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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 (Qumran Dead Sea Scro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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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8. 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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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 (Qumran Dead Sea Scrolls)  


쿰란은 사해 서쪽 둑에서 북서쪽으로 들어간 건조한 평원 칼리아 키부츠 옆에 있습니다. 쿰란은 사막 언덕의 동굴들 속에서 사해 문서들이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주거지로 유명합니다. 쿰란이 전 세계를 놀라게한 사건은 1947년초 한 베두인 아랍계 청년에 의해서입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 하루는 양들을 치던 목동 무함메드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돌맹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사해 사본 두루마리들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최고로 오래된 성경은 히브리어 사본으로 9세기경의 것들 뿐이었습니다. 3-4세기경에 필사된 헬라어 사본은 여럿 있었지만 보관 관리 주체가 바티칸이나 카톨릭이었고, 그로 인해 반그리스도교 학자들 중 일부는 보관 중 사본 일부나 전체가 날조되었을 가능성까지 거론되어, 가장 오래된 히브리 사본이 9세기라는 것이 성경의 진위성을 입증한다기 보다 오히려 그 사본이 수정된 헬라어 사본을 베낀 사본의 사본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해사본은 2천년 가까이 인간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들보다도 더 오래된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히브리어 사본인 까닭에 매우 중요한 문서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사본의 양도 가장 적은 사무엘서는 4개의 사본이, 가장 많은 시편의 경우 39개의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존하는 9세기경 구약 히브리어 사본과 성경본문이 거의 일치하는 사본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그전까지 가끔 거론되어오던 구약 날조성이 부정된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는 신약과 구약이 연결되는 시대 이전의 성경 사본이 발견되어 현재 사용되는 구약의 진실성을 뒷받침 해주고 예수님에 관한 구약 예언서들이 신약시대 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는 1947년에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예루살렘에서 15마일 떨어진 사해의 북서쪽 열한 군데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양피에 필사되어 있었다. 사해 두루마리는 주전 100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포함하지는 않았다. 이사야는 완전하지만 다른 책들은 부분적으로 완전하였다. 이 두루마리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47년 쿰란의 한 동굴(Qumran Cave 1)에서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유목민) 양치기 소년에 의해 토기에 담긴 오래된 히브리어 구약성서 두루마리 등의 문서 더미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을 쿰란문헌(사해문서,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 개의 문서가 아니라 사해 서북쪽 연안의 쿰란동굴을 포함하여 사해 서쪽의 유다의 황야로 일컬어지는 지역에서 과거에 발견되었고(특히 쿰란에서 남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라바트 동굴과 30Km쯤 떨어진 엔게디 바로 아래 헤베르 동굴에서 1-2세기의 귀중한 문헌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현재도 계속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고문서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동안 이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는 에스델서를 제외한 구약성서의 모든 책과 일부 주석서(하바꾹 나훔 미가 이사야 호세아 스바니야 시편 37편 등), 외경 및 성경 이외의 문서들이 있는데, 이중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a) 

-쿰란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에 관해 규율한 수도원 규칙서(1QS) 

-쿰란 수도원 설립과정과 관련된 해설이 있는 하바꾹서 주석(1QpHab)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인 이스라엘 규칙서(1QSa)

-종말에 치를 전쟁과 전술을 담은 종말전쟁기(1QM) 

-감사시편(찬미가, 1QH) 

-시편 집성(11QPs) 


1910년 카이로에서 발견된 것으로 문헌상 결혼과 사유재산이 허용한 것으로 보아 일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듯한 다마스커스 문헌(CD),  성전 설계와 성전 축제, 정결례, 형법 및 재판규정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는 성전 두루마리(RT, 이 문헌은 베들레헴의 어느 골동품상이 엄청난 값으로 팔아먹으려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1967년 6일 전쟁때 이스라엘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습격해서 압수했다고 함), 노아 탄생에서부터 창세 15,4까지 재미있는 이야기 형태로 엮은 창세기 전설(1Q GenAp) 등이 있다.

