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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계시이해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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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라너의 계시이해


1. 머리말

그리스도교는 자연종교(自然宗敎)가 아니라 계시종교(啓示宗敎)라고 자처하고 있다.1) 그리스도교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작된 역사적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자연적 종교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인간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하느님의 계시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개념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데에서 열쇠 역할을 하는 일차적 기초개념이다.2)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 신앙은 계시를 전제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성취는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세계 속에서 이토록 중요한 실재로서의 계시가 하나의 주변현상이 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근세이래 급격하게 일기 시작한 종교비판은 계시비판을 포함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종교성을 근본으로부터 의문에 처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3) 그리고 신학 안에서조차 계시란 단어가 성대한 양식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공허하게 느껴지기조차 하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계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계시개념은 중세신학 안에서 비로소 전문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4) 중세신학의 계시개념은 지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구원은 인간의 최고 능력인 이성을 위한 선(善)으로 나타났으며, 구원은 인식 가능한 세계를 지성적으로 직관하는 속에서 추구되었다. 계시가 구원의 인식을 가지고 오고 구원으로서의 인식을 가능케 한다는 계시관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지성주의적 계시관은 교시적 계시(敎示的 啓示) 모델로 이끈다. 교시적 계시 모델 속에서 계시는 구세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가르침의 내용애 국한되는 양상을 띤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계시개념이 구세사의 정보적이고 교리화되는 이론 부문에로 국한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계시는 자연적 실재이거나 초자연적 실재에 관한 하느님으로부터의 가르침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교시 이론적 계시관 안에서 한편으로는 계시개념의 협소화가 발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계시사가 내적으로 유기적인 가르침으로 파악된다. 이 교시 이론적 계시관도 근세 이래 신앙의 신비를 초자연적 지성의 신비로 파악하는 데로 이끌었다. 신앙의 신비가 초자연적 지성의 신비로 규정되었으며 신앙이란 자연적 지성능력으로 파악되지 않는 계시된 진리를 순명으로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계시란 초자연적 가르침인 교리의 전수로 파악되었으며 계시의 경위는 하느님에 의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지성적 개념으로 파악된 진술 명제로 해설되었다. 근세적 계시비판은 이렇게 교리화된 계시개념에 가해졌으며, 오늘날 계시의 문제가 새로운 각도에서 처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계시관의 새로운 전기를 이룩하였다.5) 이 공의회는 구세사의 교시부분만이 아니라 전 구세사건을 하느님의 계시로 파악함으로써 계시개념을 그리스도 신앙이 입각하고 있는 포괄적 기반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계시 밖에서는 어떠한 구세사도 존재하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계시가 어구상의 내용 전달이나 인간이 접근 불가능한 내용에 관한 하느님의 교시로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실제적인 인격적 자기 전달로 규정된다. 계시가 개념적인 지성주의적 진리계시에 그치지 않고 인격적 구원실재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한다. 이러한 계시개념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교시적 계시관과는 다르게 파악하도록 이끈다.

독일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계시의 주제를 그의 종교철학적이고 신학적 사상 속에서 깊이 있게 구명하였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인간 존재의 특정부문만이 아니라 전 차원을 규정하는 실재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을 외부로부터 규정하는 실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층부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실재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계시와 인간 규정이 라너에게서 독특하게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라너의 계시이해는 인간학적 전환을 신학 안에로 이끌어 들이려는 시도의 산물인 그의 초월 신학사상의 이해를 통해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6)


  필자는 이미 라너의 신학사상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으며 그 속에 그의 계시관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7) 이 글에서는 모든 신학적 주제의 근거와 기초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한 신학 주제인 계시가 라너에게서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이 글은 선행하는 연구 결과 중에서 계시와 관련된 내용을 확대 부언하여 한 편의 논문으로 작성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이글에서는 먼저 라너의 활동 초기인 1940년대 초에 발표된 종교철학서 안에 담긴 계시 규정의 실상을 서술하낟. 이어서 라너의 계시관의 핵심부분이라 할 수 있는 초월적 계시와 그 역사적 중재의 파악 경위를 서술할 것이다. 끝으로 구약과 신약의 성서적 계시사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가 라너에게서 어떻게 파악되는가를 구명할 것이다.


2. 종교철학적 계시 규정

라너는 1941년에 발간된 종교철학서 「말씀의 청자 Hörer des Wortes」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자유로운 계시의 사실성과 함께 인간의 계시 수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8)  구체적으로 라너의 계시 발생의 제시경위는 존재에 대한 질문(Frage nach dem Sein)을 제기해야만 필요성의 형이상학적 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라너의 후기 신학작품에서 부연되고 있는 초자연적 계시 규정의 초기 형태를 대하게 된다.9)


  2.1 라너에 따르면 인간이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그의 유한성을 단적으로 제시한다.10) 인간은 자신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세계에 피투된 존재이면서도 단순히 현전하지(vorhandensein) 않고 현존한다(dasein). 인간은 그의 인식행위를 성취할 때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들을 넘어서 존재(sein)를 지향하는 초월을 이룩한다. 그런데 존재, 절대존재 자체는 자신을 인간 인식의 직접적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지성의 본질로서의 전취의 절대폭(絶對幅, absolute Weite), 지평(地平, Horizont)으로서만 제시할 뿐이다.11) 전취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별 대상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 개별 대상의 하성(何性, quidditas : Washeit)을 추상해 내는 지성적 가능성이다.12) 이 전취는 매 인식작용 속에서 개별대상을 능가하여 존재를 지향하는 초월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별 대상의 유한성 인식은 존재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라너는 인간의 매 주체작용마다,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긍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식의 필연적이고 따라서 항상 이미 성취된 조건으로서 이 전취 속에…절대존재의 실존이 함께 긍정되고 있다. 가능한 대상으로서 전취의 폭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이 함께 긍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가 전취의 폭을 남김없이 채울 것이다. 이러한 의미,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전취는 하느님을 지향한다.13) 여기서 인간의 절대존재에 이르는 통로는 그가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주어져 있다.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개별 존재자는 전취가 지향하는 절대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유한한 것으로 인식되는데,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절대존재는 절대폭을 남김없이 채움으로써 인식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라너는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절대존재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 속에서 추후적으로 반성된다고 본다. 인간은 유한한 대상에 항상 내포되어 있는 제한성․부정성을 전취 속에서 명시적으로 만듦으로써만 절대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너는 인간이 모든 유한성을 부정하면서 유한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가운데에서만 무한성 속에서의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무한성 자체는 인간의 유한한 정신에 은폐되어 머문다고 보고 있다.14)


