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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서의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西洋哲學

by 巡禮者 2010. 5. 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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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서의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이 유 택*


1. 들어가는 말


철학사를 빛낸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이데거도 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자기의 중요한 사유거리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인다.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의 본질을 묻는 이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철학함'이다. 철학함으로서의 철학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본 논문은 우선 철학에 대한 부정적 규정이 담겨 있는 두 가지 명제를 선택한다.


첫 번째 명제는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이다. 철학은 그 탐구대상과 방법에 있어서 여타 다른 제반과학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철학의 철학다움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과학의 과학성을 잣대로 삼을 수도 없고 삼아서도 안 된다. 여기서 문제는 철학과 과학의 차이를 하이데거가 무엇으로 보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과학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고찰 결과 드러나는 사실은 하이데거에게 철학의 탐구대상은 제반과학과는 달리 존재자 아닌 존재이며, 그의 과학비판은 과학적대적 입장으로 오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는 "철학은 인간학이 아니다"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철학은 제반과학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다양한 형태로 규정하는 인간학도 아니다. 하이데거가 인간 현존재의 의미와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은, 현존재가 존재의 드러남의 장소이며, 존재가 현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본질을 묻는 것은 인간에 대한 단순한 휴머니스트적 관심 표출이 아님은 물론이려니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세우기 위함도 아니며, 인간의 인간됨의 의미를 그를 넘어선 다른 것, 즉 존재와의 근원적인 근원적 관계성 내지 공속성 안에서 보여 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가 인간의 본질 규정에 얼마간 주력하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인간의 본질 규정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묻기 위한 것일 뿐이다.


철학을 과학과 인간학으로부터 구분한 다음 본 논문은 하이데거가 그것을 철학으로 동일시하는 것, 즉 철학함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스승 후설이 제창한 현상학적 원칙 "사태 자체에로!"를 끌어들인다.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묻는 철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현상학의 이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저 구호 안에 바람직한 철학함을 위한 방법과 조건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함을 위해서 기존의 철학적 문제와 입장들에 대한 지식습득과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철학적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선행해야 하는데, "사태 자체에로!"라는 구호는 그 조건들을 한데 묶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거쳐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철학, 즉 철학함은 결국 인간 존재의 뿌리로서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에 비롯되는 자유 내지 자기해방의 사건임을 확인케 될 것이다.


2. "철학은 철학함이다"


철학적 사유의 대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물음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하이데거에게도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문제는 그의 사유를 끌어가는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이 철학인지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철학은 철학함이다.


그러나 "철학은 철학함이다"는 명제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이 철학함인가?'라는 또 다른 물음밖에 없다. 철학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 역시 간단명료하다.


철학함은 사람으로 거기 있음이다. (중략) 사람으로 있음은 이미 철학함을 의미한다.


이상의 문답에서 드러나듯이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철학함이요, 철학함은 사람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철학이요 철학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떤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비록 철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있다. 왜냐하면 철학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미 철학하고 있다. 비록 철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철학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이 아니라, 사람으로 실존하는 한, 항상, 그리고 반드시 철학하고 있다.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철학함을 의미한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신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철학하는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가 유한한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존립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철학 내지 철학함을 삶과 동일시하는 입장은 많은 난점을 야기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철학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철학 안에 있다면, 다시 말해서 삶이 철학함이요 철학함이 곧 삶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철학 안으로의 진입'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이 담긴 강의록의 제목이 다름 아닌 {철학입문}(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임을 감안하면 우리의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이것은 명백한 자기모순이 아닌가?


이 문제를 하이데거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사람은 그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철학을 하고 있다. 철학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역시 철학 '안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삼스럽게 철학 안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 철학의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런 '철학입문'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의 '밖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철학 안에 있다는 사실 내지 철학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한 형태로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넓은 의미의 철학자이고, 철학자로서 나름대로 철학함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 철학함의 수행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대개의 경우 그것으로부터의 부질없는 도피를 꾀하고 있다. 우리는 '잠재적으로' 철학자일 뿐이다.