 

 

 쿰란공동체 유적

 

  발견된 성경 사본

 

  

 쿰란문헌 보관 모습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점토단지(높이 65.7-47.5cm, 직경 25-26.5cm)

 

  제1동굴에서 발견된 쿰란 수도원 규칙서(1QS)

 

  ◆ 쿰란 폐허, 공동체 거주지-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예리고에서 13Km, 사해 연안에서 1.3km 거리에 있는 이 곳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결과 수도원 중앙에 회의실과 도서실(→이 도서실이 발견된 쿰란문헌의 집필 장소일 것이다), 식수 등으로 사용할 여러 저수장(우물이 없어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저장), 남쪽과 북쪽 끝에 정결례를 위한 저수장이 있고 남쪽 저수장 곁에는 식당이 있다. 수도원 남쪽 바깥에는 옹기 가마가 있었는데 쿰란 문서를 담은 옹기는 여기서 제작되었다. 수도원 서쪽의 계곡과 산에는 자연 동굴과 인공 동굴이 많이 있는데(수도원의 동쪽은 호수) 수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동굴에서 살았다.

 

  발굴된 공동체 거주지

 

  정결례(미끄베) 저수장

 

  문헌이 가장 많이 발굴된 4번 동굴(Qumran Cave 4)

 

  쿰란 동굴에서 출토된 일상 용기들

 

 

◆ 死海(Dead Sea) -  죽어서 존재하는 바다 사해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호수이다. 남북 길이 80Km, 동서 길이 16Km, 평균수심 146m, 면적 1,020㎢로서 대함몰지구대에 있는 관계로 호수면이 해수면보다 392m 낮아(Earth 394m below Sea Level) 지구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다. 사해는 북쪽의 요르단강, 동쪽의 아르논강, 남쪽의 세레드강 등으로부터 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는 곳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는 까닭은 사막 건조기후여서 물이 들어오는 양만큼 증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염분농도가 지극히 높아 보통 바닷물의 다섯 배인 30% 정도여서 생물이 살 수 없고(→사해 이름의 연유가 됨) 부력 1.166으로 물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떠있을 수 있다.

 

 

  사해의 소금기둥

 

사해 Dead Sea 


이스라엘 사해의 지형 높이가 해수면 아래 394m라는 사해 표지판으로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로 쓰여 있다. 호수 서쪽의 예루살렘과 동쪽의 헤스본의 지형 높이가 1Km에 근접하므로

예루살렘과 사해의 수직 높이는 1.3Km 내외가 된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11개동굴 중 하나인 제4동굴

 

 가축 떼를 몰고 가는 목동들

 

요르단과 국경지대 


 

현재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히브리어 텍스트(수천 개)는 거의 전부가 마소라본이며 제일 오래된 것은 서기 9-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쿰란에서 발견된 텍스트들은 기원전 3-2세기로 연대가 추정된다. 쿰란의 두루마리들은 히브리 마소라본이 얼마나 충실하게 성서 본문을 전달하고 있는지 입증하여 준다. 오늘날 쿰란의 두루마리들은 스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서에서 본문 비판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 스투트가르트판 히브리 성서는 쿰란 유적의 발굴 이후 1967-1977년경 발간되어 키텔Kittel의 히브리 성서(Biblia Hebraica, 1927~1937년 간행, 공동번역의 번역대본)를 기본텍스트로 하면서 쿰란 수사본을 반영하여 보다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이면서 본문비판으로도 훨씬 가치가 크다(가톨릭 공용 성경의 번역대본이기도 함)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히브리어 성서 사본보다 거의 1천년이나 더 오래된 사해 두루마리의 발견이 가져다 준 공헌은 크다. 첫째로는 구약본문 비평학舊約本文 批評學에 대한 기여인데, 마소라 본문과의 비교 또는 70인역(LXX; Septuaginta)의 평가문제 등에서 구약 비평학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다. 둘째, 히브리어 학자에게 새롭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 종래에 자료가 빈약했던 신구약 중간시대사, 특히 에쎄네파의 사상 교의 생활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넷째, 신약성서와의 관련에서 많은 연구 과제를 제시한다. 초대교회와의 유사점과 상이점, 목욕재계 의식과 초대교회의 세례, 메시아 사상, 세례자 요한과 에세네파 내지 쿰란교단과의 관계, 하느님과 벨리아르(Belial, 타락한 천사) 내지 빛과 어둠의 항쟁 등 이원론적 문제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를 예수 시대의 유대교 3대 종파의 하나인 에쎄네파와 동일시하고 있으며(이스라엘 이외 지역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이렇게 불렀음) 사해문서가 신약성서의 진정하고 분명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쿰란공동체 유적