  2.2 하지만 라너는 단순히 인간의 유한성과 하느님의 은폐성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기본구조를 보다 깊이 분석하려는 의도하에 하느님의 자유로운 현시성을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이 역시 고찰의 출발점이 되기는 하지만 정신의 또 다른 기능인 의지(Will)가 명시적으로 분석과정에 등장한다.15)


  라너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 필연성에서부터 유한한 현존재 자체의 피투성의 필연성을 이끌어 낸다.16) 그런데 라너는 현존재의 피투성의 필연적 긍정을 인간이 자기 현존재 자체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인간)는 자신의 피투성(Geworfenheit)을 필연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투성 속에서 그리고 피투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현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17) 인간이 세계 안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우연적 사실의 긍정이 불가피하게 필연적이기 때문에 인간 현존재의 우연성 속에서 절대성이 현시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자기 준재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을 라너는 말하려 하고 있다.


  이 점은 라너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유한하고 피투된 현존재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절대 존재에로의 초월도 오로지 비필연적인 우연한 존재자에 대한 관계의 필연성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말이다.


  라너는 우연한 현존재를 절대적으로 정립하는 요체를 의지속에서 보고 있다.18) 이러한 정립은 단순한 정적(靜的) 이해일 수는 없고 의지 작용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연한 것의 인식적 정립의 근거는 우연히 인식된 것 자체에 놓여 있지 않고 정립(定立, Setzung)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식적 정립의 근거는 의지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일반에로의 초월이 결국에 가서는 의지를 통해서 작용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라너는 의지를 인식의 내적 소인으로 규정한다.19)


  라너는 우연한 현존재를 의지적으로 긍정하게 되는 필연성에서부터 절대적 존재의 수용과 존재일반의 조명성을 추론해 내고 있다. 라너에 의하면 우연한 현존재의 절대정립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자에게서 나온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 처신은 자유로운 정립의 추성취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통찰에서 존재와 인식을 동일시하는 초월철학적인 존재관이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라너의 논증양식은 이 관찰을 확인해 준다. 우연적인 현존재의 이 절대정립이 우연적이라면 존재 자체의 원칙적 조명성이 지양될 것이다. 우연한 것의 정립의 필연성이 자유롭지 않다면, 이 정립이 어둠에 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조명되지 않은 근거에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20) 이러한 통찰에서부터 라너는 의지를 자유로운 정립의 정립된 추성취(der gesetzte Nachvollzug einer freien Setzung)라고 규정한다. 라너는 인간의 저 의지적 정립은 하느님의 정립이라고 추론해 내고 있다. 인간인 현존재의 이 자유롭고 본원적인 정립은…절대존재의 정립, 하느님의 정립일 수밖에 없다.21)


  라너에 의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이고 절대적 처신은 자유로운 창조주를 긍정함을 내포한다. 인간이 자기의 피투성을 필연적으로 긍정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처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적 정립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가 순수 존재의 자유로운 힘에 의하여 지탱된다고 알고 있다.22) 이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유로운 의지력으로 유한한 존재자를 지탱하여 준다. 하느님은 자유롭고 강대한 인격체이다. 이어서 그는 창조를 절대자 자신으로부터 발해진 자유로운 말씀이라고 규정한다.23)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자유로운 인격체로 제시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개현의 가능성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자유가 모든 인격체의 특징을 드러낸다면, 한 인격체는 의지 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다른 인격체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인간은 정신으로써 자유로운 강대한 인격체인 하느님과 대치하여 있다. 그런데 라너에 따르면 유한자의 자유로운 정립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창조력에 온전히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 창조는 결코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의 방향에 대한 명료한 전 결정(前決定)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의 초월 속에서 개현된 가능한 대상들의 지평은 직접적인 하느님의 관조가 아닌 모든 것보다 원칙적으로 광범하다.24) 여기서부터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이기는 하나 아직 궁극적으로 충만되지 않은 추우러 속에서 자유로운 하느님 앞에 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일차적인 존재에 대한 질문 속에서 이미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자유로이 행동하실 가능성 앞에 서고 이처럼 가능한 계시의 하느님 앞에 선다고 추론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자신의 기본태세의 힘으로 항상 하느님 앞에 서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계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25) 인간은 정신이나 자유로서, 하느님이 계시할 것을 요청하지 않으나 그의 침묵이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침묵하는 하느님 앞에 선다.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가능한 말씀을 필연적으로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학적 의미에서의 계시는, 하느님이 자기를 개현하거나 아니면 폐쇄하거나 하는 자유로운 결단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은폐된 본질의 사실적 개현으로서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바로 이러한 계시는 인간 기본태세의 힘으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요구할 권리가 없다.26) 신학적 의미에서의 게시는 인간에게 부채(負債)가 아닌 순수한 선물로 머문다. 결국, 하느님의 절대존재는 유한한 존재에 대하여 자유로운 존재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기 개현으로서 계시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려는 시도는 인간 현존재의 구조를 보다 상세히 분석하려는 결의하에서 착수되었다. 그런데 분석 결과는 중요하다.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초월이 오로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처신 속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27) 개별 대상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결국에 가서는 인간 자신의 자기 구정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많은 개별적인 결단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자기 자신과 하느님께 대해 처신하고 있다.


