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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 너무 세진다” 금지령 내린 ‘이 음식’···시민 봉기로 쪼개진 유럽 [사색(史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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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24. 2. 4.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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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56]“교황은 어떤 죄든 사할 힘이 없다”

 

1517년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로 통합니다. 가톨릭에 저항하는 개신교의 움직임이 본격화한 시기여서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남발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공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습니다.

 

                    가톨릭에 항의하는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를 묘사한 1877년의 그림. 안톤 폰 베르너의 작품.
 
 
교황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독점하는 기존 시스템을 거부하는 개신교도들은 늘어만 갔습니다. 특히 유럽 북부지역에서 확산세가 빨랐지요. 종교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신학적 견해’의 대립만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를 가른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한 음식’을 둔 미세한 견해차가 갈등을 불렀다고도 지적합니다. ‘버터‘가 그 주인공입니다. 음식의 풍미를 더 하는 버터가 어쩌다 종교개혁을 부른 원인으로 지목됐을까요.

 

유목민의 음식 버터...이를 혐오한 ‘문명인들’
버터의 기원부터 살펴봅니다. 버터는 유목민의 음식이었습니다. 기원전 8000년경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명된 것으로 전해지지요. 소 염소 양의 젖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버터를 만들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입니다. 유목민들의 음식이 고대 문명에까지 영향을 미쳤지요. 기원전 2500년 수메르 문명의 기록에는 소의 젖으로 어떻게 버터를 만드는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야, 우유가 굳으니까 JMT가 됐는데~” 전통적 방식으로 버터를 만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1914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은 그러나 버터를 평가절하했습니다. 주로 게르만족을 비롯한 ‘야만족’이 먹던 음식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낙산드리데스는 야만인으로 여겨진 트라키아인을 두고 ‘부티로파고이’라고 불렀습니다. 버터먹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지요. 특정 집단의 음식을 폄훼하는 경향은 고대부터 존재하던 셈이었습니다.

 

“소젖을 굳혀서 먹는다고?” 고대 로마 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올리브 화관을 쓴 여인’. 서기 79년 작품 추정.
 
 
문명의 요람 고대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버터’ 대신 ‘올리브’를 먹었습니다. 버터만큼이나 지방질이 풍부했기 때문이지요. 필수 영양소인 지방을 섭취할 좋은 음식이 있으니 굳이 야만족의 음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 로마와 같은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버터가 상하기 쉬웠기에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지요.

 

“나도 올리브를 먹고 싶지만, 우리 마을에선 자라지를 않는다네.” 트라키아 부족의 왕인 세우테스 3세. [사진출처=QuartierLatin1968]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으로 게르만족이 어느 정도 ‘문명화’가 된 뒤에도 그들은 문명의 상징인 올리브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추운 북쪽 지방은 올리브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지요. 문명화된 게르만족은 계속해서 지방질 섭취를 위해 버터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프스산맥을 기점으로 남·북 유럽의 식문화가 단절된 채 발전한 셈이지요.
‘버터 금지령’ 유럽을 달구다
 
“육류와 유제품은 성욕을 부추긴다네.”

버터가 사회적 문제로 지적된 건 14세기부터였습니다. 흑사병이 시작되면서 기독교 교리도 점점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였지요. 당시 가톨릭은 사순절과 금요일에는 육식을 금했습니다. 유제품·달걀·버터도 마찬가지로 먹을 수 없었지요. 이런 제품들은 성욕을 부추기는 음식이었으니, 성스러운 날에는 피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버터 역시 ‘금식령’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고기, 안먹는다네.” 광야에서 유혹을 받은 예수. 제임스 티쏘의 1886년 작품. 사순절은 예수가 약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사탄의 유혹을 견딘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육식을 자제하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라면, 누구나 참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금식을 해야 했던 날은 1년 중 거의 절반에 달했습니다. 금요일과 사순절 뿐만 아니라 성인 축일까지 엄격한 식단을 가톨릭교회가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와 같은 지중해에 면한 나라들은 금식일을 여유롭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고기나 유제품 대신 먹을 게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었지요. 올리브기름도 풍부했고, 싱싱한 해산물은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줬습니다.

그들에게 고기와 유제품은 ‘잠시 참을 수 있는’ 선택지에 불과했지요. 더구나 이들은 ’버터‘를 여전히 야만적인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부 지방을 여행할 때면 직접 기름을 가지고 다니곤 했을 정도였지요. 버터를 먹게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버터 금지령’이 남유럽 사람들에겐 전혀 타격없는 규제였던 것이지요.

“고기가 없으면, 생선을 먹으면 되지 않나 ㅎㅎ”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의 ‘엘 페스카도’(물고기) 1915년 작품.
 
 
알프스 이북 지역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척박한 내륙 지방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육류와 유제품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고기와 버터를 먹지 말라는 건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전능한 누군가가 우리에게 삼겹살과 김치 금지령을 내린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선전포고와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값비싼 올리브오일이나 해산물을 수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금식일에는 올리브를 먹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올리브를 따는 여인들’(1889년 작품).
버터 면죄부까지 등장
 
“그렇게 먹고 싶나, 그렇다면 그 정성을 보이게.”

교황청도 ‘버터 금지령’이 북북 유럽에서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축산업이 기반인 나라들의 시민들에게 “귀리만 먹고 살라”고 요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를 무시하고 마냥 허가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들은 신자들에게 요구합니다. 죄를 면하게 해줄 대가를요. 바로 ‘면죄부’였습니다.

