못난 아들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길에서 여러 번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셨다는 아버지의 얼굴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그 희생을 생각하며 그날 밤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석 달 뒤 특수 강간 치상범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군생활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절망적인 판결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눈물만 어른거렸다. 오직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동안 모아 놓은 천만 원도 모자라서 천만 원을 더 대출받아 변호사 선임비와 합의금을 갚았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 낮에는 퀵서비스,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다. 점심은 오토바이 위에서 빵과 우유로 때우며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이듬해 봄에는 빚을 다 갚고 할머니와 아버지께 맛있는 저녁도 사 드리고 용돈도 조금씩 드릴 수 있었다. 그즈음 대학 복학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찾아왔다. 집을 나가신 뒤 처음 보는 어머니 얼굴이었지만 기쁨도 잠시, 보증을 잘못 서 집이 넘어가게 됐다며 돈을 좀 빌려 달라셨다. 내가 힘들 때 연락 한번 안 한 무정한 어머니. 하지만 나를 낳아 주신 분이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 준비해 둔 등록금을 내주었다. 그러나 갚기로 한 날짜가 지나도록 어머니는 연락이 없었다.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너져 내렸다. 힘겨운 삶의 무게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아파트 옥상 위로 올라가 유서를 쓰는데 '아버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되뇌다 울고 말았다. 세상에 상처받기 싫어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려 하다니…. 나는 못난 놈이었다. 나는 아직 갚아야 할 것이 많았다. 아버지의 눈물, 동생의 아픔, 할머니의 고생…, 다시 용기 내어 살아 보자 이를 악물었다. 복학을 뒤로 미루고 직장을 얻었다. 지금은 고아원에서 나온 동생에게 작은 전세집을 구해 주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끔찍한 누명을 쓴 그 일은 삶에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였다. 불쑥불쑥 억울한 생각이 들지만 '고통 뒤에는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니 앞으로 힘든 일이 있어도 이겨내라'는 뜻으로 알고 마음을 굳게 다진다. 무지개는 비 온 뒤에만 떠오르는 것이니까. === 옮겨온 글 ===
친구여 우리 늙으면 이렇게 사세나 (0) | 2011.04.03 |
---|---|
老年四苦(노년사고) (0) | 2011.04.03 |
하느님과 하나님 (0) | 2011.04.03 |
내 안에 많은 미움을 만들지 마세요 (0) | 2011.04.03 |
진정한 마음의 친구 (0) | 2011.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