  2.3 「말씀의 청자」에서 라너는 인간의 역사성(歷史性, Geschichtlichkeit)을 인간의 기본태세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여기서부터 역사(歷史, Geschichte)의 형이상학적 규정을 연역해 낸다.28) 인간의 역사성 연역은 하느님의 계시가 발생하는 장(場)을 규정하는 것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라너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인식구조 분속에 임하였다. 분속 결과로 역사성이 인간 정신의 고유성으로 제시되기에 이른다.


  라너는 인간의 역사성을 시공간을 형성하는 인간의 육신성(Leiblichkeit)으로부터 연역하였다.29) 그런데 그느 질료적 육신의 고유성에서부터 연역된 역사성을 논하는 이외에 진정하고 필연적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행위가 역사적이라는 것을 밝힌다. 인간이 자유로운 행동자인 한, 하느님 지향의 초월에서까지, 즉 절대자에로의 그의 관계 규정 속에서도 자유로이 행동하는 한, 그는 역사적이다. 이 소인은 인간의 역사성에로 자명하게 본질적으로 속하여 있다.30) 여기서 역사성이 자유의 유일회성과 비예견성 속에서 비로소 발생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역사성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상호 주체적인 관련 속에서만 소여되어 있다는 점을 라너는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역사성이 인간 현존재의 본질적 고유성으로 규정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31)


  인간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정신이라는 인식에서부터 가능한 계시가 발생할 장(場)도 규정될 수 있다. 라너는 애당초부터 이 장을 인간의 역사라고 지적한다.32) 여기서 역사는 설계 가능하고 계산 간으한 일반적 법칙성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는 지금까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발생한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성으로 규정된 구조가 아니라, 특수한 것, 새로운 것, 예기치 못했던 것, 아직 있어보지 않았던 것이 발생하는 장이 역사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 전체를 관통해야 하는데, 인간의 본질은 유한한 정신으로서 바로 역사적이기 때문에 계시가 역사 속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자유로운 행위로서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역사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계시는 개인적 인간 역사의 모든 개별적 순간들 속에서 동일하게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계시를 파악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의 역사의 특정한 시점을 향해야 하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계시의 역사성은 인간의 전체 역사의 범위내에서 시공간적으로 고정된 사건으로 기대할 수 있다.


  개별적인 인간은 전인류의 지체인 한, 역사적 존재로서 이 인류의 역사를 향해야 한다. 인간은 역사에의 정향을 인간 정신의 역사성을 통하여 이미 취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이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본성의 힘 때문에 본질적으로 역사에 정향되어 있다.33)


  하느님의 게시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로써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계시를 청취하여야 한다고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자유 속에서 가능한 계시의 자유로운 하느님 앞에 선 취득적 정신성의 존재자이다.…인간은 그의 역서 속에서 자유로운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이다.34) 인간은 가능한 자유로운 계시를 위한 순종적 가능태이다.�35)

3. 초월적 계시 규정

라너는 초기 저서인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이 하느님 지향의 초월자로서 항상 하느님 앞에서 생활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계시가 인간에게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신학자로서 라너는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초월성은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서의 은총을 통해서 이미 초자연적으로 들어 높여진 초월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라너에게서 은총을 통해 고양된 인간 존재의 기본처지성은 초자연적 실존(das übernatürliche Existential)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 라너는 바로 이 초자연적 실존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동반한다고 보고 있다.36) 여기서 라너가 말하는 계시는 초자연적 계시의 초월적 국면, 또는 초월적 계시(transzendentale Offenbarung)로 지칭되고 있다.


 3.1 하느님이 계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이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서 도착하며 또한 인식될 수 있는 지점은 인간의 초월이다. 인간 이하의 실재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식할 수 없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한 사람의 예외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실재-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신화(神化, Vergöttlichung)되어 있다고 규정된다. 라너가 신학에 도입한 초자연적 실존개념은 모든 인간이 실재-존재론적으로 은총을 입고 있는 처지를 뜻한다.37)


  라너는 실존(實存, das Existential)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인격적 행위보다는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면서 이를 가능케하고 규정하는, 유한한 정신 인격의,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구조성으로 이해한다38) 그런데 인간은 당신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창조 이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이 능력은 dslrks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것, 본연의 것, 중심이며 연원(淵源)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39)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의 중추적이며 지속적인 실존을 초자연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 안에는 항상 …현재의 질서 속에서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나 주어져 있으며 상실할 수 없는 초자연적 목표에의 내적 정향성이 있다. 이 정향성을 우리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이 실존은 인간을 초자연적 목표에로 배열하기도 하고 채무적이 아니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다.40)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 형성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은 라너에 따르면 대상적으로 직접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비대상적 선험적 규정성이다. 이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타인과 친교를 이룩하고 세상만물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해서 하게 되는 반성적 사유에 선행하여 초자연적 형식대상을 지닌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41)  인간이 은총을 통하여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으며, 그에게는 순전한 자연행위를 통해서 도달될 수 없는 초자연적 형식대상이 선험적으로 소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너는 여기서 인간의 인식과 자유의 선험적 지평의 작용을 본연의 계시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초자연적 형식대상의 의미를 구명하는데 있어 토마스 데 아퀴노의 학설을 원용하고 있다.


