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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릎은 고장났지만 더 아픈 이들 돌볼 수 있으니 축복"

인물(People)

by 巡禮者 2016. 3. 27.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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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릎은 고장났지만 더 아픈 이들 돌볼 수 있으니 축복"

 

가톨릭 성체대회 한국순례단 조봉숙씨

 

이제 목발은 몸의 일부가 됐다. 무릎과 고관절, 발목 등 제 기능을 못하는 신체를 대신해 몸을 지탱한다. 그런 몸으로 4년마다 열리는 가톨릭 최대 행사인 세계성체대회에 3번 연속 참가했다. 올해 여든다섯. 순례단의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지만 항상 즐겁다. 이런 몸으로, 그 나이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신앙의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4일부터 필리핀 세부에서 열리고 있는 제51차 세계성체대회 한국 순례단으로 참가한 조봉숙씨는 순례단의 최고령 여성 참가자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조봉숙씨
조봉숙씨

조부 ‘병인박해’ 피난 천주교도 집안
‘1·4후퇴’때 월남…가톨릭간호대 1기
평생 독신으로 성모병원 간호사 근무

1987년부터 30년째 꽃동네 자원봉사
목발 짚으며 성체대회 세번째 참가
“봉사 덕분에 지난해 교황님 뵈어 행복”

“조금도 힘들지 않아. 4년마다 오는 성체대회를 손꼽아 기다리거든. 얼마나 큰 은혜를 받는지 몰라.”

그는 항상 웃는다. 순발력 있는 농담으로 늘 순례단의 분위기를 살린다. 더운 날씨에 지칠 때면 순례단을 위해 지갑을 열어 아이스크림도 ‘쏜다’. 비록 목발을 양쪽 겨드랑이에 항상 끼고 다니지만 표정은 여유롭다. 그는 8년 전 캐나다 퀘벡에 이어 4년 전 아일랜드 더블린의 성체대회에도 참가했다. “아일랜드 대회 참가는 기적이었어. 신청자가 많아 예비후보 53번이 되는 바람에 얼마나 실망했던지. 그런데 참가 기회가 온 거야. 너무 기뻤어.”

그는 지난 주말 세부에 오기 직전 한국 최초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의 민란을 피해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던 롤롬보이의 성지에 들러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땅에 가톨릭이 뿌리내리도록 자신의 피를 바친 거야. 믿음이 얼마나 깊으면….”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간호사로 살았다. 가톨릭은 운명이었다. 황해도 신계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1866년 대원군에 의해 진행된 ‘병인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스며들었다. 그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해 8000여명의 신도들이 순교당했다. 한국전쟁 1·4 후퇴 때 어머니와 남쪽으로 피난 온 조씨는 1953년 고등학교 과정인 성요셉 간호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했다. 지금의 가톨릭간호대학 전신이다. 졸업하면서부터 부평성모병원과 명동성모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그는 87년 여의도성모병원에서 55살로 정년퇴직했다. 그는 은퇴 뒤부터 본격적으로 섬기는 삶을 시작했다. 76년 오웅진 신부가 설립한 충북 음성의 걸인과 무의탁 심신장애자 보호시설인 ‘꽃동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다. 꽃동네에서는 정신이상자, 알코올중독자도 돌보고 있다. 조씨는 몸이 불편한 지금도 봉사를 하고 있다. 어언 30년째다.

“처음에는 거동이 불편한 걸인이나 생명이 꺼져가는 말기 환자들을 돌봤어. 비록 힘은 들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해냈어. 매일매일이 즐거웠어. 퇴행성 관절염으로 내 무릎은 고장났지만,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픈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꽃동네 의무실에서 봉사하며 조씨는 신의 은혜와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2000년부터는 꽃마을 구원의 집에서 활동하고 있다. 구원의 집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보살피는 호스피스 시설이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꽃동네를 방문했을 때 그도 있었다. “먼발치에서나마 교황을 볼 수 있었어. 행복했어. 꽃동네에서 봉사했기에 축복을 받은 거야.”

그는 이제 환자를 직접 돌보지는 않는다. 중앙공급실에서 각종 물품 배급을 담당한다. 다른 요양시설에서는 일회용품을 쓰지만 꽃동네에서는 가능한 한 재활용한다. 깨끗하게 빨고, 소독해 나눠준다. 움직이기가 불편한 그는 앉아서 하는 작업을 주로 한다. “일이 즐거워. 그나마 이런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인 거야. 하하하.”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성체대회는 신앙을 고백하고, 체험한 삶의 충만함을 나눠주고, 곤궁한 이들과 악압받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서와 치유와 사랑을 전하는 축제이자, 강론을 듣고 성경 공부를 하며 신앙을 두텁게 하는 기회다. 이번 세부 대회에는 72개 나라에서 1만2천여명이 참가했고, 한국에서도 장봉훈 주교(청주교구장)를 대표로 50여명이 참가했다.

“앞으로 몇번이나 더 참가할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것도 주님의 뜻이야. 걱정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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