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거목인 작가 박완서(엘리사벳) 씨가 22일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다음은 작가의 주요 연보.
▲1931년 = 10월20일 경기 개풍 출생
▲1950년 = 숙명여고 졸업,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 호영진씨와 결혼
▲1970년 =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裸木)' 당선, 소설가 등단
▲1971년 = 첫 단편 '세모' 발표
▲1973년 = 단편 '부처님 근처' 발표
▲1976년 =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발표
▲1977년 =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발표
▲1978년 = 장편 '배반의 여름', 산문집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발표
▲1979년 = 장편 '도시의 흉년' 발표
▲1980년 = '엄마의 말뚝'('엄마의 말뚝' 연작 1, 2편 '문학사상'에 연재된 데 이어 1991년 3편 발표), 장편 '살아있는 날의 시작' 발표, '그 가을의 사흘동안'으로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1년 = '엄마의 말뚝 2'로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
▲1985년 = 장편 '서 있는 여자' 발표
▲1988년 = 남편과 아들 연이어 사별
▲1989년 =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발표
▲1990년 = 산문집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발표,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1년 = 장편 '저문 날의 삽화' 발표
▲1992년 =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발표
▲1993년 =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
▲1994년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 공연윤리위원회 회원
▲1995년 = 제1회 한무숙문학상 수상, 문학의 해 조직위원
▲1996년 = 토지문화재단 발기인
▲1996-2007년 =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1997년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제5회 대산문학상 수상
▲1998년 = 보관문화훈장 받음, 장편 '너무도 쓸쓸한 당신' 출간
▲1999년 = 만해문학상 수상, 산문집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발표,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출간
▲2000년 = 인촌상ㆍ국회 대중문화&미디어상 수상,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 출간
▲2001년 = '그리움을 위하여'로 제1회 황순원문학상 수상
▲2004년 = 장편 '그 남자네 집' 출간, 대한민국예술원 신입회원 피선
▲2006년 = 제16회 호암예술상 수상, 문화예술계 인물 중 처음으로 서울대학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장편 '잃어버린 여행가방' 발표, 문학상 수상작 5편 엮은 '환각의 나비' 출간
▲2007년 = 장편 '친절한 복희씨', 산문집 '호미' 발표
▲2008년 = 단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발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인 옴니버스 영화 '텐 텐'의 변영주 감독 다큐멘터리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 출연
▲2009년 = 장편 '세 가지 소원', 동화집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나 어릴 적에', '문학동네' 가을호에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 발표
▲2010년 = '현대문학' 창간 55주년 기념해 출간된 소설가 9인의 자전소설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참여,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출간. 가을 담낭암 진단, 10월 수술
▲2011년 = 1월22일 담낭암으로 타계/조신희
2002년의 박완서
장편소설 '나목',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꿈엔들 잊힐리야)', '서있는 여자', '오만과 몽상',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욕망의 응달',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창 밖은 봄',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서울 사람들',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나의 아름다운 이웃',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산문집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살아 있는 날의 소망',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보시니 참 좋았다', '한 길 사람 속', '어른 노릇 사람 노릇', '두부', '호미', '잃어버린 여행가방',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유작)
새만금사업의 중단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하는 모습.[연합]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왼쪽).[연합]
출간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이해인, 방혜자, 박완서,
사진은 젊은 시절 아기를 안고 밝게 웃는 모습.[연합]
박경리 선생 영결식장의 박완서
2006년 5월 서울대 대학본부에서 정운찬 총장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
한국문학의 거목 故 박완서의 작품세계
박완서 작가는 불혹의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했지만 지난 40여 년간 쉼 없는 창작으로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6.25 전쟁의 상처 때문에 작가가 됐다고 말한 고인은 전쟁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로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1970-1980년대 급성장한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드러난 욕망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기도 했다.
내면적인 서사보다는 선이 굵고 분명한 이야기를 살아있는 문장으로 그려 많은 독자들과 공감을 나눈 작가는 여성의 억압 문제를 다루고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의 아픔을 그린 여성문학의 대모이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종회 경희대 교수는 22일 "중년 이후에 등단한 작가답게 세상을 보는 원숙한 시각을 가졌고, 부드러움과 따뜻함 만이 아니라 매우 예리한 시각을 가진 분"이라며 "작품을 통해 자기 상처를 드러내면서 독자들을 위로했고, 독자들과 따뜻하게 악수할 수 있었던 작가"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 씨는 "고인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신 분"이라며 "현대사의 아픔을 헤쳐온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생활어법에서 그대로 건져 올린듯한 살아있는 문장이 우리 문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세계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기억은 6.25전쟁과 분단의 상처다. 1970년 발표한 데뷔작 '나목'을 비롯해 '엄마의 말뚝' '목마른 계절' '부처님 근처' '겨울 나들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의 작품들이 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삼았다.