  한 인식의 형식대상이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대상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사유를 통하여 다른 개별 대상들과 구별될 수 있거나, 또는 다른 대상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성취되기에 이르는 지평 자체를 뜻한다. 형식대상이란 지식의 한 대상도 아니요 단순히 많은 개별 대상의 공통적인 것을 추가적으로 추상(抽象)한 총합(總合)도 아니다. 형식대상이란, 함께 의식된 선험적 지평으로서 이 지평하에서 본연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모든 개별 대상의 인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42)


인간이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하여 실재-존재론적으로 들어높여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과 자유의 형식대상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두가지 경우의 개별적인 질료대상(質料對象)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형식대상(形式對象)은 구별된다고 보고 있다.43) 그래서 인간이 은총에 힘입어 존재론적으로 높여지면서 그가 자신의 현존재를 성취하게 되는 지평이 또한 변모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과 자유가 성취되는 지평이 변화한다는 것은 라너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인간 의식이 변화된다는 것을 뜻한다.44) 은총을 통한 인간의 고양은 실재-존재론적 규정이기 때문에 그의 초자연적 형식대상이 인간에 의해 체험될 수 있고 체험되어야 한다고 라너는 주장한다. 다음의 진술은 라너의 견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의 행위가 존재적으로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이 자기에게(bei sich)있으며 더 많이 의식된다.45)


 3.2 그러나 라너는 초자연적 형식대상은 대상적 사유의 직접적 대상으로 체험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은총으로 들어높여진 인간 초월의 체험 가능성과 또한 인식과 자유의 초자연적 형식대상의 체험 가능성이란 직접적인 사유를 통해 명료하게 객관화되고 주제화되는 하나의 체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인간이 자신의 현존을 성취하게 되는 초월적 지평이 변모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초자연적 실존 속에서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초월체험, 즉 초자연적 은총체험을 하게 된다.46) 인간이 이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은총이란 순전히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수용되었거나 또는 적어도 하느님에 의하여 제공된 의식의 피안에 위치하는 처지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은총은 의식적이요, 정신적이며, 인격적 실재인 지평이다. 각 인간은 이미 항상 이 지평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경험하며 고난을 겪는다. 인간이 이 지평 자체에 대하여 사유하지 않고 거저 주어진 은총으로 파악하지 않을 때에도 그러하다.47) 이 은총체험이란 인간이 삶 속에서 타인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게 되는 모든 범주적 체험 속에서 이미 항상 비주제적으로 함께 주어져 있는 초월적 체험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이 초월적 체험이 자체적으로 하느님의 계시개념을 현실화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삶 속에서 다채롭게 발생하는 이 체험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와 구원시키는 하느님의 부름을 계시한다고 보고 있으며 초자연적 형식대상의 전달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시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롭게 수용된 인간 초월성이 은총에 의해 들어높여짐은 그 자체가 이미 계시이다. 이와 함께 주어져 있는 선험적이면서 필연적으로 사유되지 않은 인간 정신의 성취의 형식대상은 어떠한 자연적 정신능력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 전달인 은총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48) 하느님 친히 당신의 자기 전달을 통하여 인간의 형식대상이 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성취할 때마다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적어도 비주제적으로 초자연적 계시가 발생한다.


  라너는 「말씀의 청자」 안에서 계시가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로서의 인간의 기본구조성에 입각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제는 신학자로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하고 은총을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계시의 발생을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과 계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요 동일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선사하면 계시가 발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자연적 실존이 계시를 동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개별 인간이나 세상 사물과의 만남 속에서 하게 되는 범주적 체험 속에서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발생하는 은총체험이 초자연적 초월적 계시로 규정된 것이다. 이 초월적 계시는 자연적 계시가 아니라 초자연적 계시이다. 라너는 이 초월적 계시를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계시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 초월적 계시의 모든 개념적 객관화는 초월적 계시 자체에 비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초월적 계시는 역사적 계시를 통하여 대상적 내용이 전달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앞서 현존한다고 라너는 말한다.49)



4. 초월적 계시의 역사적 중재

라너는 인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체험의 역사를 계시사로 파악하고 있다. 라너는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 동반하는 초월적 계시를 이 계시역사와 유대시키려 한다. 그는 하나의 초자연적 계시가 이중 국면, 즉 초월적 소인과 역사적 소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계시의 이중 국면을 정신과 육신의 단일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현존재 구조로부터 요청하고 있다. 말하자면 라너에게서 계시의 역사성은 인간 초월의 역사성과 관련되어 규정된다.50)


  4.1 라너는 그의 종교철학서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을 역사적 정신으로 규정한 바 있다. 라너는 인간의 육신성으로부터 유출되는 역사성과 정신의 초월성이 인간의 실존 속에서 하나의 내적 단일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제시하면서 인간 본질을 역사적 정신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한 인간의 역사성과 초월성은 상호 제약하며 규정하기 때문에, 두 소인은 늘 함께 나타나며, 이러한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소인 중 한 소인이 다른 소인에로 환원될 수 없게 되어 있다. 인간의 초월성은 그의 역사성에 입각하여 항상 역사적으로 중재되어 있으며 그의 역사성은 그의 초월성에 입각하여 항상 초월적으로 중재되어 있다.51) 인간은 구체적으로 다른 인간들로부터 그리고 전체 역사로부터 유래한다. 이것은 인간의 초월성 또한 인류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이 역사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가 인간 실존의 초월성과 역사성의 단일성에 상응하여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재되어 있다고 본다.52) 그에게서 하느님은 역사의 피안에서 머무는 역사의 초월적 근거만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役事)가 개입하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적 구원행업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으며, 계시를 역사적으로 청취하는 인간의 신앙 속에서가 아니고는 달리 존재하는 계시란 없다고 보고 있다.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는 항상 세상적으로, 범주적으로 중재되어 있으며 인간 삶의 역사적 처지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비대상적 초월적 계시는 항상 대상적 인식성 안에서 중재되어 주어져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시공간 속에서 유형적(類型的)으로 이룩하는 실존성취 속에서 발생한다.


