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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로 본 과거제의 전설적 수용과 민중의 권력 인식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1. 3. 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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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로 본 과거제의 전설적 수용과 민중의 권력 인식

임 재 해 교수

 

1. 과거제의 전설적 인식과 수용

 

과거 이야기와 어사 이야기는 서로 떼놓을 수 없다. 억울한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면 으레 암행어사가 되어 억울한 문제를 해결한다. 과거는 곧 예사 사람이 어사가 되어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제도적 장치처럼 이야기된다. 암행어사처럼 세간의 억울한 일을 일시에 해결해 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 왕의 야행이다. 왕이 평복으로 야행하며 시정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는 데, 그 행태는 암행어사나 다르지 않다. 야행은 과거처럼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특정 왕의 성군다운 치적에 머문다. 결국 암행어사나 왕의 야행은 모두 민중이 기대하는 왕권의 바람직한 실현이자, 설화적 상상력이 빚어낸 구성물이다.

 

설화에서 이야기되는 ‘어사 중의 어사’는 박문수이다. 조선조에 수많은 어사들이 있었지만 정작 암행어사로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박문수가 거의 유일하다. 글깨나 하는 선비들은 물론 시골 어른들도 ‘암행어사’라고 하면 으레 ‘박문수’를 든다. 그것은 ‘야행한 왕’이라고 하면 으레 ‘숙종대왕’을 드는 것과 같은 맥락의 현상이다. 민중들은 암행어사로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한 분으로는 ‘박문수’를 거론하고, 평복을 하고 궁궐을 나와 야행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돌아본 성군으로는 ‘숙종대왕’을 최고로 꼽는다. 숙종은 야행 중에 알게 된 가난한 선비를 등용하기 위해 별과나 별시를 보이는 일도 많이 했다. 그러므로 과거와 어사, 숙종과 박문수는 서로 짝을 이루는 열쇠말이라 할 수 있다.

 

설화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기 일쑤이다. 어사와 관련된 박문수의 행적부터 보자. 박문수는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삭직당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 별유어사(別遺御使)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 때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우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730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와 같이 박문수는 암행어사 노릇을 한 적이 없다. 영조 3년에 영남의 별유어사를 일년 정도 했고 영조 7년에 호서지역 어사를 4년 정도 한 것이 전부이다. 실제로 암행어사를 한 그 시기 사람들로는 중종대의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숙종대의 남구만(南九萬), 영조대의 김재로(金在魯), 순조대의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이다. 박문수는 암행어사 명단에 올라 있지 않다. 그런데도 박문수는 마치 평생 암행어사 노릇을 하며 전국을 누빈 것으로 이야기된다. 조광조와 이황, 정약용 등 정작 암행어사를 한 인물들은 암행어사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는가? 그 자체로 답하기 전에 다른 경우를 보자.

 

박문수 이야기처럼 숙종대왕 설화도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숙종대왕이 다른 왕들보다 특별히 민생을 더 잘 돌봤다는 사료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세종대왕이 훌륭한 업적을 남긴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세종대왕 이야기는 거의 전승되지 않는다. 야행 이야기도 퍽 드물다. 그러나 숙종대왕은 야행과 암행을 일삼은 왕처럼 다양하게 이야기된다. 이야기 속에서 백성들의 민생을 살핀 왕은 곧 숙종대왕의 몫이다. 그 까닭은 역사적 업적이 두드러진 세종보다 오히려 숙종이 민중적 지지를 많이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신라 문무왕과 김부대왕의 관계와 같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남겼지만 세간에서 대왕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른 왕들처럼 문무왕으로 일컬어질 따름이다. 그러나 김부는 신라 56대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으로서, 나라를 수성(守成)조차 하지 못한 채 고려에 귀부(歸附)하고 만 초라한 왕이다. 그래도 경순왕은 세간에서 ‘김부대왕’으로 일컬어지고 동해용왕이 된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문무왕이 호국룡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과 달리 세간에서는 김부대왕이 동해를 지키는 호국룡이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부를 대왕으로 일컫고 게다가 동해용까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설화는 역사이해의 사료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왕은 따로 있지 않고 백성들이 성군으로 인식하면 그렇게 호칭할 수 있다. 대왕으로 추앙하는 일은 백성들의 몫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같은 사료에는 문무왕이 호국룡이 되었는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은 사실이고, 설화에서 김부가 호국룡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문헌사학의 편견이다. 왜냐하면 사료에 어떻게 기록되었든 문무나 김부가 용이 되었다는 것은 어느 쪽이나 사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술사료로서 설화는 문헌사료로서 기록과 차이가 있을 뿐 사실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설화에서 문헌사료와 다르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설화의 전승주체가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문무와 김부가 백성들에게 미친 실제적인 영향이 다르게 인식되고 수용된 까닭이다. 문무가 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을 당한 반면에, 김부는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전쟁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왕좌를 포기하는 희생을 감수했다. 그러므로 사가들은 통일위업의 문무왕을 기리지만, 민중들은 일상적인 삶을 안정되게 지켜준 경순왕을 김부대왕으로 기리는 것이다.

 

역사와 이야기는 이처럼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산물이다. 역사 서술 주체와 매체가 다른면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른 원인으로, 역사가 사실을 기술한 반면에 전설은 허구를 구술한 것이라는 데서 찾기 일쑤이다.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지어낸 것일 뿐 아니라 구전과정에 변화하는 까닭에 문헌사료와 달리 사실과 거리가 먼 자료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그런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문헌사료보다 전설과 같은 구술사료는 공적 인증을 거치고 공감대를 이루어야 전승력을 지닐 뿐 아니라 가변성을 지녔기 때문에 누가 의도적으로 왜곡해도 쉽게 교정되는 자가교정 능력이 있다.

 

“설화는 구연되는 까닭에 기록전승과 달리 연행현장에서 자가교정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기록된 사료는 요지부동인 까닭에 기록자가 실수로 또는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기록해 두면 바로잡을 길이 없다. 그러나 설화는 일정한 유형적 틀을 이루면서 수많은 정본과 이본들이 전승되고 있는 까닭에 근본적 왜곡은 새로운 유형의 창조로 문제된다. 설화는 문헌자료처럼 단선적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구연과정에 파문형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다중적이고 복선적인 전승양상을 이루어 개인적 착각이나 왜곡도 온전한 설화에 의해 마침내 수정되게 마련이다. 오히려 전승자의 개입에 따라 가변적으로 형성된 각편들의 변이는 설화의 내용을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역사해석의 다원성을 확보해 준다.

 

최근 사학계에서는 사료의 매체가 아니라 사료의 주체 곧 역사 서술의 주체가 더 중요하다는 자각이 일고 있다. 최근까지 역사학자들은 사료의 매체에 지나치게 치우쳐서 문헌자료나 기록자료가 아니면 마치 사료가 아닌 것처럼 여겨왔다. 그런데 문헌사학의 이러한 편견을 성찰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하여 구술사 또는 생활사 자료를 소중하게 주목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시사를 소중하게 여길수록 문헌사료의 한계는 더 커진다. 앞으로 구술사와 생활사를 비롯한 음성자료에서 나아가 동영상자료의 가치가 훨씬 더 중요시될 것이다. 기존 사료들을 디지털 매체로 전환하는 작업을 서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사학계에서 더 문제되는 것은 사료의 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을 재인실할 필요가 있다. 누구의 역사인가 하는 것이 사료의 존재양식은 물론 사료 해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상투적 질문을 넘어서 ‘누구의 역사인가’ 하는 질문에 몰두한다. 이때 ‘누구’는 ‘누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왕후장상에 대한 것이든 갑돌이와 갑순이에 관한 것이든 누구의 눈으로 서술된 역사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넘어서 ‘누구에 의한 역사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문제되어야 한다.

 

문무보다 김부를, 세종보다 숙종을 설화적 주인공으로 주목하고 대왕으로 모시며 그 행적을 높이 기리는 것은 민중의 눈으로 본 역사 구술이다. 숙종처럼 야행하며 민정을 살피거나 김부처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왕좌까지 내놓는 왕을 대왕으로 추앙하는 것이 민중의 역사인식이자 해석학적 수용이다. 박문수의 암행어사 행적을 다룬 전설이나 과거 문제를 이야기하는 설화들도 마찬가지이다. 박문수는 별유어사를 잠깐하면서도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삭탈관직하는 통쾌한 업적을 냈기 때문에, 모든 암행어사들의 정의로운 행위는 박문수의 행적인 것처럼 이야기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전설적 흡인력’이라고 한다.

