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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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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4. 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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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탐욕의 시대… 청빈의 삶 실천한 '영혼의 스승'  (2010-03-11)


강원도 산골서 혼자 살며 '영롱한 글'로 대중과 소통

"내 것이라고 남은 게 있으면 맑은 사회 구현에 써 달라"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은 종교를 넘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오두막에서 자연을 지키며 청빈한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호소하는 글을 통해 영혼을 정화시킨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며 ‘무소유’ 정신을 실천한 ‘영혼의 스승’이었다. 스님은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는 등 일체의 오용락을 멀리했지만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맡아 대중 법문만은 멈추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나 서다=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한다.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54년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그는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하며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박완일 법사와 함께 공부했다. 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승인 효봉 스님은 법정 스님을 “천생 중”이라고 하며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스님은 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과 자책을 느낀 후 걸망을 짊어지며 본래 수행승의 자리로 돌아간다.


스님은 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76년 발간된 저서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산문집 ‘무소유’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의 등쌀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그곳은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오두막에서 전파한 진정한 부와 행복에 이르는 법=병세가 나빠 지난해 겨울 제주도에서 요양했던 법정 스님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최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은둔자의 삶을 살며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청빈을 실천했던 스님은 주옥같은 산문으로 맑은 정신을 풀어내며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다. 마지막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2008)에서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라고 말한 스님은 “늘 모자랄까봐 미리 준비해 쌓아 두는 마음이 곧 결핍”이라고 일깨웠다.


법정 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특히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1999년 별세) 할머니로부터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 터 7000여평을 시주받아 97년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했다. 그리고 스님은 2003년까지 길상사의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주며 시대의 잘못을 꾸짖고 고단한 대중들을 위로했다.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94년부터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환경보호와 생명사랑 운동을 이끌었다.


◆마지막 길까지 놓지 않은 ‘무소유’ 정신=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에서 스님의 평생의 삶이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라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향기로운 글을 남겼다.


산문집은 물론 수많은 법문집과 경전 번역서, 여행서 등을 저술한 스님은 대중을 위한 산문과 수행자를 위한 법문 사이의 경계를 없애며 탐욕의 시대, 마음의 등불을 밝혔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겸손해 했다.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은 생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스님의 유지에 따라 송광사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기로 했다.


스님의 저서로는 ‘무소유’ 이외에도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버리고 떠나기’, ‘홀로 사는 즐거움’, ‘오두막 편지’ 등 산문집과 법문집 등 50여권이 있다.



법정 스님 주요 연표

1932년10월8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출가

1959년 3월15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15일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졸업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10월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2003년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겁니다(무소유  본문 중에서)"



법정스님은 본명은 박재철이다. 1932년 10월 8일 전라남도 해남(海南)에서 태어났다. 1956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년을 수료한 뒤, 같은 해 통영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曉峰)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같은 해 7월 사미계(沙彌戒)를 받은 뒤,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승려 자운(慈雲)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어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승려 명봉(明峰)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불교신문》 편집국장·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1996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다가, 2003년 12월 회주 직에서 물러났다. 2005년 현재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이 살던 주인 없는 오두막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수필 창작에도 힘써 수십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담담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정갈하고 맑은 글쓰기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문명(文名)이 높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빈 충만》 《스승을 찾아서》 《서 있는 사람들》 《인도기행》 등이 있다. 그 밖에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숫(수)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법구경)》 《인연이야기》 《신역 화엄경》 등의 역서를 출간하였다. <출처:두산벡과>


◉ 법정 스님 어록


"9ㆍ11테러는 업의 파장" "나눔 · 음덕이 내 생애 잔고" "넘친다는건 남의 몫 가로채는 것"

법정 스님은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 이래 매년 봄, 가을에 가진 대중 법문을 비롯해 국내외 법회와 초청 강연 등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무소유와 생명, 나눔의 삶을 설파했다. 세속적 삶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였던 스님의 말씀을 옮긴다.


- 풍요는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와 올바른 정신을 준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됐으면 한다.(1997년 12월 길상사 창건 법문)


- 9ㆍ11테러는 업(業)의 파장이다. 할리우드 영화 등 난무하는 폭력물에서 테러 집단이 배운 것이다. 지금까지의 업이 지금의 나를, 오늘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2001년 11월 뉴욕 불광사 초청 법회)


- 경제 논리, 개발 논리로 자연이 말할 수 없이 파괴돼 간다. 대지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곧 자기에게 상처 입히는 일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모체가 앓고 있는데, 그 지체가 어찌 성하겠나.

(2003년 10월 대구 초청 강연)


-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신다’는 말을 기억하라. 용서는 저쪽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굳게 닫힌 이쪽 마음의 문도 활짝 열게 한다.

