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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교리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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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교리
 

차례 :  1.연기법  2.일체법  3.삼법인  4.사성제  5.12연기  6.생활속의 연기법 수행


 
1. 연기법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치신 분이며, 그 진리의 내용은 바로 ‘연기’이다. 부처님은 경에서 이 연기법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앞으로 설명할 5온(五蘊), 12처(十二處) 등 일체법(一切法)의 분류,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도 모두 연기법을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한 가르침이다. 불교 교리가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연기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12연기(十二緣起)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연기법이 경전에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연기법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나고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아래의 시로 간명히 표현하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잡아함경』 제30권 335경 「제일의공경」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존재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이것과 저것의 의존관계와 상관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와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關係性)’을 뜻한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항상 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맺고 있다 하여 연기법을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 말하기도 한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편의상 인간존재에 국한해서 ‘상호의존성’을 생각해 보자.


지금 여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 어떻게 있는가? 부모로부터 몸을 받고 태어나 부모와 가족에 의존하여 성장하였다. 또한 교육과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었다. 살아있는 동안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과 같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여 분별한다. 화려하게 치장한 인기연예인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계속 눈길을 주지만, 거적을 두른 길거리의 거지를 보면 추하다고 고개를 돌린다. 칭찬하는 소리에는 항상 기분 좋지만 나를 욕하는 소리는 잠시도 듣기 싫다. 악취는 싫어하고 향긋한 냄새는 좋아한다. 무덤덤한 맛은 싫어하고 맛있는 음식은 탐닉한다. 몸에 부드러운 것은 좋아하고 거친 것은 싫어한다. 좋은 느낌은 탐착하고 나쁜 느낌은 혐오한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식된 것들은 크게 좋은 것과 싫은 것이라는 관념[想]으로 분별하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이처럼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첫째, 시간적으로 가계(家系)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둘째, 공간적으로 주위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셋째, 여섯 감각기관을 통해서 형성된 주관과 이에 상응하는 정보들로 형성된 객관과의 상호작용이 또한 ‘나’를 형성한다. 넷째,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겨난 상대적 개념이 ‘나’를 부자 혹은 가난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혹은 비천한 사람, 선량한 사람 혹은 악독한 사람 등 자화상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처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주관과 객관으로, 그리고 상대적 개념의 상호연관과 상호의존 속에서 연기된 존재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존재를 포함한 모든 연기된 존재를 주로 5온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셨고 경우에 따라서 12처 혹은 18계라 설하시기도 했다. 연기된 모든 존재현상을 나타낸다 하여 일체법(一切法)이라 하기도 하고, 3가지 과목으로 분류한다 하여 5온ㆍ12처ㆍ18계를 3과(三科)라 부른다.
 
 
2. 일체법


일체법이란 모든 존재현상을 말한다. 불교가 지향하는 오직 한길이 인간 문제의 해결, 즉 인간 고(苦)의 해결인데 왜 경전에서는 인간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다소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언급을 하고 있을까?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다양한 연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연기적 관계를 떠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체법을 설하신 것이다. 인간의 고는 일체법과 ‘나’라는 존재의 연기성을 체득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모든 존재현상은 ‘나’라는 존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 수 있다. 즉 우리는 일체법의 참된 모습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써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경전은 모든 존재현상의 연기성을 여러 방법으로 설한다. 대상은 같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방법으로 설하기도 하고, 세부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설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도들에게는 물질을 위주로 한 분석적인 접근이 쉬울 것이고, 인문학도들에게는 정신을 위주로 한 종합적인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일체법을 이해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능력, 또는 수준에 따라 다른 설명들이 필요한 것이다.


일체법의 분류 방법 가운데 초기경전에 가장 일반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5온, 12처, 18계이다. 정신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는 것은 5온이며, 물질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것은 12처이다. 또한 정신과 물질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춘 것은 18계라고 한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던 상관없이 부처님께서 5온, 12처, 18계를 설하신 목적은 물질과 정신이 모두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하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다. 먼저 5온에 대해서 알아보자.


1) 5온


5온의 온(蘊)은 ‘모임’, ‘다발’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음(陰)’이라 한역했다. 5온이란 물질현상을 나타내는 색(色)과 정신현상을 표현하는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인간 존재를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 존재를 의미한다. 일체법의 뜻으로 쓰일 때에는 색은 물질 전체를, 그리고 수ㆍ상ㆍ행ㆍ식은 정신 일반을 뜻한다. 인간 존재를 의미할 때 색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의미하며, 수ㆍ상ㆍ행ㆍ식은 정신현상을 나타낸다.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5온으로 이루어져 연기하는 ‘나’라는 존재를 고정불변의 자아로 착각하여 취착(取着)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색이 몸과 눈ㆍ귀ㆍ코 등의 인식기관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수(受)는 육체가 감각적으로 받는 유쾌, 불쾌의 느낌과 정신이 지각적으로 느끼는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감수(感受)작용이다. 상(想)은 앞의 감수작용에 의해서 받은 느낌을 이미 축적된 개념과 연관지어 개념화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위고하, 빈부격차, 아름다움과 추함 등 인간사회의 상대적 개념을 형성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는 정신작용이다. 행(行)은 위의 두 가지 감수작용과 개념작용 그리고 다음에 언급할 인식작용을 제외한 일체의 의지적 마음작용을 말한다. 물론 의업(意業)을 형성하기 때문에 형성력(形成力)이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지적작용과 의지작용이 주된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5온의 식(識)은 나누어서 아는 것, 분별, 판단, 인식의 작용을 뜻한다. 위의 정신작용들의 기저(基底)에서 인간이 역동적인 인식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처럼 5온이 인간존재를 가리키든 일체의 만물을 지칭하든 5가지의 유형의 현상들이 모여 존재를 이루며, 이는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하면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5온설은 이처럼 물질 영역은 색(色) 하나로 간단히 언급하고 정신영역은 4가지 유형의 의식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5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인 것으로 영원불멸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설한 것이다. 즉 이들에게 정신 또한 실체가 없으며 연기된 것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2) 12처


12처란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감각대상을 합친 것을 말하는데, 12입(十二入) 또는 12입처(十二入處)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하는 것으로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그 대상인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이다. 여기서 보는 작용은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듣는 작용은 귀를 통해서, 냄새 맡는 것은 코를 통해서, 맛보는 것은 혀를 통해서, 감촉은 몸의 각 부위의 피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6개의 감각기관을 내입처(內入處)라 하며 6근(根)이라고도 부른다. 6근의 근은 기관(器官)이라는 뜻 이외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 포함한다. 즉 안근이라고 해서 안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눈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6근에서 제6의 의근(意根)은 기능은 존재하지만 다른 5기관들처럼 직접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기관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이 생기므로 전통적으로 일종의 기관으로 간주한다. 한편 6근에 상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할 수 있는 것, 의근의 대상[法]을 6경(境)이라 부르고 외입처(外入處)라고도 한다. 마지막 의근의 대상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혹은 일체 현상(法)을 말한다. 즉 12처 가운데 11처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현상이다.


