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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그 이름/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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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그 이름/배광하 신부

그리스도 왕 대축일 (마태 25, 31~46)
발행일 : 2008-11-23 [제2624호, 6면]

-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 -

영생의 욕망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모든 욕망도 결국은 생명의 연장에 있습니다. 식욕, 성욕, 탐욕 등도 자신의 생명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막아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은 갈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고대 이집트 ‘미라’ 역시 죽음을 피하고 영생을 얻으려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영생의 욕망이 강한만큼 미라 제조 방법 또한 끔찍할 만큼 집요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우선 천연 소금인 나트륨으로 시체를 건조시켜 수분을 흡수하고 지방을 녹인다고 합니다.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작업이 약 70일 걸리고 또다시 40일을 건조 시킨 뒤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시체의 코로 넣어 사람 머리의 뇌부터 제거 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진의 액체를 뇌에 집어넣고 이어 내장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장은 생명을 상징하기에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내장을 꺼낸 자리는 밀기름, 밀랍, 나트론, 껌으로 혼합된 모래와 톱밥 등을 채워 넣고 모양을 다듬는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나무진이 스며든 아마포 붕대로 시체를 감는데 영생을 바라는 부적을 끼워 넣어 길이만 수 백 미터 되는 붕대를 약 2주일 동안 감는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투탕카멘 파라오의 미라에서는 143장의 부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같은 허황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꿈꾸었던 영생의 모든 인간적 노력은 수포로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인간이 도무지 풀 수 없고, 이길 수 없었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확신에 차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 20)

나아가 베드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인 구원은 예수님에게서만, 그분 이름 밖에 없다며 최고 의회에서 증언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 우리가 구원 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 밖에 없습니다.”(사도 4, 12)

복을 받은 이들

유한의 인간이며, 모든 것이 불완전한 우리에게 가장 완전하시며 무한하고 절대 전능인 주님께서, 호령하시는 임금이 아닌 사랑과 용서와 가장 겸손하신 인자의 아버지로 옥좌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오늘을 그처럼 감격과 고마움이신 주님을 온 우주의 왕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권력을 휘두르는 세속의 막강한 임금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 것들에게 더 많은 정신과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 모든 세상 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한다는 뜻이 더 큽니다.

더구나 교회의 전례력으로 이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있는 때에 세상 종말과 내 삶의 끝을 생각하여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의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그 마지막 때에 우리들 가운데 양과 염소를 갈라 선택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택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참된 왕이신 주님께서는 결코 옥좌에 앉아 계시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도처에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는 굶주린 자의 모습으로, 목마른 자의 모습으로, 나그네와 헐벗은 자, 병든 자와 감옥에 갇혀있는 자의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불쌍한 사람, 소외되고 억눌린 자의 모습으로 늘 우리 곁에 있는 그들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같은 모습의 주님을 우리가 세상에 살 때 얼마나 많이 만나 뵈었는가가 축복과 저주의 선택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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