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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히크의 신정론연구

西洋哲學

by 巡禮者 2010. 5. 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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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히크의 신정론연구


박 인 성*


철학의 탄생과 더불어 에피큐로스의 딜렘마로 제기된 신정론의 문제는 계몽시대 이후부터 논쟁이 가중되었다. 계몽기의 자연신론과 무신론적인 암시까지도 포함하는 기계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악과 신의 섭리를 조화시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계몽시대 이후 지금까지 과거와는 다르게 신적 개입이 없는 신정론으로 악이 설명될 수가 있어야 했고 이런 신정론의 재구성문제에 당면하여 존·히크는 고전적 형태의 신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악에 대한 신적 개입이 전혀 없는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을 새롭게 구성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고전적인 어거스틴형의 신정론은 과학적, 도덕적, 논리적 반론을 이겨내기 어렵다. 첫째로 사냥의 위험, 노동의 수고, 지진 홍수 등은 인간타락 이전부터 있었다. 둘째로 인류시조의 범죄로 후대의 인류가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 셋째로 원초적 의의 상태에서 악의 상태로 전락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결국 어거스틴형 신정론은 신의 예정론 사상과 맞물리게 되고 그리하여 그 신정론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에 빠진다. 이리하여 고대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이 슐라이어막허에 의해서 근대적인 체계적 구성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존·히크에 의하여 재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존·히크 신정론의 출발점은 고전적인 어거스틴형 신정론과는 달리 인간은 원래 완전하지 않았고, 인간의 존재론적 불완전성, 도덕적 미성숙으로부터 출발하여, 도구로서의 악을 통한 점차적인 영형성에로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존·히크의 도구로서의 악을 통한 영형성의 신정론은 다음과 같은 딜렘마에 빠진다. 첫째로 악이 역사 속에서 극복되리라는 낙관적 견해로서의 도구적 악이다. 둘째로 악은 선의 전제이므로 악은 제거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견해로서의 도구적 악이다. 말하자면 존·히크는 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함으로서 결국 도구적 악에 근거한 그의 윤리적 세계에 대한 비젼의 옹호는 이레니우스형의 발전적 신정론이 갖는 중요한 중심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분야 : 종교철학


주 제 어 : 신정론, 악의문제, 존·히크


I. 머리말


고전적 형태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무신론자나 유한 신을 믿는 자나 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존재를 믿는 이원론자의 문제는 아니다. 말하자면 악의 문제는 지선의 전능한 유일신이 악의 존재를 허용한다는 파라독스로부터 일어나고, 따라서 이 문제는 전능의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적 사상에 있어서 더욱 날카로운 문제로 제기된다.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은 3명제를 인정한다.


① 신은 전지전능하다.

② 신은 완전하게 선하다.

③ 악은 존재한다.

그러나 신이 완전히 선하다면 왜 악의 존재를 허용하는가? 왜 그는 지금의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왜 신은 악이 전혀 없는 세계나 아니면 적어도 이 세계보다 악이 더 적게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에피큐로스(B.C.341-270)에 의해서 처음으로 파라독스의 형태로 제기된 이 문제는 단순한 파라독스가 아니라 분명한 모순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논쟁을 하였다. 철학의 탄생과 동시에 생겨난 이러한 신정론의 문제가 특히 계몽시대 이후부터 봇물이 터져 내리듯이 쏟아졌다. 갈릴레이와 뉴톤에 의해서 초래된 물리학과 우주학의 혁명은 중세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제기될 수 없었던 많은 지적인 문제들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제들 중에서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악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다. 뉴톤은 이 세계가 운동, 물질, 시간, 공간의 개념에 의해서 수학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그 자체로 기계적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성공하였다. 뉴톤의 역학을 수용한 사람들의 당면과제는 이러한 기계적인 체계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가 그렇게 정확하게 질서지워져 있고, 그렇게도 미학적인 조화를 이룬다면 어찌하여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 궁극적으로 자연신론과 무신론적인 암시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기계론적인 세계에 있어서 악의 존재와 신적인 섭리의 활동을 서로 화해시키는 일이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엄격한 기계적 법칙과 궁극적으로는 신이 없는 체계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 속에서 도덕과 종교적 신앙이 어떻게 수용되어질 수가 있는가? 악의 존재와 증가하는 "不在的" 신의 존재와를 화해시키는 문제는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신정론을 요구케 한다. E. Becker가 그것을 날카롭게 주장하고 있다. "전적으로 과거와는 다른 무엇으로 이 세계의 악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즉 신적인 개입이 없는 신정론으로 악이 설명될 수 있어야 했다. …악은 신의 의도함이 없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져야만 했다."


