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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9:50

본문

 

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


                                                                                                                                      

 이중표(전남대 교수)


 서언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아니다. 이 대립의 핵심에는 자연세계를 경험적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자연과학적 태도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종교적 신념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기독교의 창조론이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동양의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생명을 조물주에 의해 주어진 존엄한 것으로 믿고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념은 진화론의 출현에 의해 의심받기 시작했고, 현대의 생명공학은 인간의 생명조차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생명공학의 출현은 인류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생명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 마음대로 조작하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인륜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자연과학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과 인간 생명의 문제는 종교나 윤리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인간 생명의 시원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종교와 자연과학의 갈등이 아니라, 자연과학에 의해 초래된 윤리적 위기에 대한 종교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론은 적절한 윤리적 대응이 아니다. 창조론에 근거한 기독교적 윤리는 인간의 윤리를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면 인간의 삶은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의 섭리를 알 수 있는지도 문제이고,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신념은 특정 종교인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나 신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


만약 진화론이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진화론을 부정하기보다는, 진화론은 자연과학이 표방하는 가치중립적 과학이론으로 수용하고, 윤리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이론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진화론은 설득력 있는 가설일 뿐 완벽한 이론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중립적이지도 않다.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적자생존의 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존경쟁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게 했으며, 우리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생명의 실상을 완전하게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진화론을 고집해야 할 당위도 없고, 윤리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창조론을 믿어야 할 당위도 없다. 우리는 사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윤리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사실을 밝히고, 그 토대 위에서 윤리를 수립해야 한다. 만약 객관적 사실이 윤리의 토대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차원을 달리해서라도 윤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살펴보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점을 밝히고, 윤리적 가치와 과학적 사실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모색하려는 데 이 논문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불교철학의 관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조망하고, 불교의 연기론을 통해 가치와 사실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붓다의 비판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도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과 유사한 사상적 대립이 있었다. 브라흐만(Brahman)을 창조신으로 생각한 바라문교(Brahmanism)와 정통 바라문교를 부정하고 나타난 자유사상가(?r?ma?a;沙門)의 대립이 그것이다. 바라문교에 의하면 이 세계는 영적 존재인 브라흐만이 전변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실재는 브라흐만이며, 인간의 참된 자아는 브라흐만과 동일한 실재인 아트만(?tman)이다. 자유사상가들은 이러한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한다. 자유사상가들에 의하면 이 세계는 地, 水, 火, 風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아트만과 같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이들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있는 상태이다. 인간의 의식은 영혼의 활동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대립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장아함 청정경(淸淨經)?과 이에 상응하는 D?gha-Nik?ya P?s?dika-suttanta 에 나타난다.


춘다(Cunda)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

‘자아(att?)와 세계(loko)는 스스로 생긴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는 다른 것이 만든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이면서 다른 것이 만든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이 만든 것도 아니며,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1)


 자아와 세계가 스스로 생긴 것이라는 주장은 자유사상가들의 견해로서 진화론과 상통하고, 다른 것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정통 바라문교의 견해로서 창조론과 상통한다. 붓다는 이들의 주장은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pubbanta-sahagat? dihi-nissay?; 本生本見, aparanta-sahagat? dihi-nissay?; 未見未生)로서 모두가 사견(邪見)이며 희론(戱論)이라고 비판한다.


 붓다에 의하면 자아와 세계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를 거론하는 것, 영혼과 육신은 동일한 것인가 별개의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열반을 성취한 여래는 영원히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거론하는 것, 자아의 본질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인가 다른 것이 만든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등은 모두가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계되는 논의로서 사견이다.


