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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에 있어서의 [神]의 문제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5. 6. 1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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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에 있어서의 []의 문제

                 

-자유라는 이름으로 신을 부정하는 Sartre

강성위(한국외대 교수, 철학)


                                          



전통적.역사적으로 신의 문제를 다뤄 온 학문은 의당 [신에 관한 말을 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이다. 철학에서는 원래 [초경험적.절대적인 우주의 근거]를 밝히려는 형이상학마저도 신을 직접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에 철학이 신을 연구한다면, 그런 철학은 이미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세 이전까지만해도 철학은 기껏해서 [신학의 하녀]로서, 신학을 연구하는 데 쓰여지는 한 가지의 보조과학 또는 방법론에 지나지 않앗다. 슨의 존재, 능력 및 성질을 해명하고, 사람들을 신에 대한 믿음(신앙)으로 이끌어가는 데만 전념하고 있는 학문으로는 신학이 있는데, 어떻게 철학이 이 문제들에 끼어들 수 있었겠는가? 물론 철학자들 중에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앴느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예, Descartes, Kant), 대개 신학 또는 신앙의 편에 서서 신의 존재를 옹호하려는 입장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다룬 문제들은 철학에서 보다 신학 또는 종교학 등에서 더 크고 소중하게 다뤄지고 있다.

신의 문제를 독점하고 있던 신학도 근세 이후에는 철학의 도전을 받게 된다. 즉 경험과학의 발전과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의 및 19세기의 독일의 통속철학 등이 신학의 핵심적인 대상인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신은 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중요한 연구과제로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철학들은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신학과는 반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애쓰는 것, 즉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이런 무신론을 주장하는 여러 철학사조들을 계열별로 나눠 간단히 살펴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1)[나는 신을 부인한다. 이 말은 나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부인하는 것을 부인한다는 뜻이다]1)라고 한 L.Feuerbach와 이것을 이어 받은 K.Marx 등의 소위 휴머니즘적인 무신론, 2)[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Nietzsche와 Sartre 등의 실존주의적인 무신론, 3)언어분석적으로 [신(Gott)]이라는 말에는 내용이 없다고 하는 실증주의와 신실증주의의 회의론적인 무신론, 4)1960-70년대에 미국에서 생겨나 유럽에도 영향을 미친 [신이 죽은 뒤의 신학]임을 표방하는 [신은-죽었다-신학](영. God-is-dead theology, 독. Gott-ist-tot-Theologie), 5)실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신을 옹호하려는 Dostojewski와 Camus의 [무신론의 반석(盤石)] 등등이 신의 존재를 다루되, 부정하려는 철학사조들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즉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이 여러 철학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런 여러 무신론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Feuerbach에서 시작되는 맑스주의적인 무신론과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Nietzsche의 무신론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른 논문에서 다루기 때문에 거기에 맡겨 놓고, 또 3)과 4) 및 5)의 문신론을 한꺼번에 다 다루기에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이 중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생생하고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Sartre의 신에 대한 태도만을 다루기로 한다.


1. Sartre의 무신론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이란 원래 물음을 제기하는 존재다. 그래서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살아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신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물음에 앞서서 [신은 죽었다]는 Nietzsche의 말에 현혹되어, [신은 죽었다]는 고정관념에 가로잡혀 있는 것 같다. 1967년 추리히 공항의 비행기 타탑에서 내린 Sartre는 기자들에게 서스럼 없이 [여러분, 신은 죽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2) 그리고 독일의 주간지 Spiegel지 1967년도 2월 마지막 호는 [독일 국민들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에게는 신은 죽었다]고 보도하고 있다.3)

이와같이 오늘날의 세상에는 무신론이 팽배해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역사적인 배경들이 깔려 잇다. 오늘날의 무신론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사조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요, 이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자들 중에사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는 프랑스의 Sartre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실존철학에는 소위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와 무신론적인 실존주의가 있다. 그런데 유신론적인 실존철학은 종교생활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앗으나, 무신론적인 실존철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고,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기에 50년대 후반부터 크게 논란되고, 찬.반 양론을 불러 일으켰다. Sartre는 Nietzsche의 무신론적 실존철학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이제 그의 신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살펴 보기로 한다. 그가 무신론자로 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들이 있다.



