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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페낭신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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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8. 19.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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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페낭신학교 조선 유학생 사진 공개
723호
발행일 : 2003-05-11

 19세기 말엽 말레이 반도 페낭신학교에 유학했던 조선인 신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2점이 발굴 공개됐다. 성소주일을 앞두고 선보인 이 사진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제양성에 쏟았던 당시 한국 교회의 열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화제가 되고있다.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서울대교구 고문서 담당 최승룡(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 신부는 지난 4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방문 당시 고문서고에서 찾아낸 페낭신학교 조선인신학생 관련 사진 자료 2점을 5일 공개했다.

 사진 자료는 1886년 조선인 신학생 등 페낭신학교 전교생이 신학교에서 교수단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1점(왼쪽)과 장소는 알 수 없지만 1888~1890년 사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우도(한국명 오보록) 신부와 함께 촬영한 페낭신학교 조선인 신학생 사진 1점(오른쪽)이다.

 페낭은 말레이반도 서북부에 있는 작은 섬으로 '동양의 진주'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섬이다. 18세기 영국 동인도회사의 요충지였던 페낭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아시아 각국 본토인 사제양성을 위해 1808년 국제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가톨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페낭신학교는 최양업 신부가 선발한 이바울리노·김요안·임원선시오 신학생이 박해를 피해 1855년 입학하면서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조선인 신학생이 페낭신학교에 본격 유학을 시작한 것은 1882년부터다.  한불조약 체결로 신앙 자유를 얻은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1884년까지 4차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페낭신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페낭에 유학한 신학생 대부분이 풍토병으로 고생하자 조선교구는 1890년부터 1892년까지 모든 신학생들을 귀국시켰으며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건립해 공부하게 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 페낭신학교에 유학한 조선인 신학생들은 △ 1882년 황베드로·구요안·전안드레아·박방지거·강성삼(라우렌시오)·방바오로·이내수(아우구스티노) △1883년 강도영(마르코)·전요안·김성학(아릭수)·김원영(아우구스티노)·김베드로·최루가 △1884년 정규하(아우구스티노)·한기근(바오로)·최바오로·이종국(바오로)·김도마·김승연(아우구스티노)·김문옥(요셉)·홍병철(루가) 등 총 21명이다.

 이들 중 이내수·전안드레아·한기근 신학생이 1884년 12월10일에, 최루가 신학생이 1885년 4월30일에 풍토병으로 페낭을 떠나 귀국했기 때문에 1886년 사진에는 이들 네명을 제외한 17명 조선인 신학생 모습을 담고있다.

 특히 1886년도 사진은 조선인 신학생을 '/'으로, 미얀마 신학생을 '\'로, 중국인 신학생을 '·'로, 태국인 신학생을 '0'로, 베트남 신학생을 ':'로, 일본 신학생을'+'로 표시, 구분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 당시 신학교 교수로 재임하던 블랑 신부(맨 뒷줄 오른쪽 2번째)의 모습도 담겨 있다.

 1888년에서 1890년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도 신부와 조선인 신학생들'사진은 14명의 조선인 신학생들 모두가 중국 복식에 맨발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촬영장소는 신학교가 아니라 페낭섬 어느 건물 앞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속의 조선인 신학생들 가운데 제법 나이듬직한 3명의 신학생이 가르마를 탄 것으로 보아 긴머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자 마자 5명의 학생들이 둘러싸 머리를 싹뚝 잘랐다"는 김성학 신부(1883년 페낭신학교 입학)의 증언과 입학 당시 신학생 나이로 추정해 볼 때 긴 머리를 하고 있는 장성한 신학생들은 방바오로(1882년 입학, 22세)와 강도영(1883, 20세)·정규하(1884, 21세) 신부로 추정된다.

 또 앞줄에 아직 어린티가 나는 신학생들의 경우 1884년 입학한 이종국(10)·김승연(10)·홍병철(10)·김문옥(11) 신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페낭신학교에 입학한 조선 신학생들은 10살부터 29살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선발됐고, 유학길에 오른 신학생들은 서울에서 인천·부산·나가사키·홍콩·싱가포르를 거쳐 페낭까지 50일이 넘는 뱃길 여행을 해야만 했다.

 신앙자유 이후 페낭신학교에 입학한 조선인 신학생 21명 중 사제품을 받은 이는 강성삼·이내수·강도영·김성학·김원영·정규하·한기근·이종국·김승연·김문옥·홍병철 신부 등 11명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명예회원이기도 한 최승룡 신부는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모두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으로 페낭신학교 출신 조선인 신학생들과 신부들에 관한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 신부는 또 "아직까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조차 페낭신학교에 관한 자료를 모두 정리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앞으로 사진자료를 비롯해 조선인 신학생들의 성적표와 교수들의 평가서 등 다양한 자료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사진설명)
1886년 어느 날 파리외방전교회가 운영하고 있던 말레이 반도 페낭신학교 신학생들이 교수단과 함께 신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사진에는 강도영을 비롯한 조선인 신학생 17명이있다.    1888년부터 1890년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도 신부와 조선인 신학생들 모습. 신학생 일행 뒤로 대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함께 소풍을 나왔다가 사진을 찍은 것으로 짐작된다.

