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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의사 자료 / 伊藤博文의 孫子 인터뷰

종교관련 자료실

by 巡禮者 2010. 8. 1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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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독립운동가 / 안중근의사 부인 김아려여사  

 


 
 



▲안중근의사 황해도 해주 본가


안중근(안응칠)     독립운동가

출생/사망 : 1879년 09월 02일 / 1910년 3월 26일

출생지 : 황해도 해주

가족관계 : 3남 1녀 중 장남

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상(1962)

경력 : 이토 히로부미 살해(1909), 대한의군 참모중장(1908), 남포돈의학교,

삼흥학교 설립(1907), 천주교 입교(1895)

특이사항 : 초대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

저서 :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 '국가안위노심초사'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中.......
안중근은 총명하고 사격술이 뛰어나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다.


 

 
증언으로 다시 본 의거 

안중근의사 친필 유묵 34점 한곳에

[서울신문]안중근(1879~1910) 의사는 중국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언도된 1910년 2월14일부터 3월26일

순국까지 최후 40여일간 글씨를 써서 남겼다. 유묵의 수신자는 모두 일본인이다.

이에 대해 안 의사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법원과 감옥의 일반 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고 밝혔다.

 

● 日 류코쿠대 소장품 3점 국내 첫 공개

 

지금까지 확인된 안 의사의 친필 유묵은 50여점이다. 이 가운데 34점이 100년 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안중근 의사 의거와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26일부터 내년 1월24일까지 여는 ‘안중근-독립을 넘어 평화로’ 특별전에서다.

이들 유묵은 안 의사의 손때가 묻은 유일한 유품임에도 지금까지 한 곳에서

전시되거나  체계적으로 연구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에 전시되는 유묵 34점은 국

·공립박물관 및 개인 소장 국가보물 20점과 미공개 작품 5점,

일본 소장품 7점, 중국과 미국 소장품 각 1점 등이다.

서예박물관은 이들 유묵을 내용별로 정리해

▲독립·평화 ▲의거·순국 ▲

인간 안중근 등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독립투사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동양평양론’을 주창한 사상가, 종교인, 선비로서의 안중근을 복원시킨다.

 

특히 일본 류코쿠(龍谷)대의 소장품 3점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어서 주목을 끈다.

또 안 의사의 유묵 내용 중 가장 널리 알려진 ‘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의 실물(동국대박물관 소장)이 일반에 공개되는 것도 드문 일이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안중근 글씨의 서체 및 서풍은 엄정

단아한 해서와 해행이 주가 되고 있는데,

한 글자 한 글자 모두가 침착 통쾌한 안중근의 성정 기질이 그대로 녹아 있다.

또 유묵의 내용은 안중근의 사상과 실천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안중근 실존의 삶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 의거서 순국까지 담은 사진원본도

 

이번 전시에는 이들 유묵 외에 의거에서 순국까지 5개월간의 과정을

담은 사진 원본 28점과 관련 자료 10점이 함께 공개된다.

1909년 10월20일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뤼순 이룡산에 올라 러시아군 전몰자의 무덤에

참배한 뒤 찍은 사진과 의거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 의사의

인 김아려 여사와 두 아들의 사진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체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찍은 안중근 의사의 상반신 사진 원본도 전시된다.

 

전시회 기간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안중근 동양평화학교’특강이 열린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김호일 안중근 기념관장,

김우종 중국 하얼빈대 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강사로 참여한다.


 
 

관련 포토

 
안중근 최후40일 ...
 
안중근 처형 전 ...
 
 
안중근의사 순국...
 
안중근 의사 유묵...

 

伊藤博文의 孫子 최초, 최후 인터뷰
『회사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천엔짜리가 왔다」고 수근댄답니다.
덕택에 은행 관계 일을 보는 데는 도움이 되지요』
趙甲濟
 
필자는 1984년 여름 도쿄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그해 10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다. 이토히로부미가 安重根의 총탄을 맞아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 이틀 뒤로 다가온 時点에서 다시 읽어보니 재미 있는 대목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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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사(博文寺)가 지금도 있습니까?