2. 외조부의 무관심이 신앙을 보리게 했다

Sartre가 무신론자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가정교육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가톨릭정신]으로 교육하려 햇으나, 외조부4)는 세속주의자로서 <교의종교(敎義宗敎)>를 경멸했다.5) 그래서 Sartre는 어머니와 외조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 성장했으며, 마침내 우리 세기 최대의 무신론자로 되었다. 그가 무신론자로 된 데에는 외조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자전적인 저작 [말들](Die W rter)에서, 자기는 교의에 대한 갈등 때문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에 신앙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실패한 부르심(召命)이었다. 나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하느님을 주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는 사릴을 알지도 못한 채 하느님을 받아들였다. 하느님은 내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내 안에 얼마 동안(식물처럼) 살아 있다가 죽어버렸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나는 지난날에 예쁜 여자를 만났던 늙은 바람둥이처럼 재미있어 하며, 아무런 후회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0년 전이라면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또 우리를 갈라 놓은 우연도 없이,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은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어요.]6)

이 고백과 같이 Sartre는 어렸을 때는 신을 요청하고 있었으나, 늙어서는 신을 추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뒤에 와서 그는 [전능하신 분]에 관해서는 생각하려 했으나, [새로이 신을 불러 들이려는 유혹은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도 보고하고 있다. Sartre는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전능하신 분에 대한 생각은 뒤에 가서도 버리지 않는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잇는 것처럼, 그에게도 하느님은 필요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하느님을 주었다. 그러나 가정에서 외조부가 종교교육을 무관심하게 방치해두었기 때문에, Sartre에게 심어졌던 하느님의 씨앗은 말라 죽고말았던 것이다. 즉 그가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외조부의 무관심이 그를 <신을 죽이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은 어릴 때의 교육이 한 인간의 일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3. 인간은 자유다

Sartre가 신을 부정하는 두번째 이유는 그의 인간에 대한 이해다. 원래 실존철학은 [실존](Existenz)을 중심개념으로 삼는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실존이란 곧 [총체적인 인간], 다시 말해 결단과 책임 속에서 자유로히 자기의 삶을 계획해 나가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고 있는 그런 인간이다.7) 따라서 Sartre에게 있어서의 인간은 철저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런 자유로운 존재는 미리부터 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그 스스로 있는 것](An-sich-Sein)8)에 의해 주어져 있지 않은, 즉 가능성도 없고, 만남도 없고, 교통(Kommunication)도 없이 [자기 스스로 안에 꽉 닫혀 있는 존재]9)에 의해 주어져 있지 않은 그런 존재다.10)

Sartre에 따르자면 인간이란 자유인 한에 있어서 인간이고, [그 스스로](An-sich) 안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인간은 [그 스스로](An-sich)11)를 없애버리는 자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긍정하면서도, 자기를 자유라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Sartre는 이와 같이 <인간은 자유다>11-1)(Der Mensch ist Freiheit)라고 정의한다. 이런 생각은 그의 유명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Die Existenz geht der Essenz voraus)는 명제에 바탕하고 있다. 이 명제는 [인간이 우선 실존하고, 자기 스스로와 만나고, 세상에 나타나고, 그런 뒤에야 스스로를 정의(규정)한다]는 뜻이다. 즉 종전의 철학들에서처럼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본질이 미리 있고, 이것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있고, 삶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 형성되어 간다는 뜻이다.12)

Sartre에 의하면 [인간이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가 창조한 그대로일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가 그것으로 만든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13) 실존이 본질을 앞서기 때문에, 미리 정해져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도 없고, 미리 정해져 잇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스스로(스스로의 본질)를 만들어 나가는 자요, [되어가는 자]다. 그래서 Sartre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은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 자유가 없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Sartre에 따르자면, 인간은 이렇게 원래부터 자유인데, 이러한 인간의 자유를 빼앗은 자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이 죽어야 자유가 인간에게 되돌려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Sartre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신은 죽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고, 이렇게 신을 <죽였기> 때문에 <신은 죽었다>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무신론 또는 살신론(殺神論)13-1)이 성립된다.

