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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 장재봉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2. 12. 1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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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 장재봉 신부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루카 3, 1-6) 율법의 완성, ‘사랑’
발행일 : 2012-12-09 [제2823호, 18면]

 

대림 2주일, 복음에 적힌 인물들의 명단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황제 티베리우스, 유다 총독 본시오 빌라도,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 필리포스, 아빌레네의 영주 리사니아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 당시 정치계와 종교계의 세력가들 이름이 총망라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엑스트라 명단입니다. 세상을 호령하고 부러울 것 없는 권력과 호사를 누렸지만 그 끝은 허망했다는 인생무상을 알리는 증인의 목록일 뿐입니다. 그날 하느님께서는 화려한 왕궁의 권력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최고 지위자에게 임무를 맡기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의 후미진 구석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을 선택하여 당신의 영을 채우고 그 입에 말씀을 담아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진리를 잊고 진리이신 주님을 뒤로한 채, 헤매고 있는 우리를 묶어 당기시는 사랑의 끈입니다. 권력과 재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죄와 욕심으로 범벅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음성입니다. 세상의 명성에 주눅이 들고 세상의 힘에 굽실대느라 기진한 우리를 살리기 위한 생명의 선포입니다. 어서 죄로 상한 영혼의 상처들이 ‘메워지고’ ‘낮아지고’ ‘곧아지고’ ‘평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간절한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도 칭찬하신 성인입니다.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성령을 받았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이 때문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천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삶을 지극히 당연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한 은총으로 태어난 대단한 “‘성령인’이니까 가능했을 것”이라고 일축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이끌었던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성령과 똑같은 하느님의 영이심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며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무안케 하는 꼴입니다.

요즈음,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고작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로마 8,26)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무뎌지고 영혼이 둔해져서 사명을 일깨우는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시려는 그분의 뜻을 도무지 파악하려 하지 않고 흘려버립니다. 완전히 묵살하고 지나치니, 송구함을 뭐라 아뢸지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의 법을 따라 살면 갖은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울러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위협적인 협박도 곁들이십니다. 결론적으로 무조건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위협적 표현에는 부모님들이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치는 ‘공갈’이 담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모두 ‘벌 받을 조항’에만 마음을 쓰고 그분의 눈을 피할 궁리만 했던 까닭입니다. 어떠한 의인도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마태 5,17)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율법의 정신을 고스란히 따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진심을 모르니 믿음의 삶이 곤고합니다. 그분 말씀의 맥을 놓치니 사랑을 ‘먼저 받으려는’ 쟁탈전만 벌이고 있습니다.

제발 기억해 주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자란 모습을 보고 탄식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덜 익은 우리 안에서 근심하고 속상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러 오셨습니다. 마침내 그분의 율법까지도 온전히 지켜내는 사랑의 힘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령인의 삶은 세례자 요한처럼 성실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늘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언제나 감사합니다. 드디어 온 세상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사랑하는 축복의 삶을 꾸릴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정말 신이 나는 복음인으로 변화합니다.

함께 계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을 살아가도록 힘을 주실 테니, 꼭 그리되리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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