이 우주에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와 객관계로 나눌 수 있다. 주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6내입처이고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6외입처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모든 현상은 12처에 포섭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체법의 분류 방식은 일체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 능력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5온과 마찬가지로 12처의 교설도 일체법의 연기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5온설은 물질영역 보다 정신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면, 반대로 12처설에서는 정신영역은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로 간단히 설명하고 나머지 10처에서 물질영역에 대한 설명을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것은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는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 일체를 구성하는 12처도 모두 연기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3) 18계


18계설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인식기관[6根]과 인식대상[6境], 그리고 인식작용[6識]으로 분류한다. 눈을 통해서 빛깔이나 형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식별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안식(眼識)이라 한다. 귀로써 소리를 듣기 때문에 이식(耳識), 코로써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식(鼻識), 몸으로 무엇을 접촉하기 때문에 신식(身識),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6식(六識)이라 한다. 이처럼 18계에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6근으로 인하여 6경이 있고, 6근과 6경으로 인연해 6식이 있으며, 6식으로 인하여 6촉(六觸)이 있으며….’로 이어지는 연기법의 형태를 보여준다.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이 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기관과 그 대상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는 연기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주체나 객체, 여기서 생기는 인식은 그 실체가 있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해서 생겼다 사라지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계설은 물질과 정신에 실체가 있어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설한 것이다.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의 참모습인 연기성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8계설에서도 결국 정신이든 물질이든 모든 현상은 영구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연기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처님께서 일체법인 5온, 12처, 18계를 설하신 목적은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음에 살펴볼 삼법인(三法印)에서는 일체법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다.
 
 
3. 삼법인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이다. 법이란 물론 진리를 말하고 인장은 진리로써 인증하는 증표를 나타낸다. 이 진리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셨으므로 부처님의 교법이라 하며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된다. 삼법인의 사상과 일치하면 불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의 실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법인은 초기경전에는 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삼법인이 어떤 맥락에서 설해지는가를 알기 위해서 초기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무상럭疵무아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보자.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물을테니 아는 대로 대답해 보라. 육체(色)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시각각 변해서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라면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육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것(我所)이며, 나(我)이며, 나의 본체(我體)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無我).” “그러면 정신의 세계인 감수작용(受)과 개념작용(想), 그리고 의지(行)와 인식(識)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즐거운 것이 아니며, 나의 것도 나의 본체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옳다.”


『잡아함경』 제1권 34경 「오비구경(五比丘經)」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5온의 무상함, 괴로움, 그리고 무실체성을 강조하심을 발견하게 된다. 위의 경에서도 5비구들에게 조목조목 물으시며 5온은 무상한 것이며 괴로운 것이며 따라서 실체적 자아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다. 이러한 일체법의 3가지 특성을 불교학자들이 삼법인이라 명명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무상함에서 괴로움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이것 대신 열반적정을 넣어 삼법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관찰해야 할 현실상태는 무상럭疵무아의 일반적 연기현상이지만 성취해야 될 이상은 연기에 대한 관찰로 생기는 열반적정의 상태이다. 『증일아함경』 권18에는 아예 열반을 포함해서 사법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삼법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힘든 교설은 무아설이다. 예로부터 무아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불교학의 발전 양상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 분명 ‘나’라고 하는 것이 경험하고 있다. 이 경험하는 ‘나’가 엄연히 있는데 왜 ‘나’가 없다고 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무아로 부정되는 그 ‘나’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식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부정하신 것은 당시 외도들이 말하는 ‘영원불멸의 실체적인 나’ 혹은 ‘본체로서의 나’이다. ‘나’는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5온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내가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나’인 것이다. 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진아(眞我)’와 ‘대아(大我)’같은 수식어를 붙여 놓으면 이를 ‘고정된 실체적인 나’로 착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무아를 설명하면서 잠시라도 연기법의 원칙을 벗어나면 실체적인 관념의 ‘나’가 침입하여 무아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상ㆍ고ㆍ무아의 삼법인 교설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을까? 이 교설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일까?


1) 무상설의 실천적 의미


일체의 삼라만상이 끊임없이 변해가며,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작은 미립자의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에 불과하며, 원자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물리ㆍ화학적으로 찰나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연과학도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무상의 원칙이 현대과학의 발달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기는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과학적인 지식을 주기 위해서 무상관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참다운 삶, 가치 있는 삶, 영원한 삶을 얻게 하기 위한 실천적인 의미로 무상의 참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색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진정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죽거나, 말기 암환자가 되어 죽을 날을 받아 놓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었을 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생에 대한 무상함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나이 순서대로 죽는 것도 아니며, 재산이 없는 순서대로 죽는 것도 아니다. 지식이 없는 순서대로 죽는 것도 역시 아니다. 누구나 갑자기 죽을 수 있으며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상함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하면 할수록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고생하지 않고 유복하게 사는 사람들 중에 교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로 일이 잘 풀려 성공한 사람은 자칫하면 자만에 빠지기 쉽고 일에 집착하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무상관을 닦아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무상의 법칙은 빈부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무상관을 통해서 터득할 때 인생의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상관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수행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상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인생은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 현재 소외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사노라면 복된 삶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변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복권이 당첨되는 그런 극단적인 역전의 삶이 꼭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박복이 유복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병약함이 건강함으로 역전될 수 있다. 역전의 인생이 가능한 것도 역시 바로 이 무상의 원리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무상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관찰은 무상설은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현실관이라는 오해를 바로 잡아 주고 무상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2) 괴로움의 실천적 의미


불교에서 인간이 사는 곳을 사바세계라 한다. 고통을 참고 살아야 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변화한다는 것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처럼 끊임없이 운동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변화하는 현상은 이처럼 충돌과 팽팽한 갈등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므로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몸과 마음에서 지속될 때 우리는 이것을 괴로움, 고통, 고뇌 등이라 느낀다. 괴로움의 유형에 따라 일체개고를 3가지로 분류하는데, 고고(苦苦)는 괴로움 자체의 고통, 행고(行苦)는 시간적으로 덧없이 변하는 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괴고(壞苦)는 공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 데서 오는 공허감의 고통이다.