 

암행어사 설화가 박문수에 집중된 원인을 정치적 이유로 해석하기도 한다. 박문수는 영조의 신임을 얻은 소론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중요한 단서이다. 당쟁이 숙종 대에 치열해지면서, 당쟁에 밀린 영남의 유림은 세력을 잃은 까닭에 몰락 양반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영조 때에는 수십 년 동안 노론이 조정을 석권하고 전횡한 까닭에 영남 선비들은 과거에 불응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따라서 조정의 중신이었던 박문수는 남인과 소론 실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므로 영남 지역에서 박문수의 암행어사 설화가 많이 전하는 것은 이 지역 남인들의 비호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해석의 전제가 잘못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전국적인 설화 자료를 볼 때 박문수 설화가 영남지역에 특히 집중적으로 전승된다는 전제가 잘못이다. 실제 전승자료를 조사보고한 한국구비문학대계 82책을 보면, 오히려 영남지역보다 기호지역에서 더 많은 자료가 수집되었다. 모두 153편의 박문수 설화 가운데 영남지역에는 79편이 수집되었는데, 기호지역에는 124편이 수집되었다. 나머지 28편은 강원도, 2편은 제주도에서 수집되었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시군별 책 수를 고려해 보면, 오히려 가장 많이 수집된 지역이 충남과 전북 지역이며, 가장 적게 수집된 지역이 경남이다. 경북은 평균 수준으로 서울이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당파와 관련하여 영남 지역에서 박문수 설화가 특히 많이 전승된다는 전제와 해석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

 

둘은 설화 전승주체들을 당파적 실세 집단으로 인식한 전제가 잘못이다. 설화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직접 관련된 정치적 지배집단의 기득권자들보다 그와 무관한 민중들에 의해 널리 전승되는 까닭이다. 양반들은 당쟁에 민감하고 당파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에 파당을 짓기 쉽지만, 민중들은 당쟁과 무관한 생활을 하는 까닭에 당파에 구애받지 않는다. 특정 인물전설을 전승할 때도 당파적 소속에 따라 특별히 비호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박문수 어사 설화처럼 폐의파립을 하고 걸인 행색으로 떠돌아다니며 탐관오리를 봉고파직하는가 하면,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신분적 특권을 누리는 지배집단이 즐긴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야기는 지배층의 비리에 불만을 지니고 있는 민중들이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박문수로 표상되는 암행어사는 당파적 인물이 아니라 민중들이 창출한 영웅적 인물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남지역이 아닌 곳에 박문수 설화가 널리 전승되는 현상은, 당파 논리의 정치적 해석의 오류를 바로잡는 동시에 오히려 민중적 어사 인식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설화의 전승 담당층이나 어사 설화의 특성을 고려할 때, 사실의 문제로서 박문수의 어사 공적을 밝히는 자료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자못 암행어사와 같은 공직자는 어떤 시각에서 민정을 살피고 어떤 능력과 수완으로 탐관오리를 퇴치해야 하는가 하는 백성들의 소망을 포착하는 데에는 아주 긴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과거제도에 관한 민중의 인식도 특별하다. 조선조 행정체계로서 과거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과거시험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여러 가지 문화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는 설화들을 보면, 마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과거꾼들을 따라다니며 동행 취재한 것처럼 생생한 내용들을 들려주고 듣는 사람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맞장구친다. 과거제도의 행정적 운용은 관료들의 몫이지만, 과거 공부를 준비하고 과거길을 떠나 오랜 나그네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은 백성들의 몫이다. 그리고 과거 급제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도 그들이다.

 

그런 까닭에 세간에서는 과거제 자체에 관한 제도사 문제는 관심이 낮지만, 오랫동안 걸어가야 하는 과거길의 풍속과 그것을 둘러싸고 겪는 예사 사람들의 고난과 영광에 관해서는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실제 보고 들은 경험적 사실에 설화적 상상력이 보태어서 과거와 관련된 사실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민중들이 겪는 과거제의 간접경험이자, 과거에 대한 문화적 인식의 공유이다. 따라서 과거설화는 과거에 관한 ‘사실의 역사’로서는 한계가 있으되, 과거에 관한 ‘인식의 역사’로서는 이만한 자료가 드물다. 민중이 바라보는 세간의 과거문화는 물론 과거제도에 대한 문제점도 여러 모로 포착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므로 설화를 자료로 삼아 과거제를 이해하는 것은 제도사가 아니라 생활사이자 문화사로서 집단 심성사 영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설화자료로 과거문화를 읽는 것은 실제 사실의 포착이 아닌 설화적 상상에 따른 이해이자 일종의 풍속사라는 사실을 염두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사극을 대상으로 당시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풍요롭고 흥미롭게 이해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사극을 보고 고증이 미흡하다고 나무라는 역사 근본주의자들이나 사극을 실제 역사인 것처럼 착각하고 역사공부를 하려는 역사 초보자들처럼, 설화를 두고 역사적 고증을 들이밀거나 설화자료를 마치 사료처럼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둘 다 어리석은 일이다. 자연히 과거설화를 해석하는 전제는 민중 주체의 전설적 인식과 수용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2. 과거길의 고난과 선비들의 나그네 풍속

 

과거 길은 곧 나그네의 길이다. 괴나리봇짐을 지고 여러 날을 걸어야 과거장이 있는 한양까지 갈 수 있다. 더러 포시라운 선비들은 말을 타고 가지만 무인들처럼 말을 달리지 않고 시종이 말고삐를 잡은 채 걸어가는 까닭에 시일은 여전히 오래 걸린다. 지역과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과거 길이 한 보름 족히 걸리기도 한다. 따라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은 과거 길이 곧 여행길이자 관광길이다. 처음으로 낯선 고장을 가기 때문이다. 자연히 과거 길은 다른 고장의 사람살이 모습과 자연경관을 살펴볼 수 있는 산천유람의 좋은 기회이다.

 

영호남의 시골 선비들은 과거가 목적이지만, 과거 보러 가는 길에 한양 구경하는 것도 큰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잘 나가는 선비들은 아예 과거 길에 금강산 구경까지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당시의 선비들은 금강산 구경이 최고의 유람이자 교양관광의 하나였기 때문에 한양까지 간 김에 금강산을 다녀오는 것이다. 18세기 문인 강세황(姜世晃)은 금강산 유람기에서, “장사꾼, 품팔이, 시골 노파들까지도 마치 금강산 구경을 하고 오지 않으면 사람 축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다.”고 했다. 과거길은 오랫동안 산천유람하면서 한양까지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함께 가야 제격이다. 그래야 낯선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걷는 동안 동행들끼리 이야기도 나누고 장난도 치며,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다.

 

과거길이 누구에게나 이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양반댁 선비들과 달리 가난한 선비들에게는 길 떠날 행색 마련부터 어렵다. 간신히 헌 옷을 빨아 말끔하게 기워 입어도 중로에 갈아입을 옷이 없다. 간신히 옷가지를 챙겼다 하더라도 여러날 숙박할 노잣돈이 없어서 한양까지 가는 일 자체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그래서 빈곤한 처지의 선비들은 아예 과거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설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때로는 가난한 선비가 아니라 아예 선비 축에 끼지도 못하는 빈천한 학동이나 더벅머리 총각들이 과거길로 가면서 겪는 핍박과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기도 한다.

 

가난한 총각이 서당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며 뒷글을 배우다가 서당 학동들이 과거보러 간다고 하자 자기도 따라나선다. 학동들은 따라오지 못하게 했지만, 길을 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며 도와주기로 하고서 간신히 동행을 허락 받는다. 평소에 공부를 잘 하는 총각 탓에 훈장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학동들은 이번 기회에 가난한 총각을 처치하기로 작정하고, 가는 동안에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강제로 시킨다.

 

명 따는 처녀와 입을 맞추고 오라거나 바느질하는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오라, 정승댁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 오라고 한다. 때로는 길장가 놀이를 하다가 가마 속의 규수를 신부로 만나게 된 까닭에 학동들의 질투를 사게 되어 나무에 묶이어 죽음의 수난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구박이 뒤에 모두 전화위복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양반댁 학동들을 모두 떨어지고 가난한 총각 혼자 급제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길에 입을 맞춘 처녀와 혼인을 하게 되며, 배를 따러 배나무에 올라갔다가 발각되어 정승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리고 길장가 놀이로 만난 가마 속의 정승 딸과 혼인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귀향하여 노모를 모시고 잘 산다.

 

이른바 ‘과거길에 고생하다가 급제하기’ 유형에 속하는 설화이다. 유형 이름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주인공이 과거길에 고생하지만 마침내는 급제하여 영광을 누리는 이야기이다. 고생은 과거길을 떠나기 전부터 줄곧 겪는데, 그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가정이 빈천하다. 경제적으로 빈곤하며 신분이 낮기도 하다. 부모가 없거나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산다. 둘은 정상적으로 서당공부를 할 수 없다. 서당에서 심부름을 하며 뒷글을 배우거나, 아예 서당에 가지 못한 채 양반도령이나 부유층 자제가 글 읽는 것을 바깥에서 따라 배운다. 독선생을 모시고 해도 어려운 과거시험인데, 주인공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 글공부를 한다.

 

두 가지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글공부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타고난 재주로 일반 학동 또는 제대로 글을 배우는 자제들보다 글 실력이 훨씬 뛰어난다. 여기서 행운의 조짐이 보인다. 훈장은 공부가 게으른 학동들을 나무랄 때면 으레 아무개를 좀 본받으라고 하며 가난한 총각을 추켜세운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 다른 학동들의 미움을 사서 구박의 빌미가 되는 것이다. 그 탓에 과거길에 아예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겨우 동행을 허락한 경우에도 온갖 해코지를 다하여 궁지에 몰아넣거나 아예 죽이려들기까지 한다. 이것이 빈천한 선비들이 과거길에 겪는 설움이자 고난이다.

 

거지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이야기는 빈천한 처지가 최악의 상황으로 이야기된다. 이것을 반전시키는 것은 주인공의 강력한 의지이다. 과거보러 가려고 하자 아버지조차 “이놈우 새끼, 상놈의 자석이 어떻게 과거를 할 것이며, 니가 괴거를 한들, 해 봐야 뭐하겠노?”하고 나무라기만 한다. 그러나 죽기로 작정하고 요구를 하여 기어코 과거길에 나선다. 그 결과, 거지아들이지만 주어진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운명을 적극 개척한 까닭에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과거에 급제한다.

 

빈천한 처지가 아니라도 소외된 가족의 자제들은 핍박을 받는다. 정상가족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비정상 가족의 자녀들은 여러 모로 차별을 받는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서모가 데려온 의붓아들이거나, 또는 부모를 잃고 삼촌 밑에서 자라는 조카가 바로 그러한 차별의 대상이다. 서얼들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진사급제 한 의붓아들’ 이야기부터 보자.

 

본처 아들 4형제와 의붓아들이 한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데, 의붓아들은 늘 따돌림을 당하여 설움을 받는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해서 훈장으로부터 늘 칭찬을 듣는다. 과거 길을 갈 때도 4형제는 말을 타고 종놈까지 데리고 여관에서 자고 먹으며 산천구경을 즐기며 가는데, 의붓아들은 거지 행색으로 얻어먹으며 서울까지 간다. 서울에 가서도 붓전이나 먹전, 종이전에서 거지라고 박대해서 과거 보는 데 필요한 문방사우조차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 과거를 보았는데, 글이 시관의 눈에 들어 급제하게 된다.