마치 우리가 철학의 밖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런 그릇된 인상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이다. 철학이 이미 우리의 존재 자체 안에 있는 것이라면, 저 그릇된 인상은 철학이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철학은 우리 안에 있지만 (대개의 경우, 역주) 억압되어 있다. 철학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며, 그것의 가능한 운동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그렇게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형태로 철학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철학은 언제나 이미 우리 안에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잠을 자고 있다는 것, 즉 우리가 우리의 철학함을 의식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우리가 잠재적으로 언제나 이미 철학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어디에 철학입문의 과제가 존립하는지,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철학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야 하는지 저절로 분명해진다. 철학입문이란 잠자고 있는 철학을 흔들어 깨우는 것, 철학함에 발동을 거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의 철학입문, 철학의 각성을 하이데거는 철학을 '자유롭게 하기'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철학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즉 철학이 우리의 존재에 가장 고유한 존엄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내밀한 존재필연성으로 자리잡혀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철학이 사람의 사람다움, 즉 인간존엄성의 징표일 수 있도록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철학을 흔들어 깨워 철학함에 발동을 걸어야 하는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이데거는 다름아닌 우리의 자유에서 그 대답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렇게 자유로워져야 할 것(=철학, 역주)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철학함을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일깨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자유에 기반을 둔 철학 내지 철학함의 본질을 하이데거는 무엇으로 생각했는가? 무엇이 철학이요, 무엇이 '바람직한' 철학함의 조건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이데거의 적지 않은 규정들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철학을 과학과 구분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철학과 과학을 '새삼스럽게' 구분하는 것은 철학의 철학다움이 과학성을 통해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철학은 애당초 과학의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학문이 아니기에 철학이 무엇인지는 오직 철학 자체에 의해서만 규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인간학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주어진다. 철학이 과학과 다른 것은 물론, 인간의 본질을 다양한 방식으로 규명코자 노력하는 인간학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철학함이다"라는 이 명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두세 가지 명제, 즉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와 "철학은 인간학이 아니다"는 명제의 의미를 우선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철학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규정일 뿐이다.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이데거의 적극적 긍정적 의미규정이 담겨있는 '철학함'이라는 말의 의미가 물어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도대체 철학함이라는 말로 하이데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 가능성들 가운데 필자가 본 논문에서 택한 방법은 그의 스승 후설에게서 비롯된 "사태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현상학적 원칙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하이데거에게 철학함이 철학적 지식의 단순한 습득과 전달 '이상'을 의미하고, 이 '이상'에 대한 요구가 '사태 자체에로'라는 구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라면, 이 구호 안에서 하이데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물음으로써 그가 말하는 철학함의 의미를 짚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는 명제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 보자.


3.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의하면 철학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다. 산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것이요 철학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철학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궁극적으로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고, 철학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것은 삶 자체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다를 바 없다. 왜 철학하느냐는 물음은 왜 사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그 물음에 어설픈 대답으로 목청을 돋우는 것이 공허하다면, 그저 조용히 웃어줌으로서 대답을 대신하는 일은 비겁하다. 특히 철학을 직업으로 택한 자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철학을 하는 것이며 도대체 우리가 그 안에 거주하는 철학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철학함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묻고 또 그때그때 가능한 대답을 주는 것이다. 사는 것이 반드시 삶에 대한 이유를 알고 나서야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왜 사느냐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비교적 덜 헤맬 것임은 분명하리라.


이제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가 우리 안에서 각성시키고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이란 학문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학문인가? 제반 과학과 동렬에 놓여있는 한 학문인가? 아니면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색깔과 무늬를 가지고 다른 층에 속해 있는 학문인가? 만일 철학과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학문이라면 그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하이데거가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그의 스승인 후설의 후임으로 내정되어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행한 교수취임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 특히 그것의 머리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머리말은 데카르트를 인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렇듯 철학 전체는 하나의 나무와 같습니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그 줄기는 자연학이요, 그리고 이 줄기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은 여타 다른 학문들입니다.


이인용에 이어 하이데거는 철학, 데카르트의 경우 형이상학이라는 나무가 뿌리 내리고 있는 토양 자체가 문제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에게 문제는 철학(형이상학)이라는 나무를 나무로서 지탱시켜 주는 토양 자체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느냐인 것이다. 형이상학, 즉 철학이 제반학문의 뿌리라면, 이 뿌리가 거기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는 철학이라는 나무에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함으로써 그것의 줄기와 가지에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나무를 나무로 지탱시켜 주는 것 자체는 나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을 철학으로서 성립시켜 주는 것 자체는 형이상학적일 수 없다.