 러너는 인간의 범주적 역사를,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인간의 본질성취를 구성하는 초월체험의 역사적이고 객관화된 자기 주석으로 파악한다.53) 그는 초월체험이 인간이 시공간 속에서 인간을 만나고 사물을 이용하는 속에서 하게 되는 범주적 체험 속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이말은 바로 초월적 계시가 역사적으로 중재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으로는 초자연적으로 들어높여진 인간의 초월성의 구조, 은총에 힘입은 것이면서도 항상 어디서나 작용하며, 거절의 양식으로조차 여전히 현존하는 실존, 절대적이며 용서하는 하느님 임재의 초월적 체험이 있다. 이 체험은 누구나 그리고 자의로운 양식으로 대상적으로 객관화될 수는 없어도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지속하는 실존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초자연적 초월체험의 역사적 중재성, 대상적 객관화가 있다. 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초월체험의 역사적 중재성은 하느님의 초월체험과 함께 전 역사를 구성한다.54)


   4.2 라너에 따르면 초월적 계시의 역사적 중재는 나름대로 자신의 역사를 지닌다.55) 그런데 초월성의 역사란 생성의 의미에서의 본질 역사가 아니라 인간 기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초월적 은총 전달의 자기 현시화를 뜻한다. 이는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역사적 구현과 중재를 지향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 전달의 약동성을 뜻하며 이 중재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계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중재 역사는 은총 안에서의 하느님 계시의 역사성에서의 내적 소인이라는 것이다. 이 은총 자체가 자신으로부터 본연의 대상화에로의 약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은총 자신이 전 차원에서의 피조물의 신화원리(神化原理)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계시는 필연적으로 인류의 행위와 생각의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한 한에서 초월적 계시가 자체만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 역사가 바로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역사이다.56)


 인간의 초월체험의 역사적 중재는 인간 역사의 범주적 실재들을 통해서 어디서나 성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역사적 장이 당신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께 이르는 중재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구세사와 계시사는 전체 인류 역사와 공존한다고 규정된다.57) 인간이 하느님과 늘 관련되는 가운데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의 역사는 구세사이자 계시사인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특별한 성역이 역사의 장(場) 속에서 별도의 장으로서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외견상 분명히 세속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대상물이 초월적으로 고양된 체험의 중재가 되기에 충분하며 그것이 하느님의 계시가 될 수 있다. 라너에 따르면 역사란 필연적으로 객관화된 초월체험의 자기 주석으로 존재하며, 초월적 계시의 역사란 다름아니라 원천적 초월체험의 역사적 자기 주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너는 인류의 구체적 역사 일반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그는 객관화된 구약과 신약의 계시사만을 계시사 일반으로 동일시하는 통속적인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비판한다.58) 그리고 그는 계시사는 개별적․집단적으로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 어디서나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범주적 역사는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인간이 하게 되는 초월체험의 역사적이고 객관화된 자기 해석이라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본질성취는 구체적 역사적 삶의 과정과 병행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역사적 삶의 과정 안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59) 인간의 역사―범주적 자기 주석은 이렇게 인간의 전 역사(全歷史)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60) 라너는 문화․사회․국가․예술․종교 등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역사―범주적 자기 해석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역사―범주적 자기 해석은 실제적인 진정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너는 바로 계시의 역사내적 범주적 해석이 초월적 계시의 진정한 역사라고 보고 있다. 그는 모든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자기 전달의 범주적이고 시공간적이며 사회적 사유의 역사 자체를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한 소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라너는 구체적인 인간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에서 계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삶 속에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와 체험에 의지하고 있다. 이렇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시역사를 구성하는 소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역사가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류 역사와 공존한다고 강조되는 것이다.


  라너는 인류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범주적 계시사를 초월적 하느님 체험의 역사적 중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역사는 인류의 포괄적인 자기 해석을 향하는 역전될 수 없는 의미선상에서 발생하는 역사로 드러나게 되고 더 나아가 더 강렬하게 초자연적 하느님 체험의 명시적인 종교적 자기 해석으로 드러나리라는 견해를 피력한다.61) 명시적으로 종교적인 범주적 계시사는 라너에게서 일반적․범주적 계시사의 한 형태이며 초월적 계시의 필연적 자기 주석의 성공한 경우로 파악되어 있다.


  4.3 여기서 말하는 범주적 계시사의 개념은 구약과 신약의 계시사 개념과 부합되지 않는다.62) 협의의 범주적 계시사가 성서 안에서만 주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느님 체험이 필연적으로 자신을 역사적으로 주석하고 범주적 계시사를 형성하며, 이 범주적 계시사가 어디에나 주어져 있다는 말은 이 계시사가 구약과 신약성서권 이외의 생활권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적어도 개인적인 구세사 안에서 작용한다.63) 그리고 초월적 하느님 체험의 자기 주석의 정당성이 확실한 개별적 구세사 안에 역사의 소인들이 있다는 분명한 근거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구세사 외부에서 발생하는 인류의 집단적 역사 안에서도 이러한 범주적 계시사가 존재한다는 입장이 성립된다. 물론 라너는 구세사와 세속사는 구별된다고 말한다.64) 세속사는 전체적․일반적으로 구원과 비구원에 대해서 명료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구세사와 세속사는 판결받은 역사와 판결받지 않은 역사처럼 구별된다.


  이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처지에 있거나 간에 근본적으로 이 성서적 계시사 외부에서의 일반적 구세사이자 계시사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논란될 수 없다. 일반적 계시사의 존재는 하느님의 진실한 구원의지 때문에 부인될 수 없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하느님으로부터 발해져 역사적 인간에게 주어져서 진정한 역사를 형성하며, 이 역사의 구체적 진행경위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로부터 선험적으로 추출될 수 없고, 인간의 다른 역사적 자기 해석처럼 역사 자체 안에서 체험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다.


