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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 2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9:54

본문

 

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 2

 


이중표(전남대 교수)

 

1. 서언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아니다. 이 대립의 핵심에는 자연세계를 경험적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자연과학적 태도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종교적 신념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기독교의 창조론이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동양의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생명을 조물주에 의해 주어진 존엄한 것으로 믿고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념은 진화론의 출현에 의해 의심받기 시작했고, 현대의 생명공학은 인간의 생명조차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생명공학의 출현은 인류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생명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 마음대로 조작하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인륜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자연과학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과 인간 생명의 문제는 종교나 윤리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인간 생명의 시원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종교와 자연과학의 갈등이 아니라, 자연과학에 의해 초래된 윤리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론은 적절한 윤리적 대응이 아니다. 창조론에 근거한 기독교적 윤리는 인간의 윤리를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면 인간의 삶은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의 섭리를 알 수 있는지도 문제이고,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신념은 특정 종교인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나 신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


만약 진화론이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진화론을 부정하기보다는 진화론은 자연과학이 표방하는 가치중립적 과학이론으로 수용하고, 윤리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이론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진화론은 설득력 있는 가설일 뿐 완벽한 이론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중립적이지도 않다.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적자생존의 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존경쟁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게 했으며, 우리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인간과 생명의 실상을 완전하게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진화론을 고집해야 할 당위도 없고, 윤리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창조론을 믿어야 할 당위도 없다. 우리는 사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윤리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사실을 밝히고, 그 토대 위에서 윤리를 수립해야 한다. 만약 객관적 사실이 윤리의 토대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차원을 달리해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논문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살펴보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점을 밝히고, 윤리적 가치와 과학적 사실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모색하려는 데 이 논문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불교철학의 관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조망하고, 불교의 연기론을 통해 가치와 사실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붓다의 비판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도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과 유사한 사상적 대립이 있었다. 브라흐만(Brahman)을 창조신으로 생각한 바라문교(Brahmanism)와 정통 바라문교를 부정하고 나타난 자유사상가(?r?ma?a;沙門)의 대립이 그것이다. 바라문교에 의하면 이 세계는 영적 존재인 브라흐만이 전변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실재는 브라흐만이며, 인간의 참된 자아는 브라흐만과 동일한 실재인 아트만(?tman)이다.


자유사상가들은 이러한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한다. 자유사상가들에 의하면 이 세계는 地, 水, 火, 風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아트만과 같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이들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있는 상태이다. 인간의 의식은 영혼의 활동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대립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장아함 청정경>과 이에 상응하는 D?gha-Nik?ya P?s?dika-suttanta에 나타난다.


춘다(Cunda)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
‘자아(att?)와 세계(loko)는 스스로 생긴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는 다른 것이 만든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이면서 다른 것이 만든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이 만든 것도 아니며,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가 스스로 생긴 것이라는 주장은 자유사상가들의 견해로서 진화론과 상통하고, 다른 것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정통 바라문교의 견해로서 창조론과 상통한다. 붓다는 이들의 주장은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pubbanta-sahagat? di??hi-nissay?;本生本見, aparanta- sahagat? di??hi-nissay?;未見未生)로서 모두가 사견(邪見)이며 희론(戱論)이라고 비판한다. 붓다에 의하면 자아와 세계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를 거론하는 것, 영혼과 육신은 동일한 것인가 별개의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열반을 성취한 여래는 영원히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거론하는 것, 자아의 본질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인가 다른 것이 만든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등은 모두가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계되는 논의로서 사견이다.     
붓다는 왜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는 모두가 사견이라고 비판하는 것일까? <청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붓다는 허락하지 않나니, 이들 견해 속에는 각기 결사(結使)가 있기 때문이다. ...... 이들 사견(邪見)은 말만 있을 뿐이어서 함께 논의할 만한 내용이 없다. ...... 이들 사문과 바라문은 모두 촉인연(觸因緣)으로 인하여 그러한 주장을 한다. 만약 촉인(觸因)을 떠난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육입신(六入身)으로 말미암아 촉(觸)이 생기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생기며,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으로 말미암아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대환음(大患陰)이 집기(集起)하기 때문이다. 만약 육입(六入)이 없으면 촉(觸)이 없고, ......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대환음(大患陰)이 집기(集起)도 없다. ......만약 이 모든 사악한 견해를 멸하고자 한다면 사념처(四念處)에서 세 가지로 수행을 해야 한다. ...... 사념처에서 세 가지로 수행하면 八解脫이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이들 견해를 분석하여 이 견해들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독단적이며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견해들이 나오게 된 원인과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견을 없애는 방법으로 사념처 수행을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붓다가 이야기하는 사견이 생기는 원인과 과정은 우리가 경험의 내용을 개념화하는 과정이다. 개념은 경험을 통해 얻은 여러 표상을 비교하여 그 표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속성을 추상한 후에 그것을 총괄하여 언어라는 기호를 붙이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개념의 성립은 (1)표상, (2)비교, (3)추상, (4)총괄, (5)명명의 과정을 밟아 완성된다. 붓다가 모든 사견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촉(觸;phassa)에 대하여 <잡아함 273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眼과 色을 연하여 眼識이 생긴다. 이 셋의 和合이 觸이다, 觸에서 受, 想, 思가 함께 일어난다.