[최승룡 신부의 교회사 산책] (17) “ 나라가 망하니 성교회도 망하려나? ”
692호
발행일 : 2002-9-15

1907년 황해도 봉산 검수에서 손성재 야고버 신부

“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저는 지금까지 별 탈없이 지냈는데 불행히도 6,7일 전부터 틀림없이 ‘옴’에 걸린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부분’ 사방에 물집이 생기고 화끈거리며 더욱 악화되어 걷기조차 어려운 지경이지만 교우들에게 부끄러워 이런 병에 걸렸다는 말도 못하고 더욱이 약도 모르니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의 처방을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

물론 주교님은 답장을 쓰셨을 것이지만 이를 찾을 길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홍병철 신부가 배 아플 때에 쑥 뜸을 떴다는 말을 들으시고(본보684호) ‘벽돌이나 돌맹이를 불에 구어 수건에 싸가지고 배에 대어보라’ 고 일러주시던 주교님이 아니시던가 !

어쨋거나 한국 천주교회 열 다섯번째 사제 손신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교님께 도움을 청했고 한달 후 그가 다시 올린 서한에는 주교님이 내리신 처방의 놀라운 효능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주교님의 답신을 받기 전에는 자주 목욕을 하여 좀 나아졌는데 회답을 받은 후에 주교님의 처방대로 약을 썼더니 즉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주교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지금까지 장마철에 비 피해를 막기 위하여 성당과 제 처소 뒤에 있는 동산을 깎았습니다. 마침내 금년에 선생을 뽑아 소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저 역시 아이들에게 산술과 지리를 가르치느라고 분주합니다. ”

신부님들의 편지, 보고서를 읽다 보면 신부님들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그분들의 성품을 느끼게 된다.

당시 조선 신부들은 주교님께 적게는 60통에서 많게는 300통에 이르는 다양한 편지를 썼는데도 어떤 신부들의 편지는 별로 없는 것을 보면 문서의 상당한 부분이 유실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떤 신부님은 모두 80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중 79통이 짤막한 문안, 축하 편지이고 한통 만 조금 길게 쓰기도 했다.

또 어떤 신부님은 50쪽이 넘는 장문의 보고서를 올렸으며 어떤 이는 극히 사무적인 문의나 요구 사항만 늘어놓기도 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신변 잡사까지 시시콜콜 주교님께 보고 드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서한, 보고서에 대해 주교님은 일일이 답신을 보내셨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신부님들의 보고서 곳곳에는 모든 서한에 대한 답신의 흔적이 보일 뿐 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편지를 보내시기도 하셨으니 일기 쓰시랴, 편지 쓰시랴 주교님은 쉬실 틈도 없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주교님은 최고의 악필. 로마 인류 복음화성,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독일 분도회 오틸리엔 본부등에도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내셨으니 앞으로 이 귀중한 문서들을 판독할 일이 난감하기만 하다.

1910년 12월31일자 손신부님의 편지는 짧지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년말을 맞아 주교님께 새로운 축복을 빕니다. 근자에 듣자니 주교님께서 낙마의 위난을 당하셔서 많은 고통을 겪으신다 하는데 그동안 어떠하셨는지요? 새해에는 천주님의 도우심으로 완쾌되시리라 믿습니다. 나라가 망하니 성교회도 망할 모양인지 가을 판공에 보니 저의 교우들 중 5분의 1이 냉담하였습니다."

“ 나라가 망하니 성교회도 망하는구나 !”
Occasione desolationis regni,
Etiam destruuntur Christiani.

당시 모든 조선 사람들이 품고있던 망국의 한을 라틴어로 운을 맞추어 표현한 짤막한 이 시 한쪽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국치일로 기억되는 1910년은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바로 그해였다.

*손성재 야고버 신부(1877∼1927)는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서울대교구 소속. 공소회장을 지낼 만큼 열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사제직을 갈망했으며 1888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들어가 1905년에 사제가 되었다.

황해도 검수본당(사리원 본당 전신)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손신부는 20세기에 배출한 첫 사제답게 뛰어난 라틴어 실력으로 1910년에 발간된 4복음서의 한글 번역서인 사사성경 발간에 참여, 성서국역 사업에 기여했다.