이처럼 형이상학의 근저에서 그것을 형이상학으로 떠받쳐 주는 '비-형이상학적' 근거를 일컬어 하이데거는 일단 '존재' 혹은 '존재의 빛'이라 한다. 제반학문이 개별존재자를 묻고, 그것의 뿌리로서의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자성에 있어서 묻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존재자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한, 제반학문과 형이상학의 눈에 '존재'는 곧 '비존재'('없음', 즉 '무')일 뿐이다. 존재자의 존재근거로서의 존재, 즉 비존재로서의 무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사물을 보면서 이 봄을 가능케 하는 '빛'의 존재를 대개의 경우 망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빛은 모든 봄의 가능조건으로서 분명히 없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방식이 존재자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에 대개의 경우 무시되고 망각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 자연과학은 물론이려니와 형이상학조차도 그것의 표상적 사유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존재의 빛'은 있지 않은 것, 즉 없음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의하면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자 일반의 근거로 파악했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존재자화된 것이다. 전통 형이상학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존립근거가 자기 안에 있지 않다는 것, 자기가 자기 아닌 다른 것, 즉 하이데거가 '존재의 빛'이라고 부르면서 끊임없이 그것에로의 접근을 시도하는 것, 즉 '없음'이다. 모든 있음은 이 없음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이 근원적 없음 없이는 있음의 사건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이데거는 결코 양보하려들지 않는다. 모든 있는 것의 있음은 그것의 존립근거로서 없음을 반드시 수반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반드시 존재자가 수반하는 없음을 그것이 언제나 자기를 숨기며, 그러나 그 숨김의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비은폐성'(Unverborgenheit, Aletheia)이라 한다.


존재자가 어떻게 해석되든 (중략) 어쨌든 매번 그때마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존재의 빛 안에서 나타난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표상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미 존재가 빛을 밝히고 있다. 존재는 이미 일종의 비은폐성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토록 그것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찾아 헤매고, 그것을 형이상학적 표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경험하려는 이 형이상학 자체의 존립근거, 존재자일반의 존재근거, 즉 없음, 존재의 빛, 비은폐성, 존재의 진리는 하이데거 스스로 솔직히 고백하듯이 "어둠에 싸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들에 대한 사유가 전통형이상학에는 결여되어 있으며 (결여되어 있음에 대한 자각 역시 없었다), 따라서 그 전통 형이상학의 틀 안에 머물지 않고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존재의 진리가 철학이라는 나무의 뿌리인 형이상학을 떠받치고 길러주는 바로 그 밑바탕"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행해지는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망각(존재의 빛과 진리에 대한 물음의 망각은 물론 망각의 사실 자체에 대한 망각)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통렬하기 그지없다.



형이상학은, 그것이 언제나 단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하고 있는 한, 존재 자체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철학은 자신의 밑바탕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이 밑바탕을 떠나고 있는데, 그것도 형이상학을 통해서이다.


형이상학, 즉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Schrittzurück) 그것과 거리를 두어 그것의 근거 자체를 캐묻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사유는 결국 자연스럽게 형이상학이라는 울타리를 떠나게 된다.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사유는 그것으로부터의 '작별'(Abschied)이며 그것의 '극복'(Überwindung)이자 그것의 근거에로의 '회귀'(Rückgang)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탈-형이상학적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를 요구하는 하이데거에게 전통 형이상학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형이상학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극복은 결코 형이상학의 폐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여전히 철학의 첫째로 남아 있다. (중략) '형이상학의 극복'은 형이상학을 없애버리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animal rationale)로 남아 있는 한, 그는 형이상학적 동물(animal metaphysikum)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이성적인 생명체로 이해하고 있는 한, 형이상학은 칸트의 말마따나 인간의 자연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가 왜 그토록 철학을 과학과 구분하려 애쓰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을 제외한 제반과학은,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할 것 없이, 오직 있는 것, 즉 존재자에만 관심을 두어 왔고 두고 있고 또 앞으로도 두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의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한, 그래서 오해되기 십상인 명제가 들어선다.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


과학이 사유하는 것은 오로지 있음일 뿐, 있지 않은 것은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린다. 결과가 손에 잡히는 것, 그것이 인간의 행복이건, 기술적 편리함이건, 건강증진이건, 생산력 제고이건 이 모든 것은 가시적인 결과로 나타날 때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시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 다시 말해서 어떤 다른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유, 아니 돕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유는 모두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되고 결과적으로 '무의미'의 낙인이 찍혀 삶의 영역에서의 퇴출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무엇이 진정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돕는 것인지에 대한 숙고는 그만큼 무시된다.