이러한 무신론이 Sartre의 실존주의의 바탕이다. [실존주의는 모든 결론들을 일련의 무신론적인 태도에서 이끌어내려고 하는 노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14) 이러한 Sartre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Dostjewski에도 바탕하고 있다. Dostjewski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허용될 것이다]15)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실제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못할 짓이 없게 된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유로워지겠지만,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안에서도 또 밖에서도 자기가 매달릴 가능성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로우나 <끈이 떨어진>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인간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말, 즉 인간이 <못할 짓이 없게 된다>는 말은 윤리적으로도 큰 뜻을 지니게 된다. 신이 죽으면 인간은 자유로 되지만, 끈 떨어진 연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못할 짓리 없어지게 되어, 도덕적으로 규제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의 도덕적인 방황도 사실은 이런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Kant는 <요청적인 종교>, 즉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는 하느님이 요청된다고 했던 것이다.16) 여기서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Voltaire도 <만약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을 발명해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Sartre는 이와 반대로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신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17) 이러한 Sartre의 주장은 전통적인 철학에 대한 도전이요, 전통적인 신에 관한 생각을 뒤엎은 것이다.

Voltaire의 위와 같은 주장은 Kant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Sartre는 <신을 없애버려야 할> 대상, 즉 <죽여얄 할>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이 자유이기 위해 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Sartre의 사상은 무신론이 아니라, <살신론>이라 할 수 있다. 신을 죽인 인간은 자유로워지겠지만,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오늘날의 윤리적인 혼돈은 바로 이러한 신을 죽인 자유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Sartre의 실존철학의 기본개념은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자유이고, 기본적인 문제는 남들의 명령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문제와, 스스로가 명령을 내림으로써 인간이 자기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묻는 것 등이다.18) 여기서 우리는, 신을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에게 명령을 내려,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자로만 이해하고 있는 Sartre의 신에 대한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Sartre가 배웠었고,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그리스도교의 신이야말로 인간을 <해방시킨> 구세주이며, 실제로 그 어떤 위대한 인간보다 더 많은 자유를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주었고, 종교적인 죄악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속박에서 해방시켜 준 분이다. Sartre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도 옳고 필요한 것이나, 이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Sartre가 주장하는 그런 자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지? 오히려 이런 자유는 인간을 동물적인 상태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나 아닐른지 하는 염려가 앞선다.


4.전통적인 철학에 도전하다

Sartre는 자기의 무신론을 해명하고 신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무신론적인 실존철학을 가지고서 여태까지의 철학 전체를 비판한다. Sartre에 따르자면 여태까지의 철학의 원칙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Die Essenz<=Wesen> geht der Existenz voraus.)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 즉 인간은 초개인적인 법칙에 예속되어 있으며, 일차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본질이고, 본질이 현실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Sartre가 이렇게 이해한 전통적인 철학은 플라톤주의적인 철학이며, 이런 철학에 대한 찬.반 양론은 Platon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전통적인 철학을 이렇게 이해한 Sartre는 [본질-실존-관계](Essenz-Existenz- verh ltnis)를 과감히 뒤집어 엎음으로써, 여태까지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실존이 본질을 앞서고, 실존이 본질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외친다. 즉 과거에는 [인간이란 정해져 있는 것으로 되어가는 자]라고 말해졌지만, Sartre에게 있어서는 [인간이란 되어가고 있는 자요,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로 된다.19)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다. 주체와 객체의 뒤바뀜이다. 이런 인간이해가 Sartre철학의 핵심이요, 출발점이다. 우리 인간들은 어떤 정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되어가는 바의 것(본질),이다. [그 어떠한 개념에 의해 규정될 수 있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다...인간이란 그저 자기가 구상한 그대로의 존재다...인간이란 어떤 것으로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20) 사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구상하고 노력한 바에 따라 발전해나가는 경우도 매우 자주 있다. 아무리 이런 것이 자유라고 해도, 인간은 자기에게 미리 주어져 잇는 환경이나 조건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Sartre에 따르면, 인간이란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형성되어가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자다. 우리는 [인간이란 자기 이외에 입법자가 없는 그런 자]21)라고 알고 있다. 즉 인간에게 규칙을 부여하는 자는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고, 인간은 자유다...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22) Sartre에 있어서의 인간은 이렇게 절대적으로 자유이며, 완전한 자율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혼자서, 자기 자신과 자기의 본질을 창조해 나가는 자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 Sartre는 이 자유의 방해자를 신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며, 일종의 무(無)요, 여러 사물들 중의 한가지 사물이요, 여러 대상들 중의 한가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23)는 명제를 정립한다. 그리고 Sartre는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두가지의 기본사상을 내세운다.