첫째, 고고는 매우 일반적인 의미의 괴로움 자체를 말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 부조화의 상태에서 오는 고통이다. 불치병에 걸려 병실에 누워 신음하는 고통, 어두운 밤거리에서 치한들에게 두들겨 맞는 아픔, 감옥에서 고문을 받을 때의 고통, 힘든 노동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 고통 등 여러 종류의 육체적 고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괴로운 것은 정신적인 압박감과 불안감, 그리고 모멸감과 수치심이다. 잘 모셔야 하는 홀어머니와 사랑하는 부인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보아야 하는 외아들은 괴롭다.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했을 때 정말 고통스럽다. 아들이나 딸이 대학시험에서 낙방하여 불량배들과 어울려 탈선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들은 괴롭다. 인기나 명예를 잃는 것도 괴롭다.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인기를 잃고 무대 한쪽에서 빈 객석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허탈하다. 위의 고통들은 인간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겪을 수 있는 괴로움들이다. 이런 괴로움을 당할 때 고통에 대한 관찰을 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만이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중의 고통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의 진상을 아는 수행자는 누구나 겪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이 괴로움 또한 무상하므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통찰한다. 그래서 아픔에 또 다른 아픔을 불러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둘째, 행고는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 변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으로 삼법인의 첫 번째인 제행무상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아름다운 젊음을 잃어야만 하는 괴로움, 왕성한 정력과 혈기를 잃어가는 괴로움, 나이 먹고 능력 없이 회사 돈만 축내고 있다고 퇴출당해야 하는 괴로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늙어 죽어야만 하는 괴로움 등이 있다. 그러나 행고를 관찰하는 수행자는 팽팽하고 생기 넘치는 얼굴에 험한 주름살이 생기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완숙의 미를 음미할 수 있으므로 이로 인한 더 이상의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력과 기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생리적인 현상임을 받아들이고 조신(調身)의 묘를 터득하게 되면 이로 인한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다. 나이 때문에 회사에서 퇴출당했을 때, 자신의 능력에 맞는 다른 직업을 적극적으로 찾는다면 이로 인한 괴로움은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한탄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차분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 이로 인한 허탈감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괴고는 어느 공간 속에 이루어져 있던 것이 부서지거나 없어지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예를 들면, 애지중지하던 값비싼 고려청자가 깨진 데서 오는 괴로움, 태풍이나 지진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 집을 보는 괴로움 등 물리적인 무너짐에 대한 고통이 있다. 또한 가문이 무너지고, 우정이 깨지고, 결혼생활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해체의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역시 매우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괴고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수행자는 깨진 고려청자를 보고 잠시 애석해 하더라도 원래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보관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 물건에 대한 집착의 마음을 버린다. 태풍이나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버렸다면, ‘이 엄청난 재해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하며 애석한 마음을 정리한다. 가문, 우정, 결혼이 깨진 것에 대해서도 ‘죽어서 헤어지기도 하는데 인연이 다해서 깨진 관계를 어쩔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 놓아 버리면, 괴로움의 속성이 무상하여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방하착(放下着)하여 마음을 비워 버리면 괴로움이란 실체가 없이 연기적으로 존재한 것이기에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3) 무아의 실천적 의미


괴로움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나’도 실체가 없다. 즉 무아이다. 위에서 연기법을 설명할 때, ‘나’라는 존재는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연기해 있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도 내가 아니며, 느낌, 개념, 생각 등도 또한 내가 아니다. 이 몸이란 부모님을 의지해 태어난 것이며, 느낌, 개념, 생각 등이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 온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배워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의 지ㆍ수ㆍ화ㆍ풍(地 水 火 風) 또한 이 우주의 가득한 그 물질을 잠시 인연에 맞게 빌어다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늘 먹고 있는 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 톨의 쌀이 있기 위해서 땅과 물, 태양빛과 공기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농부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야 양질의 쌀을 얻을 수 있다. 이 쌀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물[水]과 열[火]의 인연을 만나야 한다. 밥은 밥이지만 우리가 먹고 나면 밥은 더 이상 밥이 아닌 몸 속의 자양분으로 된다. 살이 되고 뼈가 되어 ‘내 몸’이 되는 것이다. 밥상의 국도 반찬도 과일도 먹고 나면 ‘내 몸’이 된다. 물도 물이지만 마시고 나면 ‘나’가 되고, 공기도 공기지만 들이마시고 나면 ‘나의 호흡’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본래부터 ‘나’ 혹은 ‘나의 것’이였던 것은 하나도 없다. 잠시 인연에 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어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처음 잉태되었을 때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한 방울의 이슬과 같았다. 이 이슬방울과 같은 몸이 어머니가 주신 자양분을 의지해서 지금 우리의 몸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까지 지금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머리도 변하고 살결도 변한다. 끊임없이 ‘나의 모습’은 변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나’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느낌, 생각, 가치관 등에서 ‘나’라는 실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좋다 혹은 싫다’라고 느낄 때 그 느낌이 ‘나’일까? 나의 느낌이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세계관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이거나, 교육을 통해서 배웠거나, 살아오며 경험하고 환경에 의해 익혀 온 개념이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가정, 이웃, 사회, 국가라는 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책과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받아들인 정보를 내 느낌, 내 생각, 내 사상, 내 가치관이라 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배우고 익혀서 받아들인 느낌, 생각, 가치관, 관습,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점령하여 온통 나의 가면을 덮어쓰고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성격의 온화함과 포악함, 몸매의 좋고 나쁨, 능력 혹은 지식의 차이, 근기의 우열,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조건들이 만났을 때 연기해 생겼을 뿐인데 ‘나’라는 주머니 속에 주워 담고는 좋으니 싫으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날씬하니 뚱뚱하니, 크니 작니, 숱한 분별과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비교하면 할수록, ‘나’라는 주머니는 자꾸자꾸 커져만 간다. 너무 커져 주체할 수 없어 결국 쓰러지게 된다. 그냥 놓아버리면 모든 분별심이 딱 끊어져 온통 환히 밝아지고 자유로운 줄을 모른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모든 시비가 끊어지고 삶이 편안하고 맑아진다. 무아를 실천하면 삶이 복되고 넉넉해진다. 달려오는 기차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아이를 구하다 발목이 잘린 어느 역무원의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일화나, 일본인 지하철 승객을 구하려고 철길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어느 한국 유학생의 국경을 초월한 감동적인 행위는 바로 무아적인 실천행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4. 사성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펴신 최초의 설법은 고ㆍ집ㆍ멸ㆍ도(苦ㆍ集ㆍ滅ㆍ道)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인 동시에 일생의 설법이다.


