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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과학 혁명을 이룬 신앙인들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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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과학 혁명을 이룬 신앙인들
 
최경희
 
 
역사적으로 과학과 종교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자연 현상과 우주 운행에 대한 과학자와 성직자 사이의 해석 차이가 있었던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방식과 과학사에 혁명을 이룬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이 태양 중심설로 대치된 사건을 일컬어 흔히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고 한다. 다른 과학 혁명들과 비교해 볼 때, 코페르니쿠스(1473-1543년)의 혁명은 전형적인 과학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만큼 인간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준 과학 혁명은 없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말할 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을 자주 인용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학자이자 성직자로 에르미란트의 주교가 된 외삼촌 카스 박첸로데의 손에서 자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유명한 저서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그는 부동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초기에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를 읽은 사람들은 이 책의 수학에만도 매혹당했다고 한다. 이 저서의 중요성은 태양 중심적 우주론을 확실한 과학적 기초 위에 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학적 타당성을 보여준 데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의 목적은 진정한 우주의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천상의 운동에 대한 지식은 실로 인간들의 정신을 악에서 멀리하고 선한 것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코페르니쿠스에게서 천문학이란 신에게로 이르는 길이었다.
 
케플러(1571-1630년)는 진정한 천체 물리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뉴턴의 유명한 말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섰기 때문이다.”에서 거인은 바로 케플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케플러는 티코 브리헤가 남긴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행성의 궤도와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을 알아냈다.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며 움직인다는 제1법칙(궤도의 법칙), 태양으로부터 행성에 이르는 선분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쓸고 지나간다는 제2법칙(면적의 법칙),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타원의 장축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제3법칙(주기의 법칙), 곧 이 세 법칙은 근대 과학의 선구적인 사실로 만유인력 발견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과학의 초기 형태를 성립시켰다. 그 밖에 그는 망원경을 설계하였으며 광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케플러는 “천문학자들은 신의 사제들이며, 자연이라는 책을 해석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라고 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그가 옛 스승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 신앙심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저는 신학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 그런데 이제 제 노력을 통해 천문학에서 신이 얼마나 찬양받고 있는지 보십시오.”
 
근대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아이작 뉴턴(1642~1727년)이다. 뉴턴은 수학, 광학, 파동현상, 역학, 천문학 등에 두루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자연철학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에는 만유인력 법칙, 외력과 운동 변화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 운동의 세 법칙이 제시되어 있으며, 운동의 본질에 관한 모든 설명의 원전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뉴턴은 말년에 연금술 이외에 신학과 성서적 예언의 해석에 몰두했다. 그는 대단한 열의와 노력으로, 성서 예언자들의 말에 숨어있는 진리를 더 잘 찾아내기 위해서는 성서를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히브리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뉴턴의 생애를 놓고 볼 때 과학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목표를 갖는 원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뉴턴은 본래 영국교회에 봉사하며 순수한 형태의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한 것을 되찾으려는 깊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뉴턴에게 신이란 우주의 창조주이며 세계의 지속적인 지배자로서, 그의 섭리는 자연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년)는 19세기 화학의 일대 변혁을 일으켰으며, 19세기 최대의 실험물리학자로 ‘전기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패러데이는 영국 서리의 뉴잉턴비츠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패러데이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후 열세 살 때에 프랑스 망명 왕당원을 위해 신문 일을 시작하였으며, 뒤에 책 제본 공장에 견습생으로 취직하여 제본 기술을 배웠고 과학 서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패러데이의 관심을 알게 된 한 고객이 영국 왕립과학연구소 회장인 험프리 데이비 경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표를 주었다. 패러데이는 강연에서 받아 적은 노트에 그림을 곁들여 책으로 만든 다음 데이비에게 보냈고, 이를 계기로 왕립과학연구소의 실험조교로 채용되어 데이비 경의 조수로 견습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뒤 45년 동안 왕립과학연구소에서 일했으며, 1827년에는 데이비에 이어 왕립과학연구소의 회장에 선출되었다.
 
패러데이의 과학적 업적은 실로 엄청나다. 그는 탄산가스와 염소를 포함해 중요한 기체를 액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고래 기름에서 벤젠을 분리해 냈다. 벤젠의 발견은 유기화학의 발전에 실마리가 되었다. 그는 전자기 유도를 입증함으로써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으며, 전기화학을 창시했고, 전기분해에 대한 법칙을 발전시켰다.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은 전자기학뿐 아니라 순수과학과 공업 기술 분야에 획기적인 성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현대 과학기술 시대의 막을 열게 하였다.
 
패러데이의 가족은 기독교적인 삶을 사는 데는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산데마니아라는 엄격한 작은 교파의 신자였다. 패러데이는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였으며 30세에 같은 교파 신자와 결혼했다. 그의 신앙은 자신의 사회생활에 제약을 가했고 자신에게 돌아온 부와 명예를 사양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굳건히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뉴욕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소설가인 존 시몬스는 패러데이를 성서에 나오는 모세에 비유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지만 그 땅을 밟아보지는 못했듯이, 패러데이는 많은 실험적 업적을 남겼지만, 수학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복잡하게 수량화된 이론을 제시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과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의 과학자들은 또한 많은 인간적인 어려움과 문제점을 동시에 가졌다. 코페르니쿠스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맛보았으며, 케플러는 근시에다 신경과민 증세를 보였고 빈곤과 질병 속에서 생을 보냈다. 인간적인 면에서 뉴턴은 질투심이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남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고집불통의 성격을 가졌다. 패러데이는 가난한 환경으로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중년에는 두통과 기억상실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에도 그들이 마음속 깊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과학사에서 어느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최경희/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로, 얼마 전 과학서적 “최경희 교수의 과학 아카데미”를 펴내기도 했다.
 
[경향잡지,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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