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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럽이 직면한 문제점들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3.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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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럽이 직면한 문제점들(1989. 5)


요제프 라칭거-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추기경-


[신앙교리성과 유럽 교리위원회의 의장들과의 모임이 지난 5월 2일부터 5일까지 라센부르그(비엔나)에서 개최되었다. 아래의 글은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의 개막 연설 내용이다.


우리는 금세기 교회의 신앙에 책임을 지고 있는 주교로서, 사람들이 오늘날 신앙에 있어서 봉착하게 되는 어려움이 특별히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어떻게 이에 대하여 옳게 응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들 중 첫번째 것에 응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광범위하게 탐색할 필요는 없다. 교회의 실천과 가르침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실제로 울려 퍼지고 있으며 오늘날 그 규칙적인 외침이 진보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가톨릭 교인들에게는 의무의 실천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 같은 꾸준한 외침의 기본 요소들을 열거할 수 있다. 우선 피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입장을 들 수 있다. 임신을 저지하는 온갖 종류의 방편들을 도덕적 견지에서 똑같은 수준 위에 올려 놓으면서 피임의 방도들을 적용하는 문제는 오로지 개인의 "양심"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다음으로 동성애 그리고 성에 대한 무분별한 주장을 단죄하는 온갖 유형의 "차별"을 배척하는 입장을 들 수 있다. 동성애를 주장하는 자들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성 행위는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있거나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전혀 끼치지 않는 한 도덕적 견지에서 대등한 것이다. 끝으로 재혼하는 이혼 남녀에게 교회의 성사를 받게 해주자는 주장과 여성들에게도 사제직을 수여하자는 입장을 들 수 있겠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반대 입장 또는 무분별한 관용 태도 안에는 서로 다른 주장이 한데 엉겨있다. 첫 번째의 두 주장은 성윤리의 분야와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의 두 주장은 교회의 성사적 질서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네 가지 주장들은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밀접하게 서로 결부되어 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것들은 인간 자유에 대한 특별한 개념에 의해 확정된 하나의 동일한 인간관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둘 때에 그러한 반대 또는 무분별한 관용의 주장들이 대번에 드러나지 않는 보다 근원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그러한 주장들의 뒷받침이 되고 있는 이 인간관을 세밀히 조사해 본다면 그 견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근본 특징들은 여기에서 도출되는 주장들만큼이나 산만하고 또 그래서 쉽게 밝혀질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인에게 교회의 전통적인 성윤리를 이야기하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그럴 듯한 주장부터 살펴보자, 현대인은 자기 성과 관련하여 보다 세분화되고 덜 제한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또 그리하여 과거의 역사적 상황들 안에서는 의미를 지녔을지라도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규범들의 개정을 촉구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다음 단계는 오늘날의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마침내 우리의 권리들과 우리 양심의 자유들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우리가 외부로부터 부과된 어떤 권위에 그 자유를 더 이상 종속시키지 않을 정도로 얼마나 성숙되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그들은 외친다. 더욱이 지금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근본관계가 재조정되고 구태 의연한 역할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며 또 기회의 완전한 평등이 모든 수준과 모든 분야에서 여성에게 부여되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교회가 유별나게 보수적인 기관으로서 이 같은 사고 노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 놀랄 만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런데 만일 교회가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기를 원한다면 궁극적으로 해묵은 사회적 금기들에 대한 신학적 변호를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가 이제라도 그와 같은 욕구를 가장 시의 적절하게 또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한다면 여성들에게 사제 서품을 허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형태로 거듭 나타나게 될 이 같은 반대 주장의 뿌리들을 찾아내게 되면 그토록 또렷한 반대 목소리가 실제로는 상당히 일관성있는 재적용 안에 뿌리를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 주요 개념들이 "양심"과 "자유"라는 말마디 안에 나타나는데 이 용어들은 대번에 도덕적 온전성의 페기, 느슨한 양심의 단순화로 명백히 분류될 수 있을 변화된 행동 양식들에 도덕성의 향기를 첨부해 줄 것으로 추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양심은 더 이상 보다 고차적인 인식 방식으로부터 연유되는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대신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지도를 따를 수 없는 개인의 자기 결정, 각 사람이 일정한 환경 안에서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여 내리는 결정인 것이다.  "규범"이라는 개념 또는 ㅡ 한층 더 나쁜 것으로 지목되는 ㅡ 도덕법 자체는 상당히 부정적인 실재로 이해된다. 즉 외적 규율은 지침을 위한 본보기들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떤 경우에서건 각자의 의무를 최종적으로 판정해 주는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사고가 지속되면 인간이 자기 육체와 맺고 있는 관계 역시 반드시 변한다. 이 변화는 해방, 지금까지 유지되는 관계와 비교해 볼 때 오랜 동안 알려지지 아니한 자유에로 개방되는 상태로 묘사된다. 그리되면 육체는 인간이 "생명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보여지는 모든 방식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소유물로 간주된다. 육체는 우리가 소유하고 이용하는 물건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와 당위와 관련하여 자기의 육체적 차원으로부터 메시지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의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또한 완전히 자립하여 그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육체를 다루기를 기대한다. 그 결과 육체가 남성의 것인지 또는 여성의 것인지 전혀 구별이 없어지고 만다. 육체는 더 이상 존재를 표현하지 못하고 그와 반대로 소유물의 일부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언제나 그와 같이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탐욕으로부터 유혹을 받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방식은 근원적으로 무엇보다도 성과 자녀 출산의 근본 분리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이론적인 분리가 아니라 실천적이며 또 부단히 행동으로 옮겨지는 이 같은 분리는 의약품과 더불어 도입되었고 또 유전학적인 기술자들에 의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인간 존재들을 실험실 안에서 조성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하기 위한 재료는 더 이상 인격 상호간의 인간적 유대 관계와 결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계획된 결과에 비추어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행되는 행위들을 통하여 조달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종류의 사고가 전적으로 적용될 때에 동성애와 이성간의 사랑 사이의 구별 그리고 혼외정사나 혼인 내 성관계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 간의 구별은 모든 형이상학적 상징주의를 박탈당하게 되고 또 그것은 강요된 역할 기대의 부산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이 같은 혁명적 인간과, 교회의 가르침을 반대하여 아무렇게나 외쳐대는 목소리들과 결부된 주장들 이면에 감추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견해를 상세히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내일의 인간학적 반성이 직면하게 되는 주요 도전들 중 하나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 반성은 전통적 개념들에 대한 상당히 의미 있는 수정이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신앙의 인간과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 즉 타협의 가능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신앙 또는 불신앙의 양자택일을 정면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는 반대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 그러한 반성은 해답을 구하기보다는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 제기해야만 하는 의문들을 식별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추진될 수는 없다. 이 같은 논의는 이제 그만두고 방향을 달리하여 질문을 제기해 보자 : 어떻게 하여 그러한 배경을 전제로 하는 가치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유행되어 버렸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분명히 밝혀진 것은, 그러한 반대 주장들이 교회 내의 어느 특정 성사적 실천이나 어느 특정 규범의 확대 적용에서 빚어진 약간의 고립된 갈등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반대 의견들 모두는 한결같이 "예증(例證)" 즉 존재와 인간적 의무에 대한 근본 개념의 아주 광범위한 변화 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반대 주장을 발설하는 사람들 중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같은 변화를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같은 특정 견해의 분위기 안에서 자신들의 사고를 전개하며, 한편 특정 견해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견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아주 그럴 듯한 견해로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주의와 속박을 좋아하고 양심과 자유를 싫어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금기를 옹호하려는 입장에 서려는 자가 있을까? 이러한 방향으로 의문을 계속해 나간다면 교도권이 선포한 신앙은 이미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들고 만다. 이 신앙은 현대 세계의 사고 구조 안에서 정당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또한 오래전부터 폐기되어 온 것으로 진보적인 현대인들에 의해 취급되므로 온전히 와해된다.  우리가 만일 세세한 데에까지 논쟁을 일삼으려 하지 않고 그 대신 신앙의 온전한 논리, 실재와 생명에 대한 신앙관의 훌륭한 인식과 타당성을 표현할 수 있을 때에 한하여 제기된 의문들에 대한 의미 있는 응답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만일 모든 관계를 염두에 둘 때에 비로소 세밀한 갈등들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다.