1911년부터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사목, 교세신장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인 그는 1927년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 휴양에 들어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1월 선종,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최승룡 신부의 교회사 산책] (13)“이것을 먹고 나니 정신이 나더라”
688호
발행일 : 2002-8-18

‘눈물의 페낭 신학교’ (상)
“우리들이 어떻게 어리석던지 음식을 우리 방에로 가져오려니 하고 점심을 기다리나 또한 무소식이라. 이와 같이 이틀, 거의 3일 동안을 기다리나 도무지 아무 동정이 없으니 최 바오로, 문 바오로 두 아해들은 참다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뇨 하며  누워 일어나지 못함을 보고 마지 못하여 배 위층에로 간신히 올라가 살펴보니 선장 비슷한 양인이 지나감을 보고 모양 없이 경례를 하며 언어는 통치 못하고 손짓으로 입을 가리키며 먹을 것을 애걸하매, 그 사람이 깨닫고 가더니 얼마 있다가 면보(식빵) 세개와 홍주 두병과 황유(빠다) 두갑을 청인에게 들리고 와서 먹는 형용을 하며 가르치고 간 후에 넷이 앉아 이것을 먹고 나니 정신이 나더라”

생전 처음 타보는 국제 여객선 내에서 어떻게 식사를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이들이 꼬박 이틀 반을 쫄쫄 굶을 수 밖에 없었던 딱한 사연이 담겨있는 이 글은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페낭 유학 회고기 중 한 구절이다.

1884년 한기근 바오로 등 3명의 동료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오른 이들 일행이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목적지 페낭으로 입성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 중 한 토막일 뿐이다.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양성을 이야기 하면서 페낭 신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 그곳 신학교는 병오, 병인 대박해를 이겨낸 조선 천주교회가 마카오에 이어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신학교였기 때문이었다.

1658년에 설립된 파리 외방전교회는 설립 당시에 포교성으로부터 방인 성직자 양성에 대한 지침을 받아 이미 1664년 당시 샴 왕국(태국)의 수도 유타이아에 신학교를 세웠고 1668년에는 두 명의 신부를 배출하였다.

1670년에는 이 신학교에 샴, 코친 차이나, 인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대·소신학생 83명이 모여 와 공부하고 있었다. 그 후 140년간 박해와 전쟁 등의 사정으로 신학교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1808년 말레이지아 페낭에 정착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1854년에 최양업 신부가 학생 3명을 선발하여 페낭에 보냈으나 신부가 되지는 못하였고 그 후 병인 박해로 인하여 다시 학생들을 보낼 수 없었다. 1876년 병자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 백주교는 1882년, 1883년, 1884년 4차에 걸쳐 21명의 학생을 유학 보냈다.

이들 24명의 유학생들 중에 11명 만이 후에 서울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학생들은 페낭에서 기후와 풍토의 차이 때문에 극심한 고생을 겪었고 강성삼, 이내수, 홍병철, 이종국 신부는 그때 얻은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페낭 신학교로의 유학길은 당시 해외의 신 문물을 접하고 신 학문을 배우는 엘리트 코스로서 그 시대 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낭을 향해 출사표를 던진 우리 ‘신부 후보생’들의 행색은 가는 곳마다, 보는 사람마다 놀라움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정규하 신부에 앞서 나가사키 홍콩 등 예의 경로를 따라 당당하게 페낭으로 향했던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 그의 페낭 유학 회고기를 읽노라면 그의 표현대로 폭소를 자아낼 수 밖에 없다. 물론 따뜻하고 애잔한 마음도 함께…

“그것은 변장이라고 할는지, 무엇이라고 할는지 여하간 그때 우리 차림 차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분홍 양사 두루막이에, 느러진 머리꼬리, 우헤는(머리위에는) 승거운 맥고모(당시 유행하던 챙 있는 서양모자)가 씌워있고 석새무명 통통한 솜바지 밑에는 걸우짝만한 양화(서양구두)가 걸리어있다.

그리고 손에는 우산 한 개씩. 남들이야 웃건 말건 우리들은 그저 ‘조와 죽을’ 지경이었다. 이 모양에 인력거를 탓다. 한 인력거에 둘씩 타고 ‘장기’(나가사키)시가를 뚫고 나갔다. 길거리에 수백명 아해들과 로동자들은 가든 거름을 멈추고 이 의미 모를 괴상한 행렬에 정신없이 눈을 팔고 있었다.”



* 1887년 조선 천주교회가 서울 용산에 예수 성심신학교를 세우고 페낭 유학생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면서 페낭 신학교 유학길은 막을 내리게 된다.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신학생 등의 귀국을 끝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페낭 유학시대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귀중한 한 페이지임에 틀림없다.
페낭 시대를 마무리하면서 당시 유학생의 회고록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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