1992년 출간한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더욱 원숙한 시각으로 전쟁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 1930년대 개풍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 자전적 요소를 담았다.
이어지는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 결혼해 집을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스무 살 무렵 겪은 전쟁의 체험을 그렸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산업화 시기였던 1970-1980년대에는 중산층의 일그러진 도덕성에 대해 치열하게 파헤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둑맞은 가난' '도시의 흉년' 등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본주의 성장기에 중산층이 가졌던 이기심과 욕망을 사정없이 드러내 보이며 도덕성의 빈곤을 고발했다.
또 '살아있는 날의 시작'을 기점으로 '서 있는 여자'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에서는 여성의 시각으로 삶을 돌아보며 여성문제를 조명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나더러 페미니즘 작가라는 사람도 있던데 페미니즘 이론은 읽어 봐도 잘 모른다. 그냥 살면서 얻은 느낌으로 쓴다"며 여성성과 남성성은 동등한 것이고 서로 보완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행복을 추구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종회 교수는 "박완서의 소설을 페미니즘으로 본다면 투쟁적, 전투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드러내는 아주 따뜻한 페미니즘"이라고 말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은 '영원한 현역'이었던 고인의 최근작들도 우리 문학에 값진 자산으로 남았다.
2000년대 들어 작가는 장편 '그 남자네 집'을 비롯해 장편 '친절한 복희씨' '세가지 소원'과 산문집 '호미' 등을 펴냈으며 지난해 여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을 발표했다.
장석주 시인은 "노년기의 경험을 소설로 쓴 작가의 작품들은 우리 문학에 희귀한 노년문학으로, 젊은 작가들이 도저히 쓸 수 없는 귀한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작가가 떠나가면서 한국문학의 한 축이 헐려나간 듯한 상실감이 크다"며 "큰 자리를 대신할만한 작가가 쉽게 나오는 게 아니기에 더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 말씀만 하소서” 中에서
어젯밤엔 맥주 대신 소주를 마셨더니 좀 잔 것 같다. 꿈을 꾸었으니까.
난리가 나서 허둥거리며 피난을 가고, 사람들이 죽고, 거리가 삼엄하고,
양식이 동이 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올림픽 첫날에 난리가 나서 다 중단됐다고 했다. 내란 같기도 하고 천재지변 같기도 한 묘한 공포 분위기였건만 깨어나니까 좋은 꿈을 놓치고 난 것처럼 허전했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 본 것 같아 섬뜩했다. 아아, 천박한 정신의 천박한 꿈이여, 내 아들아, 어쩌면 에미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니.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은 88서울 올림픽의 개막식 날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개막식도 잘 돼가는 모양이다. 딸, 사위, 손자들이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시청하면서 연방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훼방놓지 않을 만큼 대범해야 된다는 건 인내가 아니라 고투다.
그저 만만한 건 신(神)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오후 세 시경에 둘째와 셋째와 손자가 내려왔다. 딸들을 다시 만난 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애들의 지극한 염려도 그저 귀찮고 시들했다.
나는 그 동안 그대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아들 생각만 했다.
문득 내가 아들 대신 딸 중의 하나를 잃었더라면 이보다는 조금 덜 애통하고,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가 두려워 나는 황급히 성호를 그었다. 행여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를까봐 속으로 주모경을 외웠다. 그래도 두려워 화장실에 가서 울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기도였다. 그래도 두려움과 가슴의 울렁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방법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종잡을 수 없음과 순서 없음에 대해선 아무리 분노하고 비웃어도 성이 차지 않지만 또한 그런고로 그분을 덧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직 그분만이 생사를 관장하고 있다고 신의 권위를 믿었고, 불쌍하게도 깊이 공구(恐懼)하고 있었다.
저녁때는 여럿이 해운대로 나갔다. 수영만이 올림픽 요트 경기장이라
외국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느끼는 기온은 긴 소매도 썰렁한데 털이 노란 거구의 남녀가 비키니 비슷한 차림으로 거침없이 활보하는 게 괜히 꼴보기 싫었다. 손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질주하다가 큰 파도가 몰려오면 더 크게 악을 쓰며 도망을 쳐서 모래사장으로 되돌아오는 놀이를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했다. 특히 서울서 온 네 살 짜리는 목이 쉬고 옷이 다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놀이에 광분하고 있었다.