근대 이후부터 직면한 이러한 신정론의 재구성 문제에 응답하여 현대 신정론의 대가로 알려진 죤·히크는 고전적 형태의 신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악에 대한 신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고대의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을 새롭게 재정립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고대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슐라이어막허에 의해서 근대적인 체계적 구성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죤·히크에 의하여 재구성되어 이제는 전통적인 어거스틴형 신정론에 맞서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중요한 신정론으로 부각되었다.


이제 필자는 본고의 제2장에서 죤·히크가 본 전통적 신정론의 문제점, 제3장에서는 죤·히크 신정론의 형성과정, 제4장에서는 죤·히크의 영형성으로서의 신정론, 제5장에서는 죤·히크 신정론에 나타난 문제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II. 죤·히크가 본 전통적 신정론의 문제점


과거에는 기독교적 신학과 신화가 서로 밀접하게 뒤엉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나 혹은 과학으로부터 분명히 구별되는 신화를 믿어 물리적 우주의 특성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바로 이 사실이 당시 지배적이었던 전통적 신정론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만 하여도 인간타락에 나타난 악의 기원에 대한 고대적 신화가 역사로서 그럴듯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인간 타락에 나타난 악의 기초에 근거하여 신정론 세우기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신화론적인 신정론이 어거스틴에 의해서 처음으로 체계화되어 설득력 있게 널리 발전하였고, 그리고 오늘날까지 로마 카톡릭교회 안에서 그대로 인정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타락 논의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완전한 의로운 상태였고, 그의 원죄는 전적으로 선한 존재가 악한 존재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이란 그 자체는 원래 독립적인 상태나 독립적인 힘을 가진 적극적인 본질이 아니라 원래 선했던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원래 지선의 전능한 신이 선한 목표에 따라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히브리적, 기독교적 신념을 고수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의 피조물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신의 선을 나누어 받았다. 신이 선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의 기원인 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선하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서 악은 신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 선의 결여이자 결핍이다. 악은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thing)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라는 말은 하나의 적극적인 실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악이 하나의 적극적인 실재라고 한다면 無로부터 무엇을 창조하는 적극적인 능력이 피조물에게 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그 악은 창조자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악은 "본질로부터 이탈하여 비존재로 향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선과 악의 관계를 이와 같이 존재와 비존재와의 관계로 적용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악은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가 없고 선이 먼저 있고, 그것의 부정으로서 악이 존재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악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고 "선에 기생하고 있다"(evil is essentially parasitic upon good)고 할 수가 있겠고, 따라서 악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닌 이상 신은 악의 창조자가 될 수가 없음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어거스틴의 그의 고백록(Confession)에서 한 말을 인용해보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선한 것이다. 동시에 내가 추구하는 악의 기원에는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 악이 실체이라면 그것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은 그림자, 불협화음 등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존재가 있는 곳에서는 어느 곳이든지 선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악은 단순한 존재의 결핍이다. 피조물이 신이 소유한 만큼의 완전성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악이라고 할 일종의 결핍이 나타나게 되는가? 어거스틴은 그렇지가 않다고 주장한다. "無로부터 생겨난 사물에게 스스로 존재하는 신의 선함만큼의 完全善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무한히 완전한 피조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악은 본래 어떤 결핍이 피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가 있으므로 피조물이 지닌 불가피한 제한성(limitation)은 악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악은 어떤 종류의 선의 결핍(absence of Good)이 결코 아니고 "단지 어떤 사물이 본래적으로 선의 결핍을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의 결핍을 가지도록 예측되는 어떤 종류의 것이다." 피조물의 제한성이 그 자체로 악의 예증(instance)이 아니라면, 그러나 그 피조물의 제한성은 악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 속에서는 피조물들이 무(Nothing)로부터 만들려졌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악은 신의 작품 속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선하게 창조되었고, 그리고 어머어마한 은사와 능력을 가진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죄를 짓는 것이 가능했었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어거스틴은 아담과 이브가 존재하게된 그 기원은 바로 無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無로부터 생겨난 그 어떤 피조물이 아무리 고양되었을지라도 그것은 아래로 끌어내려질 수가 있는 것이다. 결핍의 이유로 그렇게 약화되었다는 것은 단지 무로부터 창조된 자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완전한 의로부터의 인간타락과 또한 악에 대한 신의 책임을 면제시키는 전통적 신정론은 최근의 이 시대에 와서야 신화론적으로 꾸며낸 기초 위에서 성립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가능해 졌고, 그리하여 이치에 맞는 신정론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신정론이 왜 지금은 용납할 수 없는 지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신정론 기초에 있는 신화의 윤곽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인간타락의 신화는 매우 이해가능한 비극적 이야기이다. 신이 창조한 천사의 일부가 신에게 반역을 도모하여 사탄이 되었다. 그리고 신이 창조한 한 쌍의 부부로 인류는 시작되었고, 신에 대한 직접적인 인지 속에 살았던 이 최초의 부부는 선하고 행복하고 불멸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그들을 유혹하여 그들은 신에게 불순종하도록 유혹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이 땅에 고통, 위험, 질병, 죽음 등등의 새로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런 인간시조 타락 결과로 그의 후예들인 그들 조상의 영향으로 역시 타락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선인은 영생복락을 누리고 악인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된다. 이런 비극적인 드라마가 기독교의 공식적인 드라마이다. 그러나 바울에 의해서 스케치되고 어거스틴에 의해서 완성된 이 비극적 드라마 즉 낙원의 완전성에서부터 죄와 고통과 죽음의 상태로의 타락, 그리고 역사의 종국에 인류는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으로 나뉘어 지도록 예정되어진 것이란 이러한 비극적 이야기는 종교적인 상상력의 결과일 뿐이다.


