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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용서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2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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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용서

발행일 : 2001-06-24 [제2255호]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가 1, 57~66. 80

미국 보스턴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독립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인 콩코드라는 마을이 있다. 거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다고 한다.

"미국의 어머니들이 멀리 영국에서 이곳까지 와 전사하고 돌아가지 못한 아들들을 기다리는 영국 어머니들의 슬픔을 대신 애도하는 뜻에서 이 비석을 세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많은 어머니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글이다. 영국 군인들의 어머니나 미국 군인의 어머니 모두가 젊은 아들들의 어머니이기에, 영국에서 이곳까지 와 돌아가지 못하게 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며 전사한 아들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영국 어머니들의 마음을 미국 어머니들이 대신 위로해 주는 묘비인 것이다.

지금까지 영국과 미국이 형제 국가로 지내고 있는 데는 앵글로색슨이라는 민족적 동질성도 있고 같은 영어 문화권이라는 공통성도 있으나 이 어머니들과 같은 인도주의적 공감대가 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 한다. 어느 수필집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도 이 같은 인도주의적 공감대와 상대방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 설교의 한 부분으로써 '공동 기도'와 '끝없는 용서'에 대한 내용을 읽게 된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구하면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모아 구한다' 여기서 마음이란 인간의 정신 생활 전반을 나타내는 말로 인간의 감정, 기억, 이념, 계획, 지식, 결정 등이 포함되는 말이다. 때문에 마음을 모은다는 말은 단순히 같은 내용과 같은 말로 기도 드리는 합송의 의미를 뛰어넘는 온전한 일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마음을 모아 구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두세 명이 모이면 거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예수님의 신성과 관계된 말이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신심을 위하여 두 사람 이상이 모인다면 하느님의 현존이 거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세 사람이 뜻을 모아 기도 드림의 장점은 혼자 드리는 기도보다 이기심을 줄이고 대신 이웃사랑과 공동선을 기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의 문제.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란다. 물론 490번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곱이라는 숫자가 충만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이기에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단 한번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무한히 용서하라니. 그리고 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용서라 하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 어떤 부담도 없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일치된 용서'만이 진정한 용서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용서라는 말은 성서에서 보면 '면제'라는 의미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더 이상 죄로 보시지 않는다는 뜻이요, 채무자가 지불 능력이 없기에 책임과 의무를 면해 주는 관대한 처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리 용서라는 말의 의미를 관대하게 해석해도 여전히 용서는 쉽지 않은 일이고 더 솔직한 표현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이 말을 이렇게 알아듣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비록 마음이 내키지 않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갈등도 일으키고, 또 우리가 시도하는 용서가 거의 100%로 실패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에 다시 용기를 얻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고 하는 시도와 노력이라고 말이다.

어떻든 분명한 것은 용서란 문제는 시작만 우리가 할 수 있을 뿐 결과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 놓아야 할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미사를 각 성당에서 봉헌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통일. 너무나 단순한 생각일 수 있지만 이 문제를 위해서는 남북의 정책 담당자들이 오늘 복음 말씀을 정독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남 북 당국이 말로써만 화해와 통일을 외치지 않고 진정 온 마음과 뜻을 모아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고, 남북이 서로의 잘못을 질책하기보다 각자의 잘못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려는 가시적인 노력, 거기에 더하여 상대방의 아픔을 헤아리는 인도주의적 공감대만이 화해와 일치를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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