 

‘고생하여 급제한 사람’ 이야기는 부모가 일찍 주어 작은 삼촌 밑에 의탁해 사는 장조카가 주인공이다. 살림은 모두 자기 부모 것이지만, 삼촌에 의탁해 사느라 마치 머슴 노릇을 한다. 삼촌이 자기 아들은 모두 호의호식하고 서당에 가서 공부를 시키면서, 장조카는 머슴처럼 일꾼으로 부려먹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장조카는 사촌들이 글 읽는데 뒷글을 배우고 어깨너머로 부지런히 글을 읽혔다. 과거 길에 사촌들을 따라 나서려 하자, 삼촌은 “정신이 있나 없나? 공부도 않은 뇜이 무싄 과게로 한단 말고. 나무하러 가라.”고 야단을 쳤지만, 나무하러 가는 척하고 나가서 지게를 벗어던지고 사촌들을 따라나섰다.

 

사촌들은 못 따라 오게 돌맹이질을 해댔다. 돌맹이를 피해 숨었다가 따라가기를 계속하자, 마침내 사촌들이 데리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떼어놓고 갈 작정으로 여염집 새댁을 가리키며 “니 저 여자한테 가가지고 그래 농담하고 그 저지레를(수작을) 하고 오면 덷고 가지. 그러지 않으면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장조카는 여자를 찾아가 거짓으로 말을 붙여 마치 잠자리를 같이 한 것처럼 꾸며댄다. 이를테면 가위를 ‘씹시개’라고 하고, 방석을 ‘하던중방석’이라고 하여 위기를 넘긴다.

 

시골길을 가다가 무를 뽑는 여자를 보고, “니 가가지고 젖 만치고 입 맞추고 무시(무) 얻어가 오몬 덷고 가지 그란하몬 안 덷고 간다.”고 했다. 장조카는 무 뽑는 일을 거드는 척하다가 눈에 흙이 들어갔다고 하자, 여자가 눈을 들여다보며 입으로 불어 주었다. 멀리서 보기에 꼭 껴안고 입맞춤을 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무를 얻어 와서 사촌들을 주자, “앗따, 니 언간하다.” 하면서 하는 수 없이 한양까지 동행을 했는데, 과거는 장조카가 했다.

 

고난을 겪는 주인공이 슬기와 재치로 위기를 넘기기도 하지만, 우연한 행운이 닥치거나 타고난 능력이 인정되어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기도 한다.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길장가 들기 놀이’이다. ‘길장가 들기’는 총각들 여럿이 장거리 나그네 여행을 할 때,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하는 하나의 장난이다. “앞에 서는 사람이 재죽을(발걸음을) 띠가(떼어) 가만 저어서 할마이가 니러오던동, 뭐 아아 업은 여자가 니러오던동, 처자가 니러오던 동 마 닥치는 사람이 전부 마느래 하기” 하는 놀이이다. 따라서 길장가 들기는 우연성에 의한 놀이이자 운명적 인연성이 강조되는 놀이이다. ‘길장가 든 가난한 총각’ 이야기를 보자.

 

홀어미 밑에서 자란 가난한 총각이 양반 자제들을 따라가며 심부름도 하다가 수원 가까이 가서 길장가들기 놀이를 하게 되었다. 부잣집 자제들은 지팡이 짚은 할머니, 아기 업은 아주머니들이 길장가 대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제일 나중에 덤으로 길놀이를 하게 된 가난한 총각 차례가 되자, 앞에서 사인교를 탄 규수가 나타났다. 길장가 사상 최고의 행운을 만난 셈이다.

 

설화의 서사구조가 지닌 대립성의 연쇄에 따라 불행이 행운이고 행운이 불행이 된다. 따라서 동행들은 가난한 총각의 행운에 화가 나서, “이늠의 자석, 가다가 질장개를 니가 젤 잘 들었이이, 니는 여게 있거라. 술 한 턱 안 내면 니는 못 간다.” 하구선, 버드나무에다 새끼줄로 묶어놓고 달아나 버렸다. 가마를 타고 가던 규수가 잠결에 꿈을 꾸고 계시를 얻어 버드나무 밑에 가서 총각을 구해 준다. 규수는 정승 딸로서 외가에 가는 길인데 마침 술과 떡을 선물로 가지고 가던 차라, 술 한 병과 떡 한 당새기를 주면서 “친구들에게 한 턱 내고 과거나 잘 보시라.”하며, 자기 이름을 손수건에 적고 반지를 빼어 주었다.

 

길장가 들기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인연이 맺어지는 운명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장가가 실제 장가로 연결되는 까닭이다. 남녀의 인연이 운명적으로 맺어지는 상황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길장가 들기를 하지 않은 경우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가난한 총각이 부잣집 도령들의 위협으로, 하는 수 없이 목화밭에서 무명을 따고 있는 처녀의 손목을 붙잡고 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처녀가 총각의 말을 들을 까닭이 없다. 총각은 “내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데 큰애기 손목을 잡고 오면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하니, 한번만 잡아주시오.”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정을 한다. 그러자, 처녀가 “잡기만 하겠느냐고. 당신 배필도 돼 줄 테니, 절대 성공해갖고 과거 시험 잘 봐서 내려오라.”고 하는 뜻밖의 격려까지 해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과거 급제를 하고 마침내 부부가 된다. 동행들이 가난한 총각을 핍박하며 희롱하기 위한 수작으로 남녀 사이의 내외 금기를 깨뜨리게 하는데, 결과적으로 길장가와 같은 놀이 구실을 하는 셈이다.

 

이 유형의 설화는 구체적 상황과 사건이 다르게 전개되어도 전체적인 서사구조는 일정하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사건의 구체적 내용까지 거의 일치하는데, 그것은 운명을 바꾸는 중요한 반전의 계기가 된다. 그러한 결정적인 계기는 한양에 도착해서 동행들이 가난한 총각에게 배를 따오라고 하는 데서 마련된다. 그 배나무는 공교롭게도 모두 정승댁 마당에 있는 배나무이다. 그리고 총각이 배를 따다가 발각되는데, 정승은 전후 사정을 듣고 용서하는 것은 물론,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배를 한 바구니 들려서 돌려보낸다.

 

이때부터 부잣집 서생들은 기가 꺾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과장에서 가난한 총각은 시험을 잘 치르고 급제한다. 정승이나 정승딸이 시험 답안을 가르쳐주어서 그렿게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총각은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은 물론, 귀한 규수를 배필로 얻고 정승댁 사위까지 되어 당대 선비들이 꿈꾸는 모든 소망을 일시에 이룬다. 조선조는 가부장체제라고 했지만, 설화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대가집 처녀에게 장가들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민중들에게 과거급제는 일거에 모든 꿈을 이룰 수 있는 초월적 소망이자 신성한 통과의례이다. 실제 과거제도는 그러하지 않았지만, 설화에서는 과거 응시에 빈부와 반상의 차별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것이 민중이 생각하는 과거제의 민주성이다. 따라서 과거시험이야말로 사회적 신분차별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능력 검증 시험이자 기회균등의 등용문이었다. 오늘의 고시제나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고시제의 비중이 크고 또 이 제도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과거제의 뿌리와 만난다고 할 수 있다.

 

과거길의 풍속사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풍속 하나는 과거길에 선비들이 제각기 뿔뿔히 가는 것이 아니라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동행한다는 점이다. 그런 조건을 갖춘 까닭에 각종 놀이와 장난이 가능하다. 젊은 선비들이 또래끼리 걸어가며 오랜 나그네 생활을 재미나게 하기 위해 ‘길장가 들기’ 놀이를 하게 된다. 상당히 기발한 놀이인데, 특히 과거 설화에서 이 놀이가 문제되는 것은 가난한 주인공을 크게 성취시키기 위한 반전 계기로 삼기 위한 것이다. 길놀이는 우연성을 원리로 하는 놀이 법칙을 운명적 인연으로 전환시키는 데 극적 반전의 구실을 하는 데 효과적이다.

 

풍속 둘은 한양의 정승댁 뜰에 있는 배나무의 배를 따오는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인공에게 고관대작의 정원에 잠입하여 배를 따오게 하는 억지나 모험이 아니라, 한양에서 내로라 하는 재상가에서는 정원수로 으레 배나무를 길렀다는 사실이다. “서울에 가이 큰 정승의 집에 큰 사당도 좋고 다 좋은데, 마 큰 배나무가, 연당 안에 별당 안에 큰 배나무가 배가 있는데, 배가 주렁주렁 열렸거든. 하고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전통 정원수로서 배나무의 수종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배나무는 봄에 깨끗하고 정갈한 흰 꽃을 가지가 덮이도록 피운다. 따라서 배꽃은 깨끗한 이미지의 선비정신을 상징한다. 사과나 복숭아처럼 시지 않은 시원한 맛을 내는 배의 맛 또한 다른 과일과 구별된다.