이런 비극적인 드라마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화의 기능으로 유효하게 유지되었고 그리고 기독교 신정론은 이 창조와 타락에 기초하여 세워졌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 신화를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신화는 문제해결에 적합하지 않다. 신화의 기능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통해 경험적 사실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를 더욱 밝게 하는데 있다. 그러나 신화가 강조하고 밝혀주는 경험은 미스테리의 투성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신화는 악의 심오한 미스테리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발견되는 악의 기원, 인간타락, 죄와 형벌 그리고 인간의 슬픔과 고통 등등에 관한 이론은 신화적으로는 만족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도덕적, 논리적 반론을 이겨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사냥에서의 위험, 농업에서 노동의 수고 등은 인간출현 이전에 이미 자연질서의 일부이고 또한 즉 지진, 홍수, 태풍, 화산폭발 등과 같은 자연적인 악도 타락 이전부터 있었던 자연적인 질서이다.


둘째로 인류시조의 범죄로 인하여 후대의 인류가 형벌을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의 최선의 도덕규범에 비추어 부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정론으로서 이 도덕규범에 의해서 인정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한다.

셋째로 신화에 기초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속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가 있다. 즉 인간은 자유롭고 완전무결한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므로 어떤 유혹에도 약해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그들 스스로 변명할 수 없는 납득 불가능한 신의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창조주는 악의 실재로부터 어떠한 책임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전적으로 자기모순이다. 최선의 세계에서 전적으로 최고선의 존재자가 악에 빠진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無로부터(ex nihilo) 악이 저절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요구하게 된다. 피조물 속에 원래부터 어떤 도덕적 결함이나 혹은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어떤 긴장상태가 있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자유 그 자체와 그리고 유혹의 부재상태에서는 죄로 기울어 질 수가 없다. 그리하여 피조물이 죄를 짓는 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원래 신과의 이상적인 관계 속에서 유한한 완전존재(finitely perfect being)였다는 사실을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전통적 신정론자들은 신의 예정론을 주장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어거스틴은 악은 완전무결했던 천사의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로 일어나게 되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반역은 결과적으로 신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었다는 예정론사상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칼빈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인류전부가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된 것은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을 얻기로 예정되었고 어떤 이는 멸망받기로 예정된 것이다. 모든 개인은 이 목적에 있어서 각각 다르게 창조되었고 구원문제도 생명이 아니면 사망으로 예정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루터도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고 또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말씀을 믿을 자와 믿지 않을 자, 정죄받을 자와 의롭게 될 자가 다 예정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화가 신정론을 체계화시킴에 있어서 그릇되게 사용되어 결국에는 의심스러운 절대 예정론 교리와 결부됨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정론 그 자체를 모순에 빠뜨리게 한다. 왜냐하면 원래의 의도는 피조물의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한 악을 비난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이 자유의지의 남용이 신의 예정에 근거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전통적 신화에 근거한 이러한 신정론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부조리와 모순에 빠지고 만다."