기술적 편리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생산력이 제고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람다운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와 반성이 없는 '과학적 사고'처럼 맹목적이고 위험한 것도 없다는 것은 지난 세기의 역사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보이지 않고,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 그래서 얼핏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과 손에 쉽게 쥐어지는 것에 가려 은폐되고, 결과적으로 존재(없음)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그것이 지니는 비효용성 때문에 제거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비단 철학의 빈곤만이 아니다. 철학적 사유의 빈곤은 구체적 행위의 빈곤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행위의 빈곤은 결국 삶의 고통과 대지의 때이른 종말을 초래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있는 것과 그것의 효율성에만 집착하는 과학적 사고의 득세, 과학적 관심의 고조와 함께 철학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를 예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철학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기존의 철학사가 보여주듯이 자꾸만 협소해져 왔다. 철학사는 어떤 의미에서 영토박탈의 역사이다. 도대체 철학은 지금 어디 서 있는 것이며 앞으로 어디에 서 있게 될 것인가? 설 땅이 없다면 개간해서 만들어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이데거는 어디서 어떤 땅을 찾아냈는가? 하이데거에게 분명한 것은 철학의 명예회복이 그 동안 제반 과학에 의해 박탈된 영토를 그것과의 맞대결을 통해 되돌려 받는 형태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류에게 이미 도래한 과학과 기술의 시대를 거슬러 과학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근세 이후, 특히 서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술과학적 세계상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고 더욱 그 입지를 강화시켜 나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이데거는 단순한 문명비판론자가 아니며 문명거부론자는 더욱 아니다. 그에게 문제는 과학기술이 판을 치고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관통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 가이다.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말해서 과학기술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것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하이데거는 주지하다시피 '내맡김'(Gelassenheit)이라 한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존재와의 근원적 관계맺음 속에서 성스러움의 영역을 확보하고 보존할 때,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적 미신'에서 벗어나 그것으로부터 '초연할' 때, 다시 말해서 존재에 자기를 '내맡길' 때 비로소 우리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과학과 그것에 의해 개발되는 기술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거꾸로 인간이 과학과 기술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이데거의 도발적인 명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과학을 무시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하이데거 스스로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이 명제는 "과학적대적"이지 않다.


우리의 모든 논의가 과학 적대적(wissenschaftsfeindlich)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학 자체는 어떤 식으로도 거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절대화요구, 모든 참된 명제의 기준이고자 하는 오만은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위의 인용에서 드러나듯이 하이데거가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 사유의 불필요함이나 과학적 탐구에 대한 철학적, 사변적 사유의 우월성이 아니다. 과학적 사유의 필요성을 하이데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우려하고 경계하는 것은 과학적 사유의 부당한 자기 확대와 자기주장, 과학적 세계상의 절대화이다. 어떤 식으로든 측정 가능한 것만을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머지는 '비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지평에서 축출하려는 '과학적 맹신'에 대한 항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양화하려 드는 모든 과학적 시도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담겨진 의미를 길어내기 위한 한 가지 가능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 과학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비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는 바로 거기에 과학적 사유의 불충분함과 옹졸함이 놓여 있다. 과학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철학을 송두리째 대체할 수 없고, 철학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과학이 아닌 이상, 과학의 과학성을 닮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철학의 본질이 자기 아닌 다른 것, 즉 과학과의 비교를 통해서 드러날 수 없고, 따라서 과학성의 요구충족을 통해서는 철학의 철학다움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철학은 과학이 아니라, 그저 자기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방식 그리고 관점을 가지고 수행하는 '철학함'일 뿐이다.


4. "철학은 인간학이 아니다"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이년이 흐른 후 펴낸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라는 책에서 하이데거는 인간학이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지에 대한 칸트의 물음들, 즉 특수 형이상학 (metaphysica specialis)의 세 영역 (합리적 우주론, 합리적 심리학, 합리적 신학)에 해당하는 이들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게 철학의 궁극적 물음은 인간학적 물음이다.


철학적 인간학으로서의 철학의 관심사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을 동식물과의 차이에서 밝힐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본연의 가능성과 당위성의 해명에 놓여 있다. 하이데거는 이들 가능성과 당위성이 "우리가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근본태도에 근거한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학적 철학이해에 반기를 든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오늘날 인간학은 더 이상 (철학의, 역주) 한 분과가 아니다. 인간학이라는 말은 현대인이 자기와 전체 존재자에 취하는 태도의 근본조류를 지칭한다. 이러한 근본태도에 의거해서 인간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만이 비로소 인식되고 이해될 뿐이다. 이제 인간학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진리를 찾아 나설 뿐 아니라, 무엇이 진리 일반을 의미할 수 있는지 마저 결정하려 든다.