부처님은 성도 후 수 주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후 자신의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찾아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고ㆍ집ㆍ멸ㆍ도 사성제법을 설했다.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사성제를 설했다고 해서 그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해서 불교교단이 성립된다. 불교교단이 성립하려면 불ㆍ법ㆍ승(佛 法 僧)의 3보(三寶)가 있어야 하는데, 사성제를 설한 초전법륜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전할 제자들이 생긴 것이다. 먼저 경전의 말씀을 읽어보자.


부처님께서 베나레스의 녹야원에 머무르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네 가지의 성스럽고 참다운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것은 괴롭다는 진리요[苦聖諦],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쌓임에 있다는 진리요[苦集聖諦], 셋째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요[苦滅聖諦],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의 진리[苦滅道聖諦]다. 만약 수행자로서 이미 모든 것이 괴롭다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며[知], 괴로움이 원인이 쌓임에 있음을 알고 끊으며[斷],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를 알고 증득하며[證], 괴로움이 사라지는 방법의 진리를 알고 닦았다면[修], 그런 사람은 빗장과 자물통이 없고,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르고, 모든 험하고 어렵고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리라. 그는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賢聖]이라 부를 것이며 거룩한 깃대를 세웠다고 하리라.”


『잡아함경』 제15권 386경 「현성경(賢聖經)」


여기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세계라는 현실과 그 고통의 원인, 괴로움이 멸한 세계, 그리고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깨우쳐 주신다. 이 사성제의 실천구조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고, 즉 괴로움은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에 해당된다. 그리고 집, 즉 미혹과 집착의 갈애(渴愛)는 발병의 원인이 된다. 멸, 즉 괴로움이 멸해서 평안한 상태는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도, 즉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은 길고 먼 윤회의 길로 추락하는 경로를 나타내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하는 방도는 영원한 행복과 자유가 있는 열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파악한 현실의 괴로움은 어떤 것인가?


1) 괴로움


사성제의 첫 번째는 괴로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즉 고성제이다. 현실의 괴로움은 보통 4고ㆍ8고(四苦 八苦)로 분류한다. 생ㆍ노ㆍ병ㆍ사(生 老 病 死)라는 삶의 모든 과정에 대한 4가지 괴로움에 다른 4가지 괴로움, 즉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해서 8고라 한다. 삶을 받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괴로움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정든 환경을 떠나야 하는 괴로움,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마지막으로 5온은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위와 같은 괴로움에 대한 여실한 인식이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괴로움을 늘 겪고 있으면서 인간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진리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미운 사람을 만나면 당장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망각하고 지낸다. 불교 수행의 출발점은 괴로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인데, 고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순간 고통을 여의고 안락함[離苦得樂]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고 전쟁 중에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을 여의고 안심입명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 괴로움을 직시해야 한다. 고통의 무게를 못이겨 삶을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은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암흑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달리는 용맹스런 장수처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당당하게 괴로움과 맞설 때 그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여 원인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2) 괴로움의 원인


사성제의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즉 집성제이다. 집(集)이란 ‘함께 모여 일어난다[集起]’는 뜻이다. 무엇이 함께 모여 일어나는가? 인간의 근본 미혹으로 인한 욕망과 애착이 모여 괴로운 번뇌가 일어난다. 이것을 한 마디로 ‘갈애(渴愛)’라 한다. 욕망의 갈증과 존재에 대한 애착이다. 이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인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 좋은 향기, 좋은 맛, 감촉이 좋은 것만을 탐한다. 그 욕망의 정도는 끊임이 없다. 하나를 충족시키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들어 주면 셋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욕애(欲愛)’라고 한다.


좋은 것만을 탐닉하는 인간의 성향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가 영원하여 좋은 것을 항상 향유하기를 바란다. 지금 이 목숨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유애(有愛)’이다.


이처럼 욕애와 유애를 추구하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허무를 탐닉한다. 이것을 무유애(無有愛)라 한다. 쾌락주의의 극치는 허무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극단에 치우친 태도는 항상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며 역동적이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 중에서 “최초의 진리가 괴로움의 인식이고 괴로움의 원인을 여실히 관찰하고 인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괴로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자살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카드 빚에 쪼들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동반자살한 가족, 부도를 내고 자살한 중소기업체 사장, 일등에서 이등으로 떨어졌다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어느 학생, 이들은 모두 자살을 결행할 정도로 이 세계의 고통을 절감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통을 경험하고 자살함으로써 고통을 벗어난 사람들인가?”
 

물론 이것은 전제가 잘못된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살한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고통을 절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이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괴로움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도피한 것이며,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오죽 괴로웠으면 자살까지 했겠냐고 묻겠지만, 사실 그들은 괴로움에 빠져 버려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괴로움에 대한 바른 인식과 괴로움의 원인을 관찰할 생각을 낸다는 것은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성제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3) 괴로움의 소멸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즉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 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진 평온의 경지를 나타낸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었으니 괴로움도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 이는 이미 중생의 삶이 아니라 열반과 해탈을 성취한 성자의 삶이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병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 병을 모두 치료했으니 이제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고통스러운 병과 그 원인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삼법인에서 언급한 열반적정의 상태이며, 이 장의 마지막에서 살펴 볼 12연기의 역관(逆觀)의 결과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모든 존재현상은 끊임없이 생멸하고[無常], 생멸, 변화하는 현상들은 갈등과 갈애의 상태를 면치 못하며[苦], 이런 생멸하는 갈등과 갈애의 현상 이면에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無我]’라는 진리를 확실히 체험하면 바로 그 상태가 열반적정인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존재현상의 시작과 끝을 여실히 관찰하여 체득함으로써 해탈열반의 세계를 성취하게 된다. 즉 괴로운 존재현상을 떠나 어떤 열반적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고, 잘못 보면 괴로움이고 번뇌이고 무명(無明)이다.


여기에 멸성제의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고뇌와 무지로 점철된 삶의 질곡이 따로 있고 해탈열반의 이상세계는 저 멀리 존재한다면 고통의 삶을 극복하기 위한 수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자비심과 공경으로 대하고, 좋은 말, 밝은 얼굴로 내 욕심을 접고 먼저 양보하며 남의 일을 같이 기뻐하고 상처를 안아주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모든 공덕을 함께 나누면, 바로 그 순간 괴롭고 힘든 고통의 삶이 지금 여기에서 신나고 기쁨이 넘치는 수행의 삶으로 전환된다. 멸성제의 현실적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다음에 살펴볼 도성제(道聖諦) 즉, 8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다.