 붓다는 왜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는 모두가 사견이라고 비판하는 것일까?  ?장아함 청정경(淸淨經)?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붓다는 허락하지 않나니, 이들 견해 속에는 각기 결사(結使)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견(邪見)은 말만 있을 뿐이어서 함께 논의할 만한 내용이 없다. 이들 사문과 바라문은 모두 촉인연(觸因緣)으로 인하여 그러한 주장을 한다. 만약 촉인(觸因)을 떠난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육입신(六入身)으로 말미암아 촉(觸)이 생기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생기며, 애(愛), 취(取), 유(有), 생(生)으로 말미암아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대환음(大患陰)이 집기(集起)하기 때문이다. 만약 육입(六入)이 없으면 촉(觸)이 없고,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대환음(大患陰)이 집기(集起)하는 일도 없다. … 만약 이 모든 사악한 견해를 멸하고자 한다면 사념처(四念處)에서 세 가지로 수행을 해야 한다. 사념처에서 세 가지로 수행하면 팔해탈(八解脫)이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이들 견해를 분석하여 이 견해들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독단적이며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견해들이 나오게 된 원인과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견을 없애는 방법으로 사념처 수행을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붓다가 이야기하는 사견이 생기는 원인과 과정은 우리가 경험의 내용을 개념화하는 과정이다. 개념은 경험을 통해 얻은 여러 표상을 비교하여 그 표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속성을 추상한 후에 그것을 총괄하여 언어라는 기호를 붙이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개념의 성립은 (1)표상, (2)비교, (3)추상, (4)총괄, (5)명명의 과정을 밟아 완성된다. 붓다가 모든 사견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촉(觸; phassa)에 대하여 잡아함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眼과 色을 연하여 眼識이 생긴다. 이 셋의 和合이 觸이다, 觸에서 受, 想, 思가 함께 일어난다.


우리가 감관으로 대상을 지각 할 때 그 대상에 대한 의식이 발생하고, 그 의식이 발생해 있을 때 자아가 외부의 대상을 접촉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데, 이렇게 자아(眼)와 대상(色) 의식(眼識) 셋이 화합한 의식 - ‘지각된 것(知覺表象)을 외부의 실재라고 느끼는 의식’이 촉이다. 이렇게 지각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감정(受)과 사유작용(想)과 의지작용(思)이 발생한다는 것을 위의 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촉은 표상을 객관적 실재로 느끼는 작용이다. 붓다가 모든 사견은 촉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 것은 모든 사견이 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는 데서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붓다가 사견의 성립과정이라고 이야기한 육입신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의 연기과정을 살펴보자. 육입신(六入身)은 육근(六根)에 의한 지각활동을 통해 형성된 자아의식이다. 즉 볼 때는 눈(眼)이 자아로 의식되고, 들을 때에는 귀(耳)가 자아로 의식된다.

 

이렇게 우리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지각활동을 할 때, 그 자아의 외부에 자아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의식, 즉 촉이 발생한다. 지각에 의해 형성된 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감정과 사유작용, 의지작용 등이 나타나며, 이들 표상 가운데 애착하는 것을 취하여 실체화하고 여기에 이름을 붙여 개념화한다. 이러한 실체화와 개념화를 통해 경험의 내용이 실체화함으로써 우리는 그 실체화한 사물의 생멸(生滅)을 인식하게 된다.
 

붓다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연기의 과정은 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표상 - 비교 - 추상 - 총괄 - 명명의 순서로 이루어지는 개념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입과 촉은 표상을 얻는 과정이고, 수(受)는 비교하는 과정이며, 애는 추상하는 과정이고, 취는 총괄하는 과정이며, 유는 명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러한 개념화 과정을 객관세계에 대한 주관, 즉 이성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작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 이해에 필수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개념화 작용이 세계의 실상을 은폐하고 있다고 본다. 붓다에 의하면 개념화 작용은 순수한 이성의 사유작용이 아니다. 경험의 내용이 개념화하는 과정에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책상이 개념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밥상, 침상, 책상 등과 같은 여러 상들을 비교하여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성질을 가진 상을 제외한 다른 상들은 추상하고, 나무로 만든 것이든, 강철로 만든 것이든, 흰색이든 검은 색이든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상을 총괄하여, 여기에 책상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책상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학적인 설명은 책상이라는 개념이 처음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만약 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책상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려면, 책상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책상이라는 사물은 책을 놓고 보기 좋은 속성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책상의 성질은 과연 책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가? 책상은 밥그릇을 놓고 먹기에는 좋지 않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동일한 상을 책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밥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책상이라는 객관적 사물 속에 내재한 속성을 논리적으로 추상하여 만든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책을 놓고 보고자 하는 욕구가 책상의 속성과 개념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책을 놓고 보기 좋은 성질을 가진 책상’이라고 부른다. 붓다가 개념화 내지는 실체화의 과정을 觸 - 受 - 愛 - 取 - 有로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념은 객관적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의 소산이다. 자아와 세계라는 개념도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에 상응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아’와 ‘세계’는 지신들이 욕구로 집착하고 있는 허망한 개념일 뿐이다. 붓다가 이들 사견에는 결사(結使)가 있으며, 말만 있을 뿐 논의할 내용이 없는 희론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우리가 객관적 실재로 알고 있는 개념의 대상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경험한 내용들이 욕구에 의해 취해진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허망한 사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은 바로 육입(六入)에서 노사(老死)가 연기하는 과정을 내적으로 성찰하는 수행법이다. 신념처(身念處)에서는 육입신(六入身)을 관찰하고 수념처(受念處)에서는 觸과 受를 관찰하며, 심념처(心念處)에서는 愛와 取를 관찰하고, 법념처(法念處)에서는 有와 生, 老死를 관찰한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허망한 개념을 실체로 착각함으로써 존재의 시작과 끝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생과 노사임을 깨닫게 되며,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生死에서 벗어난다.