위의 인용에서 드러나듯 하이데거가 인간학 내지 철학의 인간학화에 반기를 드는 것은, 그의 과학비판이 그런 것처럼, 그것의 절대화와 오만에 대한 우려 때문이지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초월철학과 함께 근대 주체성 형이상학의 바탕 위에 서 있는 "철학적 인간학의 이념에 대한 비판적 숙고"를 통해서 하이데거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우선 그것의 무규정성과 내적 한계이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 예컨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서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것은 그에 대한 어떤 가능한 대답이 아니라, 그 물음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존재의 가장 내밀한 유한성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는 철학적 인간학은 이 '유한성'의 문제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문제의 문제성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왜곡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은 인간의 유한성을 전제할 뿐, 그것 자체의 의미를 명료하게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철학적 인간학이 인간의 본질에 관한 많은 귀중한 지식들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인간의 유한성 자체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은폐할 뿐이며, 주체성형이상학과 결탁하여 다양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산출하고 있으나 이는 결국 우리 삶의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이데거가 보기에 철학적 인간학은 어떤 다른 시대보다도 많이 인간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의 필요성은 그에 비례해서 더욱 절박해질 뿐이라는 것이다.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적 인간학이 묻지도 않고 물을 수도 없는, "인간보다 더 근원적이고" 유한한 인간 존재를 가리켜 '현존재'(現存在, Dasein),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간 안에 있는 현존재"라 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의 조건 내지 근거를 지칭하는 이 '현존재'에 대한 물음은 "원칙적으로 인간학적이지 않다." 모든 인간학은, 설령 그것에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언제나 인간의 근원적 존재, 즉 현존재를 전제할 뿐 그것 자체의 의미와 구조를 문제시 하지는 못한다. 인간학의 온갖 현란한 문제제기와 다양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가 그토록 집요하게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참된 본질이 다른 존재자와의 종차를 통한 규정을 통해서는 접근불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본질은 다른 존재자가 아닌, 존재자와의 '차이'가 제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존재와의 근원적 관계성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있게 물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그의 강의 {형이상학 입문}(193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존재의 본질과 (존재)방식은 존재의 본질로부터만 규정될 수 있다. (중략) 인간이 누구냐는 물음은 언제나 인간이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인간학적 물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탈-자연학적 (meta-physische) 물음이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본질적으로 '자연학'(Physik)에 머무는 전통 형이상학의 영역 안에서는 충분하게 물어질 수 없다.)


{세계상의 시대}(1938)라는 글에서 하이데거는 인간학이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즉 인간과 존재의 근원적 관계를 보지도 못하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도 문제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본질규명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의 지적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물음의 불가능성이야말로 철학적 인간학의 존립근거라고까지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역설적이게도 인간학의 종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학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서 그가 누구인지를 물을 수 없는 그런 인간해석이다. 인간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인간학은 스스로 동요와 패배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 가능한 것이 오직 "인간 안에 있는 현존재" 때문이라면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의미와 구조에 대한 물음은 인간학적 물음이 아니라, '기초존재론적' 물음이다. 철학적 인간학을 현존재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기초존재론과 구분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기초존재론의 전개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에 대한 기존의 대표적인 인간학적 정의, 즉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보는 고대철학의 정의와 "하나님의 모상"으로 보는 기독교 신학적 정의를 각각 비판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전통적 인간학의 중요한 근원들인 그리스의 정의와 신학적인 실마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한 본질규정 안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망각된 채로 남아 있으며, 오히려 이 존재가 다른 창조된 사물들의 눈앞에 있음의 의미로 '자명하게' 개념파악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실마리는 근세의 인간학에서는 사유하는 사물, 의식, 체험의 연관에서 출발하는 방법적인 출발점과 뒤엉키게 된다. 그러나 사유행위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 또는 다시금 묵시적으로 '자명하게' 그것의 '존재'는 어떠한 물음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 그런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한, 인간학적인 문제틀은 그것의 결정적인 존재론적 기초에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기독교 신학, 그리고 근대의 인간학적 인간 이해에 공통적인 결함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무규정성'에서 찾아진다. 즉 그들은 한 결 같이 인간의 존재를 일종의 사물적 있음, 눈앞에 있음(Vorhandensein)으로 전제하고 각종 물음과 답변을 주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하이데거가 서양철학 전체를 부당하게 단순화하여 마치 모든 인간이해가 '인간학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의 인간이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가 행하는 비판에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지 모든 고대철학자가 아니다. 예컨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위시한 초기그리스 철학자들의 인간이해에 하이데거는 경탄을 금치 못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 소화하여 자기사유의 발판으로 삼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들의 인간이해야 말로 그리스철학적 인간이해의 전형이며, 이들의 이해내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적 전통, 그리고 로마시대의 스콜라 철학을 거치면서 왜곡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변형과정을 하이데거는 그의 {파르메니데스} 강의에서 'zoon logon echon'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적 규정에 따르면 인간은 to zoon logon echon이다. (중략) zoon은 '살아있는 것'(Lebendes)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생명'(Leben)을 후기그리스나 로마시대 혹은 근대적 의미의 '생물학적', '동물학적' 생명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것'(Das Lebende)은 그것의 존재가 자연(physis), 즉 자기를 스스로 드러내고 밝힘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physei on)을 의미한다. 인간본질에 대한 이와 같은 그리스적 규정은 물론 로마인들에 의해 금새 다르게 해석되었다. zoon은 animal로, logos는 ratio로.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animal rationale)이라는 것이다. 근세적 사유로 접어들면서 ratio는 주체성의 본질, 즉 인간의 자기성으로서의 이성(Vernunft)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칸트에게도 인간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짐승'(Vieh, animal)을 의미한다. 우리가 zoon을 근대생물학적 의미의 '동물' 혹은 '생명체'로 이해하게 되면 그 때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적이 아닌 로마-근세적으로 사유하는 셈이다. 모든 인간학은, 그것이 철학적이건 과학적, 생물학적이건 할 것 없이, 인간을 '사유하는 동물'로 파악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적 인간학에서와 같이 인간에 대한 다양한 본질규정에 어떤 새로운 규정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전제하고 있는 것, 즉 인간의 존재 자체를 새롭게 문제시하는 것이다. 이 존재는 모든 가능한 철학적 인간학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이미 '이해되어' 있다. 철학적 인간학은 물론 모든 다른 학문에 선행하는 존재이해 없이는 어떤 물음도, 나아가 어떤 대답도 불가능하다. 하이데거에게 문제는 이 존재이해가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연유하며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5. "사태 자체에로!"