III. 죤·히크 신정론의 형성과정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인간타락에 대한 전통적인 신정론이 서구사회를 지배하여 왔다. 그러나 고대부터 소수의 다른 하나의 주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희랍교부들 사이에 퍼뜨려졌고, 그 중에서 이레니우스(St. Irenaeus, A.D. 140-202)가 그 대표자이다. 전통적인 타락설의 경우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완전한 의로운 상태였고, 그의 원죄는 전적으로 선한 존재가 악한 존재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성숙한 책임감을 지닌 성년이 아니었고 어린아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레니우스의 견해에 따르면 아담은 정신적 발전의 긴 과정에 있어서 그 출발지점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형상'(image) 속에서 인격적 도덕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그러나 아직 신의 '모양'(likeness) 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며, 인간이 '신의 모양'에로의 도달은 고통의 기나긴 과정의 최후지점에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 자신은 이것을 창1:26에 있는 신의 "image"와 "likeness"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이레니우스에 있어서 아담의 타락은 재난적 변형으로 인한 인간성의 전적인 부패로 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의 'image'에서 신의 'likeness'에로의 완만한 발전과정에 있어서 다소 지연될 뿐인 것이다. 전통적 신정론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 본래의 의로움에서 떠나 전적인 부패의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레니우스는 아담의 타락은 단지 그의 정신적 발전의 초기단계에 나타난 첫 실수로 신의 형상이 약간 손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와 같은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의 창조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인간은 어린아이로 창조되어 불완전하고 성숙하지 못하며 점진적인 정신적, 도덕적 성장을 하며 발전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아담과 하와는 신의 'likeness'를 향한 점진적 발전으로 창조의 과정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자유의 행사를 함에 있어서의 첫 번째 실수는 그의 유약함으로 인해 인류의 유아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저주받은 반역이 아니다. 신의 창조가 원죄로 인해 훼방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예수의 성육에 의해 창조과정은 다시 제 궤도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목적론적, 종말적인 미래지향적 성격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창조와 타락이론에서 전통적 신정론과 다르다. 이레니우스 신정론의 출발지점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완전함, 즉 인간은 윤리적. 종교적 미성숙의 조건 속에서 시작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성장과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과 의도인 인간이 신을 사랑하고 신과 교제함을 터득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미성숙에서 성숙에로 발전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속사적 계획 속에서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인간성이 철저하게 부패되고 변경된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즉 다시 말해서 희망과 구원의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악의 기원과 인간의 자유의지 변호에 대한 훌륭한 이론으로 새로이 재현되고 있기도 하는데, 이런 논쟁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적 비판과 그리고 이론범주에 대한 윤리범주의 칸트적 우위를 전제하고 있다. 윤리적 완전성은 자연적으로나 혹은 선천적으로 이미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자아발전을 회피함은 윤리적, 인격적 완전함을 획득할 수 있는 필연적인 유일한 조건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신이 신 자신을 최고선과 최고목적으로 자유로이 경배하는 인간을 창조하기를 원한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인격적, 윤리적 완전성이 성취될 수 있는 현세적인 역사적 과정을 원할 것이다. 만약 윤리적, 종교적 완전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성취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면 그것은 현세적인 역사적 삶의 시초부터 '미리 주어진 것' (ready-made)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적 삶의 순례과정의 시초단계는 존재론적 불안정(ontological instability), 윤리적 미성숙(ethical immaturity), 인간과 신 사이의 인식적 거리(epistemic distance from God)의 상태이고, 이러한 상태 아래서 인간이 죄와 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그와 같은 상태 아래서 인간이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점이 인간 시초의 원초적 의로움(original righteousness)의 상태에서 타락했다는 전통적인 창조와 타락이론과 구별되는 점이다.


