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어떻게 어리석던지 음식을 우리 방에로 가져오려니 하고 점심을 기다리나 또한 무소식이라. 이와 같이 이틀, 거의 3일 동안을 기다리나 도무지 아무 동정이 없으니 최 바오로, 문 바오로 두 아해들은 참다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뇨 하며 누워 일어나지 못함을 보고 마지 못하여 배 위층에로 간신히 올라가 살펴보니 선장 비슷한 양인이 지나감을 보고 모양 없이 경례를 하며 언어는 통치 못하고 손짓으로 입을 가리키며 먹을 것을 애걸하매, 그 사람이 깨닫고 가더니 얼마 있다가 면보(식빵) 세개와 홍주 두병과 황유(빠다) 두갑을 청인에게 들리고 와서 먹는 형용을 하며 가르치고 간 후에 넷이 앉아 이것을 먹고 나니 정신이 나더라”
생전 처음 타보는 국제 여객선 내에서 어떻게 식사를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이들이 꼬박 이틀 반을 쫄쫄 굶을 수 밖에 없었던 딱한 사연이 담겨있는 이 글은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페낭 유학 회고기 중 한 구절이다.
1884년 한기근 바오로 등 3명의 동료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오른 이들 일행이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목적지 페낭으로 입성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 중 한 토막일 뿐이다.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양성을 이야기 하면서 페낭 신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 그곳 신학교는 병오, 병인 대박해를 이겨낸 조선 천주교회가 마카오에 이어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신학교였기 때문이었다.
1658년에 설립된 파리 외방전교회는 설립 당시에 포교성으로부터 방인 성직자 양성에 대한 지침을 받아 이미 1664년 당시 샴 왕국(태국)의 수도 유타이아에 신학교를 세웠고 1668년에는 두 명의 신부를 배출하였다.
1670년에는 이 신학교에 샴, 코친 차이나, 인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대·소신학생 83명이 모여 와 공부하고 있었다. 그 후 140년간 박해와 전쟁 등의 사정으로 신학교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1808년 말레이지아 페낭에 정착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1854년에 최양업 신부가 학생 3명을 선발하여 페낭에 보냈으나 신부가 되지는 못하였고 그 후 병인 박해로 인하여 다시 학생들을 보낼 수 없었다. 1876년 병자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 백주교는 1882년, 1883년, 1884년 4차에 걸쳐 21명의 학생을 유학 보냈다.
이들 24명의 유학생들 중에 11명 만이 후에 서울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학생들은 페낭에서 기후와 풍토의 차이 때문에 극심한 고생을 겪었고 강성삼, 이내수, 홍병철, 이종국 신부는 그때 얻은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페낭 신학교로의 유학길은 당시 해외의 신 문물을 접하고 신 학문을 배우는 엘리트 코스로서 그 시대 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낭을 향해 출사표를 던진 우리 ‘신부 후보생’들의 행색은 가는 곳마다, 보는 사람마다 놀라움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정규하 신부에 앞서 나가사키 홍콩 등 예의 경로를 따라 당당하게 페낭으로 향했던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 그의 페낭 유학 회고기를 읽노라면 그의 표현대로 폭소를 자아낼 수 밖에 없다. 물론 따뜻하고 애잔한 마음도 함께…
“그것은 변장이라고 할는지, 무엇이라고 할는지 여하간 그때 우리 차림 차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분홍 양사 두루막이에, 느러진 머리꼬리, 우헤는(머리위에는) 승거운 맥고모(당시 유행하던 챙 있는 서양모자)가 씌워있고 석새무명 통통한 솜바지 밑에는 걸우짝만한 양화(서양구두)가 걸리어있다.
그리고 손에는 우산 한 개씩. 남들이야 웃건 말건 우리들은 그저 ‘조와 죽을’ 지경이었다. 이 모양에 인력거를 탓다. 한 인력거에 둘씩 타고 ‘장기’(나가사키)시가를 뚫고 나갔다. 길거리에 수백명 아해들과 로동자들은 가든 거름을 멈추고 이 의미 모를 괴상한 행렬에 정신없이 눈을 팔고 있었다.”
* 1887년 조선 천주교회가 서울 용산에 예수 성심신학교를 세우고 페낭 유학생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면서 페낭 신학교 유학길은 막을 내리게 된다.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신학생 등의 귀국을 끝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페낭 유학시대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귀중한 한 페이지임에 틀림없다. 페낭 시대를 마무리하면서 당시 유학생의 회고록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