제반과학은 물론 전통철학까지도 - 그것이 철학적 인간학이건 아니면 다른 철학적 조류이건 - 사유하지 않았고 또한 사유할 수도 없었던 것, 하이데거가 그토록 철학의 사유거리 혹은 사유의 문제(Sache des Denkens)로 요구하는 것, 그것은 다름아닌 '존재' 그 자체이다. 철학이 물을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존재자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무'라 일컬어질 수밖에 없을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는 분명히 존재자가 아닌 한, 비존재, 즉 없음이지만, 이 없음, 무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며 이 존재야말로 철학이 "사유할 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와의 '차이' 속에서(존재론적 차이) 그 숨겨진 의미와 진리를 묻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이 다른 학문들에 양보할 수 없는 고유한 과제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물음은 임의대로 제기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물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근본물음을 의미한다.


1907년 열 여덟 살의 나이로 존재와의 씨름을 시작한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묻고 사유하는 일, 즉 그의 철학함은 자신의 말마따나 삶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의 사유거리, 사유의 문제가 오직 하나, 즉 '존재'라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지만, 이 존재라는 사유거리를 사유하는 관점과 방식까지 유일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변주곡과도 같은 그의 사유의 길은 '존재'라는 목표를 향해 똑바로 걸어 나간 직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존재'라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한 산행에 가깝다. 산행의 목표는 단 하나, '존재'라는 산봉우리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까지 하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중에는 얼핏 넓고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멀리 돌아가는 길도 있고 좁고 험하지만 보다 빠른 길도 있고 도중에 아예 끊겨 버리는 길도 있을 것이다. 만년에 이르러 스스로 고백하듯이 하이데거는 자기의 사유의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던 존재가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진정 좌절의 철학이요 도상의 철학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존재를 향한 산행 그 자체였지 산봉우리의 정복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물음으로 남고, 또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을 안내했던 '존재'가 그에게 사유의 매 단계마다, 존재를 향한 산행의 매 순간,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던가 하는 것이다. 비록 그 모습이 사유의 단계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남으로써 하이데거의 존재규정이 일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일이 있다면, 그러한 다양한 규정들 근저에 놓여있는 것, 즉 철학적 사유의 과제와 그 자세에 대한 하이데거의 기본견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기본견해를 필자는 그가 그의 스승 후설한테서 배운 "사태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모토에 압축시켰다고 본다.


문제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사태 자체, 즉 존재이고, 철학적 사유의 과제가 이 존재에로 육박해 들어가는 데 존립하는 것이라면, 하이데거가 이러한 육박을 어떤 식으로 보았느냐 하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방법 내지 원칙을 제시하는 구호인 "사태 자체에로!" 아래에서 하이데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우리는 1923/24년 겨울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행한 현상학 강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이 어느 특정 철학이론이 아니라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 이해되고 수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현상학의 가능적 성격에 대한 이러한 강조를 통해 하이데거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어진 현상과 사태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개방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자기의 현상학 강의를 통해서 현상학에 대한 잡다한 정보, 본질을 꿰뚫어 보는데 필요한 트릭, 어떤 일정한 프로그램이나 체계 등은 아예 기대도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대는 참된 철학함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그 것의 종말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참된 철학적 사유의 제일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잡다한 철학적 지식의 수집이 아니라, 참되고 올바른 물음제기를 위한 열정이다. 어떠한 물음도 무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모든 물음은 묻는 자 자신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이데거에게 선입견없음에 대한 요구는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선입견 없음은 이상향일 뿐이다. 아무런 선입견도 가지지 않겠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큰 선입견이다.


