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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 ‘젊은 날의 상처, 그 안에 희망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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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1. 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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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단독 인터뷰) 정진석 추기경 ‘젊은 날의 상처, 그 안에 희망 있다’

 

[중앙일보] 2012.01.07

 

“외아들인 내가 사제 되는 것 홀어머니께는 잔인했습니다 ”
힘겨운 청춘들 위한 추기경의 고백 … ‘젊은 날, 나도 많이 아팠습니다

[사진=박종근 기자]
2012년 새해를 맞아 j 가 정진석 추기경을 단독 인터뷰했다. 한마디로 기도와 고백이었다. 전쟁과 상처, 삶과 죽음, 홀어머니와 사제의 길에서 추기경은 절절하게 기도했고, 고독하게 결단했다. 그게 ‘추기경의 젊은 날’이었다. 추기경은 그런 날들을 풀어냈다. 때로는 고백으로 다가왔고, 때로는 기도로 박혔다. 인터뷰 전체를 오롯이 관통하는 추기경의 바람은 분명했다.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와 젊은이들에게 건네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위해 추기경은 기꺼이 ‘젊은 날의 상처’를 끄집어냈다.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을 보면서 북한이 어떻게 변할지 사람들이 제게 묻더군요. 저는 그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리려고 합니다.”

정진석 추기경 문장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명동성당 옆의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집무실에서 정진석 추기경(81)을 j 가 단독 인터뷰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이면서 동시에 평양교구장도 맡고 있다. 정 추기경은 “과거를 거울삼아 보세요. 남북은 믿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남북 문제도 결국 대화로 풀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께 ‘새해 메시지’를 청했다. 그는 “하느님께선 올해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365일을 주셨습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많은 사람의 선익(善益)을 위해서도 쓰십시오. 그럼 그 하루하루가 기쁜 시간이 되고, 그게 모여서 기쁜 인생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정 추기경은 1931년생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기의 현대사를 몸소 지나왔다. “요즘 젊은이들이 힘들어 합니다. 취업난 등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정 추기경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추기경의 ‘젊은 날’을 들려주었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젊은 날의 추기경’이 올렸던 가슴 절절한 기도가 녹아 있었다.

정진석 1931년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4대째 천주교 집안이다. 명동성당 바로 곁의 계성초등학교를 나왔다. 중앙고를 나와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 후에 가톨릭신학대에 입학했다. 30세에 사제가 됐으며, 39세 되던 해(70년)에는 국내 최연소 주교가 됐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2006년 3월 한국인으로선 두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1 정 추기경은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간 후 연락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었다. 외가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명동성당의 복사(服事·미사 등 천주교 예식을 보조하는 사람)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일 새벽 미사에 참석하려면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야 했다. 꼬박 3년간 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명동성당으로 가던 새벽 길, 무섭지 않았습니까.

 “무서웠죠. 사람들이 다들 자는 시간이었습니다. 혼자 수표동에서 을지로를 거쳐 명동성당으로 갔습니다. 겨울에는 길이 안 보일 만큼 캄캄했죠. 전차가 다니는 새벽 5시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찻길 한복판으로 다녔습니다. 어두운 골목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어떻게 3년간 하루도 안 빠졌습니까.

 “열 살이었지만 속으로 생각했죠.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나는 깨어 있다. 사람들이 다들 잘 때, 나는 큰일을 하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자신을 극복하는 훈련이 됐습니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겠죠.”

노기남 대주교와 복사 시절의 소년 정진석(왼쪽 앞).
●왜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힘든 일을 이겨낼수록 어린 저에게 자긍심이 생겼어요. 새벽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는 게 제겐 큰 자부심이었어요. 그 일을 통해 힘이 생기더군요. 힘든 일을 이겨낼 때마다 제 안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하루 한 권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이 귀할 때 아닌가요.

 “맞습니다. 일제시대니까요. 그래서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책을 집에서 밤새워 읽고 다음 날 반납했죠. 그리고 새 책을 빌렸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더군요. 그래서 더 읽었습니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뭔가요.

 “『발명왕 에디슨』입니다. 그때는 주로 위인전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발명한다는 것이 멋져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제 꿈은 ‘발명가’였습니다. 책읽기도 중독이 되더군요. 중·고등학생 때도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었습니다.”

 
한국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탱크.
2 정 추기경은 1950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화학공학과는 최고 인기 학과였다. ‘발명가’를 꿈꾸던 추기경의 꿈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사람을 죽이는 총과 폭탄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발명품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밟으며 그는 “내 삶의 이유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던 날은 주일(일요일)이었습니다. 어디에 계셨나요.

