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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참기업인 김만덕과 제주도

인물(People)

by 巡禮者 2010. 8. 1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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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참기업인 김만덕과 제주도

 

제주도에서는 ‘만덕할망 덕분에 살았지~’라는 말이 흔합니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만덕할망은 신적인 존재인가?’하는 의문이 들만도 한데요, 그건 아니고 20세기 초 제주에서 무척 존경받았던 여성 김만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배우 이미연 주연의 드라마<거상 김만덕>의 실재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조선사회에서 기생출신이라는 비천한 신분과 여성에게 주어지는 큰 차별을 극복하고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뤄냈으며, 그 부를 굶주림에 허덕이는 죽어가는 제주도민들을 살리는 데 아낌없이 써 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물론 당대 최고의 학자와 정치인, 조선8도의 남녀노소가 그녀를 칭송하였고 포상으로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제주 여인이 금강산까지 여행하였습니다.


>> 김만덕(1739~1812)의 생애

▶ 양반에서 기생으로
기생이 된 만덕 (새창)김만덕은 1739년 가난한 선비집안에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사랑받으며 자라다가 12세 되는 해에 부모를 여의게 됩니다. 두 오빠는 친척들이 거뒀지만 만덕은 홀로 남겨지게 되고 이웃에 살던 한 기녀의 도움으로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됩니다. 기녀는 만덕의 영특함을 눈여겨보고 수양딸로 삼았으며 기적(일종의 기녀 등록 대장)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여러 기록에서 큰 키에 쌍꺼풀이 있는 눈이 특징이라고 묘사되고 있는 그녀는 타고난 용모와 뛰어난 기예로 유명한 기생이었지만 호화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 기생에서 거부로, 거부에서 참 기업가로
늘 양인의 태생임을 잊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이 기적에 이름을 올림으로 인해 가족친지들이 천민 대접을 당하고 있다고 원망해 자주 관아에 가서 기적을 삭제해달라고 울며 청했고 결국 23세에 양인의 신분을 회복했습니다.
 만덕은 돈을 벌어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객주집을 차리게 되는 데 당시 객주집이란 술을 파는 곳이기도 했지만 상인들이 교류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만덕은 제주의 특산품을 서울에 팔기도 하고 기녀시절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화장품, 상류층 여인들의 용품을 염가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관공서의 물품까지도 조달하는 방업을 연구해 서울 상인들에게 필요물기적에서 삭제 (새창)품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학자인 체제공이 지은 <만덕전>에 따르면 만덕은 특유의 장사 수완과 물가를 잘 짐작하는 안목이 있었고 중간상인으로서 몇 년 내 큰 부를 모으게 됩니다. 그녀의 거짓 없고 사람을 중요시 여기는 따뜻한 인품은 객주에 늘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만덕은 부를 이루고 나서도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흠모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정조 대 중 1790~1794년 간 큰 기근이 계속되던 어느 해, 제주에는 화재와 수재, 풍재까지 겹쳐 전답이 소실되고 과실조차 딸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제주로 오던 지원 물자를 실은 배가 난파당하는 일까지 발생해 많은 도민들이 굶어죽는 일만 남은 참담한 상황이 왔습니다. 만덕은 그간 모은 재산은 물론 갖고 있던 패물까지도 팔아 제주도민을 위한 식량 수입에 기꺼이 기부하여 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이는 당시 기부를 한 몇몇 지배층의 기부보다 훨씬 큰 기부였습니다. 자신이 쌓은 부를 사회에 그대로 환원한 것입니다.

▶의녀반수의 명예직 획득과 금강산 여행
금강산 유람 (새창)당시 제주도민들은 특수한 인물 외에는 본토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정조 왕은 만덕의 선행을 듣고 원하는 상을 내리겠다했으며 만덕은 ‘굳이 분부하신다면 상감마마께 절을 올리는 것과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다’고 호탕한 희망을 청했다 합니다. 이에 정조는 그녀가 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의녀반수의 명예직을 하사해 그녀를 직접 만나고, 금강산여행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여행길목의 관공서마다 배려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사상 전무후무한 배려였지요. 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의녀 만덕을 환영했고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 (은혜로운 빛이 세세 대대로 이어진다.)라는 글로 만덕을 칭송하였습니다. 금강산 여행 후 서울을 떠날 때에는 문무백관이 송별연을 베풀었고 당대의 학자 이가환은 송별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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