4)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 팔정도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즉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또는 8가지 수행방법[八正道]을 말한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팔정도는 불교의 종합수행법이며, 불교수행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유구한 세월을 통해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계발되고 계승된 불교의 각종 수행법의 토대가 된다. 팔정도의 수행덕목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수행의 핵심 사항들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팔정도의 각 덕목들은 정견을 얼마나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수행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팔정도 수행의 출발점은 정념이고 그 노력이 정정진이며 이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집중에너지가 형성되면 정정,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정어, 정업, 정명이다. 다음에서 팔정도의 덕목들을 알아보자.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 또는 ‘바른 견해’라는 뜻으로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정견은 사성제를 위시한 삼법인, 12연기설과 같은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정견은 모든 불교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정견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수행의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바로 정견이다’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비구들이여, 정견은 [8정도 수행의] 시작이다. 왜 정견이 시작인가? 잘못된 견해는 잘못된 견해라고 이해하고 바른 견해는 바른 견해라고 이해한다.


『잡아함경』 제28권 「사견정견경」


그러므로 이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하기 전에 정견을 먼저 확립하도록 가르친다. 정견의 확립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무상과 고와 무아로 보고, 4성제의 관점에서 보아 모두 연기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으로 파악해야 고정된 판단 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견으로 성숙하고, 정견을 통해서 정화될 수 있다. 자유로 가는 길, 즉 명확한 통찰력을 얻는 것을 출세간적 정견이라 한다. 정견은 불교 수행의 첫 걸음으로써 올바른 견해 없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불교 수행의 기초가 된다.


둘째는 정사유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으로서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바를 잘 분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다. 정사유란 ‘번뇌에서 벗어난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를 끼치지 않는 생각’으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탐진치 삼독(三毒)에 물든 생각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울러 온화한 생각, 청정한 생각, 자비로운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즉 정견의 바탕 위에서 자기 생각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그릇된 생각을 지양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사유이다.


셋째는 정어로써 올바른 말을 뜻한다. 즉 정견과 정사유에 따라 항상 깨어있는 마음[正念]으로 올바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짓된 말, 남을 헐뜯는 말, 남을 상하게 하는 거친 말, 쓸데없는 잡담과 같은 옳지 못한 언어적 행위를 자제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순간 바로 모든 선악시비와 갈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의 흐름을 잘 관찰하여 잘못된 구업(口業)을 짓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서 진실된 말, 남을 이롭게 하는 말, 부드럽게 화합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이며 이는 올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정어에서 의미하는 언어적 행위 외에 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음란한 행동을 하고 술에 취하는 것과 같이 몸으로 행하는 잘못된 신업(身業)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생명을 살리고 남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어와 정업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바른 행위를 뜻한다.


다섯째는 정명으로서 올바른 생활을 뜻한다. 정명은 규칙적이고 건전한 생활을 하며 올바른 직업을 통해 정당하게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 수면, 업무와 같이 건전하고 절제된 일상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고 피해를 입히는 직업보다는 올바른 직업윤리를 지니고 정당한 직업을 통해 생활하도록 권장한다. 이렇듯 정명은 올바른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정정진이며 올바른 노력을 의미한다. 정정진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향해 용기를 내어 물러섬이 없이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즉 모든 괴로움과 번뇌의 주범인 근본 무명을 반야지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탐려扁치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이미 일어났으면 이를 극복하고, 반야지혜를 개발하여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면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정정진이라 한다.


일곱째는 정념으로 바른 깨어있음, 바른 마음챙김, 바른 관찰, 바른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지킴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정념이란 4념처(四念處), 즉 신체, 느낌, 마음, 그리고 모든 현상은 항상 변하며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늘 새기며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여 찰나찰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 정념수행은 단순히 4념처 수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수행법에 적용된다. 염불수행을 할 때는 불보살님의 명호가 생각생각 이어져야 하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화두챙김에 끊임이 없어야 한다.


팔정도의 마지막인 여덟 번째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 또는 올바른 선정을 의미한다. 즉 마음을 바르게 한 곳에 집중하여 삼매(三昧)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의 노력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팔정도는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대표적인 불교수행법으로서 여덟 가지 측면에서의 수행을 뜻한다. 이러한 팔정도를 계(戒 : 정어, 정업, 정명), 정(定 : 정정진, 정념, 정정), 혜(慧 : 정견, 정사유) 3학(三學)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수행 내용에 따라 세 가지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삶과 사물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이는 팔정도의 첫 덕목인 정견에서 제시되는 것으로서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즉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삼법인, 12연기, 중도설, 무아설 등을 깊이 궁구하여 삶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는 올바른 견해에 근거하여 실천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정사유로부터 정정진에 이르는 수행은 사고, 언어, 행동, 생활을 포괄하는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제로 체험하는 수행이다. 정념과 정정이 이러한 체험적 수행에 해당한다. 즉 정념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괴로움과 번뇌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정정을 통해 올바른 정신집중을 하여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적멸한 경지인 삼매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 수행의 완성은 괴로움의 소멸[滅聖諦]이며,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해 있음을 확연히 체득한 것이다. 연기법의 체득은 지혜의 완성이며, 이는 팔정도의 첫 번째 덕목인 바른 안목[正見]을 온전히 갖춘 것이다. 모든 존재가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로 연기해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이를 지혜(智慧)라 하고, 지혜는 자비(慈悲)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지혜의 성취와 자비의 실천은 불교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결국 불교의 핵심 교설은 연기법이므로 마지막으로 연기법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한 12연기를 생활속에서의 수행과 연관지어 살펴보자.


5. 12연기


12연기(十二緣起)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와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는 연기법의 기본 원리를 가장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초기경전에 보면 상황에 따라 12가지의 연기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연기가 있다.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정각(正覺)을 이루시기 전의 정황을 이렇게 회상하셨다. ‘정말로 이 세상은 고통 가운데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는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 (중략) ‘노병사[老死]의 고통은 태어남[生]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은 어떤 존재[有]가 있어서다. 그 존재는 집착이 모인 덩어리[取]이다. 집착은 애욕[愛] 때문에 생긴다. 애욕은 받아들임[受]에 의해 일어난다. 받아들임은 접촉[觸]에 의한 것이다. 접촉은 6가지 감각기관[六入]에 의해서이다. 감각기관은 육체와 정신[名色]이 있기 때문이다. 명색은 의식[識]에 의해 생긴다. 의식은 의지[行]에 의해 일어난다. 그 의지는 어리석음[無明]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알게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즉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가 소멸한다. 그리고 유가 소멸하면 생이 없어지고 생이 없으면 노병사가 없어지고 노병사가 없으면 수비고뇌(愁悲苦惱)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12권 285경 「불박경(佛縛經)」


12연기란 모든 괴로움을 떠나기 위해서 그 발생과 소멸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가지로 풀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12연기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고통을 여의기 위함이 연기법이니 만큼 역으로 위의 경전의 순서처럼 먼저 노사에서부터 12연기를 간단히 알아보자.


