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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일곱 단계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10. 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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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영성에 관하여 생각해보기로 한다.
 
미국인 한 중년 부인이 병이 들어 고통이 심해지고 절망하면서 “God is nowhere(하느님은 없다)!”하고 하느님을 원망하였다.
 
병문안 온 믿음이 깊은 딸은 어머니가 적어 둔 글을 “God is now here(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라고 읽었다. 살아가면서 ‘지금 여기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영성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영성이다.
 
힐데가르트(Hildegard 1098~1179) 수녀는12세기 독일의 영성가로서 오늘날 여성 생태주의 영성의 선구자로서 평가되는 사람이다. 그는 창조주 하느님의 생명 영성을 일곱 단계로 삼아 매일매일 삶에서 생명력을 기르는 영성을 수련하고 추구하도록 길을 제시하였다. 우리가 하느님 신앙을 일상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일주일간 창조행위를 하신 것처럼 7단계로 이뤄진다.
 
영성의 일곱 단계는 우리들이 평상시 신앙생활에서 늘 듣고 읽으면서 알고 있는 신앙의 길이다. 그러나 이 일곱 단계를 영성 수련의 지침으로 삼아 영성을 추구하는 삶을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규칙적인 생활로 매일 매일 되새기면서 영성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일곱 단계 영성의 길이 오늘 우리의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개하기로 한다.  
 
(1) 첫째 단계는 마음의 회개단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첫 단계는 회개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첫 말씀으로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다. 잘못이나 죄를 반성한다는 윤리적 의미의 회개는 회개의 소극적 의미이다. 본래 회개의 신앙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등지고 살던 삶에서 다시 돌아서서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잘못을 반성하는 소극적인 것보다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세상적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획기적인 방향 전환’ 즉 ‘Repent(Metanonia)’가 진정한 회개이다.
 
영성 생활을 하려면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그리스도인 영성의 첫 단계이다. 우리는 회개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며,
새 사람이 되며, 다시 태어나게 된다.
 
(2) 둘째 단계는 선한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처럼 혼탁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선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지, 어떤 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사는 일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공동체는 이 세상 속에서 진리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한 14:15-18)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는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엇이 진리의 길인가를 두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어 고아처럼 남겨져 이 세상 속에 마치 목자 잃은 양떼같이 되었을 때에는, 진리의 삶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서 당신을 대신하여 도와주시는 영을 보내주셨는데, 이것이 보호자 성령이다. 보호자(Paraclete)란 말 뜻은 ‘도와주는 자’, ‘격려해 주는 자’ ‘변호해 주는 자’이다. 신자들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우리 안에 계시는 보호자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믿음을 유지하며, 분별력을 갖고 선한 일을 지속하게 된다. 진리의 영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영성, 이것이 영성의 두 번째 단계이다.
 
(3) 셋째 단계는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했다.(필립피 2:3) 겸손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동시에 남의 일을 돌볼 때 기쁨이 충만해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막의 교부(敎父)들은 겸손을 맨 밑바닥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근거를 인식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 생각했다. 인간을 뜻하는 ‘homo’는 라틴어 ‘humus(흙)’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고, 또 ‘humus(흙)’이란 단어에서 ‘humilis(겸손한)’이란 말이 나왔다. 겸손하게 살려는 사람은 자신이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한다.
 
본래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귀하게 된 것임을 인식함으로써 겸손이 시작된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은 교만하여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언제나 맨 밑바닥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근거를 인식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겸손은 비굴함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비굴한 굴욕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말했다. 겸손과 굴욕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다.
겸손이 스스로 하는 자발적인 영성이라면, 굴욕은 억지로 강요된 수치요 비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권세 있는 사람들일수록 겸손하지 못한 것을 많이 본다.
자기 힘을,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싶고 또 자신을 과신하기 때문이다.
권세를 잡으면 하루아침에 바뀌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본다.
권세 잡은 이들의 겸손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오늘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신 권세를 잡고 거만하여져서 제 멋대로 군림하는 이 세상 권세자들을 향한 말씀이다.(로마 13:1) 하느님으로부터 온 권세이므로 제 권세인양 해선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종종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권세자들이 하느님께 복종함으로써 보통 시민들 앞에 겸손 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에서 겸손의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사람관계에서, 가정의 부부관계나 부모 자녀관계에서, 직장의 상하관계에서 권력의 영성이 아니라 겸손의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겸손은 절대자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영성이요 삶의 태도이다. 요즘 적든 크든 있는 대로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특별히 요청되는 영성이라 하겠다.
 