 

지금 우리 정원에 배나무가 증발된 것은 일본식 정원을 만들면서 향나무를 심은 탓이다. 향나무에 기생하는 병원균이 배나무에 옮겨가 붉은별무뉘병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하회마을이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이화촌(梨花村)이라 일컬을 만큼 집집마다 배나무가 마당에 많았다. 향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이화촌 하회마을에서도 배나무가 사라져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외래 수종들이 마치 일본정원처럼 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화 속의 풍속자료를 근거로, 한국의 전통 정원이 일제강점기 이래로 일본 정원에 의해 점유된 채 여태까지 본디 전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3. 과거급제의 인간적 한계와 천지신명의 도움

 

과거길을 다룬 설화에서 이미 주인공이 과거에 급제해서 성취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모두 이루어진다. 게다가 정승이나 시관의 도움으로 사전에 과거문제를 인지하게 되는 과정도 드러난다. 과거의 핵심은 시험문제에 어떻게 답을 써서 급제하는가 하는 데 있어야 하지만, 설화에서는 오히려 과거보러 가는 이야기가 더 핍진하고 풍부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시험문제에 관한 설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험문제에 관한 설화도 사실은 선비들이 과거시험 보러 가는 나그네의 행적 속에서 사전에 노출되게 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나그네를 떠나서 또는 길을 떠나서 과거이야기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난한 선비가 과거길을 가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날이 저물어 불빛을 찾아들어가니 소복한 청상과부가 혼자 있었다. 잠자리에서 정조를 지킬 것을 약속하고 하룻밤 잠자리를 허락받았으나, 젊은 과부를 두고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수작을 걸었다. 과부는 정색을 하고 나무라다가 자기 글에 짝을 맞추어 글을 지으면 동침을 하겠다며, “군지오지 결인연(君之吾之 結因緣)이면”이라 하였다. 선비는 여러 글귀를 제시했지만 맞추지 못하고 날이 새 버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댓글이나 알고 가자고 했더니, “오지귀랑 황천곡(吾之鬼郞 黃泉哭)이라고 했다. ‘그대와 내가 인연을 맺으면 나의 죽은 남편이 황천에서 운다’는 말이다.

 

선비가 과부와 하직하고 길을 가다가 재 꼭대기에서 돌아보니 어젯밤에 잤던 집이 간 곳 없고 바위만 있었다. 한양에 도착해서 옛날에 동문수학하던 벗을 찾아가니 그 아내가 맞이하여 안방으로 불러들이고는 ‘남편이 일찍 죽어 적적하니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선비는 어제 저녁의 글귀를 말하고 댓글을 맞추라고 하였더니, 그 과부 또한 맞추지 못하여 서로 정조를 지킬 수 있었다. 마침 벗의 아버지가 순찰을 하다가 과부며느리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엿듣고 아침에 그 선비를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그 아버지는 대감으로 상시관이었기 때문에 문제의 시를 과거 글제로 내어서 가난한 선비는 알성급제를 했다. 산신령이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과거는커녕 대감댁 과부며느리를 건드렸다가 죽음에 이를 번했다.

 

이 설화는 조동일의 유형분류에 의하면 ‘과거 급제시켜 준 신령’에 해당되는 것인데, 한결같이 주인공이 신령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이야기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는 모두 15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날 수 있다. 위의 이야기처럼, 선비가 산 속에서 저물어 헤매다가 과부로 나타난 산신을 만나 정조를 지키는 가르침을 받고 글제를 얻어 과거에 장원했다는 것이고, 다른 유형은 마을의 당나무를 돈 주고 산 사람이 베려고 하는 것을 과거길의 선비가 노자를 주고 되사서 베지 못하게 했더니, 그 당산신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선비 자신의 학문적 능력이 아닌 신령의 도움을 입어 과거에 합격했다고 하는데, 결국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렵고 “뭐이 돌봐 줘도 돌봐 줘야 돼”라고 하는 것처럼 산신이나 서낭신 또는 선영(先塋)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위의 설화에서 산신의 도움이란 선비에게 두 가지 일깨움을 주는 것이다. 하나는 육신의 욕망에 탐닉하지 말고 정조를 지키라는 윤리적 가르침이며, 둘은 구체적으로 과거의 글제를 알려주어서 과거시험에 정답을 제대로 쓰도록 하는 문학적 가르침이다. 두 가르침은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작동하여 두 가지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 그러나 그 해결의 과정은 동시적이 아니라 순차적이다.

 

하나는 과부가 된 친구부인에게 윤리적 가르침을 주어 서로 정조를 지키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구한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이다. 그것은 과거 길에 산 속에서 길을 잃거나 날이 저물어 죽음의 위기를 맞았을 때, 산신이 나타나 도움을 준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 도움은 남녀 사이의 정조를 지키겠다는 약속 위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선비의 남성적 욕망 때문에 약속을 어기게 만든다. 산신은 이러한 상황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글을 지어 탐욕을 나무라고 앞으로 일어날 두 가지 상황에 대비할 가르침을 준 것이다.

 

둘은 산신이 윤리적으로 일깨우기 위해 제시한 글이 곧 과거의 글제가 되도록 하여 선비의 목적인 등과를 결정적으로 도와준다. 글제는 이야기 각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그 내용과 형식이 거의 같다. 위와 같이 “君之吾之 結因緣”의 댓글로 “吾之鬼郞 黃泉哭”이라고 칠언절귀로 주고 받거나, 또는 “금야결가연(今夜結佳緣)이면? 고랑곡황천(古郞哭黃泉)”이라고 오언절귀로 주고 받는다. 또는 “신랑 영어차지(新郞迎於此地)이면? 고랑 곡어황천(古郞哭於黃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선비나 대감댁 과부며느리나 모두 이 글의 짝을 맞추지 못한다.

 

이야기에서는 “신령이 지은 건께 못 채우제”라고 한다. 신글은 사람이 대를 맞추어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글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경전에나 문집에 없는 글귀이자 아직 아무도 짓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글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작 능력이 없으면 제대로 대구(對句)를 맞출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에 급제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이미 있는 글을 외우거나 기억하는 정도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마치 신글인 것처럼 새로운 문장을 창작할 만한 역량이 있어야 급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과거설화는 가난한 선비가 산신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하도록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 같지만, 단순히 신조(神助)를 말하거나 가난한 선비의 성취를 말하기 위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에 녹을 먹는 관리가 되려면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사실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관리로서 윤리의식이 있어야 하며 욕망을 자제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둘은 그러한 지식과 경험을 실천하여 실제로 백성들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은 학문적 역량이나 문장력이 기존 지식을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창조적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가난한 선비는 자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산신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한 것 같지만 위의 세 역량을 모두 갖추었다. 첫째 윤리의식은 산 속에서 과부로 변신한 산신을 만나 배운 것이고, 둘째 지식의 실천은 대감의 과부며느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주어서 정조를 지키게 했으며, 셋째 신글로 배운 문장력을 과거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산신의 도움은 타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한 인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역량을 서당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과거길에 산신을 만나서 배웠다는 사실이다. 드러내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이 설화가 말하는 숨은 진실 가운데 하나는 집이나 절간에 들어앉아서 글을 읽거나, 서당에서 훈장으로부터 글을 배워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고 배운 대로 실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길에 나선 선비의 능력과 행실은 예사사람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길을 가다가 산 속에서 날이 저물어 위기를 맞이하는가 하면, 잠자리를 제공한 여성과 약속을 하고서도 기어코 몸을 탐닉하는 행실은 예사 사내들이나 다르지 않다. 이러한 수준의 범부가 산속에서 하룻밤 산신의 가르침을 거치자 윤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나게 된다.

 

나그네가 되어 과거 길을 걸어가면서 서당과 경전 속에서 만날 수 없었던 하늘과 땅을 만나고 신령한 스승까지 만난다. 훌륭한 배움의 책은 경전이 아니라 천지자연이며 실질적인 깨달음은 서당이 아니라 길 위에서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연과 신령의 가르침은 나그네로서 길을 가는 동안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생명을 살려줌으로써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이 두 번째 유형의 신조에 의한 과거설화이다.

 

선비가 과거 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 큰 정자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돈이 필요해서 이 나무를 목수에게 팔아서 베어지게 될 위기에 이르렀다. 선비가 보기에 나무가 참 좋고 베기가 아까워서 노잣돈을 털어 목수에게 나무값을 치르고 나무를 살려두었다. 그러고 길을 가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나무의 신령이었다. 목신은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 선비를 과거에 급제하도록 글제를 수집하였다. 글제를 가르쳐 주면 뽑히기는 할 것 같은데, 선영(先塋)을 모시지 않아서 벼슬은 하지 못할 처지였다. 목신은 선비를 시켜 위선(爲先) 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선비는 묘를 명당으로 옮기고 이듬해 봄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잘 살았다.

 

이 유형에 속하는 설화로는 이 밖에도 ‘당산신의 도움으로 과거 급제’, ‘표씨의 시조’ 등이 있다. 이번에는 산신이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선비가 베어질 위기에 처한 당나무나 정자나무와 같은 거목을 살려주었더니, 그 나무의 신령이 노인이나 총각으로 나타나서 선비의 과거급제를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도움의 원인은 선비의 자연생명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나무도 한 생명으로서 지키고 가꿀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암시적으로 갈무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동물보은담에 대해서 식물보은담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동물보은담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같은 식물도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는다는 생태학적 공생관념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 문제는 목신의 도움만으로는 급제해서 벼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목신이 선비와 함께 한양에 이르러 과거에 출제될 글제도 여러 모로 알아보고 과거에 응시한 선비들의 동태도 조사해 보니, 이 선비는 글제를 가르쳐 주어도 급제하기도 어렵고 벼슬자리에 등용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다른 선비들과 달리 선영신이 도와주지 않고 있는 점이다. 다른 선비들은 선영신이 도와주기 때문에 과거길이 열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목신이 나서서 도와주어도 선영신이 돕는 선비를 당할 수 없다는 뜻이고, 둘은 선영신을 잘 모시지 않고서는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목신과 선영신 가운데 신격의 우위가 상대적으로 드러나며, 인간으로서 자기 조상신을 섬기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목신의 중요한 기능은 그러한 사실 곧 선영신을 잘 모셔야 과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점이다. 목신의 가르침에 따라 선영을 위해 한 일은 구체적으로 풍수를 모셔다가 조상의 묘를 명당에 모신 것이다. 풍수지리설의 명당발복론과 연관되어 있다.