(2004년 4월 길상사 봄 정기법회)


- 세상을 하직할 때 무엇이 남겠나. 집, 재산, 자동차, 명예, 다 헛것이다. 한때 걸쳤던 옷에 지나지 않는다. 이웃과의 나눔, 알게 모르게 쌓은 음덕, 이것만이 내 생애의 잔고로 남는다.

(2006년 부처님오신 날 법회)


- 행복의 비결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아는 데 있다. 자기 그릇을 넘치는 욕망은 자기 것이 아니다. 넘친다는 것은 남의 몫을 내가 가로채고 있다는 뜻이다.

(2008년 8월 길상사 하안거 해제 법회)


-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각자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며 가꾸어 온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치길 바란다.

(2009년 4월 길상사에서 가진 마지막 법회)


-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은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2008년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법정스님의 '삶과 가르침'…"버리고 또 버렸다"

앞서 전한대로 법정 스님은 당신의 삶 자체를 통해 버리고 또 버리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법정 스님 (명동성당 특별강론,1998)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에 그 하나는 잃게 돼요.]


법정 스님은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소유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을 늘 강조했고 자신도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법정 스님은 위대한 대장경이라도 대중들이 알아보지 못하면 빨래판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불교의 가르침을 쉬운 말과 글로 옮기는 일을 평생 과제로 삼았습니다.


1976년 출간된 뒤 약 180쇄를 찍은 '무소유'는 우리 시대의 베스트 셀러였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큰 울림을 남겼습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소박한 행복의 의미를 가르쳤던 스님은 종교간 담장도 허물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길상사 법회에 초대하고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열며 화답하는 등 종교간 화합에도 기여했습니다. 70년대 유신 철폐 운동에 참여했고, 90년대엔 환경단체를 이끄는 등 시대의 아픔도 같이 했습니다.


[길상사 하안거 해제 법회 (2007)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어머니인 지구의 건강을 위해서 자식된 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마지막 수필집 제목처럼 법정 스님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삶을 마무리하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길상사 법회 (2009)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자라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듣기 바랍니다.]


"내 것 남았다면 맑고 향기로운 사회 위해 써라"--- 2010-03-11

'무소유 삶' 법정스님 입적

'무소유'의 정신을 설파하고 실천하며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법정 스님이 11일 오후 1시 51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세, 세수 78세.


2007년부터 폐암 투병 생활을 해온 법정 스님은 지난해 4월 19일 길상사 법회를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으며, 이날 입적 직전 길상사로 옮겨 열반에 들었다.


전남 해남 출생인 법정 스님은 1954년 출가, 59년 비구계를 받았다. 76년 대표적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명징한 문장에 담은 책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다. 97년에는 요정 대원각을 기부 받아 길상사를 창건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은 입적 전날 밤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써 달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밝혔다.


조계종과 법정 스님의 출가 본사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는 "일체의 장례 의식을 치르지 말라"는 평소 스님의 뜻을 받들어 별도의 장례 의식 없이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치르기로 했다.


조계종 총무원은 법정 스님에게 최고의 법계인 대종사를 추서하기로 결정했다.


“구름 수녀님!”

이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간 법정 스님은 평소 이해인(65·사진) 수녀를 이렇게 불렀다. 이 수녀의 세례명이 '클라우디아'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클라우디아'에서 영어 단어 '클라우드(Cloud·구름)'를 떠올렸다. 그만큼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의 친분은 두텁다. 출가자로서, 작가로서, 수도자로서 공유점이 적지 않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고, 이 수녀는 '가톨릭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다. 그래서 이해인 수녀에게 법정 스님의 추모 인터뷰를 청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1976년에 출간됐죠. 어디서 어떻게 읽으셨나요.


“76년은 제가 종신서원을 했던 해죠.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금방 읽었어요. 당시 너도 나도 그 책을 읽으려고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읽고 나서 소감은요.


“저 역시 수도자 신분이다 보니 내용들이 다 맘에 와 닿았죠. 책의 '난(蘭) 화분' 이야기를 읽고 개인적으로 집착하기 쉬운 취미는 안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법정 스님과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국어교사였던 제 친구가 송광사 불일암의 주소를 줬어요. 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꼭 한 권 보내라고 권하더군요. 책과 함께 편지를 드렸는데 즉시 답신이 왔어요. 그리고 78년쯤 부산 광안리의 우리 수녀원(성베네딕도 수녀원)을 방문하셨어요. 그 뒤에 수녀원에 하루 묵어가신 적도 있고요.”


-기억나는 풍경이 있으세요.