(4) 넷째 단계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사람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은 사람을 사랑하는 영적 원동력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통 이기적으로 사랑을 한다.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할 때도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자기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있다. 모두들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 충족을 위해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나 중심의 이기적 욕망의 사랑이 아니기에, 하느님 사랑의 기반에서만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을 통한 이웃 사랑에 이르는 영성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늘 이기적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의 영성은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 사랑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성, 그리고 이 세계 사람과 만물을 향한 크고 무한한 사랑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사랑의 영성이다.
 
(5) 다섯째 단계는 세상 일로부터 초월하는 것이다.
너무 세상 일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 신앙의 은총을 기쁨으로 누리는 일에 장애가 된다. 두 가지 형태의 집착을 우리는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하나는 세상 일의 성패를 신앙의 성패로 직결시켜, 하느님 복을 세상 복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집착이다. 세속적 기복주의 신앙은 신앙의 타락의 징표이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복을 받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구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복을 구하는 것을 모두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멀리하고 비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오직 세속의 욕망 충족이나 자기야망의 실현과 일치시키려는 것이다.이러한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사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세속에 빠져들어, 신앙의 품위와 판단력을 상실한 채 무한 욕망으로 치닫는 것을 늘 경계할 수 있는 내적인 자기 규범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세속을 초월한 영성이다. 세상 염려와 걱정으로, 세상을 핑계대면서 한탄하고 사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복된 삶의 모습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 선언하셨다.(요한 16:33) 하느님은 이 세상의 한계와 죄악의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좋은 것을 즐기고 기쁘게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세상과 거리 두기 영성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초연하고,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성을 갖는 것이다.
 
(6) 여섯 번째 단계는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세상의 악을 퇴치하기 위한 불굴의 저항을 말한다. 하느님께 하는 이 순종을 목숨을 걸고 하는 것으로 순명(順命)이라고 한다. 명(命)은 하늘의 명령이다. 그 명령에 순종하기에 순명이다. 수도하는 공동체, 즉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가장 중시하는 삶의 덕이 순명이다. 수도자들은 공동체 형제들의 요구에 순명하고 스승과 공동체의 전통에 순명한다. 이 순명의 태도는 공동체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영적 힘이다. 공동체를 경건하고 평화롭게 하는 이 공동체적 순명의 영적 뿌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순명하는 데서 나온다.
 
인간의 소리와 하느님의 소리를 분별력 있게 듣고 들어야 할 소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자신의 뜻과 마음을 접고 순명하는 데서 공동체는 일치가 일어나고 영성이 깊은 능력의 공동체가 된다. 순명의 영성은 단순히 침묵하는 것이 아니요, 다른 이에게 자신을 열고 겸손하게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키는 적극적인 침묵이요, 자신의 본래 뜻과 의도를 사랑의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시켜 가는 것이다.
 
(7) 일곱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창조의 마지막 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안식을 취하셨던 것처럼 우리 신앙은 새 창조를 준비하는 것이다. 새 창조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통해서 시작된다.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에 들어간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의 원리이다. 용서는 집을 나간 탕자를 맨발로 뛰어나가 무조건 받아들이신 아버지의 사랑이다. 용서를 통해 세계 안의 부조리와 인간 사이의 악순환이 풀리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에서 결말 나지 않는 문제를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는 신앙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 내맡김의 신앙이 수동적인 것 같으나 그 이상 적극적인 것도 없다. 자신을 하느님에게 열어두는 믿음의 최고경지이다. 하느님 안에서 쉬고 고요하게 살 수 있는 길이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온전히 일치하는 영성이 일곱 번째 단계 영성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성, 용서의 영성과 일치를 이루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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