첫째,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신으로부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안에 감춰져 잇는 본질, 즉 신의 생각과 의지, 일정한 목표, 완전히 정해져 있는 가치 등등을 실현시켜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의무에 억눌려 선택할 가능성과, 따라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신의 법률을 따르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 신의 실존은 인간을 남(他者, 곧 신)의 의지에 따라 춤추어야 할 꼭두각시로 전락시켜 버리고 만다. 그래서 Sartre는 <인간은 자유롭고, 자기 자신의 창조자이고, 모든 가치들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신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Sartre의 무신론의 근거가 뚜렷이 나타난다. 인간이 자유럽기 위해서는 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Sartre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를 [남을 위해 있는 존재](Sein f r Andere)에서 이끌어낸다. Sartre는 인간의 의식(Bewu tswin)을 분석하면서, 존재를 [그 스스로 있는 것](Ansichsein)과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것](F rsichsein)24)으로 구별한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실펴 보기로 하자. 의식이 [어떤 것]을 생각하는 한, 의식은 [객관적인 것](대상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 이 객관적인 존재가 [스스로 있는 것]인데, 물질적이고 확실하고 확고하고 밖으로 드러나 있는(현상되어 있는) 그런 존재를 뜻한다.25) 또 Sartre에 따르자면, 의식구조는 이 <스스로 있는 것>과 나란히 하나의 다른 존재영역을 열어준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물음을 제기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반성하는 의식과 반성 이전의 의식이다.>26) 그리고 이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를)부정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정의 근거는 무(無)이다. 이 무는 순수히 긍정적인 <그 스스로 잇는 것>에서 생겨날 수 없다. 그래서 물음을 제기하고 부정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통해 무가 세상에 오게 되는 그런 존재다].27) 인간은 <그 스스로 있는 것>을 없애는 데서 자기 스스로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인간이 <그 스스로 있는 것>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즉 인간이 <그 스스로 있는 것> 을 인정해 주는 한, 인간 자신이 <그 스스로 있는 것>의 한 조각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소외시켜 버리고 만다.

이렇게 <그 스스로 있는 것>28)을 없애버림으로써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위하게> 된다. 이렇게 <그 스스로 있는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자기자신을 기획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 근거로 된다. 여기서 Sartre에게 있어서의 <그 스스로 있는 것>이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Sartre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즉 자유를 우리기 위해서는 신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는 자기의 굴레를 없애버리는 그런 존재자다.]29)


5.이웃이 자유를 빼앗는다

Sartre에게 있어서의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존재>는 위태롭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인간학에서 말하고 잇는 바와 같이, 인간이란 본래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Mangel Wesen)다. 그래서 < 그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기 이외의 남, 즉 <이웃>이 필요하다. 물질적인 존재들의 스스로 안에 묶여 잇는(결합되어 잇는) 것과는 반대로,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남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30) Sartre는 그 이유를 남(이웃)이란 실존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남을 필요로 하는 데서 자연히 남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남에게 의존하게 되고, 자기의 실존을 남들에게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는 더세 인간은 자유를 제약받거나 빼앗기고, 남의 객체(대상)로도 되고, 따라서 스스로를 소외하게 된다. 즉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남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남들과 더불어 삶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 <나는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하고 고민한다. 나의 자의식(自義識)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 정해진다. 나의 지평에 남들이 나타나는 데서(등장하는 데서), 나는 나의 기획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나의 세계가 남들의 기획에 끼어들기 위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것을 깨달은 인간은 남들을 더불어 살아갈 동반자가 아니라 투쟁의 대상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Sartre가 도달한 결론은 [남들은 반드시 객체(대상)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Sartre는 더 나아가 [남들은 지옥일 뿐이다], [원죄란 남들이 잇는 세계에 내가 나타나는 것이다]31)고 하며, 남들을 철저하게 적대시하고 있다. 또 Sartre는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남들의 총체>(der Inberiff des Anderen)일 거라고도 한다. 내가 나름대로 남들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신은 절대로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전능하게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대상으로 될 수 없는 주체일 뿐이라고 한다. Sartre에 따르자면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의 대상으로 될 뿐이며, <신은 그저 지옥일 뿐>이라는 것이다.32)

여기서도 Sartre가 신을 없애거나 죽여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이 인간을 감금해 놓고 자유를 빼앗는 감옥이요 지옥이니 지옥을 쳐부수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만 같다. 그러나 남으로서의 이웃과 신을 부정하는 것은 사회를 부정하는 일이다. 인간은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부족함을 보충해 줄 남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웃을 자유를 빼앗아가는 적대자를 보고 부인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완전에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Sartre철학의 커다란 잘못이다.