그런데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에서는 인간은 원래 '존재론적 불완전함'(ontolo- gical imperfection)의 상태로 창조되었으므로 신이 인간의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에서는 일면 신이 악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담신화에 나타난 뱀의 모습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완전함과 도덕적 미성숙에 대한 신학적 해석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침식하면서 신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 악을 의욕하거나 신이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악을 가한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신은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 오히려 현세적 삶의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윤리적 발전의 요구로부터는 악이 전혀 배제될 수 없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신은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죄와 악은 자유로운 현세적,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고대의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사상은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 A.D.1768-1834)에 의해서 근대적인 체계적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슐라이어막허의 악의 문제와 신정론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까지 영국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슐라이어막허는 전통적 신정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로 신학이 역사적 의식을 반영하는 한에 있어서, 창세기 1장-3장에 나타나는 인간창조와 타락의 기록은 더 이상 문자적인 역사로 해석할 수가 없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은 역사적인 타락교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둘째로 전통적 신정론에 있어서의 타락개념 그 자체에 있어서 모순이 있다. 전통적 타락교리는 인간의 원초적 의(혹은 피조적인 완전함)가 역사적으로 현실화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초적 의는 타락 그 자체를 납득하기 어렵게 한다고 슐라이어막허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의 직접적인 면전에 거주하면서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했던 인간이, 참된 선에서부터 악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사실은 그럴듯하지 못한 주장이다. 타락은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거나 혹은 그것은 순수히 악의이거나 완전한 반역이다. 아담신화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정당하지가 못하다. 만약 타락을 설명함에 있어서 신의 예정개념에 의지한다면 그러한 논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에 빠지고 만다.


전통적 교리가 가진 세 번째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아담신화에 의해서 초래된 악의 비극적 깊이를 은폐시킨다. 만약 전통적인 주장대로 인간이 실제로 원초적인 의로움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면 그때는 타락이 전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초적인 의와 타락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딜렘마는 원초적 의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가 아담신화의 근거를 넘어서서 그것의 어려운 모습의 일부(뱀의 형태로 상징화된 것으로서의 악의 외형적 인 논제)를 은폐시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타락교리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악을 은폐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악을 타락의 결과로서 해석하는 경향이고, 타락 이전에 있었던 일로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타락교리는 악의 비극적인 면을 이해할 수가 없다.


슐라이어막허는 위와 같은 전통적 타락교리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응하여 고대의 이레니우스의 타락사상을 이어받아 더욱 체계화시킨다. 슐라이어막허에 있어서 타락은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정에서 어린이의 단계에 나타난 불가피한 사건이다. 인간이 신과의 순수한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와 자율을 먼저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비교적으로 독립적 존재만이 신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은 이러한 독립성 안으로 떨어지는 타락으로 여겨진다. 이는 마치 어린이가 그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기자신의 개성을 요구하는 표시로서의 불순종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슐라이어막허는 인간창조의 두 단계를 시인하고 'image'와 'likeness'라는 용어 대신에 첫째아담과 둘째아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image'는 첫째아담이고 'likeness'는 둘째아담이다. 따라서 슐라이어막허도 원초적 의(original righteousness)를 과거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완전성은 인간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종교적인 자아의식과 연결시켰기 때문에 신의식이 일어나기 위한 환경으로 적합하였다는 뜻으로 창조의 완전성을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신의식이 발생하게끔 하는 세상의 완전성은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삶을 촉진시키는 상황에서나 삶을 훼방하는 고통의 역경에서나 신의식은 고취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슐라이어막허에 있어서는 죄와 악은 신의 목적의 포괄적인 영역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것은 구원과 연결되는 것이다. 구원은 불완전성을 전제로 한다고 볼 때에 불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은 신의 은총 속에서 신이 원하는 완전성에로의 도달이 가능한 것이다.