우리가 감관으로 대상을 지각 할 때 그 대상에 대한 의식이 발생하고, 그 의식이 발생해 있을 때 자아가 외부의 대상을 접촉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데, 이렇게 자아(眼)와 대상(色) 의식(眼識) 셋이 화합한 의식 - ‘지각된 것(知覺表象)을 외부의 실재라고 느끼는 의식’이 촉이다. 이렇게 지각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감정(受)과 사유작용(想)과 의지작용(思)이 발생한다는 것을 위의 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촉은 표상을 객관적 실재로 느끼는 작용이다. 붓다가 모든 사견은 촉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 것은 모든 사견이 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는 데서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붓다가 사견의 성립과정이라고 이야기한 육입신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의 연기과정을 살펴보자. 육입신은 육근에 의한 지각활동을 통해 형성된 자아의식이다. 즉 볼 때는 눈(眼)이 자아로 의식되고, 들을 때에는 귀(耳)가 자아로 의식된다.


이렇게 우리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지각활동을 할 때, 그 자아의 외부에 자아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의식, 즉 촉이 발생한다. 지각에 의해 형성된 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감정과 사유작용, 의지작용 등이 나타나며, 이들 표상 가운데 애착하는 것을 취하여 실체화하고 여기에 이름을 붙여 개념화한다. 이러한 실체화와 개념화를 통해 경험의 내용이 실체화함으로써 우리는 그 실체화한 사물의 生滅을 인식하게 된다.


붓다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연기의 과정은 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표상 - 비교 - 추상 - 총괄 - 명명의 순서로 이루어지는 개념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입과 촉은 표상을 얻는 과정이고, 수(상사)는 비교하는 과정이며, 애는 추상하는 과정이고, 취는 총괄하는 과정이며, 유는 명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러한 개념화 과정을 객관세계에 대한 주관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작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 이해에 필수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개념화 작용이 세계의 실상을 은폐하고 있다고 본다.