6. 우리가 태어난 것도 부조리요, 죽는 것도 부조리다?

Sartre가 신의 실존을 부인하는 두번째 증명은 <신의 개념>이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Sartre에 따르자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존재>를 없애버릴 때, 즉 자기가 <무>일 때에만 존재한다. 인간은 존재의 이런 결함, 즉 우연 속에 내동댕이쳐져 잇는 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또 존재의 동일성 즉 <스스로 있는 것>과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한다.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은 <그 스스로 있는 존재>가 결여되어 있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있는 존재>는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존재>가 결여되어 있는 존재다.]33) 그런데 이 두가지를 종합하려는 노력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 있는 존재>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없어져 버리고,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존재>에서는 인간이 <무>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스스로 있는 존재>와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존재>는 동일하게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며, 인간은 절망을 하도록 저주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다같이 큰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좌절되도록 저주받았다는 것을 동시에 발견했기 때문이다.]34)
인간이 자기의 결험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데서 즉 동시에 <스스로 있는 자>와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자>로 되려고 노력하는 데서 실현시키려고 하는 바의 것은, 결험이 있는 신이라는 개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스스로 있는 자>와 <스스로를 위해 있는 자>라는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이상의 배후에는 신으로 되려는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35)

Sartre에 따르자면 이러한 소망 속에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부조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열정 속에서 스스로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존재의 바탕을 세움과 동시에 <그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서다. 이 <그 스스로>는 그 자신의 바탕을 가진 것으로서 우연에서 벗어나고, 종교가 신이라고 일컬으는 <스스로가 원인인 존재>(Ens dausa sui)다. 이렇게 해서 이 열정은 그리스도의 열정을 되돌려 놓은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서는 멸망함으로써, 신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개념은 모슨에 차 있다. 우리는 괜히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일종의 필요 없는 열정이다.]36) [우리가 태어나는 것이 부조리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도 부조리다.]37) 여기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 Sartre의 비관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스스로를위해 잇는 것>과 <그 스스로 있는 것>의 완전한 동일성은 개념으로 성립될 수도 없고 절대적인 본질이란 그저 생각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 개념은 불합리(부조리)하고 그 자체 안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신은 <그 스스로 있는 존재요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존재>로서 자기 스스로와 완전히 일치해야 하고, 동시에 자기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앞에서 간단히 본 바와 같이 이 두가지는 동일하게 될 수가 없고,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하려다가 절망만 하고 만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다. <그 스스로 있는 것>과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이 일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억지로 일치시켜 놓은 것이 종래의 신의 개념이니, Sartre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신의 개념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7. 자유만이 책임을 지게 할 수 있다

Sartre가 이렇게 신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편에서는 그의 무신론을 [그의 사고의 한 측면]이라고만 보고, [그의 저술의 핵심]이라고 절대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그의 철학적인 주저를 바로 [자연적인 반(反)신학](nat rliche Antitheologie)라고 해석한다.38)

그러나 신이라는 가정(Hypothese)을 정직하게 부정하는 것은, Sartre에 있어서는 휴머니즘의 근본적인 접근이다. Sartre가 신을 부정하는 목표는 첫째로는 <신이 되고저 하는 착각>에서 인간을 구원해 내는 것이고, 둘째로는 <신의 실존을 들먹임으로써 총체적인 자유에 참여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자기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에서도 벗어나려고 하는>39) 인간의 경향을 백일하에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핑계로, 자유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자기의 의미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게 해주는 자유에서 도망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중심주의>인 휴머니즘이 설 곳이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이렇게 신을 부정하는 목표는 인간을 부정직한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의 현재의 상처를 미리 받아들이고, 자기가 하나의 <그 스스로 있으며-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존재>로 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야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또 신을 이렇게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인간은 계속해서 모든 규정들에서 벗어져 나와 스스로를 선택하고, 의미와 가치를 하늘에서 찾아내려고 생각하지 않을 때에만 자기의 본질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반성이기도 하다.