  라너는 구체적인 종교사 속에서 계시사의 명시적 부분을 보고 있다.65) 그에 따르면 각 종교 속에서 본시 비사유적이며 비대상적인 계시를 역사적으로 중재하고 사유하며 주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형성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초월적 관계의 중재와 인간의 자기 사유의 개별적 소인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초월적 체험이 구체적인 종교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가시적이 되고 주제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종교들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 관계가 개념적으로 객관화되고 있다. 라너는 종교역사 일반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 역사를 명시적으로 주제화한다고 본다. 라너는 성서외적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사를 단순히 인간의 종교적 행위의 역사이거나 종교를 설립하려는 인간적 가능성의 결핍된 현상으로만 파악하지 않는다.66) 종교 안에서는 원천적이며, 비사유적이고 비대상적 계시를 반성하고 명제적으로 주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종교 안에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게 된 자기 사유, 반성과 성공한 개별소인들이 발견된다. 이 자기 반성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간의 대상성, 구체적 역사성의 차원 속에서 인간에게 구원을 이룩하게 된다. 그는 비스리스도교적 종교사 안에서도 성서적 계시의 하느님이 역사하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인류의 역사와 종교적 현상 안에서 비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보고 있다.67) 온갖 유형의 과실이 집단적이고 사회적 인간의 차원 안에서 어둡게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계시사 안에서도 이러한 과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계시사는 오류와 그릇된 해석과 과실과 남용과 거의 불가분리적으로 혼합되어 발생하며 의로운 역사와 죄의 역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서 참으로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과실의 역사와 구세사가 하느님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스며드는 데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68) 대조되는 이 두 가지 성격은 계시가 당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행위와 이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를 내포한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지평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성취하며 자신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면서 의인이면서도 죄인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의 대상화된 자기 주석의 역사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하며 아직 미완(未完)의 역사 속에 위치하며, 오류와 현혹과 객관화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형성된 하느님과 인간의 초자연적 관계를 인간이 그릇해석하는 수가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사 안에 오류와 비리 등이 존재한다. 종교사는 하느님에 의해 전달되어 수용과 거부의 양식으로 존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되거나 가능하게 된 인간의 종교사라는 것이다.


  라너는 인류사의 상이한 지역과 시간 속에서 발생한 다양한 종교의 역사들은 선명한 하나의 방향으로 쉽사리 통합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69)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라너는 동시에 수다한 종교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구세사와 계시사의 단일구조와 명백한 발전법칙을 인식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인한다. 오늘날 구세사와 그리스도교적 계시가 이전의 계시사의 내용은 장구한 인류 역사의 과정 속에서 극히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내용에 불과하다.


  라너는 성서 내용을 통해서 종교역사 안에서의 일반적 계시사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결과로 이끄는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한다.70) 하지만 구약과 신약성서에 따르면 인류의 전역사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계약의지 아래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인간의 과실로 점철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특히 신약성서는 인류사와 종교사의 극도의 실추를 말하고 있다. 신약 안에서 인류사와 종교사는, 원초의 순수상태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인내와 분노, 그리고 심판 하에 존속하면서 암흑과 과실의 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의 준비시간으로 존속한다고 간주되고 있다.


  라너에게서 구체적인 세계사와 인류사는 세계와 인류를 향한 하느님 자기 전달의 현시이며 중재이고, 또한 자유로운 조물을 통한 하느님 자기 전달의 수용의 현시이자 중재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은 세계사와 인류사의 절대정점이기 때문에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이 그리스도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전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5. 일반 계시사와 특수 계시사

라너는 성서 계시 영역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계시사를 일반적 계시사로 파악하면서 성서적 계시사와의 관계를 초월신학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71) 그는 여기서 현대의 진화적 세계관을 신인(神人) 그리스도 사건과 연관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정립한다.


  5.1 라너는, 인류의 역사가 2,3백년 전의 인간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나게 장구한 역사라는 것을 밝힌 현대의 학문적 탐구결과를 구세사 및 계시사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서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72) 그는 낙원에서의 원초계시-아브라함․모세․이스라엘의 역사 등-로 분할되는 재래의 계시사 및 구세사의 시기 구분으로는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계시사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인류사와 공존하는 계시사가 역사적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너는 성서에서 증언되는 성조역사(聖祖歷史)를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73) 사실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전 성서 계시사는 역사의 전과정 속에서 현재로부터 가깝게 위치하는 짧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라너는 성서 이전의 계시사와 구세사는 구조를 거의 파악할 수 없는 어두운 과거로 머문다는 견해를 피력한다.74) 하느님과의 관계가 명시적으로 주제화되고 있는 비성서적 종교들의 전례, 사회적 제도, 이론, 복고나 개혁운동 등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에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너는 종교사적 지식이 본래의 성서적 계시사와 관련될 때에 거의 명료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성서 이전의 계시사와 구세사의 구조를 파악하고 역사적 진행 속에서 각 단계의 상위성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라너는 세속 역사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 자유와 사랑, 그리고 희망의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역사관으로부터 구체적으로 발생한 역사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라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계시사로부터 전체 역사를 관조하면서 성서 시간을 그리스도 출현 이전의 최종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권리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75) 실제로 성서 계시사는 그리스도 사건의 준비를 위한 짧은 역사적 소인에 지나지 않는다. 라너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성조시대는, 대표적 성조들에 대한 신상 파악이 정확한 자료에 입각하여 실제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구약의 계약사는 일반적 계시사와 구세사로부터 유래하며 계시사의 연관성을 보전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이 계시사가 계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직접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세 이전의 성조시대는 특수한 구세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2 라너는 하느님이 친히 조정하는 초월적 계시의 자기 주석이 이루어지는 데에서 특수 계시사나 교도권적 계시사가 발생하며 구약의 성조시대 이래 이러한 특수하고 교도권적인 계시사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76) 종교사상 인식의 순수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보증되고 보증된 것으로서 사유되는 데에서 이러한 공적 계시사가 온전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천적 계시의 담지자(擔持者)들은 예언자들이라고 지칭된다. 이들 안에서 초월적 하느님 체험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범주화된다. 하느님을 통해서, 개별 실존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계시의 대상화가 이룩될 때에, 우리가 종교적 예언자이며 다른 사람들을 향한 계시 담지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안에로의 통역이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이 계시의 대상화가 순수하게 머물 때, 그리고 이 대상화 안에서의 계시의 순수성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정당화될 때, 우리 자신의 소명이…대상화된 계시를 통해서 정당화 될 때, 공적이고 교도권적이요 교회적으로 구성된 계시와 계시사를 가지게 된다.77) 라너에게서 예언자란 하느님의 개인적 의지를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과는 달리 공적인 교도권적 계시의 담지자로서 자기 자신의 초월체험의 범주적 면이 하느님으로부터 원해지고 정당성이 보증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 안에서 초월적 하느님 체험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범주화된다는 것이다.