Ⅳ. 존·히크의 영형성(Soul-Making)으로서의 신정론


본고의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대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슐라이어막허에 의해서 근대적인 체계적 구성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죤·히크에 의하여 재구성되어 이제는 전통적인 어거스틴형 신정론에 맞서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중요한 신정론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존·히크의 신개념은 근본적으로 고전적이다. 그러나 그는 전통 속에서 그 신의 개념을 사용한 그 주된 모습에서 비판적이다. 전통적 신정론자들은 신의 주권을 주장하는 한편 악에 대한 신의 책임을 방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존·히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인간자유의 남용을 악의 원인으로 볼지라도 솔직하고 진실한 일신론자들은 신이 그러한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했다는 점, 그리고 죄와 고통을 일으킬 상황을 신이 미리 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에 인간을 놓아두었다는 점에 대해서 신이 전적 책임을 져야함을 인정해야 한다. 전통적 신학자들은 창조와 관련하여 신을 비인격적 혹은 下位인격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존·힉은 이런 사실을 한편은 풍부의 원리에서, 다른 한편 죄는 형벌에 의해서 균형을 이룬다는 신플라톤주의적 심미적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동시에 이 사상은 지옥의 교리로 귀결되고, 그리고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악으로서의 지옥개념은 만족할 만한 기독교적 신정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신의 무한하고 자비로운 사랑과 배치된다. 그리하여 존·히크는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에 호감을 갖는다.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세계는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영형성" (Soul-Making)과정으로 디자인되어 시작되었다는 이론체계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레니우스의 견해로는 인간은 원래 그 형상 속에서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구비되어 있었으나 그러나 아직 신의 모양으로까지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 신의 모양이라는 뜻은 이레니우스는 인격적 존재 이상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한정적으로 신적 삶을 반영하는 어떤 소중한 인격적 삶의 질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완전함, 인류를 향한 신의 목적의 성취,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일""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상속자로서의 신의 아들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의 형상 속에서 인격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신의 창조적 작품의 점진적 단계로서의 가장 원초적 재료에 불과하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자발적인 인격으로서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한정적인 신의 "모양" (likeness)으로서의 인격적 존재로 변모하게 하는 인간을 향한 신의 선도이다.


요하닌의 말로서는 형상에서 모양으로의 운동은 동물적 삶(Bios)의 실존단계에서부터 동물적 삶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영원한 삶(Zoe)에로의 고차원적 단계로의 변천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존·히크는 인간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긍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의 계획성취로서의 진화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근대 인류학적 지식의 빛에 의해서 인간창조 개념의 두 단계는 거의 무시하지 못할 기독교적 교리가 되었다. 적어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별되는 두 단계를 인식해야만 한다. 즉 기나긴 진화과정의 산물로서의 "Homo Sapience"의 단계와 그리고 신의 어린아이로서의 갑작스런 혹은 점진적인 정신화 단계인 두 단계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첫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를 창조한 인격적 무한자와의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책임적 인격자로서의 인간발달로 점진적으로 발달해야 가야 한다. 이러한 창조과정은 우리의 인류학적 상상 속에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의 창조적 힘에 의해서 물리적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경과 속에서 그 우주 속에서 유기체적 삶을 살 수 있는 생물을 산출하고 그리고 드디어 유기적 삶으로부터 인격적인 삶으로의 변화발전이 가능케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유기체적 삶의 형태로부터 진화되어 나타났을 때에는 피조물이 신과의 의식적 관계 속에서의 존재가능성을 갖도록 원래부터 만들려 진 것이다. 그러나 창조과정의 두 번째 단계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전능의 힘에 의해서 그렇게 형성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격적 삶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자기 지향적이다. 그것은 신적인 명령에 의해서 완전해 질 수가 없고 오직 세계 속에서 그들의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인간 개개인들의 강제되지 않는 반응과 협동의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결국에는 신약성서에서 말한 소위 "신의 아들"이란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이리하여 존·히크는 인간은 원초적인 무죄상태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전통적인 신화를 더 이상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인간은 원래부터 완전한 인간으로 창조되지 않았던 것이다.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사랑과 함께 신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신과 인격적이고 사랑스런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인 것이다.