너무 맑은 물속에서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아무런 선입견도 없는 순수 진공 상태에서는 어떤 철학적 물음도 철학적 사유도 나올 수 없다. 새가 날기 위해서는 공기의 저항이, 우리가 걷고 뛰기 위해서는 흙과의 마찰이 필요한 것과 같이, 철학적 사유는 선입견, 즉 어떤 앞선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런 선입견도 없다면 아무런 철학적 물음도, 아무런 철학적 사유도 없다. 따라서 철학함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입견으로부터의 단적인 해방이 아니라, 주어진 어떤 사태 자체와의 씨름을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선입견들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일 뿐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렇게 선입견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를 열어둠,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사태 자체를 향한 열정을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철학함의 제일조건이다.


선입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심스레 사태 자체를 제대로 묻고자 하는 열정이 철학적 사유의 첫 번째 조건이라면, 철학이라는 특정 학문 속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태도, 다시 말해서 철학을 우상화하고 철학만이 이 시대의 기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는 두 번째 조건이다. 내가 혹시 철학이라는 우물 안에 들어 있는 한 마리의 개구리가 아닌지에 대한 염려는 자연스레 다른 학문에 대한 개방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이러한 타학문에 대한 관심은 결과적으로 풍요로운 철학함을 약속한다. 철학 안에만 안주 할 때, 제아무리 많은 철학책과 논문을 수집하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우리가 도대체 뭘 하는지, 뭘 하자는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과도한 자료수집은 지식의 과잉을 초래하고 지식의 과잉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현존재가능성"의 걸림돌로 작용할 뿐이다.


끝으로 하이데거가 철학함의 세 번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실존의 성숙"이다. '실존의 성숙'은 우리가 주어진 사태와 문제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리거나 섣부른 주장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이데거는 어떤 철학적 문제의 불확실과 불투명을 형식논리적 오류나 그 밖의 가능한 이유를 들어 제거해버리지 않고 몇 년씩 부둥켜안고 그것과 씨름해 나가는 동안 우리의 실존은 더욱 풍요롭고 성숙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올바른 철학함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하이데거가 행하는 후설비판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후설의 "선입견없음"에 대한 요구는 실현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선입견이자 독단이다. 철학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입견없음의 헛된 이념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선입견의 우월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태 자체와의 씨름을 통해서 제거가능한 선입견들을 서로 협력하여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선입견의 부재"(Vorurteilsfreiheit)가 아니라 선입견에 대한 열려있음(Freisein für die Vorurteile)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 제거는 단순히 '사태 자체에로'라는 구호를 소리높여 외침 혹은 사태 자체의 본질직관을 위한 의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사태자체에로'라는 현상학적 원칙이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개방성, 즉 사태자체와 타학문, 그리고 가능한 문제들에 대한 개방성 외에도 무엇이 사태 자체인가라는 물음의 제기이다. 현상학적 철학의 탐구대상이 '현상'이라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나, 문제는 바로 이 사태 자체로서 주어져 있는 현상이 무엇으로 해석되느냐 하는 것이다.


현상학이 다루어야 할 '현상'을 하이데거는 후설과는 달리 '의식현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현상학의 일차적 과제는 의식현상의 분석과 기술이 아니라,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의 존재를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존립한다. 의식(Bewußt-sein)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존재하는 한 방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의식의 현상을 분석하기에 앞서, 그 존재자의 존재방식을 그 구조와 의미에 있어 문제삼고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를 묻는 현상학은 존재론이요, 이 현상학적 존재론은 해석학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현상학적 해석학으로서의 존재론의 탐구가 단순한 의식현상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총체적 구조와 의미를 겨냥하고, 이 존재분석이 모든 다른 철학적 물음과 조류, 즉 가능한 영역존재론의 바탕을 이루는 한 "기초존재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탐구대상, 즉 불안, 염려, 죽음, 양심 등의 현상이, 그가 누누이 강조해 마지 않듯이, 어떤 경우에도 인간학적 혹은 실존주의적으로 오해되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육박해 들어가고자 하는 현상으로서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사유로서의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부하고 탐구하는 과학과 인간의 여러 가지 본질적 속성들의 기술에 주력하는 철학적 인간학을 훨씬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하이데거가 "사태 자체에로!"라는 현상학적 원칙 아래에서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를 간단하게나마 밝힘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1925년 여름 마르부르크에서 행한 강의 {시간개념의 역사 서설}에서 하이데거는 후설 현상학의 세 가지 발견들(지향성, 범주적 직관, 선험성)에 대한 논의를 거친 다음 현상학을 그 바탕에서부터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원칙으로서의 "사태 자체에로!"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문제시한다. 모든 학문적 탐구에 탐구영역과 특유의 관점, 그리고 방법이 있기 마련이라면 현상학으로서의 철학을 안내하는 저 원칙을 통해 우리가 지키고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단순한 철학적 구성과 뿌리없이 부유하는 물음들의 불식을 위해 출현했던 이 "전투구호", "사태 자체에로!"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우선, 후설 현상학의 본래적인 주제가 논리학과 인식론이었고 현상학적 탐구가 원래 과학적 논리성을 지향했음을 상기시키고 그 것의 탐구대상이 궁극적으로 지향성의 문제였음을 강조한다.


