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서양 과학과 예수회 선교사들
전상운 대건 안드레아(성신여자대학교 이사장)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
1601년, 마침내 예수회 소속 마테오 리치 신부는 황제로부터 북경 거주 허가를 받았다. 그의 스승은 독일 태생의 그라비우스 신부였다.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난 학자로서, 그런 학자에게서 수학과 천문학을 충분히 배운 리치는, 중국 학자들이 일식 예보를 틀리게 하자 서양식으로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서 깊은 존경을 받았다.
리치 선부는 서양 과학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였는데, 이 사업은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번역 사업은 예수회 동료 신부들한테로 이어졌다.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은, 중국 학자들과 함께 “서양신법역서” 100권도 편찬했다. 샬은 사실상 국립천문대를 주재했고, 아편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예수회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국립천문대를 운영했다. 이들이 세워 사용하던 천문 기기와 시설들은 지금도 북경에 남아 있다. 이 시설들은 조선 실학자들과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이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학문적인 토론과 학자로서의 교분을 나누던 유서 깊은 곳이다.
예수회 선교사와 접촉하다
조선 학자들이 서유럽을 뚜렷이 인식한 것은 17세기 초두의 일이다. 임진란이 끝난 뒤인 1603년 명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이 가지고 온 리치의 1602년 세계 지도를 보고 난 뒤였다. 이는 조선의 학자가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는 전기가 되었다. 이수광(1563~1638년)이 그중 한 사람으로 가장 정확한 이해를 가진 학자였다. 홍문관 부제학이던 그는 여섯 폭으로 된 “구라파여지도”(歐羅巴與地圖)가 매우 정교하며, 중국은 물론 조선, 일본까지 나타나 있고, 지리의 원근 대소도 세밀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칭찬했다. 이 세계 지도는 조선 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수광과 조선 학자들은 서구와 서구인, 서구 학문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신흥 청조(淸朝)에 대한 중화적 세계관 속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는 것은 서유럽과 그들의 종교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말한다. 그는 세 번에 걸쳐 북경에 가셔 서구 학문을 접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그의 새로운 학풍은 이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실학 사상의 주요한 요소인 과학과 기술, 특히 서유럽 과학 기술의 도입은 이러한 흐름을 담고 있다. 서구 과학 기술에 따른 더 큰 파문을 일으킨 해는 1631년이었다. 명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갖고 돌아온 천문 역학 및 지리에 관한 한역된 서구 과학서와 천리경, 자명종, 천문도, 홍이포(紅夷砲) 등에 경이의 눈이 떠진 것이다.
조선에서의 실학의 형성과 서구 과학 기술의 적극적 수용은 중국에 청나라가 성립되면서 일어난 뼈아픈 정치 외교적 사건이 깔려 있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한양이 함락되고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심양으로 연행되었고, 8년간의 인질 생활 끝에 70일 동안 북경에 있었다. 그때 세자는 아담 샬에게서 천주상과 천구의(天球儀), 여러 천문서와 한역된 서양 서적들을 증정받았다. 세자는 귀국하면서 이것들을 들여왔다. 그는 이것들을 궁중에서 사용하고 출판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겠다고 생각했으나, 귀국 후 3개월 만에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17세기 전반에 조선에는 세 차례에 걸쳐 서구 과학의 큰 물결이 밀려왔다. 여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노력한 사람들은 실학자들이었다.
시헌력을 채용하다
1644년 관상감 제조(提調) 김육은 연경에 갔을 때 아담 샬이 시헌력(時憲曆)을 편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관한 서적들을 사서 관상감에서 연구케 하고 시헌력으로 개력하기를 주장했다. 조정은 새 역법을 배우려고 정책적인 노력을 경주했으니, 천문 역학자들을 청에 파견하여 흠천감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새 역법을 배워오게 했다. 선교사와 접촉하는 것을 정부가 추진한 것이다.