인간이 신과의 교제를 위한 시초는 명령에 의해서 신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단계이고, 그 다음은 각 개인의 인격적 투쟁과 성장을 통하여만 성취될 수 있는 단계이다. 이 단계가 바로 영형성(Soul-Making)의 단계인 인격창조의 단계로서 여기서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갖는다. 첫째목적은 신을 위한 우리의 인격적 선택이 자유로운 인격임을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우리 속에 일정한 인격적 자질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은연중에 일어나는 가치판단은 시험을 만나 마침내 그 시험을 정복하고 그리하여 구체적 상황 속에서 올바른 책임있는 선택을 함으로서 선을 획득하는 그 사람은 무죄한 상태나 덕있는 상태 속에서 무로부터 피조된 사람보다는 더욱더 부유하고 가치있는 의미에 있어서의 선이 될 수 있다."


신정론 문제가 가진 미스테리의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계가 영형성의 신적 목적에 이바지할 수가 있을 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보아야만 한다. 신의 "image"속에서 기나긴 진화과정을 통하여 인격적인 피조물로 창조된 인간이 고통없이 신의 "likeness"를 향한 성장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주로부터 인식적 거리(an epistemic distence)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타락은 인격적 무한자와 관련하여 한 인격적 존재로서의 그의 자유행사를 한 대가이다. 그로부터 흘러나온 인간고통은 역설적으로 신적 섭리가운데 한 위치를 차지한다. 비록 신이 악을 방지하기 위해서 세계 속에서 관여할 수 있었을지라도 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히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신은 영형성의 신적 목적을 여전히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첫째로 비록 부당하고 그리고 분명히 무의미한 고통일지라도 만약 우리가 신과의 교제에 필요한 성품을 개발시켜야 한다면 그런 투쟁과 고통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도덕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인과관계의 확고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 만약 신이 부단히 악을 방지하는 일에 개입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발전이 불가능하다.


셋째로 우리가 신에게 어떤 악을 방지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가운데 수반하는 위험한 고갯길이 있다. 어디쯤에서 우리는 신의 개입을 중지시킬 것인가?


이와 같은 존·히크의 신정론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깔려 있다. 즉 신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와 같은 세계에 우리를 놓아둠으로서 오직 이런 세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근본적인 영형성을 시작할 수가 있다. 신이 우리를 이 영형성의 과정을 가지지 아니하고 이 과정을 통과한 것처럼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가 모든 고통과 도전이 없는 세계보다 도덕적 인격의 발달에는 더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고통이 건설적인 목적에 이바지하기보다는 고통과 비극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있다. 나아가 우리는 불행의 사건을 합리화하는 전통적 이론 즉 각자의 고통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정당한 벌이고 이 세계는 악령이 가득하여 인간불행의 과잉은 악령의 작용의 결과라는 주장을 마땅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히크는 실제적 문제에 부딪히고 그리고 그 문제의 성공적인 극복을 통하여서만 어떤 고상하고 가치있는 인간적 특질들이 있을 수 있다는 근본적 직관에 호소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만약 무한히 사랑의 신이었다면 이 세계를 지상낙원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인데 이 세계는 그렇지가 못하므로 따라서 신은 전선, 전지, 전능한 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악의 문제를 신의 반증으로 사용하는 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세계를 생각한다.