붓다에 의하면 개념화 작용은 순수한 이성의 사유작용이 아니다. 경험의 내용이 개념화하는 과정에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책상이 개념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밥상, 침상, 책상 등과 같은 여러 상들을 비교하여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성질을 가진 상을 제외한 다른 상들은 추상하고, 나무로 만든 것이든, 강철로 만든 것이든, 흰색이든 검은 색이든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상을 총괄하여, 여기에 책상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책상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학적인 설명은 책상이라는 개념이 처음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만약 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책상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려면, 책상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책상이라는 사물은 책을 놓고 보기 좋은 속성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책상의 성질은 과연 책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가? 책상은 밥그릇을 놓고 먹기에는 좋지 않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동일한 상을 책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밥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책상이라는 객관적 사물 속에 내재한 속성을 논리적으로 추상하여 만든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책을 놓고 보고자 하는 욕구가 책상의 속성과 개념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책을 놓고 보기 좋은 성질을 가진 책상’이라고 부른다. 붓다가 개념화 내지는 실체화의 과정을 觸 - 受 - 愛 - 取 - 有로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념은 객관적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의 소산이다. 자아와 세계라는 개념도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에 상응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아’와 ‘세계’는 지신들이 욕구로 집착하고 있는 허망한 개념일 뿐이다. 붓다가 이들 사견에는 結使가 있으며, 말만 있을 뿐 논의할 내용이 없는 희론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우리가 객관적 실재로 알고 있는 개념의 대상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경험한 내용들이 욕구에 의해 취해진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허망한 사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은 바로 육입(六入)에서 노사(老死)가 연기하는 과정을 내적으로 성찰하는 수행법이다. 신념처(身念處)에서는 六入身을 관찰하고 수념처(受念處)에서는 觸과 受를 관찰하며, 심념처(心念處)에서는 愛와 取를 관찰하고, 법념처(法念處)에서는 有와 生, 老死를 관찰한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허망한 개념을 실체로 착각함으로써 존재의 시작과 끝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생과 노사임을 깨닫게 되며,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生死에서 벗어난다. 붓다는 허망한 개념을 놓고 대립하는 견해들은 결코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잡아함 297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영혼(命)이 곧 육신(身)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 주장의 의미는 한 가지인데 갖가지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범행(梵行;윤리적 실천)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고 해도 범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이변(二邊)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중도(中道)로 향할지니, ..... 소위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 
         

영혼이 곧 육신이라는 주장은 자유사상가들의 견해이고,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는 주장은 바라문교의 견해이다. 붓다는 이들 견해가 모두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중도, 즉 연기론에 의지할 때 우리는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 이들 견해는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중아함 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사문과 범지는 일체는 모두 숙명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문과 범지는 존우(尊祐)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어떤 사문과 범지는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비구들이여, 숙작인(宿作因)이나 존우작인(尊祐作因)이나 무인무연(無因無緣)에 의지하면 거기에는 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을 수 없고, 노력도 있을 수 없으며, 이 행위는 해야 하고 이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삶이 태어날 때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에게는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조물주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고 유지된다고 해도 그렇고, 세상사가 우연하게 전개된다고 해도 그렇다. 우리가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위의 선택은 행위가 결과를 초래할 때 가능하다.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세상사가 숙명이나 조물주나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면 우리의 행위 선택은 무의미하고,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이나 도덕적 판단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창조론과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윤리적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신념으로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윤리는 신념을 거부하면 무의미하게 되고, 자연과학은 인과율에 의하여 자연세계를 설명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하여는 우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緣起?無我(空)?業報


창조론과 진화론은 모순 대립하지만 인과율적으로는 같은 기반 위에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내재해 있는 인과율은 직선적 일방적 인과율이다. 직선적 일방적 인과율은 원인에서 결과로의 방향이 한 방향이다. 즉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가 없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A → B → C → D → ...      
    

이러한 인과 페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 A가 무엇인가를 놓고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은 A를 창조주인 신이라고 주장하고 진화론은 물질, 또는 물질에서 최초로 발생한 생물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양자가 이러한 직선적 단일방향 인과 페러다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붓다가 당시의 사상적 대립에 대하여 의미는 한 가지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당시의 사상들이 직선적 일방적 인과론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는 근본 이유는 이들의 기반인 직선적 인과율이 본질적으로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율은 ‘A는 A이다’는 형식의 명제로 표현되는 공리(公理)로서 ‘A가 자라서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은 절대로 동일하므로 A’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율은 모든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는 것을 인정하고, 복잡한 것의 통일을 인정하고, 유동(流動)하는 것에서 부동(不動)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성립되는 원리로서, ‘본질의 자기동일성’을 인정하는 원리이다.