 

                   “이봐, 고기가 먹고 싶다며, 이걸 사게나.” 면죄부를 판매하는 이를 악마로 묘사한 1490년대 체코의 그림.
 
금식 기간에 버터와 고기를 먹는 죄를 용서할 테니, 이에 상응하는 돈을 내라는 의미였지요. 실제로 많은 북부 유럽의 유지들이 면죄부를 사들이면서까지 육식을 즐겼습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면죄부를 사야 했지요. 고기와 버터를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프랑스 북서부 지방 루앙의 교구에서는 ‘버터 면죄부’로 천문학적인 수입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넉넉한 수입에 루앙 대성당에 두 개의 탑을 추가하기도 했었지요. 사람들이 이를 ‘버터타워’라고 부른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의 루앙대성당 1894년. 루앙대성당은 버터타워부터 모네의 작품까지 수 많은 이야기 거리로 가득한 명소다.

 

                               프랑스 루앙 대성당의 La tour du Beurre. 버터 타워라고 불린다. [사진출처=giogo]
 
버터 먹는 독일인이 종교개혁 나서다
 
“로마 교황청의 버터금식령은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잘못된 정치는 개혁가를 소환하기 마련입니다. 대표적 인물이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였습니다(그 역시 고기와 버터를 즐기는 독일인이었지요). 그는 ‘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 보내는 연설’이라는 글에서 버터면죄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버터 금지령을 푼다면, 유혈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 루카스 크라나흐의 1546년 작품.
가톨릭교도들은 버터를 먹는 일이 거짓말을 하거나 신을 모독하거나 부정을 탐하는 것보다 더 나쁜 죄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북부 유럽 국가들은 열광합니다. 버터를 마음대로 먹으면서 신을 섬길 수 있다는 제안은 북부 유럽 사람들에게 짜릿하기 그지없었지요. 이제 루터를 시작으로 개신교는 알프스 이북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종교개혁의 선봉장에 버터가 있있던 셈이었지요. 프랑스 역사학자 장 루이 플랑드랭은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와 버터를 먹는 나라가 일치한다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개신교라는 거 믿으면 버터를 먹을 수 있다는데...” 버터를 만드는 프랑스 파리의 한 여인을 묘사한 1499년 그림.
 
 
종교전쟁이 잠잠해질 무렵인 19세기. 버터는 전 유럽에서 사랑받는 식품으로 자리매김합니다. 프랑스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갈 정도였지요.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가 ‘버터 대체재’를 구하라는 지시를 내린 배경이지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앞둔 터라 군용 수요가 늘어난 것도 공급부족의 원인이었습니다.
 

1869년 화학자 이폴리트가 마침내 소의 지방을 이용, 버터와 유사한 식감을 내는 제품을 개발합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마가린’이라 불렀습니다.

 

                                          “버터보다 싼 마가린 드셔보세요.” 1893년 네덜란드 마가린 광고.
 
조선의 역사도 뒤흔든 버터
버터는 서양의 역사만 뒤흔들어 놓은 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버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목민족의 침입 속에서 버터는 자연스레 우리 문화에 스며듭니다.

선조들은 이를 ‘수유’라고 불렀지요. 우유기름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소는 당시 경작용으로만 사용됐기에 수유 생산량은 극히 미미했지요.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의 몸보신용으로만 쓰인 사치품이었습니다.

“자 버터, 아니 수유 한번 잡숴들봐.” 조선에서도 버터와 비슷한 수유라는 식품이 북방 기마족에 의해 전파된 걸로 알려져 있다. 몽골 사냥꾼을 묘사한 명나라 그림.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수유의 생산을 관리합니다. 황해도 평안도 지방 북방계 이민자들인 달단족(몽골 민족의 한 부족) 많이 살던 지역을 생산지로 지명하지요. 이들이 노하우도 있는 데다가 궂은 일을 하기에 알맞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어서였습니다.
 

이 공간을 수유치라 불렀습니다. 수유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이에 대한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것이었지요.

 

                                             “병역 면하려는 자가 많으니 수유치를 없애라.” 세종대왕.
 
군 면제라는 달콤한 유혹에는 언제나 부패가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군대에 빠지려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위장전입을 하려는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서만 남자 21명이 등록된 사례가 있을 정도였지요.

세종대왕은 이 폐단을 막고자 수유치를 폐지합니다. 만약 지금까지 수유치가 남아있었다면, 우리나라도 꽤 근사한 버터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버터의 풍미가 세계사와 우리 역사에도 진하게 배어 있는 셈이지요.

 

                                                   조그만 버터에도 수 많은 역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네줄요약>

ㅇ중세 교황청은 사순절, 축일, 금요일에 육식·유제품 금지 원칙을 세웠다.

ㅇ남부 유럽은 해산물·올리브 등 먹을 것이 풍부해 이를 잘 지킬 수 있었지만, 축산 위주인 북부 유럽은 이를 잘 지키지 못했다

ㅇ교황청은 ‘금식’을 어기고 버터를 먹는 북부 유럽인들에게 ‘면죄부’를 살 것을 요구했다

 

ㅇ이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분리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됐다. ’버터 금지령‘의 나비효과였다.

 

<참고문헌>

ㅇ마귈론 투생 사마, 먹거리의 역사, 까치글방, 2002

ㅇ김상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가람기획,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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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기자(penkang@mk.co.kr)입력 2024. 2. 4

춭처 : 매일경제 &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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