신앙의 논리 안에 있는 세계관

이와 관련하여 나는 신앙의 세계관에 비추어, 최근 수년 동안 일정한 종류의 축소를 즉 또 다른 "예증"들을 점차로 준비해 온 변질의 과정을 겪어 왔던 세 분야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첫 번째로 우리는 창조에 대한 교리가 신학으로부터 거의 온전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전형적인 예(例)들로서 우리는 창조에 대한 교리가 신앙 내용의 부분으로서 제외시켰으며 그 대신에 실존 철학의 모호한 사항들로 대치시켜 버린 현대 신학의 두 요약서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J.파이너와 L.비셔가 1973년에 출판한 '새로운 공동 신앙 고백서: 하나의 믿음'(분도출판사,1979년)과 1984년 파리에서 출판된 기본 교리서 '가톨릭인들의 신앙'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의 무분별한 개입을 거부하는 창조 세계의 몸부림을 경험하고 있는 시대에 그리고 창조 세계를 다루는 우리의 행위들의 한계와 규범들에 대한 문제가 우리의 윤리적 책임의 중심 문제가 되어 버린 시대에는 창조 교리의 삭제란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윤리적 쟁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실로 항상 존속한다. 기계 기술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포에서 비롯된 반발 역시 물질세계 안에서 영적 메시지를 식별해 내지 못하는 무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자연은 우리가 기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수학적 구조들을 드러내고 있을 지라도 여전히 그 자체 안에 비이성적인 실제로 계속 나타난다. 자연이 수학적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체 안에 윤리적 명료성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는 주장은 형이상학적 환상으로 배척된다. 형이상학의 몰락은 창조에 대한 가르침의 제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온 것이 진화의 철학이다(이 철한은 진화에 대한 과학의 가설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 철학은 자연 법칙을 폐기시켜 자연의 발전을 조작함으로써 보다 나은 생활을 가능하게 하려고 꾀한다. 이런 방식으로써 진정 교사가 되어야 할 자연은 이와는 반대로 맹목적 시녀가 되어 인간이 이제 충만한 의식으로써 모방하려는 바를 부지불식간에 혼돈시켜 버리는 것이다. 자연(분명 창조 세계는 아니다.)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는 그것으로부터 배우려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조종하려는 자의 입장이다. 그것은 합리적 분석이 "진화"만큼이나 효율적이고 또한 따라서 지금까지 인간이 개입되지 아니한 진화 과정이 실현하지 못한 것보다 훨씬 높은 새로운 경지에로 세상을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가정 위에 바탕을 둔 관계 즉 자연을 지배 하는 관계로 지속된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양심은 교사인 자연이 가르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말 못하는 벙어리 신세로 전락되었다. 그것은 다만 어떤 행동이 개선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있는지를 계산할 뿐이다. 만일 이런 일이 집단적인 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다면(그리고 출발점의 논리에 따라 발생하게 된다면) 역사의 선봉으로서 개인의 진화를 장악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양심은 거대한 우주적 구조 안에서 불합리한 오만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는 주체의 자주성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인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바탕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절망은 항상 낙관주의의 공식적인 외형 배후에 감추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듯한 견해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구출시켜 줄 또 다른 해결책의 필요성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의식이 여전히 존속하며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쇄신된 그리스도교가 그 같은 해결책을 공급해 줄 수 있으리라는 은근한 기대 역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가 성취될 수 있으려면 창조에 대한 교리가 새로이 발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은 오늘날 신학이 떠맡아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들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세상이 "지혜 안에서"창조되어 왔다는 명제와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원초적 힘의 폭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명제가 뜻하는 바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확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양심과 규범이 상호 올바른 관계 안에로 새로이 들어서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 양심은 어느 정도 개인적인(또는 집단적인)계산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함께 인식하는 것"(con-sciens), 창조와 더불어 창조를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함께 인식하는 것임이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에 또한 인간의 위대함이  그 자신이 자기에게 유일 무일한 교사라고 자처하는 소인배의 가련한 자주성에 있지 아니하고 그의 존재가 진리 자체인 최상의 지혜로 하여금 빛을 발하도록 배려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재인식될 것이다. 인간이 창조주의 메시지, 창조의 심오한 메시지를 경청할 수 있을수록 훨씬 더 위대해 질 것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창조의 지혜가 우리의 규범이 되고 창조와의 조화가 어찌하여 우리의 자유에 대한 한계 설정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이성과 품위의 표현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때에 육체 역시 그 자신의 합당한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즉 그것은 "이용되는" 소유물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 존엄성의 성전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수공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품위는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남녀의 육체성이 형이상학적 깊이에 닿아 있으며 상징적인 형이상학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다시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상징적인 형이상학의 부정이나 경시는 인간을 품위 있게 해주기는커녕 파괴한다.