 

묘를 “잘 씨고는 그 이듬에 봄으 과거 보로 오라고 그리서 와 갖고는 그때에 과거해서 잘 살었다고” 하거나, “당산신이 일러 줘가지고 거그다 묘를 쓴 뒤에야 삼년 후에 과거를 과연 봐가지고 그분이 과거를 했어요.” 한다. 묘를 쓰고 금시발복한 경우도 있지만 삼년 뒤에 발복한 경우도 있다. 결국 위선 사업이나 선영신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조상을 명당에 모셔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성취하려면, 선비의 개인적인 학문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산신의 도움이나, 목신과 같은 자연신과 선영과 같은 조상신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글공부에만 빠진 편벽된 선비가 아니라, 산신과 서낭신, 풍수지리, 조상신 등과 같은 천지신명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은 융통성 있는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야 훌륭한 목민관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4. 불운한 선비의 과거급제와 숙종대왕의 도움

 

과거설화의 선비들은 모두 불행하고 불운하다. 집이 가난하고 신분이 미천하기 일쑤인데다 불운까지 겹치기 일쑤이다. 선비는 오직 글 읽는 맛으로 사는데, 아무리 글을 읽어도 과거와 거리가 멀다. 평생을 글공부하는 데 받쳤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름 없는 선비로 늙어간다. 아내는 살림살이를 꾸리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삯바느질하고 빨래품 팔며 온갖 수난을 다 겪는다. 그래도 글 읽는 남편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희망은 늘 희망으로 남아 있을 뿐 실현될 기미가 없다. 그야말로 불운한 선비집안의 암울한 생활 모습이다. 여기에 빛을 던져주는 것이 숙종대왕 야행이다.

 

숙종대왕이 야행을 하다가 오두막집에서 밤 늦도록 글 읽는 소리가 나길래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방 문이 열리더니 부인이 글 읽는 방으로 들어가시라고 하면서도 워낙 방이 추워서 들어가시라 말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선비는 글에 넋이 빠져서 손님도 알아보지 못하고 글만 읽었다. 한참 기다렸더니 책을 덮고서 “손님 어한(禦寒)하시려고 들어오셨는데 방이 차서 한데 같습니다.” “괜찮다구. 근데 글을 많이 읽었걸랑 과거두 좀 보지 왜 글만 읽느냐구?” “과거를 보려니 뭐가 있어야 과거를 보지요? 못 봅니다요.” “그렇지만 과거를 보라.” 하고 일어서는데, “무와불입지(無蛙不入地)”라고 하는 글을 써서 손님에게 주었다. ‘개구리가 없어서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글인데, 숙종이 글을 잘 하는 데도 처음 보는 글이었다.

 

숙종이 다음날 조회가 끝난 뒤에 신하들에게 ‘무와불입지’ 글뜻 풀이를 의뢰했다. 아무도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떤 신하가 어느 귀퉁이 책을 먼지 털고 보니, ‘돈이 없어서 과거보러 가지를 못한다’는 뜻인데, ‘엄동설한에 학이 머물 곳을 찾다가 개구리를 물어주고 땅을 얻었다’는 우화가 근거라는 사실을 알아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숙종이 그 뜻을 알고 불시에 과거를 보도록 하고는 ‘무아불입지’라는 글제를 냈다. 다른 선비들은 처음 보는 글이라 뜻을 알지 못했는데, 그 선비는 뜻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과거에 급제했다.

 

전형적인 숙종대왕 야행설화 유형 가운데 하나이다. 으레 밤늦도록 글 읽는 선비는 가난하다. 그 아내는 치외법권처럼 남편의 글방을 오롯이 지켜볼 따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하면 공부를 열심히 해도 등용의 길이 막히고 과거조차 볼 길이 없다. 능력 있는 인재보다 집안 좋은 인물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가난하면 아무리 글을 잘 해도 도무지 과거에 응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 노자도 없으려니와 지필묵을 갖추기도 어려운 까닭이다. 그래서 영문 모르는 숙종이 자꾸 과거 보기를 권하자 ‘무와불입지’라는 글귀를 적어 준 것이다. 숙종이 이 글뜻을 알고 별과의 글제로 낸 덕분에 마침내 과거에 성공한다. 전적으로 숙종의 도움에 의한 결과이다. 선비의 가난한 처지를 돕고 숨은 인재를 발탁하려는 숙종의 뜻이 널리 공감을 얻는 대목이다.

 

충청도 선비가 글을 잘 하는 편인데도 과거를 보면 번번이 낙방이었다. 열 번째는 노자가 없어서 아내 머리를 깎아 팔아왔지만 또 낙방했다. 아내를 볼 면목이 없어서 동대문에 올라 목을 매고 죽으려 하는데, 야행하던 임금이 내력을 거듭 물어서, 하는 수없이 사정을 말했다. 임금이 ‘씨아’를 운자(韻字)로 내며 글을 지어보라고 하자, “쌍룡이 상전백운기(雙龍相戰白雲起)” ‘두 용이 서로 싸우는데 흰구름이 일어난다’ 하고, 이어서 “백운지처에 낙중성(白雲之處落衆星)” ‘흰구름 떠 있는 하늘에 여러 별이 떨어진다’고 지었다.

 

임금이 내일 별과가 있으니 꼭 과거를 보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다음날 사대문에 별과 방을 보고 과장에 들어가니 문제의 운자가 ‘씨아’였다. 다른 선비들은 처음 보는 운자라 글을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이 선비는 어제 저녁에 지은 글이라 그대로 옮겨 썼더니 장원급제가 되었다.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다가 용상을 쳐다보니 어제 저녁에 만난 분이었다.

 

야행하던 임금을 숙종이라 밝히지 않은 경우이다. 이 설화는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한 가난한 선비가 목매기 직전에 구해내서 별과로 급제시킨 이야기인데, 그 과정에서 선비의 문장력과 학문적 역량을 분명하게 검증하고 확인하는 대목이 있다. 임금이 가난한 선비라고 해서 그냥 덜컥 특채하거나 과거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벼슬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임금이라고 하여 인사절차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등용하지 않았으며, 동정심만으로 인재를 발탁하지도 않았다. 요식행위라도 공식적인 절차를 꼭 밟아서 공신력을 확보했다. 그래서 별과가 필요한 제도였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씨아’를 글의 운자로 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비가 운자에 맞게 씨아를 소재로 독창적인 글을 지었다. 그런데 이 운자를 별과의 글제로 내자 다른 선비들은 아무도 적절한 문장을 짓지 못했다. 운자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데, 내로라 하는 선비들은 모두 글을 짓지 못하고 낙방하게 되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운자’이기 때문이다. ‘씨아’는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는 예사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경전만 읽어서 공부한 대가집 자제들은 씨아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둘은 ‘씨아’와 같은 백성들의 살림살이와 직접 관련된 사실들을 제대로 알아야 훌륭한 목민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전의 글귀나 동어반복하고 기존의 문장이나 암송해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목민관 구실을 하기 어렵다. 충청도 선비는 글만 읽은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 씨아를 돌려 무명의 씨를 골라내고 명을 타서 솜을 만들어 실을 뽑는 이치까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선비들이 등용되어 관계로 나가야 백성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전을 암송하고 관념적 문장을 규범적으로 짓는 사대부집안의 선비들보다 가난한 시골선비들이 더 목민관다운 자격을 갖추었다는 사실까지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해남의 가난한 선비가 좌수별감 밑에서 늘 억울한 일을 당하며 살 수 없어서, 옥수수를 쪄서 짊어지고 임금님을 알현하려 한양으로 갔다. 남산공원에 가서 보니 옥수수가 다 상한 까닭에 임금님을 뵐 수 없게 되자, 앉아서 엉엉 울었다. 야행하던 숙종이 ‘어떤 놈이 우는가’ 싶어 가서 전후사정을 물어보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숙종은 선비가 불쌍해서 덕수궁 안에 깃발에 쓰인 글자를 ‘돌방아 연자’로 가르쳐 주면서 내일 와서 맞추면 좌수별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날 덕수궁을 찾아갔다. 숙종대왕이 보니 어제 그넘이 왔길래, “저기 저것이 뭔 자냐?”하고 물었더니, “뺑뺑이 연자요.”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숙종이 화가 나서 “옛끼놈! 좌수별감은 고사하고 맞아죽을 감이다.”하고 내보냈다. 낙담한 선비가 울며 가다가 한약방 주인을 만나 내력을 묻길래, 별시에서 떨어진 이야기를 했더니, 함께 과장으로 가자고 했다. 약방 주인은 과장에서 숙종이 묻는 말에, “서울서는 돌방아 연자라고 하지만 강진 해남에서는 뺑뺑이 연자라고도 합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자 숙종이 아까 그놈 대답도 옳다는 생각이 들자, 해남 선비를 불러 좌수별감을 시키고 한약방 주인은 진사를 시켰다고 한다.

 

숙종대왕 야행은 결국 가난한 사람과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숙종이 가난한 선비를 도우듯이 억울한 선비도 도와준다. 숙종이 등장함으로써 이야기는 반전이 이루어진다. 숙종을 비롯한 임금은 절대왕권을 행사하는 전제군주로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는 까닭이다. 가난구제와 억울한 일을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보람이며 행복이다. 그것은 곧 사회적 약자들의 공동선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숙종은 지금까지 인류의 가장 오랜 매체인 설화를 통해 민중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지금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은 기득권을 옹호하느라 이런 보람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권력은 재벌을 옹호하고 재벌은 권력을 지원하며 공생하는 가운데 기득권을 특권화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원한을 사고 시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다.

 

가난한 선비는 글이라도 많이 읽었지만, 억울한 선비는 사정이 억울할 뿐 글이 받추어 주지 않는다. 따라서 억울한 사정을 듣고 숙종이 도와주기 위해 미리 답까지 가르쳐 주고 별시를 보도록 했지만, 선비는 아주 단순한 답조차 기억하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여 숙종에게 쫓겨난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잊어버릴 수 없는 수준의 단순 명쾌한 답이기에 더 어떻게 대책을 세울 방법이 없다. 자기 잘못으로 천우신조의 기회를 놓친 까닭에 그 억울함이 남다르다. 남의 탓에 억울한 것을 해소하려 하다가 결국 자기 탓에 억울한 일을 겪게 된 것이다.

