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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2)

성경자료

by 巡禮者 2010. 8. 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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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2)
 

기복·유사 신앙 만연하는 현대교회

성령 안에서 신앙 정체성 확립해야

지난 주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자.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갈라 2, 16)고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를 떠난 후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방문해,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갈라티아 신자들은 큰 혼동에 빠진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따라야 하나, 아니면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말을 따라야 하나.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서간을 쓴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바오로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갈라 3, 1~4)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율법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갈라 3, 24)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우리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라는 것”이다.(갈라 3, 25~29 참조)

놀라운 통찰이다. 아니 이는 통찰을 넘어서는 것이다. 성령의 힘 없이는 이런 통찰이 어렵다. 유다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율법이 생의 전부이던)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탈 율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성령의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우리도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이 세상의 정령들 아래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알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그 약하고 초라한 정령들에게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들에게 다시 종살이를 하고 싶다는 말입니까?”(갈라 4, 8~9)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토정비결과 사주팔자를 보고, 택일을 해서 결혼을 하고, 태어나는 아기의 작명(作名)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래선 안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야한다.

갈라티아 신자들이 이런저런 현혹하는 말에 혼란을 느꼈듯이 지금도 이런저런 가설에 혼동을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 기(氣) 수련 등 많은 유사 신심행위들도 만연하고 있다.

이런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큰 글자’로 편지를 쓴다.(갈라 6, 11) 바오로 사도의 서간 중에는 감옥에서 쓴 것도 있는데 이 갈라티아 서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종이도 많이 구할 수 있고, 여유도 있다. 그래서 큰 글자로 큼직큼직하게 써 보낸 것이다.

이 ‘큰 글자’ 중에 유명한 말이 나온다. 바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의미로 설명하면, 구역장이 되고, 단체장이 되고, 꾸르실료 교육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다. 오직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이다.(갈라 1, 15 참조)

바오로사도의 편지가 정말 멋있게 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행복을 느끼던 여러분의 그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갈라 4, 15)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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