모순율은 동일율의 반면을 말하는 원리로, ‘A는 A 아닌 것이 아니다’는 형식의 명제로 표현된다. 즉 동일한 사물에 대하여 동일한 사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모순율이다. 직선적 인과율은 이러한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으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라는 개념은 동일율에 의해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직선적 인과율은 이러한 실체를 전제로 하여 실체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직선적 인과율에서는 제일 원인이 되는 근본실체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이러한 동일율과 모순율에 근거하여 인과관계를 사유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인간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창조론과 자연적 진화라는 진화론의 명제는 먼저 ‘인간 생명’은 본질에 있어서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동일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동일성을 지닌 ‘인간 생명’을 신이 만들었다면 자연적인 진화일 수 없고, 자연적인 진화라면 신의 창조일 수가 없다는 모순율에 의해 두 이론은 모순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만약 동일율에 의해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인간 생명’이 실재한다면 우리는 모순율에 의해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에 동일율을 인정할 수 없다면, 즉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동일율에 근거하는 모순율 또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동일율에 근거하고 있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주장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붓다는 이러한 직선적 인과율을 비판하고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새로운 인과율을 제시했다. 붓다는 인과관계를 직선적 일방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관계로 본다.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이 저것의 존재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연기론 의하면 근본 실체나 제일 원인은 없다. Sa?yutta-Nik?ya 12. 20.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인연으로 하여 늙어 죽는다는 법은 如來가 세상에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그 界, 즉 法의 住性, 定性, 條件性은 常住한다. .... 여기에는 객관성과 필연성과 불변성과 조건성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住性은 상호인과의 법칙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定性은 그 법칙이 불변의 결정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며, 조건성은 그 법칙이 여러 조건들의 상호관계의 법칙임을 의미한다. 붓다는 이러한 상호인과 관계에 있는 사물을 法(dharma)이라고 부른다.


법은 관계에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실체성이 없다. 즉 空이다. 물질도 법이고, 정신도 법이다. 이러한 法은 문법적으로 명사적이라기보다는 동사적이다. 붓다에 의하면 명사적 의미의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이 허구적으로 조작하여 분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촛불은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이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을 볼 때 촛불이라는 존재가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다고 착각한다. 붓다는 <잡아함 335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보는 놈(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놈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사라지나니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 즉 작자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행위의 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즉 착한 사람(작자)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業)을 하면 착한 사람(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설의 근본취지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도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즉 인간의 본질은 업보이다. Majjhima-Nik?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며, 업의 친척이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행위의 주체를 자아로 보는 생각에서 우리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대립한다. 주체는 객체가 될 수 없고,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는 행위를 통해 객체와 관계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체와 객체는 별개의 사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행위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며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대사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내 몸은 이렇게 외부의 물, 공기, 음식 등이 들고 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을 차단하면 몸은 간 곳이 없이 사라진다. 정신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며 유지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떤 정신적 작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유지된다. 따라서 업보를 자아로 보는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인연이 되어 존재한다. 주체가 없으면 객체가 없고,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으며, 나아가 주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 객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무아설에 의하면 주객의 분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불교는 이러한 연기설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존재는 업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함께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자각은 우리에게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自他不二’의 의식을 갖게 한다.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신체나 자신의 정신이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로 확장된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남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삶을 모든 것을 내 몸으로 보는 ‘同體慈悲’의 실현으로 본다. 이것이 불교윤리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엄은 이러한 윤리의 실천을 통해 그 업보로서 성립한다. 인간은 자비의 실현, 즉 윤리적 실천을 통해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 존엄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4. 시스템 이론과 새로운 진화론


불교의 연기설은 현대의 시스템 이론이나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프리쵸프 카프라(Frijof Capra)는 ??생명의 그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짧게 요약한 시스템적 사고의 특성들은 모두 상호의존적인 것들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식별해 내는 것은 인간관찰자와 그의 앎(인식)의 과정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은 그에 상응하는 개념과 모형들에 의해 기술된다. 그리고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비해 더 근본적이거나 궁극적이지 않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와 불교의 연기설은 직선적 일방적 인과론을 탈피하여 인과를 상호의존적으로 본다는 공통의 기반을 갖는다. 그리고 사물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며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궁극적으로 - 양자물리학이 입증해 주었듯이 - 부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직물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따라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대상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 시스템적 관점에서 우리는 대상들 자체가 보다 큰 연결망 속에 묻혀있는 관계들의 연결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스템 사상가에게 있어서 이 관계는 일차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스템적 사고에 의하면 사물은 없고 관계만 있으며, 이 관계들의 그물망은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붓다의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생각과 일치하며, 自他不二의 사상과 상통한다.


