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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道德經의 '道'의 의미

東洋哲學

by 巡禮者 2010. 5. 5.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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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道德經의 '道'의 의미


도가사상의 도에 대해서 도(道)는 이 세계의 존재원리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가사상은 범신론적인 사변의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존재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또 존속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작위(作爲)에 의한 행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변이며,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인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으로,  유가에서 예(禮)와 같은 인위적인 제도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불교의 금강경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논리의 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가에서 불교의 공사상에서 논리를 차용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에 대해서는 답변자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사변의 근거가 같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도"는 인간의 인식이나 언어논리에 의해서 언표(言表)되어질 수 없는 존재양태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도"라고 언어로써 표기되면, 본연(本然)의 "도"와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사변입니다.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답변자가 언어로써 답변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을 언어로써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듯이, "도"도 스스로 무엇인가 깨닫는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는 '도가 도라 해도 된다 함은(道可道也), 영원한 도가 아니라(非恒道也) 뜻입니다. 즉 도가 도로 정의, 규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대게 '말로는 도는 표현할 수 없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로 규명하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감각이나 지각으로 경험하고 혹은 추리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인데, 대상들은 늘 변하고, 또 있다가 사라져, 영원한 도를 설명해 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말하겠지만, 道는 또 지각과 경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이는 아주 오래된 철학적 문제, 즉 늘 변화하고 항상 존재하지 못하는 '현상들' 뒤에, 실재, 즉 '본질'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그리고 도는 본질이고, 근본이라면, 도라 할 수 있는 규명이나, 정의는 변화하는 현상이라는 함의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 현상의 근원으로서의 도를 노자는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첫째는 道恒亡名이라 했습니다. 이는 사실 위의 정의와 비슷한 것인데, 여기서는 名이 하나 더 붙어서, 이를 설명해 줍니다. '도는 항구히, 즉 영원히 이름, 분별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름 명名'인데, 역설적으로 이는 道가 이름 할 수 있는 존재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현상계에서,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 그 중에서도 인간을 말합니다. 스스로 다른 존재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지각없는 존재나 지각이 부족한 존재들에게는 이름을 잃는다, 가진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이는 인간 의식 중에서도 이름 붙이는 의식 활동을  영원히 잃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들을 매우 유용하게 씁니다. 그런데 왜 노자를 이를 그것도 영원히 잃으라 했을까요? 사실 우리는 고정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상에게도 또 우리 자신에게도, 무언가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고정하여 집착하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도 그 자체로는 이익이 되지도 손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이롭다 해롭다는 이름을 붙이고 이에 고정되면 이로움 속에서 손해나고 손해 속에서 이로움이 나오는 어리둥절한 상황에 늘 시달리게 됩니다. 즉 노자는 이름이란 어디 까지나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정의된 것이라는 것을 늘 알고 어떤 고정된 이름에 구속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道 즉 영원한 의식의 편안함(大)이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又{爿首}蟲城, 先天地生이라, 장대 널판 머리와 머리든 벌레들을 성 쌓아 가지면, 하늘과 땅이 생함을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는 초간 노자의 표현인데, 장대 널판 머리와 머리든 뱀들이란,  뒤 구의 하늘, 땅과 대구가 되어, 아마도 천상의 경지에 이른 지성과, 땅에서 꼬물거리는 뱀들과 같은 본능, 감정 같은 것을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마치 돌이나, 흙을 쌓아 만든 철옹성처럼, 굳건하게 움직임 없이 미동조자 없는 상태(城)로 가지면(又),  하늘이나 땅이 생하는 것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육체와 더불어 태어나서, 이 육체보다 먼저 있었던 하늘과 땅을 앞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들을 넘어 인류로 확대 되면, 즉 우리가 감각에 의지한 형상이나, 이름을 통해 알고 있는, 이 우주가, 인류 전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인류가 있기 전에, 수 억 광년 전에 우주가 생겼다고 증언해 주었지만, 이것은 그 과학자들이 그 우주의 탄생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믿을 만한 정황'에 근거한 추론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존재나 그 법칙의 존재 여부는 철저히 인류의 '인식'이라는 지각 활동에 의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진짜 우주의 신비입니다. 아이슈타인이 말했던 바와 같이, 우주의 법칙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는 것이 신비한 것입니다. 만일 존재론적으로 인간 의식의 존재가, 우주에 선행함을 믿을 수 없더라도, '인식론적'으로는 우주에 관한 우리의 앎과, 지식이, 우리의 맑은 의식, 그 마치 거울처럼 움직임이 없는 상태여야, 그나마 그 있는 지 없는지 모를 우주를 명징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물의 명징함을 우리는 또 '스스로 그러한 自然'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어떤 욕망에 물든 의식을 가지고 있고, 또 대상적으로 이를 이용, 개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실 누구나 하늘을 보지만, 아무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道法自然입니다. 이는 두 번째를 부연 설명하는 것인데, 오직 도만이 스스로 그러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그러한 법이란, 같은 초간, 도덕경 편에서, 오직 도만이 독립하여, 다른 무엇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말하는 어떤 자연이라는 어떤 관조적 대상을 말함이 아니라, 도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상들은 그것이 우주라도, 우리의 의식이라는 바탕에 서 있어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우주라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우주가 직접 우리에게 말을 건 적은 없었습니다. 설사 우주가 우리에게 말을 걸더라도, 우리의 부정확하고 또 시공간의 한계를 지닌, 감각기관과 인식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원적 의식은, 즉 대상이 투영되어 함께 어지럽게 움직이는 마음 활동 너머의 의식은 스스로 독립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가 도를 참구해야 하는 이유이고, 도에 이르러, 현상계의 불완전을 넘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는 힌두교의 상키아,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선불교의 수행법과 만나게 됩니다.


