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삶 속에서 주님 만나기

영상글

by 巡禮者 2010. 6. 2. 09:26

본문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삶 속에서 주님 만나기  

대전가톨릭대 총장 이창덕 신부


걷고 앉고 보고 먹고 모두 하느님 체험 우리는 이 세상이 어둡다고 말한다. 세상이 점점 하느님 나라 가치를 멀리함에 따라 마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어둠의 원인에 대해 진단도 많고 처방도 많다. 밝음이 오기까지 얼마나 긴 여정을 거쳐야 할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암 템플은 "세상은 어떤 장난꾼이 남의 상점에 들어가서 진열대의 상품가격표를 모두 바꾸어 놓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비싼 물건에는 낮은 가격표를, 싼 물건에는 비싼 가격표를 붙여 놓은 것과 같다는 얘기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께서 제시하는 고귀한 가치보다는 감각적인 것에 가치를 둠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지불하고 얻어야 할 것은 등한시하고, 참 행복의 관점에서 볼 때 지나쳐도 될 것들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이 세상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며 하느님 뜻에 따른 기쁨과 희망으로 전환시킬 것인가'는 우리 신앙인들 과제이다. 우리는 대자연과 우리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는 주님 숨결을 듣고 살아가는 데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매일매일 평범한 일들, 즉 먹고 웃고 대화하고 걷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무시하는 그런 것들 가운데서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일, 생활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들이 이 세상을 밝히리라 확신한다.


일상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들이 있다.

첫째,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성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성실하게 받아들인 일상에는 하느님 은총과 신비가 담겨 있음을 명심한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 안에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 삶의 본질적 요소가 담겨 있다. 이 안에서 하느님 무게를 느껴야 한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결코 위대한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어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다.


셋째,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이고 짧은 순간은 영원함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구체적 삶 안에서 어떻게 주님을 체험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1. 일상에서 하느님 체험

일상사는 매일 반복되지만 평범함 속에서 늘 새롭게 진행시켜야 한다. 모든 일에는 목표가 있으며, 이 목표는 하느님의 원하심에 맞추어져야 한다. 목적이 없는 삶은 죽음의 삶이며 목표가 뚜렷하면 삶이 어려워도 극복할 수 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동선이다. 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선에 이바지해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종과 극기가 필요한, 타인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삶과 함께 하시고 매순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일상사를 통해 하느님 영생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2. 걷는 행동 중에 하느님 체험

인간은 환경을 개척하면서 걷는다.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구도자임을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향한 길손이되 무턱대고 헤매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즉 어떤 목표를 향해 걷는다는 말이다. 목적이 뚜렷하면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이곳이 정처가 아님을 안다. 우리는 늘 길을 가고 있음을, 어디엔가 이르러야할 몸임을, 아직도 목적지를 찾고 있는 나그네임을 체험한다.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가 바른 곳인지 반성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지인가 반문하고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3. 앉는 행동 중에 하느님 체험

아무리 방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자리를 잡고 앉아 쉬기를 기대한다. 모든 움직임은 인간 본연의 충만한 삶을 향한 표현인 것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어 평정과 고요함에 머물 때 앉음은 쉼이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의 사랑과 완전히 하나될 때 비로소 더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 도달하여 앉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앉는 행위와 장소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앉아 있는 지금은 쉼인가? 태만인가? 내가 앉아있는 곳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장소인가? 이렇게 묵상하는 것이 하느님과 대면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앉을 자리를 주님 뜻에 맞게 선별해서 앉는 것은 쉼으로 비유되는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다.


4. 보는 행위에서 하느님 체험

'본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지평을 열어주는 행위이다. 사람 눈을 보면 그 마음이 드러나는 창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움과 두려움, 오만과 자비와 선함과 악함과 시기와 경멸, 그리고 질투와 거짓 등이 눈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 눈은 마음과 세계, 안과 밖을 종합해준다.


일상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 중 중요한 부분은 보는 것이며, 이 보는 것의 척도는 하느님 방법과 척도로 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이웃을 보거나 사건을 볼 때 하느님 눈길과 잣대로 볼 수 있다면 이것은 하느님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행위가 된다.


5. 웃는 행위 중에 하느님 체험

집회서에 "바보의 웃음은 떠들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조용히 웃는다"라는 말이 있다. 웃음에는 즐거운 웃음, 쾌락적 웃음, 슬픈 미소, 억지 웃음, 할아버지 웃음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좋은 웃음은 사랑의 표시이며, 하느님 안에서 포용하는 사랑의 교습이다.


어느 시의 몇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미소는 힘들지 않고, 주는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고도 받는 사람을 부유하게 해 줍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미소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고, 아무리 가난해도 미소조차 짓지 못할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소는 사거나 빌리거나 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웃음을 하느님 앞에서의 웃음, 어디선가 맑고 밝게 터져나오는 웃음으로 바꾼다면 이 때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6. 먹는 것

인간이 먹는 행위는 전인적 성격을 띠고 있다. 먹는 데에 전인적 성격이 결여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먹는 행위를 단순히 인간 몸이라는 기계를 돌리기 위한 물질적 충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먹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먹는 것은 죽은 것이 산 것으로 변화하는 신비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죽여 우리 음식으로 먹히고 우리를 살리시는 '성체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사는 모든 이가, 주님인 같은 빵과 술을 먹고 마심으로 하느님과 서로 하나가 되는 궁극적 일치의 상징인 것이다. 우리는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동시에 먹히는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하느님 체험이다.


이제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그의 시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이의 집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다. 사랑과 봉사를 실천할 때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