 현대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그리스도인들


 2. 창조 교리의 쇠퇴는 우리가 말한 것처럼 형이상학의 몰락 곧 인간이 경험적인 것에 갇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할 때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론 역시 약화되기 마련이다. 한 처음에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뒷전으로 밀린다. 창조의 지혜는 더 이상 반성의 주제가 되지 못한다. 그 형이상학적 차원을 박탈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불가피하게 순전히 역사적인 예수, "경험적인" 예수로 환원된다. 그 같은 예수는 모든 경험 사실과 마찬가지로 발생할 수 있는 것만 내포할 뿐이다. 그의 품위를 나타내는 주요한 칭호 "아들"은 형이상학에로 향한 길이 단절될 때에 그 내용을 상실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사실을 규명하는 신학이 자주성의 개념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더 이상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 칭호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예수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이제 "대리자"또는 그와 유사한 개념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개념이 의미하는 것과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가 재해석됨으로써 해답이 모색되고 있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관련된 근본 유형이 오늘날 두 가지인데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와 혁명적인 마르크시스트가 그것이다. 예수는 온갖 유형의 "율법주의"와 그 표현들을 거스려 투쟁하는 자유주의 도덕의 선구자이다. 혹은 그는 계급투쟁의 숭배와 그 종교적 상징물로 간주될 수 있는 파괴 분자로 묘사되었다. 이 같은 배경하에 예수 안에서 구현된 것으로 보이는 현대적 자유 개념의 두 가지 측면이 명확해진다. 예수는 자신 안에 구현된 자유 때문에 하느님의 "대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론이 쇠퇴됨으로써 오늘날 나타나는 확실한 징후는 십자가가 사라지는 것이고 또 그 결과 부활, 빠스카 신비가 무의미해진 것이다. 자유주의적 신학 이해 안에서는 십자가는 우연한 일, 과오, 근시안적 율법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신학적 반성의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 발생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조류는 십자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두 번째 유형 안에서 예수는 실패한 혁명가로 등장한다. 그는 억압당한 계층의 고난을 상징할 수 있고 또 그리하여 계급의식의 성숙을 함양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신약성서의 증언에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 두 가지 유형 안에는 사실상 공통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즉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속량과 용서는 오해로서 이것으로부터 그리스도교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 작가들 그리고 온 세기의 교회가 지녀온 그리스도 신앙의 두 근본 요점(형이상학적 의미와 빠스카 신비 안에 이해된 신적 친자성)은 제외되거나 적어도 그 기능을 온전히 박탈당하고 있다. 그와 같은 근본적 재해석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여타 모든 것 즉 교회와 전례와 영성 따위에 대한 이해 역시 변질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내가 여기서 아주 준엄하게 그 결과들에 대해 묘사해 온 이 같은 노골적인 부정들은 좀체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의 추세는 뚜렷하고 또 신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어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그 같은 추세는 금새 설교와 교리 교수의 영역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 파급이 용이한 까닭으로 인해 그 추세는 순전히 신학적인 분야에서보다는 설교와 교리 교수의 영역 안에 훨씬 더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근본적 해결책은 분명 그리스도론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 연유될 뿐이다.


