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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한국 순교자 9위 순교하신 날

특집 순교자

by 巡禮者 2010. 10. 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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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6일

              한국 순교자 9위 순교하신 날

    

 

    허계임   막달레나   서소문 밖   1839.09.26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서소문 밖   1839.09.26
 
    김 율리에타   율리에타   서소문 밖   1839.09.26
 
    전경협   아가타   서소문 밖   1839.09.26
 
    조신철   가롤로   서소문 밖   1839.09.26
 
    김제준   이냐시오   서소문 밖   1839.09.26
 
    박봉손   막달레나   서소문 밖   1839.09.26
 
    홍금주   페르페투아   서소문 밖   1839.09.26
 
    김효임   골룸바   서소문 밖   1839.09.26

 

 

 

 

 

 

 
聖女 허계임 막달레나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님은
시누이 이매임(李梅任)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시었다. <모두순교하심>
 
 
1839년 3월, 남명혁(南明赫)님과 이광헌(李光獻)님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金成任)님, 김 루치아님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님의 집을 지키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허계임님은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여러 차례의 형문을 당하였으나
다 이겨 내고,  9월 26일 67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시었다.

 

聖 남이관 세바스티아노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님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趙曾伊)바르바라님과  혼인하였다.
<부인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님은 2개월 후 순교>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 만인 1832년에 풀려 나와
이천(利川)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다.
 
 
그 뒤 상경하여 처가의 인척인 정하상(丁夏祥)님의 신부 영입 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입국시키고,
그에게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으나
9월 16일에 체포되었다.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유진길(劉進吉)님, 정하상님 등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6일 남이관님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순교하시었다.

 

 
聖女 김 율리에타님
 
관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님은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 7월에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시었다.

 

聖女 전경협 아가타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동정 순교자인 전경협 아가다님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 뒤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朴喜順)님을 따라 입교하였으며,
박희순님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오게 되자 그도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의 습격으로 숨어 있던 박희순, 박 큰아기님 등과 함께 
체포된 전경협님은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참아 냈다.
 
 
이 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
하였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5개월의 옥살이를 한 뒤,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에 순교하시었다. 

 

聖 조신철 가를로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님은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출가하여 한때 스님이 되었으나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으며,
30세 쯤에 순교자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등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키는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님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6월 어느날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수하였다.
 
 
신문 중 그는 처가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고,
형리들은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시었다.
<부인 최영이 바르바라님은 5개월 후 순교하시고, 친정부모님도 모두 순교하심>

  

聖 김제준 이나시오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아버지로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으셨다.
 
 
이 무렵 나 베드로(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순성(金順性) 일당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참수형으로 44세에 순교하시었다. 

 

 
聖女 박봉손 막달레나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서울에서 태어난 박봉손님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에는 여러 교우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하였으나
박봉손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초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봉손님은 형관에게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聖女 홍금주 페르페투아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홍금주님은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혼인한 뒤 냉담하였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뒤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고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 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 중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하였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
갇힌 교우들은 홍금주님을 친누이처럼 생각하였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던 홍금주님은
옥살이 6개월 만인 9월 26일 36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聖女 김효임 골롬바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9.26
 
 


동정 순교자 김효임님은 서울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뒤 전 가족이 입교하고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김효임님은 두 여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1839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졌으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남자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김효임님은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님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동생 김효주 아네스님 100일 후 순교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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