노사란 늙음과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노사는 삶의 모든 괴로움을 총칭한 근심, 비애, 고통, 번뇌[憂悲苦惱]를 말한다. 모든 존재는 생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이 피할 수 없는 노사의 모든 괴로움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태어남[生]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고통은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전 과정 즉 생노병사를 괴로움이라 한다.


그러면 생은 무엇이 있으므로 있는가? 생은 집착을 여의지 못한 존재[有]가 있어서다. 또한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실체가 있는 존재로 고착화시키다 보니 태어난 것은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을 맞게 된다.


존재는 어떻게 있는가? 집착 때문에 있다. 취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집착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애욕 때문이다. 애욕이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오로지 물을 구하려는 생각만 나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애욕은 왜 생기는가? 받아들인 느낌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이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受)가 발생하는데 이 수 때문에 애욕과 갈애가 생기게 된다.


접촉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수가 있기 때문이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모든 촉은 6근이 6경과 접촉하지 않으면 결코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촉에도 6가지의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마음)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6입 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촉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기는가? 그것은 6가지 감각기관(六入) 때문에 생긴다. 6입이란, 6근(六根) 혹은 6처라고 하는데 이는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6입은 무엇으로 인하여 있는 것일까? 명색으로 인하여 있다. 명색이라 함은 정신현상을 표시하는 명칭과, 그리고 물질을 나타내는 색을 합친 것을 의미한다. 6입의 대상이 명색이다.


그렇다면 명색과 그에 대응하는 6입인 감각기관만 있으면 인식활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상태에서 결코 인식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식이 있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꽃을 보거나 만질 수 없듯이, 식이 없으면 인식활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식은 명색이 있기에 존재하고 명색은 식이 있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 6입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기관인 6입과 그 대상인 명색 그리고 인식 주관인 식이 다 함께 갖추어졌을 때만이 사물과 접촉하는 인식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심층의식도 포함한다. 장미꽃을 볼 경우 장미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장미꽃을 본 경험과 정보가 심층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장미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식은 어떻게 있는가? 행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으로 인하여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행이란 이미 몸과 입과 뜻에 의해서 형성된 선행 정보들이다. 이를 신런막의(身 口 意)라 한다. 장미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미 입력된 장미꽃이라는 명칭도 개념도 없다. 물론 장미꽃이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기존에 형성된 다른 정보들과 조합하여 개념과 명칭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장미꽃과 비슷한 찔레꽃이라 인식할 수도 있다.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행이 있지 않으면 상응하는 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경험된 행위가 여력을 남기며, 지식정보, 성격, 습관, 소질 등의 에너지로 축적된다.


마지막으로 행은 왜 생기는가? 무명이 있기 때문에 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에 대한 무지이다. 괴로움은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팔정도 중에 정견, 즉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확실히 체득하게 되면 무명은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의 핵심교리를 연기법의 개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체법,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12연기의 순으로 알아보았다. 사실상 어떤 교설을 먼저 살펴보더라도 연기법의 중심축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법은 존재의 연기적 구조를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고, 삼법인은 존재 현상의 연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사성제는 연기적 관찰을 통한 괴로움의 극복을 제시하는 실천적 교설이다. 그리고 12연기는 연기법 자체를 심층 분석하여 고통의 삶과 해탈의 삶을 구체적으로 밝힌 가르침이다. 이처럼 불교 교설의 중심축은 연기법이므로 어떤 교설이라도 연기법의 틀 안에 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중관, 유식, 천태, 정토, 화엄 등 다양한 교설들이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새로운 구성과 확장된 개념으로 불교 교설을 재정리했다 해도 연기법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법,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12연기를 잘 외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없는 교설이라면 고급 지식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고상한 지식에 불과하다. 불교 교설은 제대로 실천했을 때 온전한 체험의 세계에 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종단의 각 불교대학이나 사찰의 교리강좌, 혹은 교리해설서를 통해서 교리를 통달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한낱 지식에 지나지 않으며 연기법을 실천하는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연기법을 축으로 한 위의 교설들을 생활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고 실천 수행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6. 생활속의 연기법 수행


불교 교리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은 모두 불교 수행과 연관되어 있고, 그 수행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일과 속에서, 늘 부딪치는 구체적인 일 속에서 실천 가능한 것이다. 내 집안, 내 일터 등과 같은 내가 처한 환경에서 바로 실천해 그 효력이 즉각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잠자는 일상사 그대로가 수행이 되어야 하는데, 일상사 모두가 수행이 되는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수행의 시작이 일상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운 교리와 일상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기 때문에 아무리 불교 교리 공부를 오래 해도 불자의 삶에서 수행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는 것이다. 수행은 처음부터 일상사가 그대로 수행이 되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누구나 마음만 내면 실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부가 가정에서 요리나 집안일을 할 때, 직장인이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때,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행을 즉각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연기법을 배웠다. 연기의 원리를 일상사에 그대로 적용하여 생활할 때, 이것이 바로 연기법 수행이다. 먼저 연기법을 복습해 보자.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나타내는 삶의 근원적 원리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네가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자연환경이 오염되면 인간도 오염되고, 생명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환경과 생명이 살아나면 인간도 건강하게 살아난다.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연관성이 연기법의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존재는 첫째, 시간적으로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조부모 등 무수한 조상님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둘째, 공간적으로 지구촌이라고 하는 공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셋째, 외부세계에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와 의식 공간에 존재하던 기존의 개념, 관념, 가치 등 무수한 심리적 정보들과 결합하여 연기적으로 형성된 ‘나’이다. 넷째,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겨난 상대적 개념이 만들어낸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하다.


이와 같은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출발이다. 이 4가지 연기법의 기본 틀을 염두에 두고 연기법 실천을 생활속에서 응용해 보자.


연기법 수행 ① _ 공경과 감사의 생활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지구촌에 툭 떨어져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거슬러 올라가면 조부모님, 그 위의 모든 조상님들이 있었기에 지금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백만 명 이상이, 30대를 소급해서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엄격히 따져 보면, 30대 앞에 계셨던 21억의 조상님 가운데 한 분만 계시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역사의 모든 인물들이 직ㆍ간접적으로 나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분들 중에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영적 스승님이 있을 수도 있고, 인류의 문명을 질적으로 변화시킨 많은 성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삶은 성장과 성숙 쪽으로 진화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가 흐르는 방향이다.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앞으로 가는 것이 쉬운 것은 단순히 눈이 앞을 향해 있어서가 아니라 우주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을 올라가더라도 사람 본능적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우주의 흐름이 성장하기 때문이며, 더 멀리 여행하고 더 높이 나는 것도, 우주의 성향이 확대와 팽창, 그리고 완성과 성숙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기법의 이런 시간적 의미를 음미해 보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의와 공경의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경은 ‘나’라는 존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웃어른들을 올려다보는 것이요, 내 마음이 위로 향하는 행이다.