초대 통감 이또 히로부미의 손자 이또 도시오씨는 자신이 한국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인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던진 첫 물음은 『남산에 지금도 박문사(博文寺)가 있습니까?』였다. 박문사는 安重根 의사의 총탄에 숨진 이또를 추모하기 위해 日帝가 남산 기슭에 세웠던 절이다. 그런 절을 한국인들이 아직도 보존하고 있으리라고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를 인터뷰한 며칠 뒤 일본에서 나는 이름난 한국인 교수를 한 분 만났다. 한국에서는 일본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대뜸 『손자가 할아버지의 소행에 대해 사과를 합디까?』라고 물었다. 이또의 혈육까지도 한국인이 그러는 것처럼, 천엔짜리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근대 일본의 큰 인물인 이또를 「원흉」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희망하는 투로 이야기하였다. 지난 7월 나는 아무의 소개도 없이 이또 도시오씨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도쿄 근교 사이다마 현에 있는 간또세끼(關東精機)란 회사의 감사 역인 그는 『오늘 당장 좀 만나 주었으면……』하는 나의 당돌한 부탁을 선선히 받아주었다.
 
  그날 오후 4시께 나는 이또씨의 집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은 도쿄 미나또구 아자부에 있는 한국 대사관 근처 고급 주택가에 있었다. 열려 있는 낮은 대문을 지나 야트막한 흰 저택의 현관문까지 다가가도록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 방금 회사에서 돌아온 듯, 땀을 닦으며 마중 나온 이또 노인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천엔짜리가 왔다」고 수근댄답니다. 덕택에 은행 관계 일을 보는 데는 도움이 되지요』
 
  69세의 이또 도시오씨는 농담부터 했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얇은 소책자 하나를 내놓았다. 1962년 11월에 어느 법률학자가 쓴 「일본은행권 천엔지폐의 새 도안에 관한 견해」란 글이었다. 내용은 천엔 지폐에 처음으로 天皇이 아닌 역사적 인물(그 전에 지폐에 등장한 인물은 메이지 천황뿐이었다)을 넣기로 했는데, 제1후보로 오른 이또 히로부미가 부적합하다는 일부 여론에 대해 정치가로서의 이또를 변호한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또 히로부미가 일한합병의 주모자로서 제국주의자였으므로 부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문치파(文治派)를 대표하여, 日韓합병을 주창하는 군부 등 武斷派에 대항, 하르빈 驛頭에서 쓰러질 때까지 이를 억눌렀던 사람이 바로 이또였다. 日韓합병은 이또의 급사 후 무단파를 견제할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추진, 성립되었던 것이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3년부터 천엔 지폐에 이또의 얼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일상 생활 속에 가장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얼굴이 바로 한국에선 원흉이란 낱말을 앞에 붙이지 않으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또 히로부미인 것이다.
 
  피묻은 와이셔츠는 박물관에
 
  直孫子인 이또 도시오씨는 안경만 벗으면 응접실 벽에 걸려 있는 그의 할아버지 얼굴과 너무나 흡사하다. 벽에 붙은 초상화는 죽음의 길이 된 하르빈 행 열차 안에서 어느 일본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래선지 색감이 아주 암울하다. 이또의 宗家에선 히로부미의 유일한 유품으로 와이셔츠를 하나 보존하고 있었다. 安重根 의사의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 구멍 나고 피묻은 흰 와이셔츠였다.
 
 『핏자국이 너무 생생해서 갖고 있기가 좀 뭣했는데, 1953년에 할아버지의 고향인 야마구찌 현 박물관에 줘 버렸습니다』
 
  이또 히로부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히로요시는 親子가 아니다. 이또의 고향 친구이자 평생의 정치적 동지였던 이노우에 가오루(메이지 시대의 외무대신·駐韓 공사 역임)의 아들인데 이또가문에 양자로 입적했었다. 2남 분기찌(文吉)와 3남 신이찌(眞一)가 친자다. 분기찌의 아들이 이또 도시오씨. 이또 분기찌는 韓日합병 때의 일본 수상 가쯔라(桂太郞)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정권을 좌지우지한 것은 조슈번(長州藩‥지금의 야마구찌 현) 출신의 政客과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血緣과 地緣으로 복잡하게 얽힌 강력한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또, 이노우에, 가쯔라의 3각 혈연 관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시모노세끼 주변의 한적한 야마구찌 현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곱 명의 수상이 배출되었다. 이또 히로부미, 야마가다 아리또모, 가쯔라 다로, 데라우찌 마사다께, 다나까 기이찌, 기시 노부스께, 사또 에이사꾸(뒤에 아베가 추가되어 여덟 명).
 