 “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서울 혜화동 성당 앞 로터리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혜화동에 살았죠. 그런데 미아리 쪽에서 국군 패잔병들이 내려왔습니다. 꾀죄죄한 얼굴이었죠.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북의 탱크가 하루 만에 의정부까지 밀고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왜 탱크를 저지하지 못했느냐’고 했더니 ‘우리는 대전차포가 없다. 아무리 포를 쏴도 탱크가 꿈틀하고선 다시 드르르 오더라. 그게 수백 대가 오고 있다. 저지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라디오에선 계속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고 했지만, 저는 그때 패전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만난 패잔병은 사흘을 굶었다고 했습니다. 그 패잔병을 만났던 날 밤에 한강 다리가 끊어졌습니다. 시간을 따져볼 때 그 패잔병은 한강을 건너지 못했을 겁니다.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크죠.”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사흘 만에 인민군 세상이 됐습니다. 들키면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가야 했죠. 저는 숨었습니다. 한강 다리가 폭파돼 피란길도 막혔죠. 석 달간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살아있지만, 내일은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나오는 상황처럼요. 먹을 것도 없고, 이발도 못하니 장발이었죠.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실수로 길거리에 나갔다가 인민군을 만나면 죽거나 끌려가는 거니까요.”

●얼마간 숨어 지냈습니까.

 “6월 25일에 전쟁이 났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13일이 걸렸죠. 그 13일 사이에 들킨 사람은 모두 납북됐습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죠. 26일이 추석이었습니다. 추석 전날 밤에 사촌동생과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왜 정신을 잃었습니까.

 “폭격을 맞았습니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강을 건너오던 국군이 미아리 쪽으로 쏜 포탄이었겠죠. 지붕이 날아갔고,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있던 사촌동생의 배가 터져 있더군요. 전쟁 중 눈앞에서 목격한 첫 죽음이었습니다. 달이 훤한 밤이었죠. 그 주간이 미카엘 천사의 축일이었습니다. 사촌동생의 세례명이 미카엘이었죠. 자신의 축일을 앞두고 죽었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겠죠. 저는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참혹했겠습니다.

 “지금도 그날은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자리가 바뀌었다면 제가 죽었겠죠. 그날 깨달았습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말입니다. 저는 그날 죽었고, 덤으로 받은 삶을 사는구나. 그걸 절절히 느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또 넘기셨나요.

 “그해 12월 20일이었습니다. 다시 피란을 가야 했죠.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으니까요. 서울에 있던 청년들을 모두 창경원(창경궁)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을 편성해 조를 짜 피란을 시켰습니다. 그전에 한강 다리를 끊었을 때는 서울에 남아 있던 젊은이들이 인민군 보충역으로 끌려갔으니까요. 이번에는 인민군에게 병력 보충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거죠. 그날 하루 종일 걸어서 경기도 덕소로 갔습니다.”

●덕소에서 뭘 했나요.

 “남한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강물이 꽁꽁 얼었거든요. 두껍게 언 곳을 따라 남한강에 길이 나 있었죠.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순서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잠들면 얼어 죽는 거였죠. 하루 종일 기다리다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뒤에서 우지직 얼음이 깨졌습니다. 사람들이 강물에 빠져 죽으면서 아우성을 쳤죠. 얼음에 계속 금이 갔습니다. 사람들이 죽는 걸 뻔히 보면서도 서둘러 도망가야 했습니다. 강물에 빠진 사람이 저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내가 왜 안 죽었을까. 내가 저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100%였는데, 왜 죽지 않았을까. 왜 나는 살아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주님, 제 삶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했습니다. 그런 기도를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경북 의성의 산길에선 앞에 가던 사람이 지뢰를 밟았습니다. 여러 명이 죽었죠.”

●전에는 뒤에서 죽고, 이번에는 앞에서 죽었습니다. ‘전쟁 전의 정진석’과 ‘전쟁 후의 정진석’,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우리가 이론상으로는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셨다는 걸 압니다. 이성으로 알죠. 머리로 알죠. 그런데 전쟁과 죽음을 통해 저는 그걸 뼛속 깊이 느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나의 몸으로, 나의 체험으로 몸서리치게 느꼈습니다. 제 생명의 이유라고 할까, 제 생명의 목표라고 할까요. 나는 이미 죽었으니 남을 위해 살라는 메시지를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주교가 됐을 때 어머니 이복순 여사와 함께.
3 전쟁 후 정 추기경은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서울대 화공과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 제한 때문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지원할 수는 없었다. 당시 신학교에선 외아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가 “신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집안 사정을 잘 알던 고(故) 노기남(1902~84·최초의 한국인 주교) 대주교는 “안 된다. 그럼 홀어머니는 누가 돌보느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어찌하셨나요.