이런 연기의 원리를 모르면 일상의 삶에서 남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잘 났어 정말!’이라는 어느 연예인의 말처럼, 우리 개개인 모두가 다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고개 숙이고 남을 잘 모시기는 참 힘든 일이다. 누구나 윗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어하지 자신이 상대를 공경하고 대접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내 앞에 인사하고 굽실거리는 저 분은 단지 지위가 나보다 못하거나 여건이 어쩔 수 없어 그러한 것일 뿐, 속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역시 나보다 높은 분들에게 웃는 낯으로 공손하지만, 내 마음까지 상대를 공경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 경우도 있다. 참으로 진정 공경심을 일으켜 진솔하게 이웃을 모시기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경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공경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나이 적은 자가 많은 자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경은 신분, 나이, 계급 및 서열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에게 해야 한다. 예절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서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웃어른이란, 나이만 많은 거만한 어른이 아니라 자비하고 지혜로우며 인자한 마음을 가진 이를 말한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에 갈등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무지 남의 고통, 남의 처지를 이해해 줄 줄을 모른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여 남을 무시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


모든 인간은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관계속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를 쉽고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공경이며 감사이다. 즉 공경은 만행의 근본이며, 인간관계, 개인의 성장, 자연과의 친화는 바로 감사에서 시작된다. 감사하는 마음은 공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부처님과 부모님을 모시듯,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게 된다. 이처럼 내가 지금 여기에 있게 한 모든 분들을 공경하고 생활속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첫걸음이다.


연기법 수행 ② _ 기쁨 가득한 공존의 생활


공경과 감사의 생활로 연기법을 실천하게 되면, 자연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은 공경하고 감사할 대상들로 가득함을 깨닫게 된다. 농장의 농부와 산업 현장의 일꾼도, 학교의 선생님과 관공서의 공무원도, 철도나 버스 운전사들도 모두 고맙고 공경해야 할 분임을 알게 된다. 또한 물과 공기와 태양도 산과 나무, 강과 들녘도 나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생태계 덕분에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을 공간적 관점에서 보면, 동시대의 지구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공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더불어 살면, 삶은 항상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 수행의 둘째는 공존의 기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 살과 뼈 등은 흙[地]이 되어 돌아가고, 물과 피와 고름 등의 액체는 물[水]이 되어 흐르고, 몸의 열이나 따뜻한 기운 등은 대지의 열[火]로 전환되며, 우리 몸의 운동이나 혈액의 운동 등을 원활하게 해주었던 바람의 기운[風]은 대지의 움직임, 바람이 되어 흩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산하대지는 내 몸과 무관하지 않다. 내 몸은 결국 산하대지로 환원되며 산하대지는 바로 내 몸임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 어찌 남의 것을 대하듯 마구 뚫고 부수고 해칠 수 있단 말인가! 개발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수백만 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해 온 산을 뚫고 부수어 바다의 갯벌을 막는다. 갯벌 속의 무수한 생명들이 죽어간다. 늦은 밤에 공장에서 폐수를 방출하고, 공장의 굴뚝에서 마구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휴지와 음식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아무 곳에서나 침을 뱉고 코를 푼다. 이 세계는 더불어 살아야 참으로 살맛나는 환희와 기쁨의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는 것이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인류가 진작부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이 연기의 진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처럼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물이 오염되어 정수된 물을 사먹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 중심의 태도를 버리고 산하대지와 공존하고 더불어 살아갈 때 자연은 우리에게 기쁨과 환희로 보답해 준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변화무쌍한 자태를 뽐내며 산하대지는 인간들에게 신선함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반면에 연기법을 무시한 채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으로 자연을 마구 파괴하고 우주의 생태계 질서를 교란시키게 되면 반드시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여 머지않아 인류는 공멸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등과의 더불어 사는 것 또한 기쁨을 주는 생활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라 하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많은 고마운 이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삶이 신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연기법을 잊고 살면 그 즉시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바뀐다.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승진하며 더 빨리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끝이 없다. 내가 승진하기 위해서 동료가 퇴출당해야 하며 내 아들 딸이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다른 아이들이 떨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내가 피해를 보면서까지 다른 사람이 잘 한 것 혹은 잘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나의 이익을 접고 남의 이익에 찬사를 보내고 기뻐한다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니고는 실천하기가 쉽지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고의 발상을 바꾸어 연기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그리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 시대에는 공존의 밀도가 고도화되기 때문에 ‘나만 혼자 잘 살고 남들은 못 살아도 상관없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가진 자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지능지수를 IQ(Intelligence Quotient)라 하고 감성지수를 EQ(Emotion Quotient)라 하듯이 정보화 사회에서 서로 공존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공존지수, 즉 NQ(Network Quotient)라 한다.


공존지수가 정보화 사회의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인류 맞이하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는 연기법의 응용이 극대화된다는 의미이다. 농경시대에 사용했던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 보다는 네트워크 시대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말이 더 설득력 있고 적합하다는 것이다. 즉 NQ시대의 생존전략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가 아니라 ‘네가 잘 살아야 나도 잘 산다’는 공존의 법칙이 유효하다. 갈수록 복합적인 상호관계성이 확대되는 사회에서 자기만 잘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패는 물론이고, 자신과 관계된 다른 사람에게도 큰 피해를 입힌다. 더불어 공존하면 모두가 기쁘고 즐겁지만 남을 이기기 위해 짓밟으면 함께 슬프고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연기법 수행을 실천하는 이는 큰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고 함께 기뻐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북경에 있는 나비의 펄럭이는 날갯짓이 아마존 유역의 태풍의 원인이 된다. 미시적 변화가 거시적 변화를 가져온다. 옆집 개가 새끼를 낳아도 기뻐할 일이요, 갑돌이네가 산 주식이 껑충 뛰는 것도 기뻐할 일이다. 앞집 소녀 가장 영희가 그 어려운 와중에도 공부를 잘하여 장학생이 된 것도 기뻐할 일이다. 이처럼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이 온통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연기법의 시ㆍ공간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은 항상 공경과 감사 그리고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런 연기법의 원리를 바로 적용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이 원리를 머리로는 이해하여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입사한 직장 동료가 쾌속 승진하는 것을 보면 심통이 나고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법이다. 당장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생각을 하여 동료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힘들이지 않고 더불어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다면, 위에서 말했듯이 네트워크 시대의 공존지수가 매우 높은 연기법 수행자일 것이다.