  이들은 韓日합병과 55년 뒤의 國交 정상화에서 모두 主役이었다. 이들 7명은 95년간의 일본 憲政사상 35년간을 통치했다. 조슈번이 메이지維新의 주체 세력이었고 이곳 인물들이 군대와 政界에서 강력한 同鄕人 파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마구찌 현 인맥은 과거에는 한국을 집어삼킨 제국주의자들의 집단이었고 지금은 이른바 「친한파」의 주류가 되고 있다. 이또 도시오씨는 할아버지가 피살된 5년 뒤에 났다. 그는 아버지 분기찌를 통해 할아버지를 알 뿐이었다. 도시오씨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는 하르빈으로 출발하기 전날밤 아들 분기찌를 별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어떤 예감이 들었던지 유언 같은 말씀을 했다고 해요. 아버지에게는 정치가 가 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 유언을 받들어 분기찌는 경제계로 진출, 國營인 일본광업사장을 오래했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도 제련소, 금광 등을 갖고 있었다. 도시오씨는 또 다른 소책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나한테 건네준다. 「조선에 여행하여 아버지를 추억하다」는 제목의 기행문. 이또 분기찌가 일본광업사장 시절에 어느 잡지에 발표한 글이라고 한다. 나는 가다가나로 쓰인 이 소책자를 읽어가다가 문득 도시오씨의 意中을 알아차렸다.
 
  원수의 아들끼리 만나다
 
  기행문에 따르면 이또 히로부미의 사망 30주기가 되는 1939년10월에 분기찌는 미나미 총독 시대의 조선에 건너갔다. 서울에서 그는 「우연히」 安重根 의사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을 만났다. 그들은 남산 박문사에서 「함께」 안중근·이또 두 사람의 혼백을 화해시키는 공양을 했다는 거다. 분기찌는 「안준생 군이 상해에서 왔는데 안중근의 위패를 갖고 박문사에 참례, 추선공양(追善供養‥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초청, 만나게 되었다」고 썼다.
 
  京城日報는 이 에피소드를 절묘한 선전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10월 17일치 경성일보는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苦鬪의 30년을 보냈던 안준생 군이 생애의 원망(願望)이었던 이또 공에의 사과를 토로한 지금 홍대(鴻大)한 성은에 감읍하면서……은수(恩讐)를 초월한 자식끼리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 국가를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고 썼다. 이튿날의 경성일보는 두 사람의 교환 공양 장면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佛壇을 향해 왼쪽엔 『공안중근영위(空安重根靈位)』라고 쓰여진 위패, 그 옆에는 이또 公의 사진이 서로 이야기를 하듯 놓여져 있었다. 남작(분기찌)과 안준생은 독경 속에서 다만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남작은 안중근씨의 영령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분향하는 것이었다. 안준생씨는 감격의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보도 자세로 미루어 보아 이 공양 기사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의문스럽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이또 도시오씨가 두 소책자를 보여 준 뜻일 것이다. 나는 그의 할아버지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도시오씨는 他人의 견해와 문서 자료를 빌어 히로부미를 객관적으로 미리 변호해버린 셈이었다.
 
  10분의 1로 줄어든 저택
 
  도시오씨와의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오씨의 아내는 콜라와 과자를 받쳐와 정중히 꿇어앉아 탁자에 옮겨 놓고는 안방으로 사라진 뒤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는 궁내차관을 지낸 시라네(白根松介)의 막내딸이다. 근대 일본을 기획한 대정치가 이또 히로부미의 宗家 집치고는 좁은 느낌이었다. 대지가 1백20평, 건평은 60평 정도. 히로부미 시대에는 정원만도 1천2백여 평이었다. 분기찌가 귀족의원에다가 작위를 세습, 메이지 원훈(元勳)가문의 대우를 받을 시절엔 이 대저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집은 태평양 전쟁중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敗戰 뒤 분기찌의 작위는 없어지고 국가의 특별대우도 사라졌다. 분기찌는 美軍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公職 추방 명령을 받았으며 1951년 69세로 사망했다.
 