이러한 시스템 이론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유가 대립하지 않고 상호 보충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직선적 일방적 인과론을 버리고 인과를 상호관계로 본다면 과학과 인문학은 결코 대립하지 않으며, 모든 모순대립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도 다윈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맹목적이고 우연한 돌연변이가 새로운 진화를 이끈다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의 진화에서 나타난 커다란 격차는 별개의 진화 계통을 통해 이미 갈고 닦아져 있던 정교한 구성요소들 간의 공생적(共生的) 합병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새로운 생물형태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시 진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돌연변이로 생겨나서 자연 선택에 의해 유지되어 온 기존의 모듈modul(주로 박테리아로 밝혀진)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거나 합병하여 새로운 생물, 자연 선택에 의해 작용하고 작용 받는 전혀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어낸다.
       

모든 생물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박테리아의 혼합물이며, 진화의 원리는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니라 공생의 화합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또 생명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명은 화학 성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화학 물질들의 작용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언어적 모순이다. 문법에 맞게 대답하려면 명사, 즉 구체적인 사물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은 오히려 동사에 더욱 가깝다. 생명은 자신을 수선하고, 유지하며 다시 만들고 자신을 능가한다.

이렇게 생명을 동사적 의미의 자기생산적인 것으로 파악한 마굴리스는 생물이 자기생산의 과정에서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 생물은 지구에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는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생물은 자기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쉴 때마다 우리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 생물권의 숨결은 매일 지구상의 밤인 쪽에서는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증가하고 낮인 쪽에서는 감소하는 것으로 표시된다. 일 년의 숨결은 계절의 변화로 나타난다. 북반구에서 광합성 활동이 활발해지면 남반구에서는 서서히  감소한다. 최대한의 생리학적 범위에서 보면 생명은 지구 표면 그 자체이다. 여러분의 몸이 세포들로 우글거리는 해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는 단순히 생물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인연이 되어 공존하는 가운데 진화하는 공동체로서 크게 보면 한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관점은 과학이 인간의 윤리와는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이 한 생명이라면 우리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결어


필자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을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야기된 인간 존엄성의 파괴와 윤리적 위기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으로 인식하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해소하고 윤리의 토대를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불교의 연기론의 관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살펴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생명의 출발점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우리가 사물의 시작과 끝을 논의하려면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을 지닌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붓다가 깨달은 연기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연기하면서 무상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사물은 없다.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하다면 존재의 시작과 끝을 논의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의 시작에 대한 논의로서 무의미한 사견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기반은 직선적 인과율이다. 직선적 인과율은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논리학이 근거로 하는 ‘실체’와 ‘동일성’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연기법이라고 하는 상호인과율을 주장한다. 상호인과율에서는 제일 원인이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 실체로 보지 않고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인과관계로 이해한다. 즉 실체는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업보(業報)는 이러한 상호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연기론적 세계 이해는 우리에게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업보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면, 즉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남남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동체자비를 실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윤리, 즉 환경 윤리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상호인과율은 현대의 시스템이론이나 생물학의 관점과 일치한다. 시스템 이론은 종전에 세계를 부분의 집합으로 생각했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부분이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이라고 본다. 따라서 사물은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진화를 직선적,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공생적 합병으로 보며, 생명을 동사적 의미로 이해한다. 현대의 과학 이론과 불교는 인과율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조는 과학과 종교,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결코 대립하지 않고 인간의 바른 삶을 밝히는 데 함께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며, 21세기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끝>

   
   


                

 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논평

 

 

                                                                                                양형진(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불교에서 창조론이나 진화론을 어떻게 보아야하느냐 하는 문제는 논평자도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여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우선 반가웠고, 특히 논의의 전개를 아함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풀어가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니는 일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서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고 평가된다.