후설 현상학의 탐구영역과 대상, 방법을 규정한 하이데거는 드디어 '현상'(phainomenon)과 '학'(logos)을 각각 "자기를 드러내는 것"과 "어떤 것 그 자체로 보여줌"이라 함으로써 자기가 이해하는 현상학이 스승의 그것과 차이가 있음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은 의식에 주어진 지향적 현상에 대한 분석과 기술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그 것에 의거해서 보여주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현상학적 원칙을 표현하는 구호 "사태 자체에로!"는 현상학을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상학이라는 제목이 다른 과학들의 제목과 - 신학, 식물학 등 -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그것이 이 학문의 탐구대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단지 탐구되는 것 혹은 탐구되어야 할 것의 탐구 방법, 즉 어떻게(Wie)만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학은 "그것이 철학적 주제의 경험, 파악 및 규정양식의 지칭으로 국한되어 사용되는 한 일종의 방법적 제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그 당시 철학계의 대부였던 리케르트를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일반적으로 말해지지 않을 수 없다. 현상학은 직관의 철학이고자 하지도 않고, 직접적인 것의 철학이고자 하지도 않는다. 현상학이 원하는 것은 결코 이런 (리케르트적, 역주)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 그저 사태일 뿐이다."


6. 맺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하이데거가 철학을 무엇으로 이해하며 바람직한 철학함의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시도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하이데거가 그의 존재사유를 통해 끊임없이 거기에로 육박해 들어가고자 하는 사태 자체는 존재자를 탐구하는 과학의 '객관적' 사태도 아니고, 타 존재자와의 종차를 통해 규정 가능한 인간 본질도 아니며, 모든 것이 거기로 귀착되는 순수한 의식현상도 아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지향하는 사태는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근원, 즉 존재의 고향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잡다한 철학적 지식의 축적과 전파, 전수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발원하고 거기로의 회귀를 꿈꾸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 고향에서 누리는 아늑함과 자유로움에 대한 희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기분 내키는대로 시간을 때우는 자의적인 소일거리나, 우리가 언제라도 손쉽게 책에서 빼낼 수 있는 (철학적, 역주) 지식의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원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요, 어디서나 집에서와 같이 있고자 하는 충동이다." 그러나 집에 있고자 하는 충동의 지향점이 궁극적으로 집이 주는 아늑함과 자유라면, 현실적인 무용성과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철학함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결국 고향에서의 자유로움, 그것을 향한 열망이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하이데거에게 철학, 즉 철학함은 자유에서 비롯된 원초적 사건이자 자유를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몸부림이 궁극적으로 허망하다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철학함이 지니는 이러한 허망함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쓸모도 없어 하녀의 비웃음을 살수밖에 없는 사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제적 무용성, 불필요가 철학의 필연성을 배제하지도 또 할 수도 없다고 본다. 이제 철학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필연적인지, 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그의 철학적 잠언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이 시대에 가장 물을 만한 것에 대한 촉구로서의 철학은 불가피하게 가장 낯선 것이 된다. 바로 그렇기에 철학은 가장 필연적인 것이다. 필연적인 것은 단순한 것에서 가장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단순한 것을 가장 어려운 것이라 부른다. (이하 생략)


모든 필연성(Notwendigkeit)은 궁핍(Not)에 근거한다. 존재의 진리와 진리의 존재에 대한 가장 예리한 숙고는 그것의 필연성을 가장 심각한 궁핍 안에 가진다. (중략) 철학의 필연성은 이러한 숙고로서의 철학이 저 궁핍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견뎌 냄으로써 인간 역사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 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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