  도시오씨는 거액의 상속세와 재산세를 물게 되었다. 닛산 자동차의 봉급생활자로 일하고 있었던 도시오씨는 집터를 팔아 세금을 냈다. 그 바람에 집터는 할아버지 시대의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손자 도시오씨는 도호꾸(東北)제국대학 법문과를 졸업, 닛산 자동차 회사에 들어갔다가 태평양전쟁 때 징집되어 도쿄 근? 냅?기구연대(氣球聯��에서 중위로 복무중 敗戰을 맞았다. 곧 닛산에 복직, 관리부장까지 승진했다가 산하의 아쯔기 자동차 부품 회사(주)의 상무로 옮겼다. 79년에 퇴직, 지금은 작은 기계공장의 감사 역으로 소일하고 있다.
 
  소심하고 순해 빠진 것 같은 도시오씨에게서 風雲의 정치가 이또 히로부미의 잔영(殘影)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웠다. 줄어든 저택의 크기만큼 인물의 크기도 3代에 걸쳐 축소돼 온 것 같았다. 이또가 아들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유언한 것도 일찍이 아들들의 인물됨을 간파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근대일본의 설계자 이또
 
  현해탄을 바라보는 일본 서해안 야마구찌 현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또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 최초의 국제인이었다. 숱한 메이지維新의 主役들을 길러낸 향토의 교육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가르침을 받은 뒤 그는 23세 때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이또는 이노우에 가오루 등 네 청년과 함께 런던에 머물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던 중 신문을 통해 그들의 향토 조슈번(藩·번은 도꾸가와 막부 시대의 지방 봉건 영주가 다스리던 행정 구역)이 막부의 쇄국정책에 호응,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4개국 연합함대와 決戰을 벌이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또도 한때 과격한 양이파(攘夷派)였다.
 
  영국 유학중 그는 동양과 서양의 힘의 차이를 똑똑히 보았다. 이또와 이노우에는 급히 귀국, 쇄국 정책을 따르는 조슈번을 목숨을 걸고 설득, 연합함대와 강화하도록 했다. 뒤에 조슈번이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 지방)과 함께 도꾸가와 幕府타도의 중심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재빠른 문호개방 덕분이었다. 영국과 친해진 조슈藩은 신식 무기의 구입으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때 이미 이또는 사이고 다까모리 등 유신 3걸(傑)을 바짝 뒤따르는 젊은 지도자 그룹에 끼여 있었다.
 
  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이또의 실적은 일본 헌법의 制定이다. 그는 프러시아의 강력한 立憲군주제를 도입한 일본憲法을 초안했다. 1889년에 공포된 이 憲法은 1945년 敗戰 때까지 한 조목도 수정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이또는 44세에 일본 최초의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원로들의 총리選考 회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이또의 친구 이노우에는 『총리대신은 적어도 외국電報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즉 국제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는 뜻인데 이또 이외에 그런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淸日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이또는 수상직에서 물러난 野人의 입장에서 立憲정우회란 新黨을 조직, 정당정치의 전통을 일본에 심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또는 한국의 독립을 원했다』
 
  나와의 대화 중에 이또 도시오씨는 그의 할아버지가 『정치가였지 軍國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하꾸분(필자 주‥그는 히로부미라고 발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사무라이 출신인 메이지 功臣들과는 달리 平民 출신이었습니다. 군인들과는 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청일, 露日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자신이 붙은 군인들은 군국주의 색채를 드러내게 됐는데 이또 하꾸분은 그런 思潮와는 생리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러시아를 당면의 敵으로 생각하여 南進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을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있어선 군인들과 일치했습니다』
 
  도시오씨가 보여 준 「7인의 재상」(요미우리 신문 야마구찌 지국 펴냄)이란 책은 이또 히로부미가 한국 병합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또의 조선에 대한 생각을 보자. 그는 『한민족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지금 상황이 나쁜 것은 국민들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다. 합병은 매우 성가신 일이다. 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나는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또의 진보성, 민주적 사고와 행동이 잘 나타나 있다」
 
  이또는 1905년 한국황실 위문특파대사로 서울에 들어와 고종을 협박, 을사보호 조약을 맺었다. 1906년 3월엔 초대 통감에 취임, 조선 통치에선 사실상의 최고 행정관이 됐다. 1907년엔 헤이그 밀사 사건이 나자 高宗 황제에게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거든 차라리 일본에 대해 宣戰을 포고하라』고 공갈, 황제를 양위케 하였다. 일본군을 동원, 의병을 진압·학살한 책임자도 이또였다.
 