붓다는 허망한 개념을 놓고 대립하는 견해들은 결코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잡아함 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영혼(命)이 곧 육신(身)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 주장의 의미는 한 가지인데 갖가지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범행(梵行;윤리적 실천)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고 해도 범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이변(二邊)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중도(中道)로 향할지니,소위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영혼이 곧 육신이라는 주장은 자유사상가들의 견해이고,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는 주장은 바라문교의 견해이다. 붓다는 이들 견해가 모두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중도, 즉 연기론에 의지할 때 우리는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 이들 견해는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중아함 도경(度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사문과 범지는 일체는 모두 숙명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문과 범지는 존우(尊祐)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어떤 사문과 범지는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비구들이여, 숙작인(宿作因)이나 존우작인(尊祐作因)이나 무인무연(無因無緣)에 의지하면 거기에는 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을 수 없고, 노력도 있을 수 없으며, 이 행위는 해야 하고 이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삶이 태어날 때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에게는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조물주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고 유지된다고 해도 그렇고, 세상사가 우연하게 전개된다고 해도 그렇다. 우리가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위의 선택은 행위가 일정한 결과를 초래할 때 가능하다.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세상사가 숙명이나 조물주나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면 우리의 행위 선택은 무의미하고,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이나 도덕적 판단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창조론과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윤리적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신념으로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윤리는 신념을 거부하면 무의미하게 되고, 자연과학은 인과율에 의하여 자연세계를 설명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하여는 우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Ⅲ. 불교의 연기설(緣起說)


창조론과 진화론은 모순 대립하지만 인과율적으로는 같은 기반 위에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내재해 있는 인과율은 선형적 단일방향적 인과율이다. 선형적 인과율은 원인에서 결과로의 방향이 한 방향이다. 즉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가 없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A → B → C → D →


이러한 인과 페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 A가 무엇인가를 놓고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은 A를 창조주인 신이라고 주장하고 진화론은 물질, 또는 물질에서 최초로 발생한 생물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양자가 이러한 선형적 단일방향 인과 페러다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붓다가 당시의 사상적 대립에 대하여 의미는 한 가지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당시의 사상가들이 다같이 선형적 일방적 인과론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는 근본 이유는 이들의 기반인 선형적 인과율이 본질적으로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율은 ‘A는 A이다’는 형식의 명제로 표현되는 공리(公理)로서 ‘A가 자라서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은 절대로 동일하므로 A’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율은 모든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는 것을 인정하고, 복잡한 것의 통일을 인정하고, 유동(流動)하는 것에서 부동(不動)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성립되는 원리로서, ‘본질의 자기동일성’을 인정하는 원리이다.