누누히 말해온 바와 같이, Sartre는 신과 이 신을 믿는 종교가 없어져야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스스로 누릴 수 잇다고 주장한다. 이런 자유를 행사할 때, 그 행위는 도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즉 인간은 자유롭게 행위했을 때만이 자기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인간은 신이나 자기 이외의 그 어떤 자를 구실(口實)로 내세우더라도 자기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존철학에서 <책임>을 내세우는 것도 바로 그 행위가 자유에 따른 행위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Sartre에 따르자면 인간의 기획(계획)은 <자기자신>을 해방시키고,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책임있게>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Sartre의 무신론을 여태까지의 그 어떤 무신론보다 원숙한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들 한다. 그 이유는 그의 무신론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특징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Sartre는 반종교적인 정서가 깃들어 잇지 않은 그런 무신론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는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어조(語調)는 없다. 사실 신을 부정하기는 하되 현실적인 종교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은 그의 어린 시절의 가정분위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둘째로, Sartre는 계속해서 변질해온 이데올로기와 같은 그런 무신론은 반대한다. 무신론의 가장 큰 폐해는 바로 그것이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 있는데 다른 무신론과 같이 신의 실존은 반대하면서도 이데올로기화하지 않은 것이 Sartre무신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실존주의자는 될 수 있는대로 노력을 적게 들이고 신을 제거하고자 하는 일정한 유형의 세속적인 도덕에는 단연코 반대한다].40) 그는 이렇게 통속적이고 깊이 없는 무신론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또 그는 [무신론은 일종의 잔인하고 지리한 모험이다. 나는 무신론을 끝가는 데까지 다뤄 보았다고 생각한다]41)고도 말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무신론을 <잔인하다>고 한 것은 정치이데올로기화된 무신론을 가리킬 것이다. 이런 무신론을 알고 있던 Sartre는 정치의 도구로 전락한, 이데올로기화된 무신론을 반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이런 무신론은 인간에게 해방이 아니라 속박만 가져다 주었기 떄문이다. 인간이 신의 속박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자유, 즉 자율에 따른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자기 철학의 이상으로 삼고 있던 Sartre는 경직화된 이데올로기가 신보다 더 잔인하고 인간의 자기형성에 더 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Sartre가 거듭해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이 없어야 자유로와지고, 자유로이 행한 행동이 진정한 인간의 행동이며 이렇게 행해진 행동에만 책임이 따른다. 일반적으론 시인되고 있듯이 자유에 따르지 않은 행동, 즉 강요된 행위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신을 없애고 자유가 된 인간은, 바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죽음>=<인간의 자유>=<행위주체인 인간의 책임>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8. Sartre의 투쟁목표는 <무상>이었다

우리는 여태까지 Sartre의 무신론의 핵심을 개략적으로 살펴 봤다. Sartre의 무신론에 대한 해석은 대충 네가지가 있는데, 이 해석틀의 성격이 분명치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논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간단히 이 네가지의 해석틀을 무비판적으로 요약해 보기로만 한다. 예컨대,42) G.Marcel이 Sartre를 [체계적으로 신을 모독한 자]라거나 [청소년을 부패시킨 자]아고 한 것은 지나치게 조급하게, 따라서 지나치게 빨리 내린 결론이고, H.Dumery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는 Sartre의 신개념은, 획일적.가치론적.이원론적인 신개념에는 들어맞으나 삼위일체인 신에게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논의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고, F.Jeanson이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Sartre의 휴머니즙을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을 완성한 것이라고 칭찬하는 일도 Sartre의 기본적인 의향에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Sartre에 관한 비난과 칭찬은 엇갈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섣불리 어느 한쪽을 지지하거나 거부할 수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자적으로, 위에서 논의해온 내용에 따라 Sartre의 무신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판을 해보기로 한다.