  이런 이또를 그의 손자나 학자들은 『韓日 합병에 반대했고』『민주·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으며』『합병을 서두르는 武斷派를 눌렀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또가 韓日합병에 대해서는 가장 온건한 입장이었다는 얘기다. 한국 학자들은 물론 반대다. 이또가 통감이 된 뒤 합병 정책에 소극적이었으며 이 문제로 야마가다 아리또모-가쯔라 라인의 강경파와 대립했음은 한국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또가 합병 자체에 반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민대학 한상일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또는 무엇보다도 수완 있는 정치가였다. 한국에서의 통감 경험을 통해 일본은 한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병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건이 성숙되면 자신이 합병정책을 수행하지 않아도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합병이 이뤄지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통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우찌다와 같은 대륙낭인의 반대 운동이나 정부내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중히 계산·계획한 결과의 행동이었다」(「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164∼165쪽).
 
  「원흉」과 「흉탄」의 거리
 
  이또는 1909년6월 통감직을 사임했다. 사임 이후 이또는 태도를 표변, 정부의 합병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또가 하르빈으로 간 것도 韓日합병 뒤 더욱 일본의 위협을 느끼게 된 러시아를 달래려는 목적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서였다. 노회한 이또는 「韓日합병의 실천자」란 惡役만은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합병이 정치가로서, 먼 뒷날에까지 흠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일본학자들 중에는 『안중근의 총탄이 오히려 합병을 앞당겼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총탄은 역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또를 역시 제대로 맞힌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 쪽의 거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니 이또 도시오씨는 合倂에 대한 방법론상의 온건론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또 도시오씨의 어머니는 韓日합병의 최고 책임자였고 합병에서 강경론자였던 당시 수상 가쯔라의 딸이므로 친할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선 무단파의 代父였던 외할아버지를 비판해야 하는 기묘한 입장에 있다. 어쨌든 이또 히로부미는 메이지維新의 공로자 사이고 다까모리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근대 정치인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또를 원흉으로, 저들은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흉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시오씨는 퍽 담담하게 이 모순 관계를 처리하였다.
 
  『두 분 모두 조국의 역사에 충실하려다가 그렇게 됐으니 똑같은 애국자지요』
 
  이또가 피살된 날짜는 묘하게도 10월26일(1909년)이다. 매년 이날엔 도쿄 시나가와 구에 있는 무덤 앞에 일본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인다. 야마구찌 현 출신의 著名 인사들이 조직한 「보쪼(防長)구락부」란 향우회가 제사를 주관한다. 이 향우회엔 기시노부스께 전 수상을 비롯, 현대 일본의 政·財界를 주름잡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다. 야마구찌 현에선 7명의 총리대신을 비롯, 기라성 같은 군인, 경제인 등이 숱하게 배출됐으나 이 향우회가 매년 제사를 바치는 인물은 두 명-이또 히로부미와 露日전쟁 당시 여순공략을 지휘했던 노기(乃木) 대장뿐이다.
 
  노기 대장은 메이지 천황이 죽자 아내와 함께 자살, 천황을 뒤따른 사람이다. 이또나 노기나 모두 비정상적인 죽음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독 두 사람을 제사하는 것은 깨끗한 死生觀과 결벽의 비극미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취향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또의 아내는 기생 출신이었다. 메이지維新 전에 도망 다니기에 한창 바쁘던 이또를 숨겨준 인연으로 연애결혼했다고 한다.
 
  도시오씨는 『우리 집안의 전통이 두 개 없어졌다』고 농담했다. 사라진 전통은 첫째가 「정치」, 둘째는 「外道」다. 정치가로 출세한 뒤에도 이또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도쿄 신바시의 화류계를 휩쓸고 다녔다. 도시오씨의 아버지 분기지도 이 기질을 받아 퇴근길의 인력거를 아까사까나 신바시의 화류계로 직행시켜 深夜까지 술·여자 속에서 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外道가 부럽기도 한데,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다』는 건『그럴 돈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박힌 그 수많은 천엔 지폐도 손자와 특별히 친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老後 생활을 보내고 있는 도시오씨의 두 아들도 평범한 봉급생활자다. 딸은 유명한 화교 실업가 임이문(林伊文)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이로써 이또 가문은 중국과는 화해를 한 것 같은데, 도시오씨는 헤어질 때 『죽기 전에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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