“수녀원에 오셨을 때 제가 광안리 바닷가를 함께 걷자고 했죠. 순순히 따라 주셨어요. 제가 주웠던 조가비를 드리니 주머니에 넣으셨어요. 비구 스님과 수녀가 바닷가를 걷자니 좀 쑥스러우셨던 것 같아요. 그 뒤에 불일암에서 어느 보살님과 제가 하루를 묵은 적이 있어요. 보살님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고 저를 순천까지 데려다 주시라고 부탁하고 갔어요. 몇 시간 적막한 산중에서 스님과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했죠. 스님도 계속 헛기침을 하시며 절더러 포도를 씻어오라 하시더니 마치 성난 사람처럼 집어 드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마 그 시절엔 스님도, 저도 젊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부산엔 종종 오셨나요.


“부산에 자주 오시라고 하면 '거 참 중이 수녀 보겠다고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쑥스러웁디다'라며 너털웃음을 짓곤 하셨죠. 자주 뵙진 못해도 늘 든든한 버팀목 같은 분이셨어요.”


-법정 스님은 김수환 추기경과도 친분이 무척 두터우셨죠. 김 추기경 선종 1년여 만에 법정 스님도 입적하셨어요.


“정말 슬픕니다. 성당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86년도 쯤인가…, 제가 유명세 때문에 괴로워할 적에도 법정 스님은 제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오늘은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란 그림엽서를 한참 들여다 봤어요.”


-'시인 이해인'이 보는 '수필가 법정'은 어떠합니까.


“그 분의 글은 한마디로 시원한 동김치(동치미) 같아요. 읽을수록 감칠 맛이 납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어쩜 이렇게 하실까?'하고 감탄할 적이 많죠. 개인적으로 저는 『영혼의 모음』과 『서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수도자 이해인'이 보는 '수행자 법정'은 어떤가요.


“어찌 보면 좀 냉정하리만치 철두철미한 분으로 여겨졌어요. 그러나 실은 속정이 많은 분이셨죠. 타 종교를 이해하는 폭도 넓으시고, 늘 책을 가까이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셨죠.”


-법정 스님 하면 '무소유'가 떠오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도 '무소유의 영성'은 각별한 의미가 있지 않나요.


“'무소유'는 말로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무소유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을 적에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겸손과 사랑이 없는 무소유는 공허할 뿐이죠. 때론 훌륭한 일을 하면서도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고, 때론 자기 방식의 무소유를 강조하며 남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죠. 이 길은 참으로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법정 스님 위중 소식을 듣고 성당에서 기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스님을 아는 다른 수녀님들도 같이 기도를 했을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잘 선종(열반)하실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장례식도 하지 말고, 다비만 조촐히 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여러 사람에게 폐 안 끼치고,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 극히 단순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신 거잖아요. 당신의 평소 성격 그대로의 유언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생명의 품으로 돌아가신 법정 스님께 수녀님께서 보내시는 작별인사를 듣고 싶습니다.


“스님께선 이젠 정말로 스님의 본래 뜻대로 완전한 무소유가 되셨네요. 스님께서 그리고 꿈꾸시던 정토에서 부디 행복하세요. 스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셨던 '어린 왕자'처럼 별나라에 가시거든 종종 꿈에라도 잠시 오시어 더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을, 길들이는 법을 일러주세요. 길들인 것과의 이별이 쉽지 않은 우리에게 잘 이별하는 법도 가르쳐 주세요.”


수행자가 가야 하는 길 보여주신 스님, 열반으로 가시는 발걸음 가벼우소서.

 

[법정 스님 추도사] 소설가 정찬주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스님의 속가 외사촌 조카인 현장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님을 길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상경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현장 스님도 목이 메고 저도 목이 멨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온 몸으로 살고, 온 몸으로 죽어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은 초등학교 때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꿈도 꾸어 보고, 청년기에는 인간 실존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동족끼리 피 흘린 6ㆍ25전쟁은 스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속은 스님이 살아야 하는 번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효봉 선사의 제자가 됩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에는 한 아주머니가 장경각의 고려대장경판을 ‘빨래판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스님은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강원을 마치고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합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은사 다래헌에서 사십니다. 현대문학에 ‘무소유’를 발표하시어 문명을 떨치시기도 하고,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투쟁에도 간여합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스님을 몇 달 동안 잠 못 이루게 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가 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만행을 보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깊이 자책합니다. 어떤 운동도 인격 형성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가 불일암을 짓고 텅 빈 충만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불일암마저 번다해지자 강원도 산중 오두막으로 가 정진하시는 한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를 창건하시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내면을 조금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 ‘서편제’ 조조 프로를 보시면서 맑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소년기부터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을 견디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거름 삼아 깨달음의 꽃을 피우신 분입니다. 중학교 때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던 스님.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을 떠나기가 아쉬워 울었던 스님.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고방 호롱불로 ‘주홍글씨’를 읽다가 야단 맞고 유난히 좋아했던 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렸던 스님.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서 정진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禪)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맑은 모습 속에 한국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 동자도 만나시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 다한 일들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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