 논평자의 의무상, 논쟁적으로 글을 쓰기는 했지만 이교수님과 논평자의 시각차는 거의 전적으로 진화론을 무엇이라고 파악해야 하느냐하는 문제와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 문제 설정에 대한 질문 >


이 글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을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경험적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자연과학적 태도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종교적 신념 사이의 간극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파악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의식의 설정은 첫째, 자연과학적 태도는 인간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는 노력에 위해한 것이라는 가정과, 둘째, 종교적 신념은 자연에 대한 경험적 이해와 전혀 무관하게 혹은 상반되게 형성된다는 암묵적 가정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해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인간의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기독교의 창조론이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동양의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생명을 조물주에 의해 주어진 존엄한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는 우선 동양에서의 ‘천’의 개념을 서양의 ‘창조신’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조물주의 개념이 보편적으로 동양에서의 천에 들어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더구나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조물주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에 존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생명공학 등에 의해 초래된 윤리적 위기를 다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 이론의 수용과 거부는 (적어도 당위적으로는) 어느 것이 참인가 혹은 어느 것이 참에 가까운가(Verisimilitude:진리근접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문제이므로, 윤리적 위기 때문에 창조론이나 진화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우리의 가치관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설령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진화론이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진화론을 아직 완벽한 이론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파생되는 (적자생존 등의) 도덕적 혹은 윤리적 주장을 거부 내지는 유보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진화론이 다른 어느 이론보다 참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평가된다.


< 본문과 결론에 대한 논의 >


2장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육사외도의 견해에 대응시키고, 이에 대한 부처님의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육입신으로 말미암은 촉의 인연으로 인하여 견해가 생기니 이러한 모든 견해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독단적이며 주관적이라는 12연기의 가르침을 논리학 등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허망한 개념을 놓고 대립하는 견해는 결코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없으니 연기에 근거한 중도로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하여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아주 좋은 설명이지만,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사상가들의 견해인 “자아와 세계가 스스로 생긴 것이라는 주장”을 진화론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뒤의 논의와 연관되므로 3장에서와 논의와 함께 다루고자 한다.


3장의 논의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모두 직선적이고 일방적 인과율의 기반 위에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이 둘이 모두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 직선적 인과율에 기초하여 있으며,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이 대립의 근본 이유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론은 그럴지 모르지만, 진화론은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는 것을 인정한 적도 없고 복잡한 것 속에서 통일을 인정한 적도 없으며 유동하는 것에서 부동하는 것을 인정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본질의 자기동일성이라는 명제의 기반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하나의 생명체 A 가 다른 생명체 B 로 변해가는 것은 단순히 A 가 B 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A 라는 인에 무수한 연이 부가되어 B 가 된다는 것이 진화생물학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초 생명의 탄생이나, 그 이후의 진화 과정에서 모두 그러하다.

 
최초의 생명은 단순한 물질의 화합(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혼돈의 상태와 태양에서 유입되는 강력한 에너지라는 환경적 요인(연)이라는 바탕 위에서 원시 생명의 구성 요소가 되는 물질의 화합(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기권 상층부에 있는 오존층이 태양에서 오는 강력한 자외선을 차단하므로, 즉, 연이 바뀌었으므로 최초 생명의 탄생과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최초 생명의 탄생이 단순하게 직선적이고 일방적인 인과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시 대기에는 오존층이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생명체는 자외선이 걸러지는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물 속에서 진화하던 생명체가 육지 위로 올라온다는 사건은 수상 식물이 광합성에 의하여 산소를 만들어내고 이 산소가 오존층을 형성한다는 전 지구적 환경의 변화가 있은 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하나의 수상 동물이 하나의 육상동물로 변하는 직선적 인과가 아니라, 전 지구의 동시적 참여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진화의 전 과정은 상호 의존의 결과이고 연기의 결과이고 상입(相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진화에는 오히려 이교수님이 말씀하신 住性, 定性, 條件性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화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므로, 무아무실체적이어서 공이고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는 좋은 예가 된다. 