 “주교님께 말씀을 드려 달라고 어머니께 부탁했죠. 그걸 통해 어머니의 심정도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제가 그렇게 잔인합니다. ‘주교님께 허락을 받으면 신학교에 가고, 못 받으면 단념할 작정입니다’라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선 뭐라고 하셨나요.

 “그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노 주교님께 가서 떼를 쓰셨습니다. 결국 허락을 받아 오셨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머니 마음을 달래 드린 건지, 아니면 더 심하게 불효를 한 건지. 지금까지도 저는 어머니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 달라고 부탁한 건 일종의 배려가 아니었나요.

 “그건 맞습니다.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달래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허락을 받아 오셨을 때 저는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이구나, 이건 인간의 계산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요즘도 홀어머니 슬하의 외아들이 사제품을 받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사제품을 주실 때 추기경님 심정은 어떻습니까.

 “그런 경우 사제서품식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사제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부모님께는 최대한의 표현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가령 ‘하느님께 큰 상을 받으시라고.’ 사제품을 받는 당사자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식을 포기하는 거죠. 그러니 사제가 되는 당사자보다 부모님이 더 위대한 거죠.”

●그건 돌아가신 추기경님의 어머니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까.

 정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어머니도 노 주교님께 그런 말씀을 들었을 겁니다. 저는 그게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추기경은 훗날 노 대주교의 비서신부가 되기도 했다.


최근 입적한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과 정 추기경
4 혹자는 정진석 추기경을 “보수적”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추기경의 보수는 단층적인 보수가 아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가 헤쳐온 삶과 시대의 무게는 복층적이었다. 정 추기경은 어렸을 때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께 불평한 적이 없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어머니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입학할 때 서류 제출을 위해 그는 호적초본을 뗐다. 그때 처음 알았다. 정 추기경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활동한 사회주의자였다. 해방 후 북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질문을 잠시 망설였다. 침묵이 흘렀다. 결국 물었다.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외가에서 저와 어머니를 돌봐줬으니까요. 만약 물질적으로 어려웠다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진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개인의 문제에서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피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지식인이었고,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건 당대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겪은 시대적 조류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진 않았습니까.

 “그때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이미 컸으니까요.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 시대를 살았던 지성인이란 사실은 한편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어떻습니까.

 “아쉬웠습니다.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셨죠. 그런데 일제시대 지식인의 조류에 휩쓸렸던 겁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진리를 찾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찾으려 했던 건 참 아쉽습니다.”


바티칸에서 열린 정진석 추기경 서임식.
5 정 추기경은 요즘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책상에 앉아 성경을 펴고, 읽고, 묵상한다. 그리고 책을 쓴다. 미사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 오전 8시까지 책을 쓴다. “어릴 때 새벽 미사를 다녔던 힘이 지금도 크게 작용하는 겁니다.” 어릴 때는 하루 한 권씩 책을 읽었고, 요즘은 매년 한 권씩 책을 쓴다. 지난 연말에도 저서 『안전한 금고가 있을까』(가톨릭출판사)를 출간했다. 지금껏 쓴 책만 꼬박 50권이다.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정 추기경은 가슴으로 당부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나만을 위해 살지 마시고,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 더 크게는 우리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고자 노력해 주십시오. 그리고 실력을 키우십시오. 그래야 여러분 각자의 인생이 보람 있고 풍부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을 위해 살지 말고, 많은 사람의 선익을 위해 살아주십시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이 큰 해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가 공동체 의식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도와주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그래야 민족 전체가 발전하는 길로 가지 않겠습니까.” 정 추기경은 대선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보내는 신년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새해에는 독자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 올 한 해 이루고자 하는 소원들이 하느님 뜻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다. 어느새 추기경 집무실 앞뜰에 눈이 소복했다. 그 눈을 밟으며 생각했다. 여든을 넘긴 추기경의 젊은 날, 험난한 역경을 뚫고 올렸던 기도와 고백. 거기에 담긴 희망을 되씹듯이 눈을 밟았다.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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