 모순율은 동일율의 반면을 말하는 원리로, ‘A는 A 아닌 것이 아니다’는 형식의 명제로 표현된다. 즉 동일한 사물에 대하여 동일한 사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모순율이다.12)


선형적 인과율은 이러한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으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라는 개념은 동일율에 의해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선형적 인과율은 이러한 실체를 전제로 하여 실체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선형적 인과율에서는 제일 원인이 되는 근본실체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이러한 동일율과 모순율에 근거하여 인과관계를 사유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인간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창조론과 자연적 진화라는 진화론의 명제는 먼저 ‘인간 생명’은 본질에 있어서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동일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동일성을 지닌 ‘인간 생명’을 신이 만들었다면 자연적인 진화일 수 없고, 자연적인 진화라면 신의 창조일 수가 없다는 모순율에 의해 두 이론은 모순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만약 동일율에 의해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인간 생명’이 실재한다면 우리는 모순율에 의해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에 동일율을 인정할 수 없다면, 즉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동일율에 근거하는 모순율 또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동일율에 근거하고 있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주장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붓다는 이러한 선형적 인과율을 비판하고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새로운 인과율을 제시했다. 붓다는 인과관계를 선형적 일방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관계로 본다.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이 저것의 존재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연기론 의하면 근본 실체나 제일 원인은 없다. Sayutta-Nik?ya 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인연으로 하여 늙어 죽는다는 법은 如來가 세상에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그 界, 즉 法의 住性, 定性, 條件性은 常住한다. … 여기에는 객관성과 필연성과 불변성과 조건성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13)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住性은 상호인과의 법칙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定性은 그 법칙이 불변의 결정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며, 조건성은 그 법칙이 여러 조건들의 상호관계의 법칙임을 의미한다. 붓다는 이러한 상호인과 관계에 있는 현상을 法(dharma)이라고 부른다.


법은 관계에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실체성이 없다. 즉 空이다. 물질도 법이고, 정신도 법이다. 이러한 法은 문법적으로 명사적이라기보다는 동사적이다. 붓다에 의하면 명사적 의미의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이 허구적으로 조작하여 분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촛불은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이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을 볼 때 촛불이라는 존재가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다고 착각한다. 붓다는 ?잡아함 335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보는 자아(眼)는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자아는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사라지나니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 즉 작자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행위의 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과정,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작자)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業)을 하면 착한 사람(報)이 된다. 이것이 무아설의 근본취지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도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즉 인간의 본질은 업보이다. Majjhima-Nik?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며, 업의 친척이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행위의 주체를 자아로 보는 생각에서 우리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대립한다. 주체는 객체가 될 수 없고,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는 행위를 통해 객체와 관계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체와 객체는 별개의 사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행위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며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대사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내 몸은 이렇게 외부의 물, 공기, 음식 등이 들고 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을 차단하면 몸은 존재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정신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며 유지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떤 정신적 작용도 나타날 수 없다. 몸도 마음도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유지된다. 따라서 업보를 자아로 보는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인연이 되어 존재한다. 주체가 없으면 객체가 없고,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으며, 나아가 주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 객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무아설에 의하면 주객의 분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불교는 이러한 연기설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존재는 업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함께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자각은 우리에게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의식을 갖게 한다.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신체나 자신의 정신이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로 확장된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남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삶을 모든 것을 내 몸으로 보는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현으로 본다. 이것이 불교윤리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엄은 이러한 윤리의 실천을 통해 그 업보로서 성립한다. 인간은 자비의 실현, 즉 윤리적 실천을 통해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 존엄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Ⅳ. 시스템 이론과 새로운 진화론


불교의 연기설은 현대의 시스템 이론이나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프리쵸프 카프라(Frijof Capra)는 ?생명의 그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짧게 요약한 시스템적 사고의 특성들은 모두 상호의존적인 것들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식별해 내는 것은 인간관찰자와 그의 앎(인식)의 과정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은 그에 상응하는 개념과 모형들에 의해 기술된다. 그리고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비해 더 근본적이거나 궁극적이지 않다.16)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와 불교의 연기설은 선형적 일방적 인과론을 탈피하여 인과를 상호의존적으로 본다는 공통의 기반을 갖는다. 그리고 사물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며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궁극적으로 - 양자물리학이 입증해 주었듯이 - 부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직물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따라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대상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 시스템적 관점에서 우리는 대상들 자체가 보다 큰 연결망 속에 묻혀있는 관계들의 연결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스템 사상가에게 있어서 이 관계는 일차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17)