◆ 쿰란 공동체(에쎄네파) -  이 공동체는 1947년 이스라엘의 死海 부근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많은 양의 문헌들을 발견하면서 그 실체가 자세히 알려졌다. 문헌들의 발견으로 그리스도교 성서학계에서는 커다란 파장이 일었는데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정정되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에쎄네파로 추정되는데 이는 제관들 중심의 사두가이파, 평신도 중심의 바리사이파, 민족독립 투사 단체인 열혈당파와 함께 유다교의 한 분파로 볼 수 있다. 이 집단은 예루살렘 성직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과 내쫓긴 일반신자들이 합해져서 기원전 150년경에 생겨났는데(135-104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성서 인물로서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도 그의 언행 등에 미루어 에쎄네파 출신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있다.


그리스도 시대에 그들은 死海 북부의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아주 엄격한 생활방식을 지키며 살고 있었는데(주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엄격한 수도자로서의 이상에 따라 은수자적 공동체 생활을 하였음. 한편 기원전 31년 대지진 이후 예루살렘의 시온산에도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어둠의 자녀들과는 분리되어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생활을 하였다(거주지의 무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서 여자의 뼈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함). 그들의 생활방식은 사제적 성격, 계급성, 엄격한 율법 준수,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확신하고 이에 대비한 묵시론적 영성, 가난한 삶 추구,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인 빛의 아들로 자처함 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많은 점에서 바리사이들과 비슷하나 공식 유다교와는 아주 달랐다. 이들은 이원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의 대립으로 특정지어진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이 둘이 서로 투쟁하는 가운데 인간의 변화가 결정된다고 보았으며 양측의 거센 투쟁은 있으나 결국 하느님께서 악의 영을 파멸시키신다고 보았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사용하고 각자 가지 손으로 땀 흘려 일할 의무를 실천하며 상거래를 못하게 하고 희생제사의 형태로까지도 피를 흘리는 일을 못하게 했다. 이들의 공동체 조직은 그리스도교 수도회들과 매우 비슷한데(개신교 제외), 입회 조건이 매우 까다롭고 수련기간이 있고 계급적으로 다스리며 규율이 엄격하고 정결 예절을 실행하며 저녁밥은 공동으로 모여서 거룩하게 먹었다. 이들은 정의의 스승이라고 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며(어떤 자료에서는 정의의 스승이 쿰란 공동체를 설립했다고도 함) 메시아가 세상에 오면 불경한 자들을 뿌리 뽑아 없애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거룩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쿰란 공동체의 최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제1차 유다항쟁 중이던 68~70년 사이에 파괴 몰살당했거나 주변 요새 등으로 도망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상이나 생활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지 못하고 점차 주변 국가들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쿰란교단 [Qumran community] 


고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약 4천 명 종교집단으로 주요활동  성경연구, 육체노동, 기도, 예배


사해문서 중의 쿰란사본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조직한 종교단체를 말한다. 교단으로 번역되는 말은 헤브라이어 ‘야하드’로, ‘하나로 결합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로 맺어진 공동체를 뜻한다. 쿰란 사람들은 자기들을 ‘언약의 백성’, ‘선택된 자’, ‘참된 이스라엘’ 등으로 불렀다.


그들은 에세네파에 속하며,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회적인 공동생활을 했다. 인원은 4천 명 정도로 추산되며, 주로 성경연구와 육체노동과 기도와 예배에 모든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보통 메시아의 잔치를 예언적으로 기념하는 방식으로 했다.


3명의 제사장과 12명의 신도(3명의 제사장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가 최고회의를 조직하고 교리적,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밖에 ‘큰 자들’에 의한 회의가 있어 교단에 처음 입단하는 사람을 심사하거나 계율을 범한 자들을 재판했다. 이들은 율법에 매여 있었으며, 이방세계의 사람들을 포용할 수 없었다. 1947년 사해두루마리 뭉치가 발견되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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