(1)우리가 Sartre에게 물어보고 싶은 첫번째 질문은 <인간을 절대적인 자율에로 해방시켜 주기 위해 신을 없애버리려는 목표를 지니고 잇는 그의 존재론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일종의 휴머니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Sartre의 이러한 존재론, 즉 철학은 본질적으로 인간학으로 좁혀져 버리고, 휴머니즘을 절대화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Sartre의 철학적인 분석은 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휴머니즘도 불가능하게 해버리는 것 같다.43)

왜냐하면 Sartre에 따르자면 인간의 본질의 바탕은 <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불가피하게 우연히 내맡겨져 있다. <그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없애버리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내용없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가능한 것에 대한 기획을 통해 구성되어 있으나, 그 기획 자체 안에는 자기가 포함되어 있질 않다. 인간은 오로지 <그 자신 밖에 있는 존재>44) 안에 실존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 <무>다.45) 어떻게 그런 존재론이 [휴머니즘]을 창설할 수 있겠는가?

또 자유를 한계도 제약도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인간을 모든 관계에서 고립시켜 버린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Sartre는 이웃마저 자유를 빼앗는 자라고 규정하고 배척하고 있다. 이렇게 고립된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궁극적인 의미와 삶의 근거를 찾아낼 수 없어, 낙담하여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틀어박히고 만다. 존재는 <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의미가 없는 그런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Sartre의 이런 존재론의 결과인 그의 인간학과 자유론은 제절로 모든 존재가 궁극적.필연적으로 아무런 뜻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Sartre에 따르자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의 실존이 인간의 자유를 없애버린다. 이 말을 구체적으로 Sartre의 존재론에 적용해 보면, 신의 실존은 의미가 없는 자유를 부정하게 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여러가지 비관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Sartre는 자기의 휴머니즘을 철저한 낙관주의라고 이해하고, 이것에 대한 모든 비판적인 해석에 날카롭게 대항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리들이 만들어낸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46) 이런 계속적인 자기창조, 즉 절대적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고와 행위로 발전하는 것이 이런 낙관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Sartre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고쳐 생각하게>47) (Umdenken) 하려고 강요하려 하며, 또 우리들에게 신을 부정하는 것을 반드시 비관주의나 쾌락주의나 허무주의나 유물론과 연결지우는 여러 사고는 이제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 Sartre의 휴머니즘은 일종의 역설(Paradox)에 빠져 들게 된다. 우선 그는 인간을 일종의 쓸모없는 정열로 보고, 태어나는 것을 부조리라고 보고, 반드시 즉어야만 하는 것도 부조리한 것으로 본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의 행동철학을 <자기 자신으로 해방되어 가는 인간>이 의미를 실현시켜 나가는 낙관적인 학설이라고 보고 있다.

(2)Sartre의 존재론은 실존(주관), <그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것>과 본질(객관, 그 스스로 있는 것), 즉 실제적인 실존행위와 본질을 낡은 형이상학에 따라 온당치 못하게 구별짓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48) 과거의 존재론에 따르자면, 현존재(인간)에게 알맞는 본질의 바탕이 되는 것과 우선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앞뒤를 규정하는 관계는 현존재가 본질을 전제로 하고 있다. Sartre가 이런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관걔를 뒤집엎는 것이다. 즉 실존을 본질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이 존재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형이상학에서는 본질로서의 신이 먼저 존재하고, 이 본질에 따라 실존이 생겨나고 규정되었으나, Sartre의 철학에서는 실존이 먼저 있으니 본질로서의 신이 필요없고, 따라서 신이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Sartre는 실존(그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것)과 본질(그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도식을 뒤집어 엎었다는 데에만 머물러 있다. 이렇게 뒤집어 엎는 일은 전제나 거듭해서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다. Sartre는 본래적인 존재문제는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존재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본질과 실존의 구별이 가려 있기 때문이다.