시스템적 사고에 의하면 사물은 없고 관계만 있으며, 이 관계들의 그물망은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붓다의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생각과 일치하며, 自他不二의 사상과 상통한다. 이러한 시스템 이론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유가 대립하지 않고 상호 보충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선형적 일방적 인과론을 버리고 인과를 상호관계로 본다면 과학과 인문학은 결코 대립하지 않으며, 모든 모순대립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도 현대 학자들에 의해 다윈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맹목적이고 우연한 돌연변이가 새로운 진화를 이끈다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의 진화에서 나타난 커다란 격차는 별개의 진화 계통을 통해 이미 갈고 닦아져 있던 정교한 구성요소들 간의 공생적(共生的) 합병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새로운 생물형태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시 진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돌연변이로 생겨나서 자연 선택에 의해 유지되어 온 기존의 모듈modul(주로 박테리아로 밝혀진)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거나 합병하여 새로운 생물, 자연 선택에 의해 작용하고 작용 받는 전혀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어 낸다.18)


모든 생물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것이 아닌 여러 박테리아의 혼합물이며, 진화의 원리는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닌 공생의 화합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또 생명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명은 화학 성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화학 물질들의 작용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언어적 모순이다. 문법에 맞게 대답하려면 명사, 즉 구체적인 사물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은 오히려 동사에 더욱 가깝다. 생명은 자신을 수선하고, 유지하며 다시 만들고 자신을 능가한다.19)


이렇게 생명을 동사적 의미의 자기 생산적인 것으로 파악한 마굴리스는 생물이 자기 생산의 과정에서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 생물은 지구에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는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생물은 자기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쉴 때마다 우리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 생물권의 숨결은 매일 지구상의 밤인 쪽에서는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증가하고 낮인 쪽에서는 감소하는 것으로 표시된다. 일 년의 숨결은 계절의 변화로 나타난다. 북반구에서 광합성 활동이 활발해지면 남반구에서는 서서히 감소한다.


최대한의 생리학적 범위에서 보면 생명은 지구 표면 그 자체이다. 여러분의 몸이 세포들로 우글거리는 해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는 단순히 생물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아니다.20)


모든 생명은 서로 인연이 되어 공존하는 가운데 진화하는 공동체로서 크게 보면 한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관점은 과학이 인간의 윤리와는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이 한 생명이라면 우리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Ⅴ. 결어


필자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을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야기된 인간 존엄성의 파괴와 윤리적 위기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으로 인식하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해소하고 윤리의 토대를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불교의 연기론의 관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살펴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생명의 출발점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우리가 사물의 시작과 끝을 논의하려면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을 지닌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연기하면서 무상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사물은 없다. 모든 존재현상은 공(空)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이라면 존재의 시작과 끝을 논의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의 시작에 대한 논의로서 무의미한 사견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기반은 선형적 인과율이다. 선형적 인과율은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논리학이 근거로 하는 ‘실체’와 ‘동일성’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연기법이라고 하는 상호인과율을 주장한다. 상호인과율에서는 제일 원인이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 실체로 보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인과관계로 이해한다. 즉 실체는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업보(業報)는 이러한 상호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연기론적 세계 이해는 우리에게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업보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면, 즉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타인이나 자연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동체자비를 실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윤리, 즉 환경 윤리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상호인과율은 현대의 시스템 이론이나 생물학의 관점과 일치한다. 시스템 이론은 종전에 세계를 부분의 집합으로 생각했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부분이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이라고 본다. 따라서 사물 중심에서 벗어나 관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진화를 직선적,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공생적 합병으로 보며, 생명을 동사적 의미로 이해한다. 현대의 과학 이론과 불교는 상호인과율이라는 인과율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조와 불교는 과학과 종교,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결코 대립하지 않고 인간의 바른 삶을 밝히는 데 함께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21세기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주제어: 창조론, 진화론, 선형적 인과율, 상호인과율, 동일율, 모순율, 생명, 실체, 동일성, 연기설, 무아설, 업보, 자타불이,

           동체자비, 시스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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