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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예술가 ‘백남준’

인물(People)

by 巡禮者 2010. 8. 1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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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대의 예술가 ‘백남준’

 

2006년 1월 29일은 희대의 예술가 백남준이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한 날입니다. 그 후로 4주년이 지났습니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라 불리는 그의 예술혼은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현재 인천 송도국제도시 내 문화공간인 ‘트라이볼(Tri-bowl’에서 지난 23일부터 7월 18일까지 87일 동안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 아트전’이 열립니다. 2점의 대형 비디오 설치 작품과 10여 점의 비디오 조각, 10여 점의 회화․드로잉 작품, 임영균 사진작가가 촬영한 백남준 퍼포먼스 사진 12점,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9점 등 총 43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백남준, 그를 우리는 '한 세기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예술가'라 칭합니다.


"비디오테이프 녹화기에는 '빨리 감기' '되감기' '정지'버튼이 있지만, 우리의 삶에는 '시작'버튼 하나뿐이다"란 그의 말처럼 인생을 되감기할 순 없지만 우리는 그의 예술세계를 되감기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재 예술가 백남준과 그의 예술세계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 ‘시작버튼’을 눌러볼까 합니다. 

 

백남준의 생애

 

백남준은 1932년 일본 지배하에 있을 때 한국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홍콩으로 건너가 1949년 홍콩 Royden School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동경 근교에 위치한 가마쿠라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경대 인문학부에 입학합니다. 가마쿠라란 곳은 일본 선불교의 본산이기도 한 불교 성지인데 어릴 적 이곳에서 살았던 경험이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에 정신적 기반이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미학을 선택하고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배웠습니다. 졸업논문은 현대작곡가 아놀드 쉔베르크의 음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956년 독일로 유학한 그는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를 수료합니다. 그리고 1958년 백남준은 선불교와 신음악에 대한 관심을 전위 미술로 확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생깁니다. 바로 다름슈타트 하계현대음악캠프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를 만난 것입니다.

 

작곡과 퍼포먼스에 관한 존 케이지의 사상은 백남준은 물론 급진적 예술운동 그룹인 플럭서스(Fluxus)의 창시자로 음악캠프에 초청된 조지 마치우나스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존 케이지를 만난 이후 백남준은 상이한 매체를 결합시켜 통합 예술개념을 탄생시킨,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미술집단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후 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음악 공연(독일 뒤셀도르프, 1959), 피아노포르테 연구 공연(1960), 심플 공연(스웨덴 스톡홀름, 1961), 뮤직일렉트로닉TV전(1963) 등 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을 통해 유럽에서 실현하지 못한 퍼포먼스를 실현해 나갑니다. 1967년에는 샬롯 무어만과 공연한 ‘오페라 섹스트로닉’에서 음란죄로 체포되면서 문화 테러리스트란 악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활동은 활발히 이어져 1977년 위성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했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는 등 예술적 입지를 다져갔습니다. 그러나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몸의 왼쪽 신경 모두가 마비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국내외에서 다양한 전시회를 열었고, 다양한 상과 명예도 안았습니다.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로 올랐습니다. 1998년에는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1998년도 교토상'을 수상했고,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2000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6년 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타계했습니다. 그가 개척한 비디오아트는 음악적 시각화라는 발상에서 나온 그만의 독보적 예술 장르로, 미디어와 예술의 본격적 만남으로 꼽힙니다.

 

비디오아트란?


비디오아트(Video Art)는 비디오, 즉 텔레비전을 표현매체로 하는 예술을 말합니다. 1970년대 전반부터 성행한 현대예술의 한 경향인데 아직 확실한 형식이 이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과거 용구의 생산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시대에는 예술과 기술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으나 기계생산이 발달하면서 예술은 기술로부터 독립해 자율성을 띠게 됩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예술에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의지와 시도를 보이면서 20세기 후반부터 급진적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비디오아트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술관이나 화랑 등에 전시돼 ‘움직이는 전자회화’라는 애칭으로 조용한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백남준 작품세계의 특징

백남준은 한국인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첨단 기술과 전위 예술을 결합한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세계에 우뚝 선 사람입니다. 백남준 공식블로그에 소개된 ‘백남준 히스토리’에서는 그만의 예술세계의 특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기존의 예술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디오아트를 통해서 한국미학의 핵심인 ‘웅비하는 원초적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그의 작품 기본엔 한국인의 ‘천지인’사상과 그의 조국, ‘한국’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지인 사상을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법칙으로 삼았습니다. 서양의 몸을 동양의 마음으로 표현했으며, 서구사상과 문명을 무교나 불교사상으로 시각화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첨단기술을 전위예술로 승화했습니다. 한국적 색감인 색동은 비디오에 담겼고, 보이즈 추모제는 ‘오귀굿’으로 풀어내는 등 그의 작품 속에는 늘 ‘한국’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은 참여와 소통입니다. 백남준은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문화의 독재라고 봤습니다. 그의 작품 ‘참여 TV'를 보면 마이크가 두 개 설치돼 있는데 이는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인 참여와 소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비상업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작품을 만들어 돈 받고 파는 행위를 배격했고 작품은 그냥 작품으로 끝나야지 여기에 금전적 가치가 붙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엔 재미가 있습니다. 대중성과 재미는 백남준 예술의 핵심 요소로 꼽힙니다. 심각한 사상이나 철학을 배제하고 예술가 자신의 재미와 변덕, 즉흥성에 의해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백남준이란 사람 자체에서도 발합니다. 그의 몸짓이나 말에서는 웃음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천진한 장난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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