 

억울한 것만 생각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다. 그렇다고 해서 억울한 이야기가 억울하게 끝을 내는 법은 없다. 이야기는 여기서 새로운 반전이 이루어진다. 만일 반전이 없다면 설화라 할 수 없고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문학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도 없다. 반전의 주체는 제3의 구원자이다. 숙종이 아닌 제3의 인물이나 다른 응시자가 선비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해결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다른 응시자는 선비의 정보로 자기가 정답을 맞추어서 합격을 하는 것은 물론, 실수한 선비도 정답을 맞춘 것처럼 변명하는 재치를 발휘한다.

 

이를테면 ‘돌방아 연자’를 지방에 따라 ‘뺑뺑이 연자’라고도 한다는 식이다. 따라서 시골에서 온 선비로서는 당연히 뺑뺑이 연자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틀린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형식은 여러 설화에서 두루 드러난다. 서울 사투리로 말하면 ‘비둘기 구(鳩)자’요 시골 사투리로 말하면 ‘또두락 구자’라고 하거나 ‘솔개 연(鳶)자’인데, 비둘기가 근처에서 푸드득하고 날아가자 ‘푸드드기 연자’라 한다. 그 자체로 온전한 답이 아니지만, 지역에 따라 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논리를 수긍한 숙종은 두 사람 모두 합격시킨다. 전혀 다른 답을 했는데도 사투리를 인정해서 합격시킨 것은 기막힌 논리이다. 왜냐하면 시골 선비를 시골선비답게 인정하고 특별히 우대한 까닭이다. 지역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물론 시골인재는 서울인재와 다르게 역차별하여 우대해야 한다는 보기를 보여준 셈이다.

 

숙종대왕이 어려운 처지의 선비를 도와주어 답을 가르쳐주고 별시나 별과를 보았는 데도 선비가 모자라고 더덤하여 엉뚱한 답을 말해 문제되는 이야기는 이밖에도 별도의 유형으로 널리 전승된다. ‘숙종이 가르쳐준 과거답안 잊은 사람’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런 유형 가운데에는 숙종이 가난한 선비에게 병풍에 그린 그림을 ‘매가리’라고 가르쳐 주었지만, ‘왜가리’라고 답해서 낙방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그 사실을 안 다른 선비가 과장에서 역시 왜가리라고 답하면서, 까닭을 묻는 숙종에게 “큰 놈은 매가리고 작은 것은 왜가리라고 하는데, 병풍에 그린 것은 작은 것이므로 왜가리”라고 변명한다. 그러자 숙종이 가난한 선비의 답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판단하여 두 사람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답을 편벽되게 고정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답이 융통성 있게 존재하며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단답형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인물을 등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은 숙종의 성찰적 태도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정확한 답을 근거로 가난한 선비를 떨어뜨렸지만, 뒤늦게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판단을 번복하는 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제군주가 자기가 내린 판단과 결과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의사를 번복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요즘 권력자들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숙종은 성숙한 인간이자 포용력 있는 군주로서 대왕칭호를 받을 만하다.

 

셋은 가난한 선비 덕택에 답을 알고 과거에 급제하게 된 다른 선비의 공정한 태도와 슬기로운 능력이다. 낙방한 선비로부터 시험답안을 알아냈으면 자기나 맞추어서 합격하고 말기 쉬운데, 이 사람은 그 선비의 오답까지 거론하면서 기어코 두 사람이 함께 급제하도록 하는 슬기를 발휘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글을 정확하게 아는 것보다 목민관으로서 더 긴요한 자격을 갖추었다. 은혜 입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알 뿐 아니라, 수렁에 빠진 상황을 재치 있게 수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설화는 비정상적인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온전한 인재 발탁에 관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전라도 선비 두 사람이 사촌간인데 태학관에서 밤늦도록 글을 읽었다. 숙종이 야행하다가 서울 장안에서 이 방에만 불이 켜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았다. 기미를 살피니, 글을 한참 읽다가 종제가 형에게 자기 장가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두 해와 관련된 이미지로서 빛, 밝음, 뜨거움, 붉은 색, 불 등을 나타낸다. 이처럼건국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강림할 뿐 아니라, 이름이 제각기 다르되 하늘의 해를 상징하는 뜻을 지녔다고 하는 점에서 모두 같은 존재이다. 결국 건국시조의 이름은 신시고국,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까지 한울님 곧 해를 상징하는 뜻을 지녔다. 그러므로 그 동안 건국시조를 일컬어 천손강림이라 했는데, 천손이 아니라 사실은 천제 자체인 해님을 상징한 존재라고 해야 더 적절하다.

 

그 뿌리는 신시고국의 시조 아버지인 환인에서부터 비롯된다. 환인은 ‘환한 님’, ‘하느님’, ‘밝은 님’을 나타내는 말인 까닭에 ‘태양’ 곧 ‘해’를 뜻하는 것으로 일찍부터 추론되어 왔다. 따라서 환인 = 천제 = 제석은 같은 대상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어떤 세계관에 따라 어떤 소리값 또는 상징을 끌어오고, 그것에 따라 주님, 하느님, 아버지, 여호와, 야훼, 알라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환인을 일컫는 ‘천제’는 곧 상제님이자 하느님이며, 물리적 실체와 관련해서는 태양 곧 해일 수 있다. 그러므로 환인은 사실상 천제이며 태양신으로서 하느님을 일컫는다.

 

하늘과 해는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한정되는 실체나 상징물이 아니다. 세계 전체가 공유하는 대상이자 신격이다. 이런 인식으로 보면 해님인 한울님의 건국은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환웅의 신시고국은 바로 인간세상 전체를 다스리는 나라를 상징한다. 따라서 환웅천왕은 세상에 머물러 살면서 이치로서 교화를 한 까닭에 재세이화(在世理化)했다고 한다. 이때 ‘재세’의 세상은 국가의 범주를 넘어서는 인간세상을 포괄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울은 인간세상을 아우르고 있는 우주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

 

고조선 이전의 고대에는 건국시조를 천제 곧 한울님으로 인식했고 그 구체적인 실체 또는 상징을 태양 곧 ‘해’에 둔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미지가 한층 구체화되어 마침내 부여에서는 건국시조가 천제로서 ‘해모수’ 곧 ‘해’로 나타나고 고구려 또한 해의 후손으로 인식하여 동명왕으로 일컬었기 때문이다. 해의 실체를 해의 다양한 이미지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일컬은 것이 곧 건국시조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시고국 이래 나라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건국시조를 하느님 곧 해로 인식하는 세계관적 정체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곧 건국이 하나의 나라를 세우거나 한 겨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 또는 인류사회 일반으로 인식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신시고국 시조인 환웅이 실제로 하늘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며 ‘홍익민족’이 아닌 ‘홍익인간’의 이상을 추구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홍익인간은 배달민족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환인과 환웅이 한울님으로서 인간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식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자기 국가를 곧 세계나 우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특정 국가나 민족의 지도자로서 시조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류의 지도자로서 한울님을 인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다른 나라에 다른 한울님, 곧 다른 국가에 다른 천제나 천왕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건국시조를 천제이자 한울님, 곧 해로 인식한 까닭은 단순히 건국시조가 아니라 세계 수립자이자 세상의 지도자로서, 한울의 중심 곧 우주를 밝히는 태양이라 여긴 데 있다. 세계 창조의 주체이자 우주생명의 근원을 태양 곧 해님으로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건국시조는 모두 해를 일컫거나 상징하는 말로 호명되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기록에는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나라에 등장하여 착종을 보이기도 한다.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부여의 시조 해모수와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 고구려의 동명왕본풀이에 해모수가 천손으로 등장하는데 단군이 해모수와 같은 인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록을 보자.

 

단군기(壇君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서하에 있는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 하였다”고 했는데,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사통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고 했다” 하므로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일 것이다.

 

하백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은 사람은 단군과 해모수 두 사람이다. 하백녀를 중심으로 보면 단군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은 부루이고, 해모수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은 주몽이다. 기록에는 부루와 주몽을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어머니 하백녀는 같고 아버지가 단군과 해모수로 다르다.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다. 일연의 설명이 잘못된 셈이다.

 

그러나 일연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보면, 윤내현의 해석대로 ‘단군과’ ‘해모수’는 같은 인물이다. 부루와 주몽 형제의 아버지가 같다면 그를 낳은 단군과 해모수는 사실상 같은 인물이다. 다른 기록에도 단군과 해모수가 모두 ‘부루’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삼국유사 ‘북부여’조에는 해모수가 부루를 낳았다고 하고,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 보면, 단군이 부루를 낳았다고 한다. 두 기록을 옮겨보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한 뒤에 스스로 왕을 칭하였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칭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고 해(解)로써 성씨로 삼았다.”

 

단군본기(檀君本紀)에 이르기를, “비서갑(非西岬)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

 

중요한 것은 천제인 해모수가 강림하여 북부여를 세우고 아들 부루를 낳았고 단군도 아들 부루를 낳았다고 하는데, 부루를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 해모수와 단군은 같은 인물이다. 해모수가 스스로 왕을 칭했으니 단군 왕검과 같은 이름, 곧 보통명사로 본다면 가능한 일이다. 단군이든 해모수든 왕이 부루를 낳았다고 하는 점에서 보면 두 인물은 사실상 왕을 나타내는 동일인물일 수 있다. 문제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단군왕검처럼 나라를 세우고 부루를 낳은 뒤, 성을 ‘해’씨로 하였다는 점이다.

