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천문대, 신앙과 과학의 만남
홍승수 라파엘(서울대학교 교수)
사제 천문학자
로마에서 동남방으로 60리쯤 가면 나오는 카스텔간돌포는 교황 성하의 여름 별장지이다. 해마다 수많은 방문객이 성하를 알현하고자 곳곳에서 몰려온다. 그들의 눈엔 성채의 테라스 맨 위층에 자리잡은 돔이 먼저 들어오는데, 둘씩이나 있는 것을 보고 선뜻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천문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방문객들은 근처 베르니니 별장 숲 사이로 보이는 또 하나의 천문대를 보고서야 생각을 고쳐 먹는다. “바티칸에 현대적 천문대라?” 하며 의아해 하는 것이다.
이곳 바티칸 천문대의 전속 연구원은 예수회 사제들이다. 최첨단 관측 장비를 갖춘 엄청난 규모의 전문대들이 여기저기 건설 중에 있으며, 우주선들이 태양계 구석구석을 탐사하고 있는 20세기말에, 교황청이 예수회 사제들에게 천문학 연구에 전적으로 매달리 게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만 들릴 것이다. 천문학을 전공하는 나도 천문학자 사제를 이상하게 느끼던 때가 있었다.
학위 논문 연구에 열중하던 시절에 학술지 논문을 통해 알던 학자 코인(G. Coyne S.J.)을 학술 대회장에서 직접 만나 보니, 검은 수단에 하얀 로만 칼라를 한 신부님이었다. S.J.가 예수회를 의미하는 약자라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편광 관측에 관한 논문의 저자 트레너(P.J. Treanor)에게도 S.J.가 붙어 있음을 새삼 발견하였다. 사제인 그분들은 천문학자로서 과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소행성을 발견한 피아치(Piazzi)와 천제 분광학의 원조 안젤로 세키도 신부였다. 우주 팽창의 관측적 증거가 제시되기 전에 대폭발 우주론의 이론을 정립시킨 르메이트르(G. Lemaitre) 신부, 항성 종족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오코넬(O’connell)이 사제였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달력을 생각해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잊을 수 없다.
바티칸 천문대의 옛뿌리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576년, 건축가 마체리노에게 높이가 73m나 되는 탑 모양의 건물을 짓게 하였다. ‘바람의 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남북으로 길게 깔려 있는 대리석판이 있고, 그 중앙에 자오선을 파놓았으며, 남쪽 벽면 높이 5m 되는 곳에 구멍을 뚫어 놓아 태양빛이 정오에는 자오선상에 떨어지도록 되어 있다. 대리석 판에는 황도 12궁의 별자리 그림이 차례로 새겨져 있는데, 정오에 태양빛이 내려앉는 별자리가 바로 그날 태양의 천구상 위치를 나타낸다. 그러니까 3월 21일 정오에는 태양빛이 춘분점에 대응하는 별자리 그림에 와야 한다. 그런데 어느 해 춘분날 정오에 태양빛이 춘분점에서 60cm나 떨어진 곳에 닿는 것을 보고, 그레고리오 13세는 당시에 아마 진행 중이던 달력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했다고 한다. 이 방이 ‘달력의 방’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달력 개혁이 분명 여기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방에 관측 연구 장비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말이다. 인쇄물을 관장하는 추기경이 도서관 문에 ‘바티칸 천문대’(Specula Vaticana)라는 문패를 써붙이고 사람들을 안내했다. 이것이 1784년이었다. 그러나 베드로 대성전의 거대한 돔이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 등으로 천문대를 로마 대학 구내로 옮겼다가, 몬시뇰 길리가 1789년 천문대장으로 임명되고, 비오 6세로부터 그레고리오 탑 상층부를 연구 시설로 개조하도록 명을 받음으로써 이 바람의 탑은 다시 기상, 천문, 지질 연구의 중심이 된다. 1800년부터 시작되는 길리 몬시뇰의 연구는 참으로 눈부시다. 수성의 태양면 통과 현상, 목성의 달, 여러 개의 혜성, 일식 현상 등을 당시로서는 수준 있게 관측하여 기록에 남기고 있다.
로마 대학 천문대도 교황청 천문대로서 과학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중 안젤로 세키 신부의 업적은 반드시 언급해야 할 정도이다. 혜성을 세 개나 새로 찾아냈고, 지자기, 기상, 태양, 별 그리고 물리적 힘의 동질성 등에 관한 연구로 약 730편의 논문을 남겼다. 일식 때 홍염을 분광 관측하였고, 홍염이 태양 흑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밝혔다.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천체 분광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열었다는 것이다. 약 4000개의 별들의 스펙트럼을 찍어, 그 특성에 따라 별들을 4종류로 분류할 수 있음을 밝혔다. 별들의 각종 물리적 특성을 밝히는 데 그는 항성 분광형이라는 열쇠를 우리에게 마련해준 셈이다. 1870년에 교황청은 로마 대학 천문대의 소유권을 이탈리아 정부에 박탈당한다.