Sartre의 신개념에 대한 비판이 노리고 있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데서 생겨난 형이상학적인 신개념이며, 이런 일은 이미 중요한 철학자들이 다 해왔던 일이다. 이렇게 해서 Sartre는 신을 비판할 때 Descartes와 Leibniz의 신개념과 관련을 갖게 된다. 즉 그의 무신론은 유신론적인 신개념으로 되돌아 간다. 합리론적인 유신론은 신을 저세상에 있는 <최고의 존재>(summun ens)49)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신은 질서를 보호하는 자로 되고, 기술적.기계적인 창조자로 된다. 만약에 우리들이 Sartre처럼 신을 <보다 높은 곳에 있는 수공업자(匠人)>나 탐욕스럽게 자기의 보물을 지키고 있는 경찰의 감시자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모든 자유와 위신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Sartre의 [신]은 인간의 폭을 좁히고, 인간을 위협하는 인색하고, 샘 많은 그런 신이다.50) 그래서 그의 무신론은 실제로는 하나의 우상(Idola)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즉 온당하게 이해된 신이 아니라, 곡해되어 이지러진 우상을 신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Sartre는 잘못된 종교교육을 통해 자기의 신개념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서전적인 저서 [말들]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종교를 미리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종교가 구원이기 때문에 나는 종교를 희망하고 있었다. 만약 사람들이 나에게 종교를 거절했더라면 나는 내 스스로 종교를 발명해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종교를 거절하지 않았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난 나는 전능하신 분이 나를 당신의 자랑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내가 믿으려 했던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사람들이 나에게 가져다 준, 사회적인 능력을 갖춘 신 안에서 나의 영혼이 바라던 그런 신을 알아내지 못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의 창조자였으나, 사람들은 나에게 <최고의 우두머리>를 가져다 주었다. 이 두가지가 일치를 이루고 있었으나, 나는 그런 것을 몰랐다. 나는 내키지도 않으면서 바리사이인들의 우상을 떠받들었다. 그리고 공인된 여러가지 가르침들이 신앙을 찾으려는 나의 즐거움을 내게서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다.]51)



    {註}

1)Brugger, Walter: Philosophisches W rterbuch, Freiburg 1978, S.31에서 재인용.
2)Fries, Heinrich: Abschied von Gott?(줄여서 Abs라할 것임), Freiburg 1979, S.11
3)같은 책, 같은 곳
4)의사요 신학자였던 Africa의 성자 Albert Schweitzer의 조부, 따라서 Sartre와
  Schweitzer는 내종간.
5)Weger, Karl-Heinz(Hrg),: Religionskritik von der Aufkl rung bis zur Gegenwart,
  Freiburg i.B. 1979, S.269참조
6)ABS, S.54
7)Coreth E.Lotz J.B.: Atheismus kritisch betrachtet, M nchen und Freinurg/Br.
  1977, S.89참조(Akb로 줄임); Borne,Etienne: Gott ist nicht tot -  ber das  rge-
  rnis und Notwendigkeit des Atheimus -, Wien, Graz, K ln 1965, S.126이하 참조.
  (Gnt로 줄임)
8),9)절대자로서의 신을 가리킴.
10)Abs, S.54-55참조.
11)하느님, 즉 신을 뜻함.
11-1)Gnt, S.119
12)이것은 Platon과 Aristoteles에서 비롯되어 중세기에 보편논쟁을 일으켰던 보편자
   의 문제와 연관됨직 하다.
13)Abs, S.55
13-1)필자가 독자적으로 생각한 말이다. 있던 [신이 죽었다. 없어져야 한다면] 살아
     있던 신을 죽인다는 뜻으로도 된다.
14)Abs, S.55
15)Abs, S.55
16)Abs, S.55참조.
17)Abs, S.55참조.
18)Akb, S.89참조.
19)Akb, S.89
20)Sartre,J.P.:Ist Existenzialismus ein Humanismus? in Drei Essays, Berlin 1961,
   S.11(E.H.로 줄임)
21)E.H. S.35
22)E.H. S.16 또 Gnt, S.119./ Gnt, S.119참조
23)Akb, S.90
24)종래의 Hegel철학에서 이것을 卽自存在와 對自存在로 번역했으나, 번역어 자체의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풀어서 번역해 보았다.
25)Akb, S.90이하 참조.
26)Akb, S.91
27)Sartre,J.P.: Das Sein und das Nichts, Versuch einer ph nomenologisxhen ontol-
   ogie, Hamburg 1962, S.678(SN으로 줄임).
28)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 따라서 여기서는 신을 뜻한다.
29)SN, S.714
30)Akb, S.91참조.
31)SN, S.714
32)Akb, S.91-92참조.
33)SN, S.71

1
34)SN, S.783
35)Akb, S.92참조.
36)SN, S.770
37)SN, S.680
38)Akb, S.93참조.
39)Akb, S.93참조.
40)E.H. S.15
41)[말들], S.194
42)Akb, S.95참조.
43)Akb, S.95참조.
44)Akb, S.95
45)Akb, S.96
46)
47)Akb, S.46
48)Akb, S.97참조.
49)Akb, S.98
50)Akb, S.98참조.
51)[말들], S.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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