시헌력은 1654년에 공식 채용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데, 첫째로 조선 왕조가 처음으로 청의 제도를 공식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고 앞선 천문학이었으므로 수용이 당연했지만, 청조에 대해 정치적 문화적 반감을 지녔던 조정이 스스로 채용한 사실은 커다란 변화로, 이른바 북학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따른 서양의 과학과 기술, 학문과 문화가 서학으로서 조선 실학자들에게 연구되는 또 하나의 계기였다. 시헌력이 시행되면서 조선 학자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의 접촉은 더욱 활발해졌다. 실제로 실학자들은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천문 역산법을 배우고, 서양의 정밀 기계 기술을 도입하여 장점을 살린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이익과 홍대용의 서양 과학
연경에 간 일도 없고 선교사와 교류도 없던 실학자 이익(1682~1764년)은 서구 과학 기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초기 실학자의 어느 저서에서도 볼 수 없는 서양 과학에 대한 다듬어진 견해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천문 역산의 정밀함과 정확함 때문에 서양 과학이 우수하다고 인정했다. 또한 그는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을 확신했는데, 이는 그에게 중화 사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그는 둥근 땅덩어리는 제자리에서 자전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말했다. 그는 명말 청초의 서양 천문서에 흔히 인용되는 비유를 기술하여 지전설(地轉說)을 긍정하지만, 더 이상 나름대로의 이론을 전개하지 못하는데,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익의 학문은 홍대용(1731~1783년)한테 계승 확대되었다. 그도 서양 천문학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그것은 “수학에 바탕을 두고 의기를 참고하여 온갖 모양과 현상을 관측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1765년 북경에 갔을 때 네 번이나 남당을 방문하여 유(Hallerstein) 신부와 포(Gogeisl) 신부와 토론했다. 그 내용을 적은 “유포문답”(劉鮑問答)은 조선의 실학사에서 가장 상세한 예수회 선교사와의 필담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다. 천문학과 천주교 교리에 관해 문답하고, 천주당에 있는 여러 문물을 구경했다. 풍금을 연주해 보고 누상에 설치된 커다란 기계 시계와 이익이 보고 싶어하던 망원경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서양이 수학과 관찰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동양보다 앞서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지어 스스로 수학을 연구했고, 용수각(龍水閣)이라는 사설 천문대를 세워 관측 기기를 갖추었다. 천문 관측 시설과 기기가 엄격히 통제되던 체제에서 개인이 이러한 천문대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주해수용”은 책의 이름처럼 천문 관측과 관련된 실용적인 수학서이다.
홍대용의 학문은 지구 회전설과 무한 우주론의 전개에서 그의 진취성과 창조성이 나타나고 있다. 지전설은 서구 과학 수용의 태도를 잘 나타낸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그들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었지만, 중국 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것을 소화하고 동양적 사고의 논리적 전개로 긍정적 결론을 도출한 것은 조선의 실학자들이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홍대용의 지구 회전설을 소개하였다. 또 “연암집”(燕岩集)에서는 홍대용이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지전설에 자신을 가져 의심치 않았다고 적고 있다. 홍대용 자신은 그의 저서 “담헌연기”(湛軒燕記)에서 “무릇 땅덩어리는 하루 한번씩 돈다. 지구의 둘레는 9만 리, 하루는 12시간이다. 9만 리의 큰 땅덩어리가 12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고 보면, 그 빠르기가 포탄보다도 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논리를 전개한다. 하늘이 만든 것에 둥글지 않은 것은 아직 없다. 그런즉 지(地)가 구(球)로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대공(大空)에 땅이 정지하여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괴연(塊然)히 하늘에 매달려 있다면 즉시 부수 사토(腐水死土)하고 그 자리에서 썩고 헐어 부서져 버릴 것이다……. 이 설은 선교사들이 소개한 이론을 동양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기의 논리로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회 선교사들과 중국 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지전설을 자신의 사고와 정연한 논리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관상감의 학자들
17~18세기 조선의 서양 과학 도입에서 관상감(觀象監)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도입 서적들도 역학서가 주류를 이루었고, 세계 지도와 천문 관측 기기들도 모두 관상감 소관이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관상감 학자들과 관원들을 반드시 파견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선교사들과 토론하고 새 지식과 관측 기기들을 계획적으로 구입하는 일을 끊임없이 수행했다. 조선의 공식 기록들에는 이런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1708년에는 관상감에서 천문도와 세계 지도를 공식 제작하였다. 아담 샬의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모사한 것이다. 여기에는 제작 경위와 공식 제작 사실, 참여 학자들과 관직 성명이 기록되어 있고, 색채도 선명하게 대형 병풍으로 만들어 대궐 안에 두었다.
1742년 관상감에서는 또 하나의 서양 천문도를 제작했다. “신법천문도”라는 이름의 대성도(大星圖)이다. 1723년에 쾨글러(I. Kogler)가 작성한 300좌 3083성(星)의 대성표를 중국 사신으로 갔던 관상감 학자 김태서와 안국빈이 쾨글러에게 직접 배워 그려 온 것을 갖고 만들었다. 이것은 두 번째 공식 천문도 대병풍이다. 그 당시 천문학 지식을 510자로 설명하고, 태양과 달, 망원경으로 관측한 5개의 행성을 그려 놓았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이 신법천문도는 1807년에 서명준이 150여 자의 해설을 붙여 목판본으로 간행했고, 1834년에는 정호가 목판본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 병풍은 지금 법주사에 보존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쾨글러의 천문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채색 사본으로 귀중한 유물이다.
1741년에는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안국빈이 역관 변중화, 김재현과 함께 쾨글러와 페레이라 신부 등에게 그 산법을 배우고 온갖 애로 속에서도 그 책들을 구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책 전부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1745년이었다. 1744년과 이듬해 두 번에 걸쳐 중국에 가서 역산법을 배운 김태서가 돌아오면서 사가지고 왔고, 안국빈은 그 내용을 배워옴으로써 케플러의 타원설에 따른 태양과 달의 운동 및 그 계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경향잡지, 1993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