서양학(과학)은 현상(有,1-9)를, 동양학은 이치(無,0)를 근본적인 대상으로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0입니다. 0은 무엇을 더(+)해도 변화가 없고, 아무리 곱(X)해도 0이 됩니다. 이 부분은 서양학에서는 신비주의로 간과하고 있지만 동양학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서양학은 어떤 것에 국한시키지만, 동양학은 어떤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시간과 공간, 하늘과 땅과 인간 즉 만물만사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을 진리로 합니다.



1. 동서양의 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은 현상의 數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동양은 이치의 象數를 대상으로 합니다. 즉 서양은 공간(象)과 시간(數)을 분리시켜 다루지만 동양은 하나로 합일하여 다룹니다. 따라서 數는 자연수 즉 中數만을 대상으로 하므로, 서양처럼 소수점 이하의 數는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소수점 이하가 위 만물만사를 포괄하지도 못합니다. 23.5도는 현상의 측정값으로 변하는 수치이며 지축의 기울기에만 적용됩니다. 그러나 30은 이치로서 변하지 않으며 지축의 기울기뿐 아니라 대우주 소우주에 적용됩니다.


2. 3天2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동양학은 數만을 다루지 않고 象數를 다룹니다. 위 3천2지는 도형뿐 아니라 만사만물에 적용하는 수치입니다.


3. 우주는 시간과 공간으로, 대우주와 소우주를 포함한 말입니다.


宇宙(우주): 유안은 '회남자'에서, "天地四方 曰宇, 古往今來 曰宙"(하늘, 땅, 4방을 宇라고 하며, 과거가 가고 현재가 오는 것을 宙라고 한다)라고 宇(공간)와 宙(시간)를 정의한다. 이것은 우주를 시간과 공간의 분리가 아닌, 時空의 합일개념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또한 공간을 하늘, 땅, 동, 서, 남, 북의 6合의 모습과, 시간을 가고 오는 順逆의 양방향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동양학은 위 천문이 천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양학의 이치에 적용되는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일월이 운기, 주역, 정역 등에 근본적으로 설정되어 동양학의 모든 학문에 적용됩니다. 즉 시간 공간 뿐 아니라 천지인이 하나임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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