 

해모수는 천제 또는 천제의 아들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그 이름도 ‘해모습’ 또는 ‘해머슴아’를 표현한 것으로서 환인이나 환웅처럼 우리말 소리값으로 밝은 해를 나타낸다. 단군도 박달나무 ‘단’자를 통해서 밝은 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해모수가 그렇듯이 ‘단군도 해의 아들 곧 일자(日子)라는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은 해를 하느님으로 인식하여 단군을 해의 아들로 불렀던 셈이다. 고조선 사람들이 하늘의 상징인 해를 하느님으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환웅족들은 해를 천신 곧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환님’ 또는 ‘한님’으로 부르면서 그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인천제의 후손을 표방하는 한족은 곰족과 범족과 달리 동물토템이 아닌, 천신과 광명을 신앙하는 해토템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환웅이 처음 터잡은 태백산이나 고조선의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의 지명 또한 밝은 빛이나 양지, 해, 아침 등을 뜻한다. 아사달이 곧 ‘아침 땅’을 이르는 한자말 국호 ‘조선’이다. 아사달 조선은 시간적으로 해 뜨는 땅이지만 공간적으로 양지바른 땅을 뜻한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들은 고조선을 밝은 조선이라는 뜻으로 ‘발조선(發朝鮮)’으로 일컬었다. 고조선의 국호가 중국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관자(管子) ‘경중갑(輕重甲)’편에 보면, 고조선의 국호를 ‘발조선’으로 기록해 두었다.

 

백두산이나 백악산, 백산, 태백산 등의 백(白)은 모두 밝은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밝달의 한자 표기를 백산(白山) 또는 백악(白岳)으로 했다. 태백산과 백두산은 큰밝달이며, 백악산 아사달은 아침 햇빛을 받는 양지쪽을 뜻하는 것으로서 ‘밝달 조선’이며 ‘발조선’과 같은 말이다. 바다이름 발해나 나라이름 발해도 발조선의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적통을 이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연호를 하늘의 법통을 잇는다는 뜻으로 ‘천통(天統)’이라 일컬은 사실도 참고할 만하다.

 

실제로 고조선은 발조선 또는 아사달이라 일컬을 만하게 지리적으로 해가 가장 먼저 비치는 동방의 땅이다. ‘아사달’에서 비롯된 국호 ‘조선’은 해가 처음 떠오르는 시점(時點)과 해가 가장 잘 비치는 지점(地點)을 이상으로 추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국호 ‘조선’ 곧 아사달이라는 이름에서도 이미 태양신 하느님을 시조왕으로 삼은 정체성이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고조선족은 하늘과 해, 빛, 아침을 존중하는 민족으로 해석한다. 해를 상징하는 말과 나라이름도 일정한 연관성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부여의 건국시조 성씨가 해씨이자, 우리 민족 최초의 성씨가 해씨라는 점이다. 부여의 시조 해모수, 해부루 부자의 해씨(解氏)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해모수가 곧 해인 것은 천제의 아들일 뿐 아니라, “아침이면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세상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해모수의 행동양식은 곧 아침저녁 해의 출몰과정과 같다. 세상사람들이 일컬은 천왕랑이란 이름도 해를 뜻한다.

 

해모습을 한 ‘해모수’가 햇빛의 밝음을 상징한다면, 그래서 사실상 ‘환한 님’, 환님과 같다면, 해의 뜨거움을 나타내는 ‘해부루’는 곧 ‘해+불’의 음차로서 해의 불꽃같은 열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해부루의 ‘부루’와 ‘부여’의 나라명도 일치한다. “전기 부여는 중국 고문헌에서 ‘부루(符婁)’, ‘불이(不而)’, ‘비여(肥如)’ ‘불이(不二)’, ‘부역(鳧繹)’, ‘부여(扶黎)’ 등으로 기록”되었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 또한 해의 감응으로 태어난다. 주몽은 해부루와 달리 성을 ‘해’씨라 하지 않았지만, 천제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 못지않게 ‘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더 구체화하여 밝히고 있다. 유화부인이 햇빛을 받아서 주몽을 잉태하고 큰 알을 낳았다는 것이 그러한 근거이다.

 

금와왕은 유화를 이상하게 여겨 방 속에 가두어 두었다. 그랬더니 햇빛이 방 안을 비추었다. 유화가 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서 또 비추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들이 만했다.

 

주몽이 천제인 태양신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 관계를 비롯하여 유화의 주몽 잉태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삼국유사에서는 주몽 스스로 천제 해모수의 아들이라 했고, 세종실록에서는 주몽 스스로 천제의 손자라고 한 사실도 중요하지만, 하늘 또는 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주몽이 천제의 아들인가 손자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천제의 후손이자 햇빛 감응에 의해 태어난 ‘아해’이자, 태양신의 표상인 큰 알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금와왕은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버리게 하였으나, 말들이 알을 비켜가고 백수(百獸)가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구름이 낀 날에도 알 위에는 늘 햇빛[日光]이 있어서, 도로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주몽은 천제 해모수 곧 태양신의 아들이자 태양 자체로서 해부루와 같은 존재이다. 주몽도 본디 성은 해모수에 따라 해씨였으나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태어났다고 하여 스스로 ‘고’씨라 하였던 것이다. 해가 높은 곳에 있는 사실을 근거로 고씨라 한 것 같은데, 해씨나 고씨나 모두 천제 해모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일 뿐 아니라 한결같이 태양신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6. 해를 상징하는 건국시조 본풀이 전통의 지속

 

고조선 이전의 신시고국 시조인 환웅의 정체가 밝은 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천제, 천왕의 전통은 부여에 와서 한층 구체화된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환웅은 서로 정체성이 일치하는 존재이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다스렸을 뿐 아니라 천제의 아들로서 천왕을 자처한 것은 해모수와 다르지 않다. 신시건국 본풀이의 전통이 부여건국 본풀이에서 고스란히 이어진다. 부여에서는 해를 생활말과 더 가깝게 나타내서 해모수, 해부루라 하였고 해를 시조왕의 성씨로 삼았을 뿐 아니라, 해의 출몰 양식에 따라 활동하거나 햇빛을 받아서 후손들이 태어나는 등, 시조왕이 해를 상징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한층 생활세계에 맞게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부여와 고구려에서 머물지 않고 신라와 가야에까지 이어진다. 신라의 건국시조 본풀이는 6촌촌장의 출현에서부터 비롯된다. 박혁거세 이전에 신라 건국의 토대를 이루었던 6촌촌장들의 본풀이도 신시고국을 세운 환웅본풀이의 서사구조와 같다. 환웅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강림하여 신시고국을 세우듯이, 6촌의 촌장들 또한 모두 하늘에서 산으로 강림하여 일정한 수준의 공동체국가를 세우고 특정 성씨의 시조가 되며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6촌촌장의 출현은 신시고국의 천왕인 환웅의 출현과정과 같을 뿐 아니라, 산을 무대로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하는 공간적 입지까지 같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환웅족과 사로국 촌장들이 하늘의 해를 천신으로 섬기고 천왕을 시조왕의 상징으로 삼는 같은 민족으로서 역사적 뿌리와 세계관, 천신신앙 등을 공유한 동일문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웅본풀이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촌장본풀이는 신라인들이 고조선의 유민(遺民)이라는 사실을 잘 입증한다.

 

박혁거세 출현과정도 주몽처럼 알로 태어나며 해 또는 빛을 뜻하는 ‘아해’로 묘사된다.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비치고”, “자주빛 알이 있었으며”, 알에서 나온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니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도 맑고 밝았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열쇠말은 번개빛과 자주빛, 알, 동천, 광채, 밝았다 등이다. 자줏빛 알도 해를 상징하지만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도 해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밝히는 왕이라는 뜻으로 박혁거세 또는 불구내(弗矩內)라 일컬은 것이다.

 

세상을 밝히는 존재 혁거세나,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사상의 환웅천왕이나 사실은 같은 사상을 지녔다. 신시고국의 환인과 환웅에서 부여의 해모수와 해부루, 환웅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박혁거세의 세상을 밝히는 사상으로 나아간 것은 한층 하늘의 인식이 ‘해’ 중심으로 구체화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박혁거세를 일컫는 불구내는 붉은 또는 밝은 빛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홍익인간 이념을 해의 기능을 통해 한층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세상을 밝히는 해 또는 붉은 해를 표상하는 언어가 혁거세이다. 김알지 출현과정도 박혁거세와 다르지 않다. 호공(瓠公)이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크고 밝은 빛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있는데, 구름 속에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빛은 궤에서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호공도 박을 뜻하고 밝음을 상징하지만, 시림 또한 태초의 숲으로서 여명을 뜻한다. 닭이 우는 소리도 동이 트는 사실을 알린다. 모두 해와 관련이 있다.

 

크고 밝은 빛이 비칠 뿐 아니라,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있었으며, 그 빛 속에 황금궤가 있었다. 하늘에서 땅에 뻗친 빛은 유화부인을 비추던 빛이나 박혁거세의 자주빛 알을 비추던 빛과 같은 양상인데, 여기서는 빛이 더 다양하다. 하늘에서 내리 비치는 빛과 더불어서 금궤에서 나오는 빛이 어우러진다. 빛을 ‘대광명’이라고 하여 특히 강조했으며, 금궤에서도 빛이 나온다고 했는데, 황금은 그 자체로 번쩍거리는 빛을 상징한다. 빛의 근본은 해 곧 태양이며, 황금빛은 태양빛을 상징한다.

 

해의 상징은 빛이자 붉은 색이고 뜨거움이지만, 형태로는 알이다. 박혁거세와 석탈해는 해의 상징과 더불어 알의 형태까지 갖추었는데, 김알지는 금궤 속에서 아기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중요한 사실은 금궤에서 크고 밝은 빛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광명을 주는 실체는 곧 해인데, 그 해를 상징하는 것이 황금이자 금빛이다. 시조왕의 태양 상징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본풀이에서도 황금알을 통해 한층 구체화된다. 김수로본풀이에서 시조왕은 아예 해를 상징하는 황금알로 출현한다.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땅에 드리워져 있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여진 금으로 된 합이 보여, 그것을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있었다.

 

가락국 수로왕의 출현 이야기를 보면, 마치 박혁거세와 김알지 본풀이를 보는 것 같다. 하늘에서 드리워진 자주색 줄은 곧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이상한 빛이 비추었다거나 자주색 빛이 비추었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그 빛이 비친 자리에 알이나 금궤가 놓여 있었다고 하듯이, 여기서도 자주색 줄이 닿은 곳에 금합이 있었다고 한다. 금합 안에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와 금궤 속에서 나온 김알지를 아우른 셈이다. 금합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로 했다는 사실도 김알지와 같다. 황금에서 비롯된 김씨도 해씨나 고씨처럼 사실상 하늘의 해를 상징한다.