  라너는 이러한 교도권적계시사가 구약 속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다.78)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이전 인류사의 전승의 핵이 구약 성조 역사 안에 이미 소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라너는 구약성서가 계시 가능성과 관련해서 애매모호성을 지닌다고 간주한다. 구약이 하느님의 진술과 역사(役事) 자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해석기준도 없고 이 주장이 환상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한 권위있는 해답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과 견해에 고나한 명석성과 확실성을 추구한다. 그는 이러한 명석성과 확실성을 인류의 역사적 자기 주석, 특별히 예언자들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종교적 체험의 궁극적 명석성과 확실성은 구약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이다.


  라너는 구약성서가 1천 년에 걸친 완만한 생성경위와 다양한 신학입장으로 말미암아 자체적으로 단일적 개념으로 통합되지 않는다고 본다.79)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비로우면서도 심판하는 하느님의 반려자라고 자각하면서, 자신의 역사가 미지적이거나 구원적 미래에로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라너에 따르면 구약성서 안의 구체적 내용이 이 역사를 계시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반려성(伴侶性)의 사건이며 개방된 미래에로의 경향으로서의 역사가 이 역사를 구세사로 만든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국면이 외적으로 이 역사에 다가오는 해석들이 아니라 해석된 것에서의 역사적 소인들이다. 라너는 바로 이 해석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시사로 구성한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역사는 비단 이스라엘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며 실제로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80) 이스라엘의 역사가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의 역사이며, 과실의 역사이고, 원천적으로 종교적이었던 것이 율법적으로 경직화되어 가는 역사였기 때문에 라너 자신의 견해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현상으로서의 구약안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원해진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오류적인 것, 변질된 것과 타락된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안에는 권위있게 그리고 항상 확실하게 개인의 양심을 위해 구체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과 인간적으로 타락하는 것과의 사이에서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지속적이고 제도적인 요체란 없다.81) 라너는 성서가 근동 민족의 종교사안에서 부분적 계시사의 지속성과 구조성의 인식을 허용하는데 비해서 다른 민족의 종교사 안에서는 계시의 지속성과 구정성의 인식 가능성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견해를 시인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라너는 구약의 계시사를 다른 구세사로부터 분리시키고 유리시킬 수 없다고 본다. 다른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적 관계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3 라너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포함하는 본래의 구약성서적 계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역사의 최종단계의 짧은 순간이라 규정하고 있다. 구약성서적 역사는 그리스도의 최종적이며 직접적인 사전역사(事前歷史)일 뿐이다.�82) 구약성서의 내용과 구조의 성서적 기반은 그리스도로부터만 단일적 해석을 허용할 뿐이라고 라너는 주장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 관계의 명시적이고 종교적인 주제화가 구약 속에서 하느님에 의해 친히 역사 안에서 신임을 받고 정당화되는데, 이러한 특수하고 교도권적인 계시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정점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83)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 전달의 주석이 적당한지 여부를 가리는 유일한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직접적 사전 역사로서의 구약의 계시사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계시사와 전승으로서의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라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 유형의 계시사의 시작과 충만을 보고 있으며 그리스도 사건을 세계사와 공존하는 종교사의 절대정점으로 파악한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세계는 장구한 인류사 안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과도기로 파악할 수 있다.


  라너는 구체적 인류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치 역시 이 안에서 공존하는 종교사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기준과 상관하게 된다고 주장한다.84) 라너는 이 시기에 인류가 명시적인 자의식(自意識)에 이르게 되며, 내성적 사유, 예술과 철학 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주변환경에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기투하는 양상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라너는 이러한 역사적 현상을 하느님의 계시와 관련시켜 해석한다. 세계와 피조물인 인간처럼 하느님의 자기 전달 역시 자신의 역사를 지닌다. 이 자기 전달을 세계와 인류의 최종 의미와 목표로서 처음부터 역사를 지탱한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바로 이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지니며, 역사 속에서 범주적으로 점점 더 명료하게 현시되며, 더 이상 추월할 수 없고 되돌이킬 수 없는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게 된다. 일반 종교사 안에서 인간의 구원이 애매모호한 양식으로 주제화되고 있는 데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해석된 양식으로 주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를 통하여 예수의 인간적 존재에로 육화되는 속에서 온 인류를 위해서 더 이상 추월할 수 없는 절정에 이르게 될 때에 계시사가 절정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85)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육화 속에서 전달된 실재로서의 하느님 자신이 인간 예수와 절대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과 육신적이고 사회적 차원 안에서의 범주적 자기 해석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계시 바로 그 자체가 되었다. 이 계시사에서 이미 발생했고 유일무이하고 궁극적인 절정에서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 전달과 그것의 역사적 중재성의 절대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일치가 한 신인(神人) 속에서 계시되어 있다. 이 신인은 전달된 분으로서 하느님 자신이 이 전달의 인간적 수용이면서 이 제공과 수용의 궁극적인 역사적 현시인 것이다.86)