예를 들면 흄(David Hume)은 가능한한 안락하고 편리한 집을 짓고자 계획하는 건축가에 대해서 말한다. "창문, 도어, 불, 통로, 계단 등등의 건물전체의 구조가 소음, 혼돈, 피로, 어두움, 그리고 심한 더위와 추위의 재료"로 되었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 건축가를 주저없이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신의 목적이 동물적 삶(Bios)이나 혹은 인간의 생물학적 삶(biological life of man)으로부터 영원한 삶(Zoe) 혹은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영원한 가치있는 인격적 삶에로의 발전이 옳다고 한다면 전능·전선한 신이 인간을 위해 왜 이런 세계를 창조했는 지에 대한 물음은 필요없게 된다. 동시에 왜 이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로 설계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도 사라진다. "흄과 같은 비판은 완전한 유한적 존재의 환경으로서의 천상세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완전을 향한 과정 중에 있는 존재를 위한 환경으로서의 이 세계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 것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신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개념이 옳다면 세계는 낙원으로 되도록 의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성의 발달역사는 그리스도의 모형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존·히크의 결론은 분명하다. 그의 신정론에서 귀결되는 점은 악과 고통이 없는 세계 속에서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이성화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고통과 악이 없는 세계에서는 우리는 구원될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는 악과 고통이 있는 이 세계를 기뻐해야 마땅하다. 악은 단지 외견상 악일 뿐 궁극적으로 선이다. "우리의 신정론은 악의 의미는 신의 목적이 결과적 작용을 하도록 되어 있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인간의 고통과 죄가 인간역사의 종말에 피조물에 대한 신의 목적을 파괴한 것으로서 드러난다면 그 때는 궁극적 조망에서 그것은 악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만약 인간의 고통과 죄가 피조물을 향한 신의 목적달성 역할을 했다면 그 때는 궁극적 조망 속에서 그것은 선에 공헌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스터리의 적극적 가치에 대한 솔직한 호소이다."라고 존·히크는 말한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존·히크가 본 전통적 신정론의 모순점, 존·히크 신정론의 형성과정, 그리고 존·히크의 영형성(Soul-Making)으로서의 신정론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존·히크 신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변호하는 점에 있어서는 전통적 신정론보다 우월함을 드러내고, 그리고 영형성에 이바지하는 악의 도구적 견해를 통해서 이원론을 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즉 그의 신정론에 있어서 도구로서의 악이란 사상은 악의 비극적인 사실이 은폐되거나 혹은 다음과 같은 딜렘마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그의 신정론에 있어서 악이 역사 속에서 극복된다는 도구로서의 악의 견해는 인류역사의 미래지향적인 진보적인 해석(progressive reading)으로서 이는 고대 펠라기우스주의의 경향이다. 둘째는 그의 신정론에 있어서 악은 선의 조건이고 전제이기 때문에 악은 극복될 수 없다는 비관적 해석(pessimistic reading)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 마니교적 이원론의 경향이다. 그런데 후자에 있어서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비극을 재확인하는 결과가 된다. 말하자면 존·히크의 도구적 견해로서의 악에 대한 논법은 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히크는 아우스비츠 사건같은 계획적 대량학살의 비극적인 재난의 고통에 의해서 야기된 어려움에 직면하여, 그의 영형성논의가 가끔 실패하고 있음을 자신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서 그의 이러한 솔직함이 그의 신정론을 후자의 비관적 해석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즉 영형성이 악을 요구하고 악에 의존하게 될 때 가능한 영형성의 조건을 제거함이 없이는 악은 제거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존·히크가 부인하는 이원론적인 견해이다. 이런 어려운 난관에 직면하여 존·히크는 그의 신정론 사상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해결의 개념을 내놓는다. 신이 우리를 인도하는 궁극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고 견뎌야 할 모든 고통과 슬픔과 실패를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존·히크의 이레니우스형의 신정론 해석은 헤겔이 세계의 도덕적 견해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지적되었던 이율배반에 빠지게 되고, 또한 그의 종말론적인 해결은 칸트적인 신과 영혼불멸의 요청설과 다를 바가 없다. 요컨대 존·히크 신정론의 종말론적인 해결은 발전론적인 이레니우스형의 신정론이 대책을 강구하여 미연에 방지해야만 할 바로 그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 결국 영형성을 위한 도구적 악에 근거한 존·히크의 세계의 윤리적 비젼에 대한 옹호는 이레니우스형의 발전적 신정론이 갖는 중요한 중심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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