 

더 주목할 내용은 황금알이 ‘해처럼’ 둥글었다는 사실이다. 황금빛이 가지는 태양 상징의 기능을 한층 구체화하기 위하여, 황금알을 예사 날짐승의 알 모양과 구분하기 위해 아예 해처럼 둥근 모양으로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해 모양의 황금알 곧 태양 생명으로부터 가락국의 시조들이 출현한 것이다. 대가야의 시조인 뇌질주일(惱窒朱日)은 천신인 아버지 이비가(夷毘訶)를 닮아서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시조왕의 얼굴모습까지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시조왕은 해 곧 태양신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알에서 태어나고 세상을 밝게 하는 박혁거세의 상징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수로왕을 비롯한 가락국의 6왕들 또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해모수처럼 태양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7. ‘해’로 상징되는 하늘 인식과 자연생명

 

개벽본풀이나 천지왕본풀이에서 하늘은 모든 것의 으뜸이자 처음이다. 하늘의 해는 다른 천체인 달과 별과 더불어 3재론의 한 축을 이루지만, 해를 특별히 하늘의 중심으로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건국본풀이에서는 시조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뿐 아니라 해를 상징하는 존재로 한울님 또는 천제, 천왕으로 일컬어진다.

 

신시를 비롯하여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까지 이어지는 건국시조 본풀이에도 하늘이 중요한 공간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건국시조들이 한결같이 하늘에서부터 강림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흔히들 ‘천손강림’ 신화라고 하는데, 건국시조를 천손으로 인식하여 일컫는 말이지만, 구체적으로 천손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인격적인 존재여서 사람을 낳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천손이란 단지 신성한 존재란 뜻이기만 한가? 라는 등, 그 동안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막연히 신성한 존재로 인식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온 시조의 정체성은 하늘의 세계관적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하늘이 어떤 세계인가 하는 것이 밝혀지면, 천손이라는 개념이 아니라도 하늘에서 내려온 시조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한층 뚜렷할 수 있다. 그런데 시조왕들은 한결같이 하늘의 해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처럼 서술된다. 천손이 아니라 천신, 곧 한울님, 천제, 천왕으로서 해이다. 해가 곧 시조왕을 상징하는 것처럼, 해는 우주생명의 중심이자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생명의 시조로 인식된다. 결국 하늘의 본질은 해이며 시조왕은 곧 하늘에서 내려온 해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제 또는 천왕으로서 하느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환웅천왕의 신시고국, 단군의 아사달 조선은 물론 해모수와 해부루의 부여도 천신으로서 하느님 곧 ‘해’를 숭상하고 시조왕의 이름과 국호까지 해의 구체적 형상과 기능, 또는 시공간적 인식과 관련하여 나타냈던 것이다. 박혁거세 몸에서 광채가 났다거나 알지가 들어 있는 금궤에서 빛이 났다고 하는 것은, 환인과 환웅, 해모수와 해부루, 주몽과 유리, 박혁거세와 김알지, 수로왕과 대가야왕 등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시조왕들은 스스로 해처럼 빛을 발했다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건국시조의 자질은 한결같이 천제나 천왕으로서 해를 상징하는 존재이자 해의 권능을 지닌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해처럼 세상을 밝히는 존재는 그가 누구든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시조왕이다. 해는 하늘을 다스리는 한울님이자 태양신으로서 고대인들의 섬김의 대상이 되었고, 지상에서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훌륭한 지도자도 으레 한울님으로서 천제나 천왕으로 일컬어지고 천체로는 해를 상징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는 늘 섬김과 관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관적 인식 때문에 상고시대 한국인은 ‘해[太陽]’의 공전주기를 기준으로 ‘한 해[年]’를 설정하는 태양력의 역법도 마련하였으리라 추론된다. 이러한 추론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리 민속에는 태양력을 근거로 한 24절기가 있고 동지가 과거에는 아세(亞歲)로서 설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관념은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동지를 작은설이라 한다. 결국 가장 밤이 긴 동지가 일년의 처음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자정이 하루의 처음이고 자방이 방위의 기준이 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동지를 설로 삼았듯이 태양력을 기준으로 한 해를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둘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태양(太陽)을 나타내는 말과 연(年)을 나타내는 말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말 ‘해’는 역법으로서 한 해를 나타낼 때 천체로서 해 곧 태양을 나타낼 때나 꼭 같이 쓰인다. 천체 태양도 ‘해’라고 하고 역법의 연(年)도 ‘해’라고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뜬 달도 ‘달’이라 하고 역법의 달도 ‘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말 해와 달은 천체의 해와 달, 역법의 해와 달을 모두 꼭 같이 일컫는다 이것을 근거로 볼 때 우리말이 성립되던 시기부터 태양과 태음의 두 역법을 함께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우리와 달리 태음력 경우에는 다소 같은 말을 쓰지만, 태양력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말을 쓰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법이 아주 발달했던 중국의 경우도 달의 경우는 천체의 달(月)과 역법의 달(月)을 같이 쓰지만, 해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말을 쓴다. 중국의 한자말은 역법으로 한 해를 나타낼 때는 연(年) 또는 세(歲)를 쓰지만, 천체로서 하늘의 해를 나타낼 때는 일(日)을 쓴다. 일본의 경우도 이와 같다. 영어의 경우에도 한 해를 나타내는 ‘year’와 태양을 나타내는 ‘sun’은 전혀 다른 소리값의 말이자 전혀 무관한 기호의 문자로 표기한다. 서양에서도 태음력을 먼저 썼던 사실은 언어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한 달을 나타내는 ‘month’는 천체 달을 나타내는 ‘moon’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천체> <역법> <천체> <역법>

 

한국어: 해 해 달 달

한자어: 日 年 月 月

영 어: sun year moon month

 

 일반적으로 달과 역법은 일치하되 해와 역법은 불일치하는 현상을 보인다. 따라서 달의 공전주기가 관찰 가능한 대상이므로 태음력을 먼저 사용하다가 뒤에 일년주기의 정확성을 위해 태양력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한다. 적어도 천체의 ‘해’를 뜻하는 말이 해모수 시대에 이미 성씨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고대 한국인들의 하늘 인식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천체를 관찰하여 수립한 태양력의 역법 ‘해’와, 자신들이 숭배하던 신성한 존재 ‘해’를 끌어와 시조의 왕명이나 성씨로 삼은 문화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인의 시조들은 모두 하늘에서 왔다. 하늘의 달나라나 별나라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해나라에서 왔다. 천지인 3재 가운데 하늘이 으뜸이지만 사람도 으뜸이다. 대우주로서 한울님의 실체는 해이자 태양신이다. 소우주로서 한알님의 실체는 알이자 아해로서 해를 닮아서 세상을 밝히는 지도자이다. 대우주로서 하늘과 소우주로서 인간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세상의 길흉사를 모두 하늘이 관장한다. 그것은 환인이 환웅을 지상에 내려보낸 것과 같다. 빛이 주몽을 잉태시킨 것도 이와 같다. 하늘의 말이나 닭이 혁거세와 알지를 출현시킨 매개 구실을 한 것도 그러한 보기이다.

 

세상의 생명과 세계를 주관하는 것은 하늘이다. 세상의 주재자(主宰者)가 바로 하늘이며 더 구체적으로 해이다. 해는 모든 생명의 모태이다. 따라서 인류시조는 물론 건국시조들도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늘이 생명이고 생명이 하늘이다. 우주 하늘은 생명의 태반이다. 하늘생명 해가 세상에 빛으로 내려와서 인간세상을 다스린다. 따라서 시조왕은 한결같이 천제이자 천왕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 곧 하늘굿을 한다. 부여에서는 해맞이굿을 강조하며 영고(迎鼓)라는 이름의 하늘굿을 한다. 고구려에서는 해가 밝아오는 동녘에 모여서 태양신을 섬기는 굿 동맹(東盟)을 한다. 예에서는 노래와 춤으로 하늘을 섬기는 하늘굿 무천(舞天)을 한다. 그러므로 영고의 해맞이굿이나 동맹의 동녘굿, 무천의 하늘굿은 모두 하느님인 해를 섬기는 제천대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늘을 섬기는 제천의식의 전통 속에 해를 숭배하는 천신신앙 또는 태양신앙의 전통이 형성되어 있다. 하늘이 생명이고 해가 생명이라는 것은 자연생명을 말한다. 자연생명은 스스로 개벽하여 세상을 이루고 생명을 창조하였다. 천지개벽은 곧 인간생명의 잉태과정과 같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시조왕은 한결같이 하늘에서 온 한울님 곧 해이다. 해는 만물의 생명원천이자 자연생명의 상징이다. 소우주이자 인간생명 아해와 맞서는 것이 대우주이자 자연생명 해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며 제천의식을 하는 전통은 곧 자연생명을 인정하고 자연생태계를 섬기는 일이다.

 

우주생명은 유기적 실체이다.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며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세상을 밝히는 구실을 한다. 마치 해가 하늘에서 땅으로 비치면서 생명을 낳고 기르며 삼라만상을 생육하여 번성하게 하는 것과 같다. 햇빛에 의존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이 땅의 생명이 곧 하늘이자, 하늘생명이 곧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 대우주와 소우주의 인간은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한울의 생명이다. 한울의 우주생명은 곧 우주생태계를 이루는 부분이면서 전체이다.

 

아해의 생명을 훼손할 수 없듯이 우주생명을 훼손할 수 없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듯이 자연생명과 인간생명 또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하늘로 상징되는 자연생명을 신성하게 섬기는 것이 인간생명을 받드는 길이자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홍익인간 사상은 곧 홍익생명 사상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자 해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고대 제천의식의 하늘굿 전통은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고 섬기는 생명굿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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