  그리스도 사건은 보편적 계시사와 구세사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파악 가능한 절정으로 규정되고 있다. 일반적 계시사 안에서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와 그 범주적 중재성이 대소의 간격을 지닌 채 작용하고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해소적으로 온전하게 유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사건은 보편적 게시사 한가운데에서 특수한 교도권적 계시사의 구별을 위한 규범적 기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계시는 역사 속에서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심층 속에서 이미 항상 비반성적으로 체험하는 초월적 계시의 반성적 진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5.4 라너는 그리스도 계시사건을 보편적 종교사와 인류사의 과정안에로 명백히 편입시키면서 동시에 이 과정의 종말론적 절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여기서 역사 속에 등장한 신인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이고 진정한 인간 존재를 구현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초월-종교적 체험의 시초부터 소여되어 있는 원초 자료의 역사적 중재이자 대상적 객관화로 파악되어 있다. 라너는 그리스도 교회를 역사 속에서 지속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파악하면서 교회 밖에서 발생하는 모든 계시사를 교회 자신의 사전 역사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자신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하느님과 그 은총의 절대적 구원실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대적 구원실재는 이러한 자기이해를 통하여 어디서나 주어져 있는 집단적․개인적인 구세사를 배제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전역사이자 은총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세계 어디서나 발생하는 구세사는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서 궁극적이고 능가할 수 없는 역사적 객관화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전체 인류사의 가장 내면적이요 신화(神化)하는 약동성으로서, 이 전체 인류사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다.87)


  라너에 따르면 인류는 그리스도 사건 이래 단지 초월적으로만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인류사가 이제는 범주적으로도 자신의 목표 안에로 들어서서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과정 안에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조종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 역사 안에 인류가 지향하는 바 목표로서의 신인 그리스도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작단계의 초월성 안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말론적 역사 속에서 자기 현존재의 신비에로 도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간의 충만이라 지칭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간의 충만이 지금은 완성의 구성으로가 아니라 시작의 양식으로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너는 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근거와 규범이 역사 자체 안에 소여되어 있으며 현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88)


  라너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의 종말론적 궁극성을 규정하면서 여기서부터 교회의 무류성을 추출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하겠다.89) 라너에게서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계시가 사회적 구조성을 지니고 명시화된 실재이다. 교회는 이를테면 종말론적 절정에 이른 하느님 계시의 역사적 현존이다. 그런데 라너는 교회 안에서 현시되는 하느님의 계시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실제로 주어져 있는 궁극적 진리인 한, 교회는 무류적 진리 요청을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절대적 자기 현시의 진리가 궁극적 진리인 한, 즉 이데올로기적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실제로 소여되어 있는 승리하는 진리인 한, 교회는 자신의 진리 요청 속에서 무류적 교회이다.90)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상적이고 실제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현존케 하는 교회의 고백이 절대적 투신 속에서 성취되는 데에서 교회는 소멸할 수도 오류를 범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의 계시진리의 무류성이 교계제도적으로 구성된 교회의 진리의 무류성인 한, 교회의 교도권은 무류적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는 늘 새로운 역사적 현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현실화하고 전개함으로써 이 진리를 지속적으로 현존케 하는 데에서 교회 교도권의 과제를 보고 있다.


  라너가 이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무류성과 더 나아가 교회 교도권의 무류지권을 인정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 밖에서 발생하는 일반 계시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특수 계시 사이에 개재하는 본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음은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성서적 그리스도 교회 밖에서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가 발생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를 종말론적 계시로 규정하고 이에 입각해서 역사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의 무류적 계시로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절대성을 기초 신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6. 맺음말

오늘날 신학 안에서 일차적 기반개념이자 그리스도의 자기 주석에서의 열쇠개념으로 간주되고 있는 계시개념이 칼 라너에게서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계시개념이 라너의 초월신학체계 안에서 기초를 형성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서 계시는 바로 인간과 세계의 구원실재로서의 하느님의 인격적 자기 전달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의 이러한 계시이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과 부합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반포된 계시헌장의 내용은 많은 수정작업을 거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라너가 바로 공의회에 참여한 전문 신학자로서 계시헌장의 수정작업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사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91)본회의의 토의를 위해서 마련되었던 초안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의 생활 속에서 이성과 자연의 영역만을 인정하려고 한 합리주의와 자연주의를 거슬러 하느님의 구원과 계시의 초자연성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92) 자기 방어적 입장을 취했던 이 공의회에서 계시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라고 규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규정의 의미는 초자연적 인식의 현시의미로서 파악된 것이 사실이다. 계시 사건이 신적신비, 계시된 진리, 신앙교리나 계시된 가르침을 중재하는 교시사건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93)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은 계시 자체를 하느님의 인격적 자기 전달로 규정하면서, 계시를 개념적-지성주의적 언어계시로서가 아니라 인격적 구원론적 실재계시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의 인식에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실재로서의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여 당신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실제로 형성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라너의 계시관은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치밀하고 일관성 있게 부연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실상과 그로부터 추출되는 결과들을 그의 필생의 작품인초월신학체계 안에 수렴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시개념은 웅대한 사상적 체계를 지탱하는 기초로서 드러난 것이다.


  라너의 계시관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한, 비판의 여지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입장에 가해지는 비판은 서구 그리스도교계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되다시피 하는 교회의 공식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그대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라너가 계시를 초월적이고 범주-역사적 국면으로 구별하면서 구체적 인류 역사를 계시사로 원칙적으로 규정한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가 종교사를 범주-역사적 계시사로 파악하고 있음도 정당하다. 그런데 그가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타종교 역사와 구별하면서 공정이고 교도권적 계시사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무류적 계시사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실제로 발생한 실증적 교회사와 교회와 교회들의 현실에 직면하여 논란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여기서 시사된 문제점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주변세력에 지나지 않는 소위제3세계속한 교회가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될 제3교회의 시대에 달리 해결될 수 있다고 전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94) 라너의 계시관의 한계는 그가 속한 서구 그리스도교계의 한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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