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속의 개인간 다툼 문제에
수용을 통한 ‘진정한 지혜’ 강조
지난주에 코린토 서간의 첫 번째 집필 목적이 교회의 분열이라고 배웠다. 이제 또 다른 집필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6장의 말씀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1코린 6, 1~5)
이번에는 파벌간, 당파간 싸움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다툼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모이면 개인 간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인간이 모인 공동체인 탓에 ‘싸움’이 없을리 없다.
실제로 본당 공동체는 많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든 그렇지 않든 다른 신자에게 피해를 주는 신자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코린토 신자들은 교우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회 법정에 가서 호소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교우들 간에 돈 문제가 생기면 법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교우인데도 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법정에 고소장을 낸다.
고소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느냐’며 항변할 수 있다. 실제로, 도저히 법에 호소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법정에 고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1 코린 6, 7)
바오로 사도는 “차라리 억울한 일을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사기를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하지 못합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억울하고 하소연할 곳은 법정 밖에 없는데, 당하면서 살라는 말인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지 말라는 말인가? 속시원한 해결책은 없을까.
본당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단초는 소공동체에 있다고 믿는다. 물론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가정 공동체이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가정과 가정이 만나야 한다. 이렇게 가정과 가정이 만나면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장이 바로 소공동체다.
소공동체에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러면 영적인 힘이 생기고 지혜가 생긴다. 이 세상의 각종 반목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으로 나오는 영적인 에너지가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이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원동력이 공동체 기도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법’과 ‘사랑’중에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법은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한다. 법은 하한선이고 사랑은 상한선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회초리 한 대 맞았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한다고 생각해 보라. 물론 자녀를 심하게 체벌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모든 체벌에 고소가 따른다면 그 가정, 그 사회는 얼마나 삭막해 질까.
형제 자매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여기서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한다)은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다. 사랑이 없기에 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매일 매일이 지옥이다. 마음속 응어리를 풀지 않기 때문에 늘 무엇엔가 매여 살아간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교회안의 지혜로운 이를 찾아가자. 그리고 소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해결하도록 노력하자. 신앙인들만이라도 이제 지혜롭게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 모범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개인간 다툼 문제를 거론한 후 불륜과 혼인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8장에서 ‘우상’에 대해 말한다. 개인간 다툼은 모두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상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주에는 우리를 망치는, 우리를 반목시키는, 공동체를 깨트리는 그 우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