따라서 창조론이나 진화론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교수님이 소개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히려 진화론에 의하여 잘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를 4장에서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면서 현대의 시스템 이론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진화론이 아직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도 형성되어 가는 이론이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며 따라서 다윈 이후 논의된 진화와 관련된 모든 학문적 업적을 총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화론은 시스템적 사고나 불교의 연기설과 함께 세계를 상호의존적으로 파악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화의 과정이 공생적 과정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면, 진화론도 과학이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게 되어 이교수님이 염려하는 부분이 충분히 해소되면서 동체대비의 윤리관의 기초가 성립된다고 생각된다. “현대의 과학 이론과 불교는 인과율적 기반을 공유한다”는 그 ‘현대의 과학 이론’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바로 ‘진화생물학’이다.<끝>

 

 

 


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논평

 

 

                                                                                          양명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1.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는 것은 제가 볼 때도 옳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한 충돌은 서로 같은 수준에 있을 때 일어나는 데, 종교와 과학은 그처럼 같은 수준에서 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역할이 다르고 담론의 수위가 다른 것입니다.  한 쪽은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설명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사람이 어떻게 고통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얘기합니다.

 

 만일 종교가 성서의 얘기를 과학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면 반드시 과학에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얘기는 과학보다 훨씬 풍성한 삶의 진리를 담고 있는 얘기들입니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세계를 말로 해 본 것이므로 상징성이 강하고 그래서 풍부한 해석을 요청하는 것이지, 자연 과학 이론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 나온 창조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의 창조 얘기가 상징이라고 해서 창조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을  꼭 배격하는 창조론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인정한다고 해서 신의 섭리와 주권을 부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테야르 드 샤르댕 같은 사람의 노력은 주목할 만합니다.
 

2. 그런 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부인하는 이중표 선생님과 좀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이나 창조론은 윤리의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연기론이 윤리의 근거를 마련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을 몇 가지 들고 있습니다.


먼저,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모두 처음을 말하고 첫 실체를 말하는 데 그것은 모두 촉에서 나온 것으로 허망한 개념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체는 없고 모두 관계만 있기 때문에 첫 실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물론 데카르트적 자아의 부정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서양의 근대적 자아라는 것은 과학적 사고 방식과 연결된 것으로서 인간을 주체로 강하게 내세웠는데 주체는 곧 실체였습니다. 


그러니 실체의 부정은 곧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주체의 부정과 연결된다고 보겠습니다.  데카르트적 자아는 개인주의의 바탕이 되니, 관계를 강조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윤리의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실체 개념으로 가면 서로를 위하는 윤리를 설립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이나 창조론은 모두 첫 실체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진화론은 처음을 말하고 창조론은 처음과 나중을 말합니다.  진화론도 꼭 집어 나중을 말하지는 않지만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는 역사의 방향을 말하게 됩니다.  진화론이 진보적 역사관의 바탕이 된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에도 나중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보면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모두 처음과 나중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도 성서의 세계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이 처음과 나중이라는 것이 윤리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냐는 생각은 중요합니다.  사람의 현재의 도덕적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장차입니다.  장차 진리가 승리하고 선이 승리한다면 지금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에 맞추어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 장차가 내 생애 안에 볼 수 없는 것이라도, 역사의 끝에 그런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윤리를 만듭니다.

 

이것은 물론 칸트도 <실천이성비판> 변증론에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말하자면 이른바 역사 의식이라는 것이 거기서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역사의식이 몹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역사의식이라면 이 역사 속의 구체적인 억압과 부조리를 수정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투쟁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미래는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고 하는 주체성입니다.  운명론에 빠져 있으면 역사 의식이 안 나올 것입니다.


