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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적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2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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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적

발행일 : 2001-07-08 [제2257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루가 10, 1~12, 17~20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이다. 김 신부님은 충청도 솔뫼에서 1821년 출생하여, 15세가 되던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이국 멀리 마카오로 유학해 1845년 8월 17일 서품 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가 된 분이다. 서품된 후 약 8개월동안 활동하시다 체포되고 서품 된 지 1년 1개월이란 짧은 기간동안 사제로 사시다가 만 25세의 짧은 생애를 사신 분이다.

이러한 신부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주님께 대한 열정'과.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철저한 투신'이란 두 말씀이다.

물론 이 열정이라는 말과 철저한 투신이라는 말은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고 항상 선일 수만은 없는 단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지향하는 바가 '공동선'이나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선', 또는 '하느님'을 지향할 때 이러한 단어들은 참으로 가치 있는 말이 된다.

인류의 불행은 어쩌면 우리가 참으로 열정을 바치고 투신해야 할 대상과 그렇지 못한 가치 없는 대상이 뒤바뀌는 경우일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 ?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포로가 되든지 아니면 자신의 게으름과 타협하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내 안의 유혹과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도 마지막까지 신부님이 선택한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을 경험하게 된다. 혹독하게 가해지는 육체적 고문이 하나의 유혹이었고, 또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라는 핑크 빛 착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이라는 본능적인 유혹이 그것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혹들과 더불어 그분을 더 힘들게 했던 유혹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는 의심과 갈등이라는 내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교수도 저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고문보다도 침묵과 내면의 갈등이 더 무서웠다고. 아마도 신부님도 감옥 안에서 이러한 내면으로부터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유혹은 신부님을 쓰러뜨릴 수도 있는 가장 강력한 이끌림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유혹들은 하나같이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고, 조금만 한눈을 판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무거운 것들이었지만 신부님은 그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 힘은 김 신부님만이 가졌던 주님께 대한 열정과 철저하고도 타협없는 투신의 정신,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처럼 걱정하거나 두려워함 없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의 힘이 적절히 조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흔히 유혹은 마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유혹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혹과 대화를 시작하면 이 유혹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의미에서이다. 때문에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 그것을 단호히 거절해야지 그렇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그 유혹과 대화를 시작하면, 10의 9은 결국 유혹에 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유혹이 가지는 힘이고 이를 마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러기에 이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유혹이 일어날 때 그 유혹과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고, 또 하나는 바로 김 신부님처럼 올바르고 가치 있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투신과 신앙의 힘이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 모두 쉽지 않는 일이요,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 속의 연습과 실습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김대건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것도 어쩌면 오늘날 이 땅의 사제들이 사제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신부님이 가졌던 이러한 정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현대는 하느님의 길을 방해했던 1독서 시대의 아세라 목상과 돌 우상,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이 사셨던 시대의 국가의 권력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방해물들은 없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오늘날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적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교묘해 졌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아름다움과 선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과 학문의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길을 교묘히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김 신부님의 열정과 투신을 본받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투신을 방해하는 오늘날의 아세라 목상과 김 신부님 시대의 국가 권력이 가지는 오늘날의 의미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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