바티칸 신천문대의 개막
바람의 탑 천문대도 길리 몬시뇰의 후계자가 없어 연구 활동을 이미 중단했고, 로마 대학도 빼앗겨 연구 시설을 제대로 갖춘 천문대를 바티칸 산하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888년 레오 13세 즉위 10주년에 사제 서품 50주년 기념 경축 행사가 전세계적으로 준비되고, 당시 기상 관측소 대장이던 덴자 신부는 연구 기기 전시회를 기획한다. 대성공을 거둔 전시회가 끝난 다음, 예술적 가치가 있는 선물들은 교황청 여러 곳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교황은 과학 장비들을 한군데 모아 연구에 쓰이기를 원하였다. 덴자 신부가 바람의 탑에 그것들을 보관하기를 제안하고, 교황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바르나바회 소속인 덴자 신부를 새로 발족하는 천문대의 대장으로, 라이스 신부를 부대장으로 임명한다. 바람의 탑은 항성 시계, 자오의, 굴절 망원경 등을 기증받고 돔을 네 개나 갖추면서 옛 영광을 찾으려 하나, 로마 대학 천문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즈음 세계 천문학계는 국제 공동 노력으로 하늘 전체를 사진에 담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바티칸도 1887년 파리 국제 전천(全天) 사진 촬영 계획 1차 회의에 대표를 보내어 참가 자격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다. 바로 그날 사업 수행에 필요한 구경 33cm의 이중 사진 적도의 굴절 망원경을 발주한다. 모두 18군데 천문대가 참여하는 이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바티칸 천문대는 교회와 과학계의 효과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당장 시급한 문제가 이중 적도의 설치 장소였다. 그레고리오 탑에는 더 이상 불가능했고, 덴자와 라이스 신부는 교황께 레오 탑을 쓰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 레오 탑을 교황은 기꺼이 양보한다. 드디어 직경 8m의 회전 돔에 2중 적도의 굴절 망원경이 설치되면서 레오 탑은 세계 굴지의 천문대가 된다.
레오 13세는 1891년 “바티칸 천문대 재건립과 개조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고, 재정 지원을 약속한다. 이 교령에서, 교회를 비과학적이고 비지성적이라고 몰아붙이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저항 내지 변명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100년 전 바티칸 천문대의 재발족에서 우리는 신앙과 과학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려는 교회측의 적극적인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덴자 신부가 선종한 후 라이스 신부는 국제 전천 촬영 사업의 바티칸 천문대 몫을 거의 완성시켰다. 전 하늘의 사진을 찍고 그에 따라 성표와 성도를 만드는 일은 엄청난 시간, 노력, 재정 그리고 창의성을 요하는, 그 수많은 별들의 위치와 밝기를 재는 일은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천 사진 1040장의 거의 전량을, 성도 540장 중 277장을 만들었다. 1906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 천문대 대장이던 예수회 하겐 신부가 대장으로 부임했고, 라이스 신부의 자료를 이용해서 총 481215 별들의 등급과 위치를 측정 1928년에 바티칸 몫을 완수한다. 하겐 신부의 변광성에 대한 정보는 변광성 연구에 초석이 되고, 별들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 중요성이 오늘날에야 인식되기 시작한 암흑 성간운에 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하기도 했다.
카스텔간돌포와 미국 서부
로마시의 팽창으로 밤하늘이 점점 밝아져 천문 관측이 어려워졌다. 천문대 이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비오 11세는 선임 교황처럼 기득권을 포기하고, 관측 여건이 허락한다면 자신의 여름 별장 간돌포 성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다. 이 제안은 전세계 천문학자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최고급의 망원경과 분광 연구 실험실까지 갖춘 새로운 모습의 바티칸 천문대 개관식이 1935년에 있었다. 교황은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영감을 받아 이날 “와서 우리 함께 창조주 하느님께 찬미 드립시다.”를 바티칸 천문대의 좌우명으로 주었다. 밤마다 하늘을 관측하는 연구자와 방문객들에게 대리석에 새겨진 이 좌우명은 믿음과 과학의 진정한 만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바티칸 천문대의 간돌포 성 시대부터 교황은 연구진의 구성을 예수회에 전적으로 맡겼다.
간돌포 성으로 옮긴 후부터는 연구 내용이 다양해지고, 은하계 구조와 항성 종족에 관한 연구로 현대 천문학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 눈부신 활약과 자료 축적을 일일이 밝힐 수 없을 정도이다. 그라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제적 규모의 공동 연구에 점점 더 깊게 관여하게 되고, 도시의 야광이 간돌포의 강력한 슈미트 망원경을 무력하게 만들자 장래를 심각하게 검토해야 했다.
여러 가능성이 논의되지만, 미국 아리조나 대학과 협의하여 연구 활동 공간과 편의 시설을 제공받으며, 슈트워드 천문대 시설 사용권을 보장받았다. 또한 과거 기술로는 비교도 안될 직경 1.83m의 거울을 그 대학의 엔젤 교수로부터 기증받아 저렴한 비용으로 대형 망원경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청이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액수였으므로, 천문대장 코인 신부 일동은 ‘바티칸 천문대 은인들의 재단’을 설립하고 350만 달러의 기금을 확보했다. 이 망원경이 제작되면 루손시에서 160km 떨어진 그레이함 산 정상에 설치될 예정이다.
믿음과 과학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트 피크 천문대는 인디언 보호 구역에 자리잡고 있다. 토호로 오드함 인디언의 사전에는 ‘천문학자’라는 낱말이 없다. 대신 그들을 ‘눈이 긴 사람’이라고 부른다. 현대 천문학자들의 눈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참으로 길다. 우주 대폭발의 순간까지도 넘보려 할 정도이다. 이 눈길이 향하는 궁극의 목표는?
바티칸 천문대의 역사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역대 교황들의 애정어린 눈길을 만날 수 있다. 그분들이 천문학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그저 ‘우주의 신비’라고 습관적으로 말해 버리는, 창조주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하는 도구가 천문학인데, 세상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철저하게 염려하시는 분이 교황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긴 눈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믿음과 과학이 만나는 극적인 장소가 바로 천문대라는 교황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3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