둘째는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으로 믿는 것 곧 마침내에 대한 희망이 필요합니다.  마침내 진리가 이길 것이라는 희망이 없이 주체성만 가지고는, 대의를 위해 지금 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진리가 이길 것이라는 희망은 아주 길게 보면 종교에 들어갑니다.  종말론이 되는 것이지요.  길게 볼수록 쉽게 좌절하지 않고 대의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신앙은 그런 윤리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역사 의식에는 인간의 주체성과 신의 주권이라는 서로 모순된 관념이 서로 묘하게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주체성만 가지고 역사 의식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신의 섭리를 믿는 신앙도 역사 의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런 신앙이 인간을 노예 의지로 빠트릴 위험은 늘 있지만, 기독교의 신 관념에는 인간의 주체성 문제가 늘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것이 근대에 서양의 휴머니즘 철학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지금까지 역사 의식과 관련해서 창조론이나 진화론이 윤리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처음과 끝은 실체 개념과 연결이 있는데, 그것이 불러오는 결국에 대한 희망이 불의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진화론과 창조론이 윤리의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는 까닭을 이중표 선생님은, 창조론의 경우 인간의 주체성이 약화되고 진화론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철학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진화론이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것은 과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세계관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과학적 발견을 주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이 꼭 적자 생존의 철학을 전수한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서구 제국주의에 그런 역할을 했지만, 만민 평등을 실천하기 위해 나온 마르크시즘도 진화론이 없었으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진화론은 인문학에 진보사관을 마련해 주었고 그러한 진보사관이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지만, 역사의식에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꼭 진보사관 쪽의 얘기를 따르지 않더라도 역사가 어떤 모양으로든 진보한다는 신념은 윤리를 위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생존 경쟁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이 비인간화 현상을 낳아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수정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동양적 사고 방식이 큰 공헌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쟁이 없으면 사람은 부패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거리에 떡집이 하나 있으면 횡포가 심하다가도 다른 곳이 생기면 서비스가 좋아집니다.  공무원이 경쟁이 없어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사실입니다. 

 

경쟁이 없어도 모두 잘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지만 인간의 됨됨이가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경쟁은 어느 정도 정의에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경쟁이 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선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이 생존경쟁의 원리를 제공해서 인간 사회를 비윤리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꼭 맞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창조론이 인간의 주체성을 약화시켜 윤리를 상실하게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신의 섭리가 우리 나라 교회에서 인간을 노예의지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슨 종교가 들어오든 사먀니즘적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나 일제 시대 때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강력한 희망을 주었던 것은 인간의 주체성과 양립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와 ‘모든 것은 내가 한다’는 것이 양립하는 신학을 계속 발전시켜왔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도 그런 것입니다.  그 문제는 여기서 더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역사 의식이 강하게 대두된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3.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답해 보겠습니다.  작자는 없고 업보만 있다고 하는 연기론은 이 선생님의 말씀대로 불교 윤리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자타 불이’는 ‘동체 자비’의 실천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실체가 있고 그 다음에 실체끼리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관계만 있을 뿐이라고 하는 얘기는 서양의 개인주의 윤리를 극복하고 장차 공동체 윤리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문명의 미래에 그런 얘기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그런 동양 사고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비슷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르틴 부버 같은 사람도 ‘관계의 아프리오리’를 말하고 레비나스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크게 부각시켜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도 그런 사고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계를 강조하는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도 관계를 강조하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삼위일체라는 신 관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으로 이해한 것도 관계로 이해한 것이고, 죄라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관계 단절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렇지요.  <우리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는 창조 구절도 바로 관계의 존재로 인간을 만들자는 뜻입니다.  관계의 유비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불교의 연기론만큼 관계의 아프리오리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데카르트 식의 개인주의가 나올 근거가 기독교 세계관에 어느 정도 들어 있었다고 봐야 되겠습니다.


사실 서양에서 근대는 인간이 실체로서 주체가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나고 너는 너가 되기 때문에 연기론에서 얘기하는 자타 불이하고는 너무나 먼 얘기입니다.  만일 윤리가 동체 자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면 데카르트나 칸트의 주체는 윤리의 근거를 좀 먹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떨어졌다가 붙는 것이 자유실현의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 너는 너라고 하는 냉정한 관계는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근대성이라는 것이 인간 관계를 합리화했는데, 합리화라는 것은 차갑게 하는 것입니다.  떨어 뜨려 놓고 제 3자와의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떨어 뜨려 놓고 그 동안 당연하게 알던 권위나 억압 관계를 청산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보여집니다.  떨어지면서 억압관계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른바 이데올로기 비판도 그런 떨어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떨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자비가 그냥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억압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도 품고있는 것이라면 자타불이만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길게 보면 자타불이와 동체자비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타자를 각각 개인적 실체로 보는 인간관을 거치지 않으면 동체 자비는 억압의 현실을 덮어두고 그냥 엉켜 있는 관계가 될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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