손자 중 제일 나이 어린 그 녀석은 자주 제 키의 몇 배나 되는 물벼락을 맞느라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바다가
그 녀석을 아주 삼켜버릴 것만 같아 간이 오그라붙는 것 같았다. 나란히 앉은 걔들 에미들은 태연히 담소를 즐기는데 나 홀로 그 모양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서 한 생각 중 꽤 괜찮은 생각은
앞으로 나에겐 기쁨도 없겠지만 근심도 없으리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람. 남이 안하는 걱정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내 걱정을 요약하면 또다시 사랑하는 이가 죽는 것을 볼까봐였다. 아직도 나에게 걱정거리가 많은 것은 아직도 사랑이 안 끝났음인가. 병적인 걱정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돌아왔다.
큰애가 내 과음에 대해 동생들에게 일러바쳐서 세 아이가 합세를 해서 걱정을 하고 법석을 떠는 바람에 목을 추기는 정도로만 마시고 일찍 혼자서 방으로 돌아왔다. 술 대신 책으로 잠을 청할 궁리를 한다.
법정 스님이 쉬운 말로 옮긴 법구경을 읽었다. 짧은 운문을 집대성한 사화집 같은 거여서 쉽게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다 옳은 말씀이고 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 구절도 많아 친근감을 느꼈지만 내가 원하는 것 찾아내진 못했다. 내가 원하는 건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남아 있다는 확답이었다. 그 밖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다 건성이었다.
다 일고 나서 옮긴이의 해설을 보니 이 시는 후딱후딱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한 편 한 편 마음의 바다에 비추어보면서 차분히 음미하듯이 읽는다면, 맑은 거울이 되어 그 속에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 실려 있었다. 내 속을 들여다보고 한 말 같았다.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이 사람 수효보다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속마음을 울리는 한마디 외에는 다 부질없는 빈말일 뿐인 것을. 세상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좋은 것으로 충만해 있어도 내 아들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처럼.
남편이 별세한 후 반야심경을 해설한 카세트 테이프를 마냥 반복해 들으며 위로 받은 생각이 났다. 그때만 해도 내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좋은 말에서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도 큰 슬픔이 내 마음을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어버렸다.
이해인 수녀로부터 받은 세 권의 책 중 『샘』 과 『종교박람회』도 법구경처럼 단숨에 읽었다. 두 권 다 안소니 드 멜로라는 처음 들어보는 신부님이 쓴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 모음이었다. 쉽고 단순한 글들이었지만 조급하게 읽어도 되는 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법구경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음미할 마음이 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사후의 생명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는 신의 명확한 계산서였다. 이런 나에게 나 자신도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나머지 한 권은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G. 로핑크 지음)라는 50쪽 정도의 얇은 소책자였지만 그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한 편의 시 때문에 날이 샐 때까지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初雪]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唯一回性)을 외치고 싶다.
베개가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죽음이 왜 무시무시한지, 아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지 정연한 논리로써가 아니라 폭풍 같은 느낌으로 엄습해왔다. 하나의 죽음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사랑과 기쁨, 고통과 슬픔, 체험과 인식 등,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따라서 아무하고도 뒤바뀔 수 없는 그만의 소중하고도 고유한 세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그 시 속에 묘사된 한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는 세계 속엔
그의 고유하고 신비에 쌓인 체험만 있지 미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젊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세계 속엔 그 자신과 그의 부모형제가 걸던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 미래가 포함돼 있는가. 특히 자식이 부모의 소망은 물론 허영심까지 충족시켜줄 만큼 잘 자라 부모가 한찬 우쭐해 있을 때, 부모는 어리석게도 자식이 성취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었다. 아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동일한 축(軸)을 가지고 마냥 팽배해가고 있었다. 그 나름의 독립, 혹은 연애나 결혼 등으로 에미로부터 분화(分化) 해나가기 직전,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공유하던 에미로서는 가장 행복한 착각의 시절에 아들은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의 소멸을 뜻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들이 인턴 과정을 끝마치고 전문의는 무슨 과를 택할까 의논해왔을 때 생각이 났다. 그애는 나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마취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아들로 인하여 자랑스럽고 우쭐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애써서가 아니라 그애 스스로가 선택한 학교나 학과가 에미의 자긍심을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내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치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그애는 그 과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중요하지 않은 과가 어디 있겠니? 이왕 임상을 할려면 남보기에 좀더 그럴 듯한 과를 했으면 싶구나."나는 내 허영심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그 아들에 그 에미랄까, 나 또한 아들의 마음이 끌린 쓸쓸함에 무조건 마음이 끌려 그애가 원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늘 사랑과 칭찬만 받으면서 자라 명랑하고 거침이 없고 남을 웃기기 잘하고 농담 따먹기에 능하던 아들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나는 그때 아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알아버렸다가 아니라 알아야 할 무진장한 걸 가진 대상으로 우뚝 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리고 그때의 그 앎의 시작에 대한 설레임까지 꼬바기 밝힌 새벽 빛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1988년 9월 18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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