3. 마지막으로 나는 신앙 내용의 철저한 축소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신학적 반성의 세 번째 분야 즉 종말론을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영생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의 설교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최근에 작고한 나의 친구 유능한 주석가는 1970년대 초반에 그 자신이 들어왔던 몇몇 사순절 설교에 관해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첫 설교 중에 사제는 신도들에게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고 두 번째 설교 중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천국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땅 이곳에서 우리의 낙원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신도들에게 납득시키려는 고충을 겪어야만 하였다. 확실히 이처럼 극단적인 일이 가끔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안의 주제에 대한 언급을 주저하는 일은 일반화되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장차 올 세상의 위안으로써 이 세상의 불의들을 정당시한다는 마르크시스트의 고발은 너무 뿌리 깊은 것이고 또 현 사회 문제들은 지금 윤리적 투신의 전력을 요구할 만큼 아주 심각하다. 이 같은 윤리적 요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원한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삶은 오로지 우리의 현 존재 안에서만 준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니꼴라스 카바실라는는 14세기에 놀라운 반성을 통해 이 진리를 표현하였다.: "이미 미래 생활의 벗이 되었고 들을 귀를 가진 자들만이 그 생활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세상 안에서 우정이 시작되고 귀가 열리고 혼인 예복이 준비되고 또 나머지 모든 것이 준비되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이 형성되는 작업 장소는 이 현세 생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싹이 어둡고 제한된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동안에 자연이 그 싹으로 하여금 빛 안에서 살도록 준비시키고 또 장차 올 생명의 유형에 따라 그 싹을 형성시킨다. 성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발생된다." 영원한 생명의 절박한 요구만이 이 생활의 도덕적 의무에 그 절대적 절박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만일 천국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면 인간 존재의 내적 긴장과 그 공동책임은 약해진다. 실제로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으며 또 "앞장서 있음"이 우리를 "앞서" 간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천당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 자신들처럼 자유롭고 또 유혹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나은 세상"의 이념 안에 내포된 그릇된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 이념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조차 우리 희망의 참 목표와 도덕의 진정한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알 수 있는 바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의식 안에서 보다 나은 미래 세계의 이상향에 의해 거의 온전히 대치되고 말았다. 그 실현을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는 미래 세계는 도덕의 실제적인 관련점이 되며 그리하여 그 같은 도덕은 또 다시 진화와 역사의 철학과 뒤죽박죽이 되고 또 보다 나은 생활 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함으로써 그 자신을 위한 규범을 창출해 낸다. 이런 방식으로 사유를 전개하게 되면 젊은이들의 이상적인 활력이 촉진되고 또한 사심 없는 활동에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켜 많은 결실이 초래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노력을 위한 포괄적인 규범으로서 미래는 충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가 내일의 보다 나은 세상에로 축소되어 버린다면 현재는 궁극적으로 몇 가지 가상적인 미래를 거슬러 자기의 권리를 주창할 것이다. 환각 세계에로의 도피는 이상향의 우상화에서 빚어지는 논리적 귀결이다. 이 이상향에 도달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거나 아니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자신을 그곳으로 내팽개친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세상이라는 용어가 기도문과 설교문 안에서 현저히 부각되고 또 부주의에서 신앙이 "내 만족"으로 대체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내가 여기서 진술해 온 모든 내용이 많은 이들에게 너무 부정적인 것으로 비쳐질지 모른다. 물론 나의 의도는 그 자신의 모든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들을 지니는 교회 전체의 상황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 상황 안에서 신앙에 장애되는 요소들을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제한된 주제 안에서 나는 철저히 분석을 제시하였다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나의 유일한 의도는 부단히 나타나고 있는 개별 문제들을 넘어서서 갈수록 새로이 변화하는 형태로 개별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가장 깊은 동기들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신앙의 모든 내용을 토의하기 전에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현대인의 그와 같은 근본습성을 이해하기를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제기된 의문들에 대해 단순히 응답하는 대신에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한해서 우리는 세상이 자유주의적 실험과 마르크시스트적 실험의 실패를 겪고 난 이후에 기대하게 되는 다른 해결책으로서 신앙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도전이다. 여기에 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맡은 크나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원문: Card. Joseph Ratzinger, Difficulties confron-ting the faith if Europe today, L'Osservatore Romano, N.30, 24 July 1989, 6면, 번역 ; 대구 가톨릭 대학 최영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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