다음에서 살펴볼 나머지 2가지 연기법 수행은 공존의 몸가짐과 말씨, 그리고 마음가짐 즉, 신ㆍ구ㆍ의(身 口 意) 3업을 다스리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관한 것이다.

연기법 수행 ③ _ 안으로 늘 깨어있는 생활
다섯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외부의 정보와 의식 공간에 존재하던 기존의 개념, 관념, 가치 등 무수한 심리적 정보들과 결합되어 연기적 ‘나’가 형성된다. 안으로 늘 깨어 있어 이렇게 형성된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세 번째이다. ‘나’는 찰나찰나 연기적으로 변하고 있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무아’라는 사실을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공부를 할 때는 이 말이 수긍이 가고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만 우리 생활속에 실천하려고 할 때는 ‘무아’니 ‘연기법 수행’이니 하는 말 따위는 나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상황에 이끌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휘둘려 괴로울 때, 화가 날 때,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 우리는 순간순간 그 상황의 노예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깨어있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며, 혹은 자신의 말과 뜻을 관조할 수 있을 때 그를 우리는 연기법 수행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친구와 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싸우는 순간 친한 친구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이렇게 욕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망각한 채 그저 욕하고 주먹이 날아가고 심한 몸싸움까지 하고 만다. 이렇듯 순간의 상황에 휩쓸려 내 마음의 중심을 잃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비로소 후회하고 한탄한다.


연기법 수행자란 누구인가? 순간순간 연기적 삶의 태도를 잃지 않는 자이다. 연기적 삶의 태도란 무엇인가? 예컨대, 화를 내는 순간 연쇄적으로 일어날 상황들을 미리 간파하여 몸과 입과 뜻을 조절하는 것이다. 마치 바둑의 달인이 바둑판의 진행될 상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듯이, 내 몸ㆍ입ㆍ뜻의 행위가 전개될 상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이런 수행자는 어떤 돌발적인 상황에도 휩싸이지 않고, 마음이 항상 밖을 향해 있지 않고 내면을 관조하고 있다. 이 사람의 내면은 맑고 고요하다. 마음은 언제나 당당하여 흔들림이 없으며 그 어떤 외부의 경계가 다가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법 수행자의 맑고 당당한 마음이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六根]은 외부의 대상, 즉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六境]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더 좋은 경계, 더 짜릿한 자극을 찾아 집착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고, 귀로 좋은 말을 들으면 자꾸 생색내고 싶어 하며, 좋은 음식은 자꾸 먹고 싶고, 좋은 사람은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6가지 감각기관인 6근이 시키는 대로 이끌리다 보면 자꾸 욕심과 집착이 늘어나 ‘나’라는 생각만 키우고, 이 ‘나’라는 거창한 실체관념에 끊임없이 업을 덮어씌워 결국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연기법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런 실체관념의 늪에 빠져들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있는 자이다. 외부에서 그 어떤 경계가 그를 휘젓더라도 경계에 따라 마음이 천차만별로 흩어지지 않는다. 참된 연기법 수행자의 면목은 경계에 닥쳤을 때 여실히 드러나는 법이다. 언뜻 보기에는 모두가 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경계 앞에 서면 참된 맑음, 참된 수행자의 실상이 나타난다. 맑은 물 한 컵과 흙탕물 한 컵을 한동안 가만히 놓아두면 양쪽 다 모두 맑게 보여진다. 그러나 막대로 휘저어 본다면 맑은 물은 그대로 맑지만 흙탕물은 온통 탁해지기 마련이다.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을 제외하면, 휘저어도 맑음을 원래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연기법 수행자라 하더라도 경계 없는 인생은 없으며 경계에 닥쳐 ‘욱’하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경계가 닥치면 과거 업식(業識)따라 마음은 동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업식에 놀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안으로 늘 깨어 있어 솟아나는 업식을 관조하고 있으면 그 업의 세력은 곧 약화되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연기법 수행 ④ _ 분별심과 집착을 놓아버린 자유로운 생활

 
육근과 육경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낸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 분별을 하며 마음이 대상에 머물게 된다. 대상을 붙잡고 ‘나’,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일으킨다. 일상의 삶을 잘 살펴보면 항상 ‘좋다-싫다’, ‘아름답다-추하다’, ‘나의 것이다-너의 것이다’ 등 분별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이 분별심은 집착을 낳는다. 집착은 항상 탐착과 혐오라는 두 가지 양상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탐착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강하게 끌어들이는 심리 에너지이고 혐오는 자신에게 해롭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거부하고 밀쳐내는 심리 에너지이다. 이런 심리적 에너지가 우리들의 삶 전체에 점철되어 있어, 이 에너지의 강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는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고통과 번민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


하지만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이지 좋고 싫은 대상이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연이어 교차하며 흐르는 것이다. 이처럼 애착과 혐오, 사랑과 증오, 쾌락과 고통, 칭찬과 비난,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건강과 질병, 심지어 삶과 죽음까지도 매 순간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바로 생멸하는 연기적 현상을 애써 붙잡지 않고 놓아버리면, 시계추의 진동처럼 애착의 힘에서 혐오의 힘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제자리를 찾는다. 삶은 마치 좌우로 흔들리는 추와 같다. 추 스스로 중심을 찾게 가만히 놓아둔다. 억지로 그 추의 중심을 찾으려고 붙잡는 순간 추는 중심을 떠나버린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물 흐르듯 가만히 두면 되는데 좋으면 강하게 끌어들여 집착하고, 싫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밀쳐내어 고통과 번민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자유와 해탈의 삶은 저 멀리 사후 열반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상황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면 ‘지금 여기’에 바로 지고한 행복의 삶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법 수행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생활속에서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편의상 4가지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연기법 수행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린 ‘자아’라는 강한 철옹벽을 녹여 없애는 데 있으며, 자아중심의 분별심에서 생긴 좋고 싫음의 두 극단을 지양하여 지혜의 발현과 자비의 실천을 꾀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연기법 수행은 기법이나 테크닉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불교수행 테크닉에도 적용되어야 할 가장 원초적인 원리이다. 비록 여러 가지 수행법들의 언어의 표현과 구체적인 행법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이들 수행법 속에서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는 이론적 토대는 연기법이다. 즉 연기법은 어떤 형태의 불교전통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수행 원리이다. 이 원리의 특징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행복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멸되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원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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